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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이야기/게임 리뷰





*스포일러 있습니다.


*PS4 버전을 기준으로 작성된 리뷰입니다.



올드 게이머라면 1991년에 나온 울펜슈타인 3D를 기억하시는 분들이 많으리라 믿는다:울펜슈타인 3D는 id가 둠을 만들기 전, 본격적으로 FPS라는 장르의 공식을 세우면서 히트치게 만들었다는 데 의의가 있는 작품이며, 수많은 사람들에게 id라는 제작사의 이름을 기억하게 만들었던 작품이었다. 그리고 울펜슈타인 3D가 나온지 20년이 지났다. 그 사이에 FPS 게임계에 무슨일들이 있었는가? 퀘이크와 언리얼 토너먼트가 소위 하이퍼 FPS의 왕좌 자리를 놓고 자웅을 겨루었고, 콜옵과 메달 오브 아너가 2차세계대전 밀리터리 FPS를 정립하는 것처럼 보이더니, 콜옵 시리즈가 모던 워페어를 통해서 영화적인 연출과 현대적인 밀리터리 FPS라는 개념을 확립하였다. 그리고 이젠 콜옵과 배틀필드가 현대 밀리터리 FPS의 왕좌를 놓고 싸우는것처럼 보이다가, 블랙옵스 2와 어드벤스드 워페어 등으로 전장을 현대가 아닌 미래로 이행하려는 것처럼 보이며, 메인스트림 바깥에서는 바이오쇼크나 디스아너드, 데이어스 엑스:휴먼 레볼루션 같은 실험작들이 FPS의 경계를 부수려고 시도했고 성공을 거두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 동안 울펜슈타인은 무엇을 했는가? 물론 울펜슈타인 프랜차이즈는 2001년 리턴 투 캐슬 울펜슈타인 이후로 계속 존속하였으며, 잊을만한 시간이 되면 울펜슈타인은 돌아왔다(2001 리턴 투 케슬 울펜슈타인, 2003 에너미 테러토리, 2009 울펜슈타인, 2014 뉴 오더) 하지만 이 프랜차이즈가 거둔 성공이란 시리즈의 연명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울펜슈타인 3D가 둠 이전의 FPS의 문법을 세웠다면, 이제 울펜슈타인 시리즈가 FPS 계에 미쳤던 영향은 미미한 수준에 불과하였으며 게임 플래이나 스토리 등에서 구태의연한 모습을 보여주었다(물론 에너미 테러토리의 경우, 수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는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문제는 이 계보를 이어나갈 게임이 퀘이크 워즈에서 끊김으로 인해서 유의미한 움직임이 되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그렇기에, 새로운 질서New Order가 지배하는 FPS 세계에서 이 장르 최초의 히트작이었던 울펜슈타인이란 프랜차이즈가 적응하지 못하고 점점 도태된다는 느낌을 받는 것은 과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FPS의 새로운 질서가 지배하는 새로운 시대에도 불구하고 울펜슈타인은 구태의연한 게임 구조와 이야기를 들고 뉴 오더로 다시 돌아왔다. 이 닳고 닳아버린 프랜차이즈가 과연 무엇을 더 보여줄 수 있을것인가?


울펜슈타인 뉴 오더는 리턴 투 캐슬 울펜슈타인과 울펜슈타인으로부터 이야기가 이어지는 작품이다:주인공인 B.J 블라스코윅즈는 임무도중에 심각한 부상을 얻고, 14년 동안 혼수상태에 빠져버린다. 그리고 그가 다시 깨어났을 때, 세계는 나치가 지배하고 있었으며 블라스코윅즈는 다시 한번 나치와 싸우기 위해서 총을 빼든다. 사실, 이제 나치를 죽이는 것은 장르적인 특성도 아니고 모든 서브컬처 작품에서 일어나고 있는 하나의 흐름이자 경향이다. 그리고 나치를 죽이는 것이 하나의 경향이라는 명제를 놓고 뉴 오더를 본다면, 뉴 오더는 또다시 구태의연한 이야기를 들고와서 구태의연한 플래이와 함께 버무리는 이도저도 아닌 평범한 게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뉴 오더가 그런 구태의연함을 작품 전반에 도배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재밌는 게임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각각의 요소들이 시너지를 이뤄내고 있기 때문이다. 


뉴 오더가 보여주는 게임플래이는 전적으로 과거지향적이다. 요즘 FPS들이 일반적으로 취하는 콜옵식의 일자진행의 레일로드 액션을 지향하지 않고, 과거의 액션 어드벤처식의 맵 탐색과 수집 요소들과 탄약을 곳곳에 숨겨놓는 스테이지 구조를 만들어낸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뉴 오더의 게임 흐름은 '일직선'적이다. 거대한 맵을 두고 다양한 방식의 플래이 방식을 보장하는 방식이 아니며, 기존의 복도식의 맵에서 중간 단계들을 좀더 키운 뒤에 그 내부를 다양한 디테일로 채워넣은 형식에 가깝기 때문이다. 또한 게임은 기본적으로 '잠입'이라는 요소를 시스템의 일부로서 그럴듯하게 구현하는듯 하지만, 기본적으로 잠입 게임으로 보기에는 잠입의 요소가 대단히 단순하며 정형화되었다:앉아 있는 상태에서 적들이 주인공을 인지하는 범위는 관대할 정도로 짧으며, 소음기 권총과 나이프 투척이 너무 강력해서 잠입액션 게임을 조금이라도 즐겨봤던 사람들에게는 발각되기 전에 모든 적들을 처리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다(노말 난이도 기준)


뉴 오더 내에서 잠입이라는 요소는 대단히 거친 방식으로 재현되기는 하였지만, 그것은 게임 내에서 크게 겉돌지는 않는다:잠입을 강제하는 스테이지가 몇몇 있기는 하지만(교도소와 강제 수용소 스테이지 같은), 기본적으로 잠입이 가능한 스테이지와 불가능한 스테이지가 비율면에서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일단, 게임을 진행하는 대부분의 시간은 극단적인 파괴로 가득차 있으며, 모든 무기를 두자루씩 드는 아킴보 슈팅은 아드레날린과 남성 호르몬의 과다분비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정신없고 과격한 플래이를 게이머에게 보장한다. 기본적으로 달리고-쏘는 것 말고는 다른 게임에 비해 특출난 시스템이 없는 울펜슈타인 뉴 오더가 그나마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지점이 기본적인 총 쏘는 맛과 총을 맞는 적들의 반응에 대한 표현 자체가 훌륭하였으며 이 점에서는 다른 트리플 A급 게임들을 능가한다. 하지만, 계속 쏘고 달리고를 반복하며 사람을 지치게 만드는 콜옵식의 레일로드 스테이지와 다르게, 뉴 오더는 일직선이긴 하지만 여기저기 돌아볼 수 있는 거대한 스테이지 구조와 거칠고 단순하지만 나름대로의 긴장감을 선사하는 잠입 기제를 집어넣어서 과격한 액션 사이에 '쉬어가는' 스테이지를 집어넣었고, 그 결과 게임은 파괴와 혼돈의 액션과 그 사이를 쉬어가는 휴식 시간으로서의 잠입(거칠고 투박하지만)과 돌아볼 수 있는 스테이지 구조가 서로 균형을 이루게 되었다.


그리고 게임이 취하는 구시대적인 체력회복 시스템과 난이도는 게이머에게 끊임없이 넓은 스테이지를 탐색하게 만드는 동력을 제공한다. 울펜슈타인 뉴 오더의 체력-체력회복 시스템은 구시대적인 체력회복 아이템을 이용한 회복과 요즘 대부분 게임들이 취하고 있는 콜옵 시리즈의 자동회복을 일부분을 차용한 구조인데, 20단위로는 자동으로 회복하지만 그 이상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체력회복아이템을 섭취해야 회복을 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또한 적들의 숫자나 화력, 내구력 역시 체감상 상당하기 때문에, 게이머는 끊임없이 체력과 총알을 쏟아붓고 이것을 보급하기 위해서 맵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탐색을 해야한다. 그리고 다양한 루트를 제공하는 것은 아니지만, 게임은 적을 우회해서 공격할 수 있는 대체루트를 제공하기 때문에 게이머는 한 곳에 머무르면서 적을 깨작깨작 처리하기 보다는 적극적으로 돌아다니면서 측면을 효과적으로 기습하는 쪽으로 게임을 플래이하게 된다. 그렇기에, 이 넓은 스테이지를 탐색하는 것은 무의미하게 맵을 디테일하게 구성한 것이 아닌, 맵의 구조를 게이머의 필요에 따라 탐색하며 자연스럽게 아이템과 숨겨진 요소를 수집하게 되는 구조를 보여준다.(동시에 버튼 눌러서 그 많은 아이템을 먹어야하는 것이 그렇게 괴로울 수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임은 여전히 단순 그 자체로 보인다:화끈한 액션과 그 사이를 쉬어가는 탐색과 잠입이 균형을 맞추더라도, 기본적인 액션은 단순하게 엄폐하고-쏘고-달린다 라는 구세대적인 지점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시대에 철저하게 뒤떨어져있다:예를 들어 바이오쇼크의 경우에는 한손으로는 초능력을, 한손으로는 총을 쏘며 주변 지형 지물과 초능력을 결합하여 다양한 방식으로 게임을 풀어나갈 수 있게 만들었고, 디스아너드는 FPS에 도입이 불가능할거라 본 파쿠르를 게임에 도입하여 스테이지를 다층적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심지어 콜옵이나 배틀필드의 경우도, 단순한 싱글플래이를 지향하지만 중간 중간에 다양한 최첨단 현대무기를 다루는 미니게임을 집어넣음으로서 단순하게 쏘고 달린다라는 감각만으로 싱글이 가득차 있다는 것을 부정하려 애쓴다. 뉴 오더는 그런 점에서 본다면 구태의연 그 자체이다.(물론 중간중간 쏘고 달리는 것 외에 미니 게임도 있긴 있다.) 그것이 어떤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것도 사실이지만, 단지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것만으로는 게임의 요소들이 시너지를 불러일으킨다고 볼 수 없다.


울펜슈타인 뉴 오더를 높게 평가할만한 지점인 동시에 게임이 이 구태의연한 게임플래이들을 모두 끌어모아서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는 숨겨진 고리는 바로 게임의 이야기다. 혹자는 뉴 오더의 이야기를 쿠엔틴 타란티노의 '바스타드:거친 녀석들'에 비유하면서 "불랫스톰 같은 게임에서 어떤 도덕적인 불쾌함을 느끼게 만드는 것은 상당히 부끄러운 지점이다"라고 평가하기도 했다.(엣지의 프리뷰 기사) 하지만 유념해야하는 것은 바스타드라는 영화 자체도 도덕적이고 멜로드라마적인 복수극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이다:히틀러는 유대인 특공대 손에 죽어서 시체에 총질을 당하고, 나치에게 가족을 잃은 유대인 소녀는 흑인 조수의 도움을 받아 극장에 불을 질러서 나치 고관대작들을 모두 태워죽임으로서 자신의 복수를 달성한다. 울펜슈타인 뉴 오더가 서사전략으로 취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전략이며, 게이머는 뉴 오더의 이야기를 따라올라가면서 나치의 악행에 대해서 분노하게 되고 그 분노를 동력으로 게임 내의 텍스처 덩어리인 나치들에게 분노를 쏟아내게 된다.


재밌는 점은 나치의 악행이 '육체'라는 매게를 통해서 드러난다는 점이며, 나치에 저항하는 레지스탕스는 육체에 상처나 결함 또는 낙인이 있거나 정신적인 문제를 겪는 등의 '비정상'적인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이다:뇌에 파편이 박혀있는 블라스코윅즈, 나치의 아이를 배었다가 유산한 아냐(레모나의 일기로 자신을 드러내긴 하지만), 하반신 마비인 케롤라인, 유대인인 셋 로스, 흑인에 큰 화상자국이 있는 J, 신경증적인 모습을 보이는 테클라, 뇌절개를 당한 맥스 하스, 나치였지만 자신의 자식을 나치의 손에 잃고 나치에게 복수할 때까지 자신의 나치 문신을 남겨놓겠다는 클라우스 등등. 이들 모두 나치에 의해서 육체적-정신적인 고통을 겪으며, 나치에게 복수해야하는 도덕적인 정당성을 부여받는다. 그리고 비정상적이며 다양한 모습의 레지스탕스 반대편에는 나치의 웅장한 정상세계가 자리하고 있다:아이젠발트 수용소 스테이지에서 보여주는 비정상적인 크기의 판테온이나, 데스헤드의 시설, 런던 노티카의 모습 등등까지, 게임은 나치의 신화적 이미지에 대한 집착과 그에 대한 미학을 디젤펑크 식으로 포장하고 말도안되는 크기로 뻥튀기 한다. 그리고 이 웅장한 새로운 질서New Order(히틀러가 전쟁중인 1941년, Neuordnung이라고 공개적으로 선포한 유럽 전반에 대한 정치적 계획)에는 그들의 기준에서 벗어난 비정상인들을 위한 자리는 없다. 데스헤드가 마지막 스테이지에서 플레이어를 '네놈을 위한 자리는 이 세계에 더이상 없으니 포기해라'식으로 비꼬았던것처럼, 이미 새로운 질서가 들어섰고 지켜야할 것이 없어진 레지스탕스가 복수에 연연하는 것인 무의미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아냐가 나치에게 계속해서 복수하지만, 결국은 새로운 질서가 들어서자 자신의 친구였던 사람들이 나치가 되거나 나치인척 했던것처럼 말이다.


여기서 블라스코윅즈의 케릭터의 재해석이 빛을 발한다:여태까지 금발벽안의 정진정명한 마초 이미지에 머물러있었던 이 무색무취한 케릭터는 뉴 오더를 통해서 '전쟁에 신물이 난 전쟁영웅'로 탈바꿈하며 이 변화는 나치의 정상세계와 비정상적인 레지스탕스의 경계에 있다:프라우 엥겔이 블라스코윅즈를 아리아인의 표상으로 칭찬하거나, 데스해드가 블라스코윅즈와 자신에게는 윌리엄('William' B.J Blazkowikz)이라는 같은 공통점이 있다고 지적하거나, 월면기지 스테이지 도입부에서 나치 장교가 블라스코윅즈의 머리에 박힌 파편을 X레이 검사대로 투시하고는 대전쟁 때 참전한 전쟁영웅으로 그를 대우하는 지점 등등에서 블라스코윅즈는 은근슬쩍 나치라는 악역과의 경계에 발을 담는다. 어찌보면, 서로의 적을 무참하게 도륙을 낸다는 지점에서, 그리고 그것이 상대방의 육체를 통해서 그로테스크하게 표지된다는 점에서 블라스코윅즈는 나치와 접점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은연중의 접점을 블라스코윅즈는 죽어간 사람들에 대한 기억과 도덕적인 죄책감, 그리고 아냐와의 로맨스로 철저하게 부정한다.


블라스코윅즈와 아냐의 정사장면에 대해서 폴리곤의 극찬에는 본인 역시 동의하는 편이다.(링크는 여기) 아냐와의 정사장면은 훌륭하게 잘 만들어졌으며, 그것이 단순하게 성적자극을 위해 삽입된 것이 아닌 스토리 내에서 중요한 기능을 한다는 것이다. 더이상 지켜야할 것이 없는 블라스코윅즈에게 지켜야할 일상(아냐)을 부여하며, 동시에 '어떤 때는 크리스마스고 어떤 때는 생일이었던 것처럼' 좋았던 옛날을 환기시키는 육체적 경험으로서 섹스가 들어선다. 이는, 뉴 오더라는 게임 자체에서 나치의 육체에 가해지는 무지막지한 폭력과 복수라는 부정적인 육체와의 관계의 대척점에 있는 것으로도 볼 수 있는데, 상처받은 두 영혼(블라스코윅즈는 자신이 알던 세계가 무너졌으며, 아냐는 자신의 부모를 잃어버렸다)이 서로를 치유할 수 있는 행위로서 섹스가 그 자리에 들어선다. 그리고 처음 오프닝 시퀸스의 평화로운 일상의 환상을 블라스코윅즈가 '전사로서 이런 일상은 현실이 아니다'라고 부정하지만 마지막엔 그 환상에 아냐가 들어옴으로써 '지켜야하는 세계가 있다는 것'이라는 감각으로 변화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느껴지도록 아냐와 블라스코윅즈 사이의 관계를 설정하고, 섹스는 그러한 변화에 있어서 중요한 화학적 촉매로 작용하며 그들이 도덕적인 복수를 넘어서 나치의 새로운 질서와는 다른 인간들임을, 그리고 희망이 있음을 은연중에 암시하게 된다. 그렇기에 울펜슈타인 뉴 오더의 이야기는 나치에 대한 도덕적인 복수와 고발이 게임을 움직이는 주된 추동력으로서 작용하였으며, 그것이 더나아가서 '내가 나치를 쳐죽이는 것과 나치들이 레지스탕스를 쳐죽이는것과 뭐가 다른가'라는 찝찝함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닌 놀랍게도 잔잔한 이야기와 여운이 남는 카타르시스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을만 하다.


(물론 스토리에 대해서, 여전히 도덕적인 복수의 한계에 사로잡혀 있다라고 지적할 수 있다: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처럼, 나치즘은 그 잔학한 행위와 함께 이를 지지하는 수많은 일반대중의 생각없음과 침묵, 즉 평범한 악의 개념에 근거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둘을 한꺼번에 다루는 것, 무지막지한 악으로서의 나치와 평범한 악으로서의 나치즘의 지지자들이 동시에 등장하는 것은 이야기의 초점을 흐릴 수 있을 뿐더러, 무엇보다도 행동하는 매체로서의 게임의 특징이 복잡한 서사와 잘못 결합하면 나치를 죽여야하는데 나치를 죽이라는건지 말라는건지 햇갈리게 만들 소지가 다분하게 있기 때문에 적절치 않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언젠가는 그런 복잡미묘한 감정과 관계를 게임이 게임 서사를 통해서 전달할 수 있으리라 믿어본다.)


울펜슈타인의 그래픽 엔진은 id의 id tech 5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레이지에서 보여주었던 특유의 메가텍스처와 질감을 보여준다. 하지만, 60프레임으로 구동되는 것과 근거리에서의 디테일이 세밀한 것을 제외하면, 사실 차세대 전용이라는 메리트는 전혀 없어보이는 그래픽이라고 할 수 있다. 차세대의 표준적인 그래픽의 기준을 세컨드 선에 놓는다면 말이다. 하지만, 음악과 효과음에 있어서 완성도는 훌륭하다 평할 수 있는데, 총기 발사음과 타격음이라던가, 혹은 모두 독일어로 더빙되어 녹음된 나치 적들의 음성이라던가(파크라이 3의 샘 배커의 대사를 인용하자면, '뭐든지 독일어로 발음하면 나쁜놈 같이 보이지!), 심지어는 그 당시의 팝송들을 새로운 질서 하에서 재해석해서 편곡-삽입하였다던가 등의 세밀한 지점까지 신경을 썼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울펜슈타인:뉴 오더는 FPS에 새로운 질서가 들어선 시대에 구시대적인 발상과 구시대적인 이야기로서 맞대응하는 게임이라 볼 수 있다. 물론, 구세대적인 감성에 입각한 게임이기에, 게임은 여전히 구세대적인 한계에 사로잡혀 있다. 하지만, 훌륭한 스토리가 평균은 보장하는 게임 플래이를 엮어서 시너지를 이루고 있으며, 멀티가 없다는 점, 1-2회차 이상은 반복하기 힘들다는 점 등의 요즘 게임 답지 않은 한계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사람들이 매료될만한 게임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게임 이야기





게임 컨셉이 



군대 장비와 가젯을 이용하는 경찰과 범죄자들의 싸움에 대한 판타지



라는데,



왜 군대를 안부르고 경찰을 부르는 것일까? 라는 뻘한 생각을 해보는 겁니다. 



멀티 컨셉 자체는 알보병 위주의 싸움이 될거 같아서 마음에 들지만요. 음...





소설 및 책 이야기




*요약과 노트는 https://medium.com/@Leviathan1104/14b0cb5c2a2f 를 참조하시길. 


앨런 소칼과 그 동료들의 저서인 지적사기는 한 논문으로부터 시작한다:앨런 소칼은 한 편의 논문인 "경계침범:양자중력의 변형해석학"이라는 논문을 소셜 텍스트 지에 게재하고, 수많은 펄학자들과 사회학자들은 그의 논문을 높게 평가하였다. 하지만, 소칼은 이 논문에 적혀있는 어떠한 내용도 자신은 이해할 수 없는 헛소리이며, 자신이 쓴 논문은 여태까지 과학을 인문학적 글쓰기에 남용하고 있었던 포스트모던 학자들을 겨냥한 도발적 텍스트라고 밝힘으로 인해서 학계와 지식인 사회는 발칵 뒤집어지게 된다. 이러한 배경을 바탕에 둔 앨런 소칼의 지적사기는 자신이 게제한 논문과도 같은 문제, 과학과 철학-사회과학 사이의 무의미하며 현학적인 결합에 대한 경고이자, 동시에 이 둘의 결합에 대한 기초적인 전제를 제시하고 있는 저서라 할 수 있다.


엘런 소칼이 지적하고 싶은 글쓰기의 흐름, 특히 포스트모던의 글쓰기 흐름이 갖고 있는 중대한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1)철학자들이 과학에 대해 정확하게 아는 것고 아닌 막연하게 아는 이론을 장황하게 늘어놓아 글에 접목시킨다. 2)그리고 그러한 인용이 왜 나왔는지에 대해서 근거를 제시하지 않는다. 심지어 원전(과학)의 인용을 넘어서는 변용이 일어난다. 3)동떨어진 맥락에서의 인용과 분야에 대한 어설픈 학식. 이를 인용한 독자에 대한 겁주기. 4)무의미한 구절과 문장을 이용한 말장난. 등등이 있다. 요는, 포스트모던의 글쓰기란 엄밀한 논증의 형태를 취하지 않으면서 자기 머릿속에서나 존재하는 지적 허세의 글쓰기라는 것이 엘런 소칼의 분석이며, 그의 다양한 분석사례들(들뢰즈, 라캉, 보들리야르 등등)에 대한 분석이 이를 뒷받침한다.


개인적으로 생각했을 때 이 책을 읽을 때 주의하여야할 점은 바로 예시가 무엇을 이야기하는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초점을 맞추고 이해하려고 애쓰는 것이다:이 책이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각각의 예문에 적혀있는 부정확한 과학의 인용을 지적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큰 그림(포스트모던 사조의 글쓰기에 대한 비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글이기에, 예시에 초점을 맞춰서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읽어내려는 것은 글의 초점을 벗어난 독해이며 특히 소칼과 그 친구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글들과 논증이 제대로 안되어있는 지점들만을 끌어모아서 예시로 들었기에 이 속에서 무언가를 끌어내기에는 힘들어 보인다. 그렇기에 구체적으로 예시들과 논증 사이의 구체적인 반박에 대해서는 여기서 논하지 않고자 한다.


물론, 소칼이 수많은 예시들을 통해서 제시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하다:포스트모던 학자들이 쓴 글들과 그 내부에 들어있는 과학적 지식에 대한 묘사가 글 내부의 논리와의 결합이 대단히 허술하며, 그렇게 전개가 이루어지는 글들이 현학적인 지식 자랑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지적사기를 높게 평가할만한 지점은, 자신들의 포스트모던을 향한 불만을 최대한으로 억누르면서 자신들이 문제를 제기하는 지점은 전적으로 '그러한 표현'에 대한 문제에만 국한시키고 있다는 점이다.(인문학-사회과학 전반을 향한 공격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 글에서 소칼이 포스트모더니즘을 향해서 제기하는 문제제기는 전적으로 '구좌파'적인 특징에 기초하고 있다. 소칼은 현실의 학문을 해결하지 못하는 학문에 대한 공격, 계몽과 더 나은 삶을 보장할 수 있는 과학과 기술에 대해서 극단적인 상대주의와 유아론에 입각하여 '과학이란 믿음에 불과하다'라는 주장을 전파하여 사람들을 미혹시키기에 포스트모더니즘의 가장 큰 문제라고 보고 있다. 그가 노엄 촘스키가 이집트 민주주의 혁명을 통해서 느꼈던 생각들을 인용하는 지점은 인상이 깊은데, '과학과 민주주의를 받아들이면서 발전한 이집트 사회가 서구발 포스트모더니즘에 의해서 현학적인 말장난에 빠져들었다'라고 탄식하는 지점은 소칼이 포스트모더니즘 사조를 바라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하지만 동시에, 포스트모던의 특징인 '지적인 우울'에 대한 단초를 여기서 발견할 수 있으며, 이에 대한 본인의 노트는 위의 링크를 참조하시면 된다)


지적사기에서 찾아볼 수 있는 의미있는 지점은 과학과 인문사회학이 만날 수 있는 일종의 경계지대에 대한 단초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지적사기는 두 문화 같이 과학-인문사회학 사이의 결합을 다루고 있는 저서가 아니며, 소칼과 그 친구들 역시 그 결합 또는 인문학에 대한 과학의 우위를 선언하는 것이 이 책의 목표가 아님을 지속적으로 다루고 있다. 하지만, 문제상황, 포스트모던이 과학을 남용하는 상황에 대해서 무엇이 남용이고 무엇이 허용되서는 안되는가에 대해서 진지하게 다루고 있다는 점, 아주 상식적이긴 하지만 '과학을 인용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이러한 단서조항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라고 이야기하는 지점에서 최소한도의 과학-인문사회학 사이의 교류 가능성과 최소조건을 제시하고 있다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소칼이 지적사기를 통해서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어떤 한쪽이 다른 한쪽보다 더 우월하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한 작업이 아니다:소칼은 분명하게도, 각각의 학문이 다루고 있는 '세계'들은 대단히 복잡한 형태이며, 그 내부의 이론들과 관점들이 각각의 세계와 연관이 되어있을 가능성, 혹은 한 학문적 세계에서 다른 학문적 세계로 전이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고는 하나(물리학-화학의 경우와 같은, 물리학의 발견이 화학의 체계에 영향을 주었던것처럼) 그것이 서로의 학문에 대한 이해에 기반하여야 하며 그것은 '대단히 어렵다'라는 것이 소칼의 입장이다. 소칼은 인문사회학-과학의 융합은 가능하다고 보는 입장이긴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이 취한 방식(인문학이 과학을 오독하여 남용하는)은 그대로는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즉, 어떤 한 학문이 다른 학문에 영향을 주고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은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왜곡을 불러일으키지 않으려면 양 학문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한다고 볼 수 있다:하지만 여기서 좀 엇나간 질문을 하자면, 그렇다면 양 문화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두 문화의 융합에 대하여, 왜 포스트모던은 과학을 그렇게 쉽게 오남용했을까?


여기서 살짝 다른 논의를 진행해보고자 한다:소칼이 지적하고 있는 문제들, 포스트모던 인문학의 과학의 오남용의 사례는 인문학이 과학을 남용한 사례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과학이 인문학을 '남용'한 케이스는 존재하지 않을까? 유명한 사례들은 많다:나치즘이 지금은 금기시되는 과학인 우생학에 기반하여 인종청소와 대량학살을 감행한 것들에 대하여, 현대의 과학은 그러한 우생학적인 믿음과 과학이 전혀 받아들여질 수 없는 '넌센스'라고 보고 있다. 하지만, 2차세계대전 이후에도 나치즘의 산물인 우생학에 근거한 불임수술의 경우, 독일의 지성들의 모임인 막스 플랑크 연구소에서조차 '과학적'이라는 판단하에 제도 자체를 옹호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러한 '과학적 판단'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정확하게 과학 역시 인문학적인 편견에 사로잡혀 있을 수 있지 않을까?(소칼 역시 그러한 지점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또다른 사례를 보자:독서토론 도중 아버지가 제시한 사례로서, 한때 경제경영에 있어서 컴퓨터를 이용한 계량경제학이 한국에 처음 소개되었을 때의 사례이다. 컴퓨터라는 개념과 컴퓨터를 이용한 경제학이라는 개념 자체가 대단히 생소한 시점에서 롯데월드 및 롯데호텔의 공사에 시험적으로 컴퓨터를 사용한 공정관리를 도입하게 된다. 여기에는 정치적인 뒷이야기들도 존재하지만, 그 내부에는 '컴퓨터라는 기계보다 인간이 더 믿을만하다'라는 어떤 믿음이 깔려있기도 하였다. 하지만, 결과는 인간의 손으로 공정관리를 했을 때보다 비용이 수배 더 들어가버리게 되었다. 물론, 요즘 컴퓨터를 이용한 공정관리는 대단히 신뢰할만하며 동시에 일반화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어째서 기계와 정밀한 이론이 투입된 이런 사례들, 우리가 과학적이라 '믿는' 이런 사례들에 있어서 전혀 과학적이지 않은 '엇나감'이 발생하는가? 이렇게도 볼 수 있다:우리가 '과학적'이라 생각하는 과학이란 실제 과학이 아닌, 우리가 과학에 대해서 갖는 '이미지'다. 실제로 코지마 히데오가 메탈기어 솔리드를 만들면서 했었던 실수, 우성-열성의 구분에 있어서 우월함과 열등함의 개념으로 받아들여서 케릭터와 이야기를 구성했던 실수를 했던것처럼(우성과 열성은 엄밀하게 이야기하자면, 같은 유전자 내에서 무엇이 먼저 발현될 것인가? 의 문제이다. 무엇이 더 우월하고 열등하고의 문제가 아니다), 과학과 인문학적인 믿음의 '혼선'이 발생하고 그것이 흔하게 일어난다는 것이다.


물론 인문학-과학에 있어서 서로에게 그나마 '쉽게' 환원 가능한 지점도 존재하며, 그것이 금융공학이나 과학적인 이해가 인문학적인 이해에 결합해서 '실제로' 움직일 수 있는 지점(혹은 실제로는 우리가 그것이 움직인다고 '믿는 것'일 뿐인가?)을 만들기도 한다:하지만 문제는 인문학적 이해-과학적 이해의 분리된 세계가 아니라, 이 둘이 섞여서 경계가 모호해지는 지점들의 문제이다. 나치즘이 보여줬던 정치적 과학(우생학, 열등 민족을 가려내는 기준으로서의 과학)-과학적 정치(우생학에 근거하여 대량학살을 불러일으키는 정치)의 양측의 경계침범을 일으켜서 끔찍한 방향으로 시너지를 일으키는 것들, 인문학적 믿음이 과학적인 사실로 포장되고 동시에 과학적인 사실이 인문학적인 믿음으로 깎여내려지는, 두 문화의 경계에서 일어나는 예외적 상황들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이런 점에서 소칼이 제시하는 '기준'은 많은 점에서 이 아슬아슬한 경계의 예외상황을 독해하는데 있어서 도움이 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성적인 기준을 제시하려는 소칼의 방법론에도 불구하고, 본인이 소칼에 대해서 느낀 아쉬움도 어느정도 존재한다. 물론 이는 그와 그의 저서에 대한 살짝 비겁한 지적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소칼은 지속적으로 자신의 저서 내에서 범죄현장의 비유를 반복해서 인용한다. 그의 비유는 이러한데, 가령 살인사건이 있다면 그 현장에는 증거가 남아있으며, 증거에 대한 과학적인 분석과 수사에 따라서 우리는 단 하나의 사실, 범인을 향해서 나아갈 수 있다. 물론, 일반적인 대부분의 상황에 있어서 소칼의 비유는 정확하게 들어맞는다. 하지만 문제는 일반적인 상황이 아닌 '예외적인 상황'이다.


본인의 희미한 기억에 남아있는 형법총론에서 가장 인상적인 판례는 다음과 같다:어떤 사람이 한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 낫과 흉기로 폭행을 했다. 하지만 피해자는 그 현장에서 죽지 않았지만, 그 폭행에 의해서 심장에 이상이 생겼으며 이후 소풍을 가서 김밥과 콜라를 먹다가 채하여서 급성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그렇다면, 이 사건의 경우에 있어서 '범인'은 누구인가? 아니, 이것은 과연 '살인사건'인가? 이런식으로 법학도들은 법에 있어서 이런식의 다양한 특이사례들을 배운다. 하지만 이러한 특이사례들이, 일반적인 '상례'이기 때문에 배우는 것이 아니다. 특이사례를 통해서 드러나는 법의 시스템과 그 적용, 그 자체를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다:예외상황을 통해서 주권자는 체제의 본질을 열렬하게 사유하게 된다는 키에르케고르의 말처럼, 법학도들이 특이한 케이스들을 붙잡고 끙끙거리는 것이야말로 이 시스템이 어떻게 움직이는지에 대한 사유가 예외상황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책임을 지우는 과정에 있어서 '과학'의 도움은 결정적이다:과학과 법의학이 아니었다면 위의 케이스에 있어서 어떻게 폭행과 심장 이상과 급성 심부전을 한꺼번에 연결지을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이러한 인과관계를 추적해서 누구에게 책임을 물을 것인지를 사유하게 하는 것도 과학적인 사유와 논리학적인 접근이 도움을 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과학적인 수사와 범인의 특정지음과 별개로, 자연현상과 인간 사회의 문제가 달라지는 아주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지점이란 그러한 현상에 대해서 의미와 해석이 부여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단 한명의 범인과 살인을 쫒아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법시스템에 대한 본질적인 측면이라고 이야기할 수 없으며, 몇백 몇천건에 한번 일어날까 말까한 사건을 통해서 얼핏 드러나는 시스템 전체의 본질,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작동한다고 판단할 건지에 대한 예외상황에 대한 사유와 문제의식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지적에서 본인은 소칼을 비판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다만, 소칼이 사회나 철학을 다루는 지점에서 상당히 '일직선'적인, 하나의 진실이라는 소실점을 향한 운동에 자신의 사유를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시선이 갖고 있는 한계가 드러난다고 생각을 하는 것이다. 물론, 소칼은 이미 자신의 저서에서 충분하게 자신의 겸손함을 드러냈으며, 하나의 계에 대한 학문들이 서로 맞닿기에는 각자가 다루고 있는 계의 복잡성이 상당하기에, 다른쪽이 다른쪽에 대해서 어떤 견해를 피력할 때는 겸손함을 취할 수 밖에 없다는 입장을 보여주었다. 또한 저자들의 공격적인 인용에도 불구하고 포스트모던 담론 자체를 싸잡아서 비판하려는 것을 최대한 자제하려는 모습을 보여주었기에, 그의 이러한 시선에 대해서 지적하는 것은 본인이 느끼기에도 '부당'하다고 느끼는 바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이 지적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소칼이 보여주는 일반상황, 그리고 과학이 일반상황을 분석하는 강점에 대해서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이며 이는 인문사회학도로서는 중요한 '한계'로도 느껴진다. 재밌는 점은, 소칼이 포퍼의 반증가능성이 갖는 한계를 이야기하면서 언급한 콰인의 경험주의 도그마의 문제이다:실험과 이론이 모순을 빚을 때마다, 과학자들은 실험과 모순된 이론을 폐기하거나 혹은 실험이 잘못되었다고 선언하지 않는다. 그들은 '예외적'인 결과를 불러일으킨 실험을 두고 그것이 이론에 적용될 수 있는것인지, 아니면 부수적인 전제가 필요하거나 이론에 수정이 필요한지, 혹은 실험에 있어서 고려되지 않은 전제가 있는 것인지 등의 다양한 사유를 한다. 이런 점에서, 과학 역시도 '예외상황에 대한 열렬한 사유' 그 자체가 인문학에 있어서 예외상횡을 다루는 방식과 유사할 수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물론 과학 자체를 학문으로서 배우지 못한 본인이 제시하는 오만한 이론일 수 있다) 이런 지점에서 본다면, 소칼이 과학의 일반상황을 이해하는 하나의 틀을 세우는 지점을 넘어서, 과학과 인문학적인 사유가 서로 맞닿을 수 있는 지점(예외상황에 대한 열렬한 사유)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라는 희망적인 생각을 가져보기도 하는 것이다.


물론, 이 책은 과학과 인문학의 접점을 다루기 위한 책은 아니며, 어느 한쪽의 우위를 이야기하기 위한 책은 더더욱 아니다:하지만 문제는, 포스트모던의 글쓰기 방식을 넘어서 우리 일상속에서 드러나고 있는 환원불가능한 것들의 환원가능함에 대한 믿음들, 과학적 사실이 믿음이 되고 정치적 믿음이 과학적 사실이 되는 혼란스러운 경계상황과 예외상황들이 점점 '상례'의 형태로 굳어져가고 있으며 동시에 재앙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 보인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소칼이 지적하고 있는 문제의식은 좀더 넓게 보자면 포스트모던의 문제를 넘어서 문제의식을 확장해서 볼 수 있는 지점을 갖고 있는것처럼 보이며, 지적사기는 포스트모던의 문제점과 함께 포스트모던 비판론을 뛰어넘어서 인문사회학 전반에 깔려있는 과학적 사유에 대한 신화를 무너뜨릴 수 있는 기반으로서 사용될 수 있다고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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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이야기








머더드:소울 서스펙트는 근래 보긴 드문 어드벤처 장르라고 할 수 있다. 요즘과도 같이 비주얼적인 측면에서 활동적인 이미지를 강조하거나, 혹은 이야기를 즐기기 위해 NPC와 대화하고 퍼즐을 풀기위해서 머리를 굴려야 하는 것이 단순화되는 경향속에서 그런 것들을 복잡하게 꼬아서 자신만의 특색으로 갖는 어드벤처 장르의 한계는 명확하기 때문이다. 물론 텔테일 게임이 만드는 어드벤처 게임들이나, 킥스타트 프로젝트를 통해서 고전적인 포인트 앤 클릭 어드벤처 장르가 만들어지기도 하는 등의 다양한 흐름들이 시장에 나타나고 있는 것 역시 사실이다. 하지만, 여태까지 소위 대기업 유통사들(UBI나 액티비전이나 스퀘어 에닉스 같은)과 제작사들이 대규모의 자본을 쏟아부어서 어드벤처 게임을 만든 경우는 거의 없었기에 머더드 소울 서스펙트는 그런 점에서 상당히 인상적이며, 동시에 기대와 걱정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머더드 소울 서스펙트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주인공이 세계를 바라보고 상호작용하는 '상태'이다. 주인공은 죽은 자이다:그렇기에 그에게는 현실과 직접적으로 상호작용할 수 없는 한계가 생겨나게 된다(위에서 이야기하는 직접적으로 사물과 상호작용 불가능해진다던가, 혹은 사람에게 질문을 할 수 없다던가, 현실세계에 간섭하기 위해서 영매 조수의 도움을 받아야한다던가) 하지만 동시에 육체를 버림으로서 생기는 장점들도 생겨난다는 점도 있으며, 이 장점들이 상당히 인상적이라 할 수 있다:벽이나 막혀있는 장애물을 뚫고 들어간다던가, 물체나 사람에게 빙의를 해서 사건에 대한 정보를 모으는 등의 육체를 가진 사람에게 불가능한 일들을 행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제 3자적이면서 모든 주변의 정보를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는 전지적 유령 시점은 언뜻보기에는 새로운 방식처럼 보이지만, 근래 미드나 영화, 서브컬처등에서 나오는 수사물 장르의 연출 방식을 뒤집어서 비튼 쪽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보자:셜록 홈즈는 특유의 논리적 추리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탐정이 되었다. 얼룩 띠의 비밀에서는 홈즈가 자신의 의뢰인이 어떤 사람이고 어떤 상황에 놓여있는지를 단번에 알아맞추는 장면 묘사를 통해서 그가 취하는 추리의 특징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셜록 홈즈는 공간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사소한 정보들을 하나의 논리에 따라서 재배열하고, 그것을 논증의 형식으로 각각의 증거가 서로를 지탱하여 하나의 진실을 밝힌다. 이렇게 본다면, 증거를 모아서 진실에 접근하는 것은 탐정의 소명이며, 동시에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정보를 보는 것은 '탐정의 축복이자 저주'(셜록 홈즈:그림자 게임)이다.


그리고 근래의 수사물들은 셜록 홈즈의 추리와 논증 과정을 '시각화'하는데 성공하였다:CSI가 과학이라는 도구를 이용해서 사건을 재구성한 이후로, 증거가 시각화되어 과거를 재현하여 하나의 진실을 재구성하는 방식의 연출 방식은 일반적이 되었다. 그런 점에서 CSI가 후반으로 갈수록, 확대에 집착하며 증거에 모든 것이 집약되어 있다는 식의 이야기 전개를 보여준다고 비판을 받은 지점은 어찌보면 CSI 시리즈가 자신이 만들어낸 공식 '그 이상'을 바라보지 못했기에 생긴 문제라고 볼 수 있다. 하여간, CSI가 과학을 통해 확보한 증거라는 점을 논증이라는 선으로 이어서 과거라는 진실을 시각적으로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보여주었던 '진실'이라는 연출방식은 다른 작품들에도 영향을 끼쳤다. 예를 들어 영화 셜록 홈즈:그림자 게임에서는 비밀통로를 찾아내는 방식을 이러한 시각화의 과정을 거치는 등의 모습을 보여줬으며, 심지어 마지막 클라이맥스의 싸움마저도 '논증'의 형식을 빌어서(각자의 불리한 조건들, 전술들에 기초해서 다음 움직임을 예측하고 그것이 어떻게 싸움에 적용되는가를 보여준다) 서로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방법으로 묘사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머더드:소울 서스펙트가 갖는 시각은 수사물 또는 추리물 장르의 표현 방식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트레일러에 나온 중요한 시스템만을 추려서 보자면 증거들은 중요한 키워드의 형태인 '문장'으로 축약 시각화되며, 게이머는 주변의 놓인 증거들을 바탕으로 범인의 움직임을 재현하기도 한다. 하지만, 과거의 탐정들이 증거물들을 자신의 내부(머릿속)으로 끌어들임으로서 그것을 재구성하고 진실을 밝혔다면, 머더드 소울 서스펙트에서는 탐정이 현장에 흩어져있는 다양한 증거들에 빙의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다른 사람들이 보지못하는 증거를 보고 그것을 취합하여 진실에 접근한다는 점에서 그의 역할이 정진정명한 탐정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으나(그의 철지난 중절모+양복 패션에서부터 분명하게 드러난다), 죽은자 라는 케릭터의 특수한 성격이 증거를 가지지 못하게 만드는 등의 제한과 함께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사물에 영향을 미치는 등의 단점과 장점을 동시에 주기 때문에 기존의 탐정과는 다른 독특한 시각으로 세계와 진실을 바라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충분하게 편리한 저널과 정보요약, 게임 시스템을 보장해주지 않는다면 이러한 시스템 자체가 게이머에게 증거에서 증거로 왔다갔다 하게 만드는(증거 자체를 들고 다닐 수 있는 인벤토리 시스템이 불가능하니) 귀찮음을 유발할 수 있다는 점에서 양날의 검과도 같은 시스템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안한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머더드 소울 서스펙트는 이런 시각의 역전 덕분에 기대할만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머더드 소울 서스펙트는 6/3 한국발매 예정이다.




게임 이야기





아캄 시리즈 신작인 아캄 나이트입니다.

아캄 시티까지만 하고 아캄 오리진을 할까말까 밍기적 거리고는 있는데,

언제한번 시간이 되면 아캄 오리진도 해봐야겠네요...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스포일러 있습니다.


인간의 과학적 오만이 잉태한 두려운 미래가 다가온다. 인류의 생존을 위협할 존재로부터 인류는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네이버 영화 시놉시스)


일찍이 멋진 신세계의 저자, 올더스 헉슬리는 그의 멋진 신세계 1947년판 서문에 놓고 이러한 아쉬움을 표출했다:세계는 핵의 시대로 이행하였으며, 그리고 나는 과학의 이러한 파괴적이면서 경이로운 힘을 소설에 넣지 않은것이 아쉽다고 생각한다, 라고. 1945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이 떨어진 이후로 인류에게 있어 핵은 그야말로 '신의 힘' 그 자체였다. 핵은 전세계를 파괴할 수 있는 재앙적인 힘(핵무기, ICBM 등)인 동시에, 인류에게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약속하는 기적적인 힘(원자력 발전)이기도 하였다. 그야말로, 원자력이라는 기적과 재앙이 합쳐진 전지전능한 힘이 '태양의 힘이 내 손안에 있도다'(닥터 옥토퍼스, 스파이더맨 2, 물론 이 경우에는 핵융합이지만)라는 인류의 자만과 합쳐서 현대사는 핵이라는 힘의 남용을 불러일으켰고, 그 결과 우리는 만드는 힘이든 파괴하는 힘이든, 넘치는 힘에 둘러싸여 까닥 잘못하면 파멸할 수 있는 위기에 봉착하고 말았다:체르노빌 사태, 스리마일 원전 사태, 도호쿠 쓰나미 및 후쿠시마 원전 사태 등등. 이러한 위협들은 우리에게 무거운 질문을 던져준다. 과연, 우리가 핵을 통제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저 우리가 통제'할 수 있다'라고 믿고 있는 것일까?


원작 쇼와 고지라가 출발하는 것은 바로 이 핵에 대한 공포였다:핵폭탄을 직접 맞은 핵에 대한 일본인의 공포와 통제할 수 없는 과학에 대한 공포(옥시젼 디스트로이어를 만들고는 그 힘에 경악하며 끝내는 자살하는 세라자와 박사라던가)가 묻어나오는 작품이었다. 이후에 다양한 시리즈의 전개와 함께 고지라는 다양한 케릭터성을 갖게 되었지만, 고지라 시리즈의 본질이자 원천은 '핵이라는 힘에 대한 공포'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공포, 그것이 인간이 손에 들고 보아라, 이것이 바로 태양의 힘이다! 라고 외치지만 그것이 손을 벗어났을 때의 무력감과 재앙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참치를 쳐묵하며 인류와 참치 생태계 존망을 놓고 자웅을 겨루던 롤랜드 에머리히의 고질라(1998)와 다르게, 올해의 고질라(2014)는 바로 그 지점에서 고지라가 가졌던 공포와 헐리웃 블록버스터의 문법을 결합하려는 시도를 보여준다.


(아쉽게도, 본인은 참치먹는 고지라를 제외하면, 쇼와 고지라 원판도 보지 못했다:그렇기에 이 감상글은 필연적으로 한계를 내포하고 있기도 하다. 그점에 있어서 읽는 분들께 양해를 구한다.)


고지라 분석에 앞서서, 먼저 이 영화에 걸맞는 질문을 던져보고자 한다:도대체 괴수, 괴물이란 무엇인가? 일찍이 바타이유는 인간과 동물의 구분을 두고 독특한 논리의 이론을 전개하였다. 인류는 노동을 통해서 동물과 구분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인간의 육체성은 여전히 동물에 사로잡혀 있다. 인간은 끊임없이 폭력에 대한 충동과 성욕, 식욕에 시달리며 이것은 인류가 노동을 통해 쌓아올린 질서를 위협한다. 그렇기에 인류는 금기를 통해서 이러한 동물적인 욕구, '폭력'(무질서한 힘의 분출)을 통제하려 한다. 하지만 동물은 다르다:동물은 어디서든지 섹스를 하며, 사냥을 하고, 폭력을 행사한다. 하지만 구시대의 인류들은 동물들 역시 인간을 옭아메고 있는 금기를 이해하지 못할리 없다고 보고, 금기의 제한을 아무렇지도 않게 넘나드는 동물을 '신성한' 존재로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여기서 괴물은 탄생한다:동물에게 있어 폭력이 하나의 삶의 방식이었다면, 인간의 상상력으로 탄생한 괴물에게 있어 폭력은 존재양식이자 하나의 은유이다. 인간과 동물 사이의 그로테스크한 결합(미노타우르스 같은)이나 생명력의 과도한 분출(머리를 자르면 또다른 머리가 솟아나오는 히드라 같은)의 형태로, 동물의 신성함에 대한 믿음에서 출발하여 자연적인 동물의 모습을 벗어난, 무질서한 힘의 표출인 '폭력'을 행사하기에 가장 적합한 형태로 정향진화한 존재들이 바로 '괴물'들이었다. 그리고 이 괴물들은 종교가, 영웅이 이 세계에 질서를 가져오기 전의 세계를 지배하는 '신'이었다. 이 신들은 질서가 잡히기 전의 인류가 이해하지 못했던 세계, 그 자체였으며 이 신들은 인류와 함께 세계를 거닐었고 경외의 대상이자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질서가 괴물을 대체한다:아도르노는 영웅의 모험(오딧세이아)을 통해서 영웅이 혼돈으로부터 질서를 가져온다고 보았으며, 보들리야르는 영웅이 죽인 괴물의 피에서부터 문명이 솟아나온다고 보았다. 


(이푸 투안의 토포필리아에 따르면, 가장 민감한 오감을 가졌던 인디언들도 '존재할리 없는' 괴물을 인지했었다고 한다:물론, 그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문화'에 의해서 인식이 재구축되며 없는 것을 인지할 수 있을 정도로 문화의 힘은 강하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어찌본다면 실제적으로도 고대의 인간들은 '괴물'과 함께 살았을지도 모른다:실존하지 않더라도 그들의 인식범위 내에서 그 괴물은 실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명이 세계에 질서를 부여하지만, 그럼에도 인간은 괴물을 그리워한다:킹콩(2005)를 보자. 문명화된 인간이 가지지 못하는 문명 이전의 '마지막 순수성'의 상징으로서 킹콩은 문명으로부터 온 여인과 순수한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최후의 괴물, 최후의 야만인이라는 고귀한 지위를 차지했던 킹콩은 문명의 정점인 뉴욕으로 끌려와서 조롱거리가 되고 결국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에서 문명의 손에 의해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괴물은 파괴적인 무질서이며, 문명은 질서에 의해서 만들어진 존재이기에 그 둘이 한 공간에서 존재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 아바타에서도 드러나는 것처럼, 인간이 점점 태초의 무질서함을 향해서 그리움을 표출하는 것, 그리고 그것이 다양한 형태의 '괴물'과 생태계의 형태로 드러나는 것은 인류가 문명에 대해서 느끼는 피로감과 문명이 만들어내는 광기에 대한 좌절감이 드러나는 지점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고질라(2014) 역시 바로 문명에 대한 피로감과 광기(과연 우리가 핵이 불러온 이 괴물들을 통제하고 막을 수 있는가? 극중 핵으로 등장한 위협을 핵폭탄으로 다뤄내려는 인류의 오만함 등등)에서 시작한다:하지만 고질라가 자연으로 회귀할 것을 요구하는 수많은 유사 귀농(?) 영화와 다른 점은, 괴물과 인간 사이에 있어서 유대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괴물들은 거대한 재앙이라는 것이다. 고지라와 무토는 인류가 존재하기 이전부터 그래왔고, 영화가 진행되는 그 시점에서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영원히 그러할 존재들이다. 원판 쇼와 고지라가 인간의 과오, 핵실험을 통해서 만들어진 존재였다면 2014년의 고질라와 무토는 자연의 일부이자 핵분열에 대한 자연의 매카니즘으로서 인간의 이해범위를 아득하게 능가해버린다. 하지만 2014년판 고지라와 무토, 그리고 기존의 고지라 시리즈들이(참치먹는 고질라까지 포함해서) 갖는 공통점은 바로 '핵'이라는 키워드와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고지라 시리즈는 그 자체야말로 원자력 시대의 '신화'이다:인류는 핵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것은 1945년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 및 수많은 원자력 관련 사건들로 불가능한 것으로 증명되었으며, 핵 그자체는 하나의 '괴물'이 되었다. 그리고 생명력이 폭발할듯한 원자력의 이미지로부터, 고지라들이 탄생하였다:특히 2014년판의 경우, 핵의 광기넘치는 생명력의 분출(방사능 오염과 그것의 지속시간)을 먹어치우며 번식하는 '무토'의 존재와 그러한 광기 넘치는 생명력에도 불구하고 수만년의 세월에 걸쳐서 스스로 자정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연의 대변자 '고지라'의 존재가 갈라져나온 것이다. 물론, 왜 고지라가 무토를 사냥하는가? 라는 지점에서 영화는 다소 작위적인 지점(그들, 자연의 자정작용과 광기넘치는 핵 에너지가 싸우게 내버려두어라Let them fight)을 드러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무토-고지라, 핵의 광기와 자연의 자정작용의 사이에서 인류는 무기력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핵을 둘러싼 두 힘의 격돌, 무토와 고지라를 두고 인류가 취하는 경외와 공포, 핵이 우리를 파괴할 수 있다는 공포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은 그런 광기넘치는 핵의 에너지를 억제하고 있다는 경외가 격돌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영화는 고지라의 문법을 헐리웃 영화의 문법에 접목시킨다:영화의 러닝타임 도중, 관객은 보통의 헐리웃 영화에서는 접하지 못할 당혹스러운 두 시퀸스를 만나게 된다. 첫번째는 하와이에서 수컷 무토와 고지라가 처음으로 대면하는 장면이며, 두번째는 고지라와 무토 한 쌍이 샌프란시스코에서 재격돌하는 장면일 것이다. 첫번째 장면은 고지라의 포효와 함께, 곧바로 주인공의 아들이 고지라와 무토가 싸우고 있는 장면을 TV로 촬영한 것을 보고 있는 장면으로 넘어간다. 두번째 장면에선, 샌프란시스코에 상륙한 고지라가 무토와 격돌하는 순간, 주인공 아내가 공포에 질린 눈으로 그들을 올려다보는 그 순간에서 쉘터의 문이 닫히면서 전투 시퀸스 자체를 끊어버린다. 만약 이것이 일반적인 헐리웃 영화였다면, 이 둘의 싸움을 근거리에서 잡아내어 역동적인 움직임을 보여주었을 것이다:이미 퍼시픽 림에서 괴수와 거대로봇의 격돌이라는 점으로 서브컬처와 헐리웃 영화의 문법이 서로 아름답게 융합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고지라는 충분히 좋은 선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거부함으로서, 뭔가 다른 노림수가 있음을 드러낸다.


그리고 영화는 그러한 의도적인 끊기와 함께 파괴된 현장을 보여주는 것과 괴수의 전체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치 자연재해가 휩쓸고 지나간것처럼 인류가 쌓아올린 문명이 무기력하게 무너지는 장면들과 함께, 하나의 카메라 내에 담아내지 못할 정도로 '거대한 괴수'를 묘사하고 싶은 것처럼 보이는 연출들은 위에서 이야기한 기묘한 시퀸스 끊기와 함께 독특한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또한 고지라의 카메라 동선은 기존의 비슷한 영화들(클로버필드나 퍼시픽 림, 우주전쟁 같은)과 다르다. 기존의 헐리웃의 괴수물은 재난을 하나의 스펙타클로 만들어낸다:카메라의 동선은 위협당하는 인물들을 따라 아슬아슬하게 전개하지만, 그러한 아슬아슬한 위험들에서 드러나는 넘쳐나는 정보량을 관객에게 상황이 이해할 수 있게끔, 그리고 분명하게 빠져나가겠지만 영화속의 인물과 함께 아슬아슬함을 느낄 수 있게끔 만드는 것이 우선 목표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고지라는 그런 '아슬아슬한' 감각마저도 거부한다.(물론 그것이 영화가 노리는 바와 절충되지 못해서, 영화를 붕떠버리게 만드는 문제를 만든다:이는 후술하겠다)


영화의 이 기묘한 지점들은 이해하기 위해선 먼저 다음과 같은 시점의 특징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고지라와 무토를 바라보는 시선이 고지라와 무토의 '키높이'나 그들의 움직임을 가장 역동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신체부위(꼬리나 날개 같은), 혹은 이 모든 싸움을 느긋하고 화려하게 조망할 수 있는 시점이 아닌, '인간'의 시점에서 올려다보는 것이 대부분이라는 것이다.(물론 높은 곳에서 조망하는 시점도 존재하지 않느냐, 라고 반문하실 분도 있겠지만 그것은 비행기, 헬기 같은 장소에서 내려다보는 것이며, 이마저도 '한 장면에 다 들어오지 못한다') 그렇기에 인간은 무토, 특히 고지라의 전체 모습을 한번에 조망할 수 없다. 고지라와 무토가 휘두르는 무지막지한 폭력앞에서 인간은 왜소할 뿐이며, 모든 고지라와 무토의 관측 장면은 항상 주변의 '인간을 포함'함으로서 인간을 넘어선 보편부당한 카메라의 시점이 아닌, 왜소한 인간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핵과 자연의 충돌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경이적인 폭력의 분출을 목도하는 형식이 된다.


그렇기에, 카메라가 다루어내고자 하는 고지라와 무토의 이미지는 문명 이전의 신들, 신화속의 괴물들의 이미지와 흡사하다:그것은 통제할 수 없는 원자력 에너지의 분출이자 인간이 경외시하며 두려움에 가득찬 눈으로 바라보는 존재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올려다볼 수 밖에 없다'는 것은 상당히 의미심장하다:원자력이라는 신화적인 이미지, 통제할 수 없는 에너지와 결합하면서 인류문명이 통제할 수 없는 기록조차 희미한 신화 이전의 괴물들 불러일으켰다는 공포와 절망감, 그리고 인류는 이해할 수 없는 자연의 자정작용(고지라)과 핵의 파괴성(무토)이 격돌하는 자연의 섭리를 목도하는 경외감이 극을 지배한다. 이는 괴물은 문명에 의해서 몰락할 수 밖에 없다고 하거나 우리가 지향해야하는 방향이란 야만적인 문명이 아닌 고귀한 괴물들의 이미지라고 선언하는 대중문화의 서사와 다르게, 고질라 2014년 판에서는 문명은 이 괴물들을 막을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다는 '겸손함'을 드러낸다. 그리고 이 경외감과 공포, 겸손함을 드러내기 위해서 영화를 기존의 고질라 시리즈의 문법을 헐리웃 스케일에 접목시켜서 진지한 형태로 구현한다:이것은 그렇기에 퍼시픽 림과는 상극에 있는 영화다. 물론 두 영화 모두 과거의 서브컬처에 대한 애정에서 출발했다. 하지만 서브컬처의 클리셰와 미학을 가벼운 것으로 만들어서 데자뷰를 불러일으키는 영화를 만드는데 집중한 퍼시픽림과 다르게, 고질라는 처음부터 끝까지 고지라 시리즈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받아들여서 영화에 접목시키고자 한다.


이로써, 앞서 이야기한 두 시퀸스의 기묘함이 설명이 된다:첫번째 장면에서, 고지라와 수컷 무토의 첫만남을 매스미디어의 형식으로 스쳐지나가듯이 묘사한 것은 이 둘의 전설적인 첫 등장에 대한 하나의 이야기로 묘사하는 지점이라 볼 수 있다. 전설이 탄생하는 순간, 그 전설에 대한 이야기는 사람에게서 사람으로 전파된다. 이 경우에 있어서, 이 둘의 만남이 처음으로 대중에게 알려지며(그전까지 무토나 고지라의 존재는 극비였다), 대중는 그들을 경외와 공포로 바라보게 된다. 그리고 두번째 장면이야말로 고질라 2014 버전의 미학을 압축하는 백미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 그들이 분출하는 폭력을 피하기 위해서 인간이 쉘터로 숨어들 때, 고지라와 무토가 서로 맞붙는 장면을 '올려다보는' 동시에 그 화면을 '끊어내버리는 것', 경외감과 함께 그것에 대한 호기심이 아닌 두려움에 가득찬 채로 쉘터문을 닫음으로서, 원시인들이 야수를 피하듯이 현대인들이 고지라와 무토라는 재앙을 피하는 무력감, 경외감, 공포감을 한장면에 압축한다.


그렇기에, 영화는 전적으로 재앙과 신화적인 괴물로서의 고질라를 드러내려고 한다. 하지만, 고지라와 무토를 다뤄내는 카메라가 아닌, 인간의 이야기에서는 영화는 상당히 미숙한 지점을 드러낸다. 주인공의 아버지는 무의미하게 소모될 뿐이며, 주인공과 그 가족은 극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할 뿐이다(물론 이는 고지라나 무토와 맞서싸워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다만 인간이 들러리일 수 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들러리 역활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재앙을 맞이하는 군중을 다뤄내는 장면에서조차 인물의 동선이나 다뤄내는 방식, 그리고 드라마를 만들어내는 지점에서 상당히 어설펐기에 초중반에서 결전이 일어나는 후반부까지 영화가 늘어진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으며 이는 매우 치명적인 문제로 보여진다. 그렇기에 현재 사람들 사이에서 고질라의 평이 극과 극으로 나뉘는 것도, 충분하게 이해할 수 있는 지점이다. 


하지만, 인간이 주로 등장하는 장면에 있어서 상당히 의미심장한 지점이 있다. 먼저 주인공의 '직업'이다:주인공은 폭탄 해체 전문가이며, 핵폭탄의 타이머를 직접 설정하였기에 자신이라면 60초만에 그것을 해체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피력하기도 한다. 하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은 부상을 입은 몸으로 보트를 간신히 샌프란시스코의 해안에서 멀리 떨어뜨리고는 의식이 희미해지는 중에 핵폭탄이 터지는 것을 목도한다:핵폭탄 해제는 실패로 끝났다. 인류가 핵을 해체하고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은 그저 오만해 불과하다는 듯이, 영화의 마지막 고지라가 기진맥진해서 쓰러지는 장면과 핵폭발 장면을 교차시킨다. 또다른 하나는 헤일로 강하 장면이다:이 시퀸스는 군종목사의 기도로 시작된다. 마치 종교적인 제의를 거치는 듯한 엄숙한 음악(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의 모노리스 테마 BGM)과 핏빛 플래어, 그리고 원시의 혼돈속으로 뛰어드는 듯한 묘사는 아름답다 못해 장엄함까지 느껴질 정도이다. 


결론적으로 고질라는 또 좋아할만한 사람만 좋아하는 영화라고 볼 수 있다. 아직 감독에게는 미숙한 점들이 보이며, 단순하게 스펙타클을 감상하기에는 영화는 괴수영화라는 서브컬처 미학의 비중을 너무 높게 잡아버렸다. 물론 현재 관객들에게 있어서 큰 흥행몰이를 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사람들이 이에 대해서 극단적으로 상반된 평가가 나오는 것은 당연하게 보인다. 하지만 고질라가 의미가 있는 지점은 그 특유의 겸손함과 함께 괴물을 한때 태초의 혼돈을 거닐었던 신의 모습으로 그려내려 한 고전적인 미학을 헐리웃 대자본과 결합시켜 살려내려 한 감독의 노력에 있으며, 그렇기에 그 결점이 아주 뚜렷하더라도 좋아할만한 사람들은 충분히 좋아할만한 작품임에는 분명하다.





게임 이야기








나치를 죽이는 것은 일종의 '스포츠'가 되었다:마치 클래이 사격처럼, 일정한 서사(나치가 등장하고, 세계가 위험에 빠진다)와 함께 게이머는 모서리마다 튀어나오는 나치 군복을 입은 나치 군인들이나 하켄크로이츠를 이마에다 박아놓고 나 죽여줍쇼 하고 달려드는 표적들을 얼마나 정확하고 화려하며 빠르게 처리하는가를 테스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을 죽이는데 있어서 많은 질문을 던지지 않는 것이 게임 서사의 특징이라고는 하지만, 근래의 게임들이 '마땅히 죽여야 하는 적'에 대한 개념에 의문을 품고, 서사에 있어서 분명한 선악을 구분하는 것이 아닌 적마저 서사의 일부로 끌어들이는 복잡한 서사를 보여주는 경향이 생기고 있는 것 역시 사실이다. 그러나 나치를 죽이는 것은 어떠한 서사의 설명도 절대적으로 필요가 없다:나치니까 죽여도 된다. 사람들은 나치 군복을 입은 허수아비를 죽이는 것에 대해서는 정말로 너그러울 정도로 어떠한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물론 여기서 나치즘을 옹호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나치가 저지른 범죄는 전인류를 향한 적대행위이자, 파괴행위이다. 하지만, 과연 나치즘이 나치의 '군복'을 입은 자들과 하켄크로이츠의 기치를 내걸은 자들로만 '한정'지어서 볼 수 있을까?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재기하였던 문제들, 나치즘이 존속할 수 있게 어떠한 의문을 제기하지 않은 평범한 인간들의 '악'의 문제라던가 나치즘이 본격적으로 전인류를 향한 전쟁행위로 이어지기 전, 유럽 전역에서 나치즘을 하나의 '해결책'으로 바라본 시각도 존재했다는 점 등등은 나치즘이 단순하게 하나의 군복, 상징으로 좁혀서 바라볼 수 없는 복잡한 문제임을 암시하는 지점이다.


그러나 여기서, 울펜슈타인이나 다른 게임들이 나치즘을 특정한 군복과 상징을 입은 존재로만 한정짓는 것에 대해서 비판하고 싶지 않다:그것을 비판하려면, 단순히 게임을 넘어서 다양한 대중문화의 성향을 비판해야 할 것이다. 또한 대중문화를 위한 변명을 하자면, 상징과 군복이야말로 간편하게 적과 나를 구분할 수 있는 수단이기도 하기 떄문이다:타란티노의 바스타드-거친녀석들에서 이야기했던 것 처럼, '너희 나치들은 군복으로 구분이 가능하지, 하지만 군복을 벗고 있을 땐 누가 누군지 알 수 없단 말이야. 그래서 내가 이걸(이마에 하켄크로이츠 문신을 새기는 것) 하는 거지'처럼 군복과 상징이야말로, 아주 편리하게 기능하는 피아식별 장치이며 서사를 정당화시키는 기제로 작용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흥미로운 지점이 있다:나치 군복과 상징을 걸치고 그것을 걸친 것만으로 쏴죽이는 것이 편리하게 정당화되는 '정당한 적'의 개념에 대한 믿음이 일종의 '정당한 전쟁'의 관념으로 이어지고 형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모든 윤리와 도덕은 정당한 적을 향한 폭력, 정당한 전쟁 앞에서 멈춘다. 단지 그런 표상을 걸친 것 만으로, 그들은 나치즘에 100% 동의하는건 물론 그것의 열렬한 신도자 대변자가 되는 것이다. 물론 아까도 이야기했듯이 게임 서사에 있어서 단순하게 흑백의 논리로 구분되지 않는 복잡한 적과 나의 관계가 게임을 지배하지만, 실제의 게임 플래이에서는 분명하게 쏴죽여야할 적과 지켜야하는 NPC 사이의 구분이 뚜렷하게 존재한다. 이렇게 본다면, 게임 규칙 내부의 '정당한 적'의 존재와 정당한 적과의 '정당한 전쟁'에 대한 감각은 게임을 지배하는 중요한 기제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된 글은 '정당한 적과 정당한 전쟁'으로 이어질 것이며, 울펜슈타인 뉴 오더는 5/23 한국 정발 예정이다.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스포일러 있습니다.




시드는 유명인사들의 바이러스를 열혈팬들에게 판매하는 클리닉에서 근무하고 있다. 남들 몰래 자신도 유명인들의 바이러스를 주입하면서 심지어 불법 유통까지 시키던 시드는, 자신이 주입했던 하나 가이스트라는 여배우의 바이러스로 인해 서서히 죽어 가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제 17회 부산국제영화제)


보통 예술에 있어서, 예술가의 가족 사이에서 작품관은 쉽사리 공유되는 것이 아니다:물론, 예술을 쉽게 접하는 '환경' 자체가 예술과 관련해서 예민한 감수성을 기르는데 도움을 주기도 하며 예술가 '가족'을 형성하기도 한다. 바흐 일가나, 요한 스트라우스 1세와 2세, 뒤마 부자 등등 대를 이어서 예술을 하는 예술가들도 꽤 많이 찾아볼 수 있다. 문제는 미야자키 고로-하야오 사이의 부자갈등의 케이스나 아버지 뒤마의 여성편력을 보고 도덕적인 내용의 춘희를 썼던 아들 뒤마의 케이스를 고려해본다면 예술가 가족이 '공통된' 주제의식을, 특히 선대의 주제의식과 미학을 따라가는 형태를 취하는 경우는 드물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아들인 브랜든 크로넨버그의 데뷔작 안티바이럴은 대단히 기묘한 작품이다:최근의 데이빗 크로넨버그가 초창기 B급 SF 호러 영화를 만들었던 시절의 주제의식에서 표현양식을 제외하고는 드라마와 다양한 장르의 형태로 옮겨갔다면, 아들 브랜든 크로넨버그의 안티바이럴은 아버지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초창기 B급 SF호러 영화에 근접한 주제의식과 미학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물론, 아들 크로넨버그와 아버지 크로넨버그 사이에 '분명한' 차이점이 존재하긴 하며, 이는 밑에서 자세하게 다루고자 한다.


안티바이럴이 집중하고 있는 소재는 '질병'이다. 주인공인 시드는 특별한 클리닉에서 '질병'을 판다. 하지만 이 질병은 '특별'한데, 유명인이 겪었던 질병이며 팬덤은 이 질병에 감염됨으로서 유명인과 '유대감'을 느낀다. 그리고 시드 역시 자신의 소비자들과 유사한 기묘한 유대감에 중독되어있으며, 한나 가이스트(재밌게도 '가이스트'라는 단어는 독어로 '정신'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와 유대감을 느끼고자 그녀의 질병을 자신의 몸에 주입하다 결국 크나큰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기본적으로 영화는 이러한 '뒤틀려있는' 대중의 유명인을 향한 관심사를 풍자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는 듯 하다:유명인의 세포로 만든 배양육으로 음식을 만들어 먹는 등의 엽기적인 유명인 파생상품이 넘쳐나며, TV에서는 과격할정도로 선정적인 가십성 뉴스들을 방송한다. 단순하게 본다면, 안티바이럴의 영화 미학은 전적으로 과격한 세태에 대한 풍자를 그로테스크한 형태, '자본주의의 병자'(실제적인 의미에서)라는 악의가득한 이미지로 풀어낸 것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를 좀더 파고들어간다면 아들 크로넨버그가 안티바이럴을 통해서 달성하고 한 미학이 아버지 크로넨버그가 초기에 성취하였던 육체와 이물질의 결합과 그 과정과 유사하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시작하기에 앞서서, 우리는 먼저 이러한 질문을 던져보아야한다:과연 '질병'이란 무엇인가? 가라타니 고진은 일본근대문학의 기원의 질병에 대한 챕터를 할애하고 문학에 드러난 질병의 이미지를 분석한 적이 있다. 특히 결핵의 경우, 고진은 결핵이 근대문학에 있어서 가장 많이 쓰이는 메타포의 하나로서 결핵이 갖는 문학적인 이미지의 독특함이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고진은 결핵과 그 결핵의 메타포가 갖는 특징에 주목하였다:결핵은 근대의 병원체의 발견(비록 처음 발견했을 때 코흐가 잘못 발견한 것이긴 하지만)에 의해서 주목받기 시작한 질병 중 하나이다. 또한 전근대의 전염병의 파멸적인 속성과는 다르며(전근대의 전염병은 하수 시스템의 정비로 소멸되었다), 결핵이 갖는 특수한 이미지들, 즉 '야만적인 건강함'과는 다른 '창백하며 우울한 내면으로 파고들어 타인의 접근을 거부하는 듯한' 결핵환자들의 이미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결핵이라는 질병이 병원균이라는 특수한 원인에 의해서 발병된다는 속성이 발견됨으로 인해 결핵은 근대문학에 있어서 하나의 메타포로 각광받게 되었다.


하지만 결핵의 문학에서 다루는 감상주의적인 속성과 다르게, 현실의 결핵은 그저 하나의 고통스러운 질병에 불과하다. 또한, 결핵은 단순하게 결핵 병원균에 의해서 발병되는 질병이 아니다:우리는 매일 여타 다른 균들과 함께 결핵균에 노출된다. 하지만 우리가 결핵에 쉽게 걸리지 않는 것은 결핵이란 질병원에 노출되는 것 이외에도 우리의 건강상태, 질병원에 대한 노출도, 그리고 여태까지 유전을 통해서 이어받은 결핵에 대한 내성(아프리카에 사는 사람들이 말라리아에 높은 내성을 갖는 특성인 변형된 적혈구를 그 특성이 없는 사람이 말라리아에 걸려 죽음으로서, 배제-선택에 의한 유전으로 내성을 이어받았듯이) 등등의 다양한 요인들이 개입하여 생겨난 결과물이 바로 질병이란 현상이다. 즉, 우리의 믿음과 다르게, 질병은 질병원 자체의 절대적 원인(물론 질병원이 있어야 질병은 생긴다. 그것은 주의해야 한다)에서 비롯되지 않는다:고진은 이러한 병원체-병원의 관계에 대한 믿음을 신학적인 믿음에 불과하다고 지적한다. 그렇기에 근대문학에 있어서 질병에 대한 메타포, 그리고 그 병원체에 대한 신화는 원래 있던 것을 발견 한 것이 아닌 결핵이라는 것을 '재발견 및 재정의'한 하나의 이미지라 볼 수 있다.(흥미로운 것은 시드의 창백한 병자적 이미지와 한나 가이스트의 가련한 폐병 환자적인 이미지가 전술한 창백한 병자, 결핵환자의 이미지와 유사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가족끼리 전염되는 감기처럼, 같은 공간에 있어도, 심지어 같은 병원균에 노출되더라도 감기라는 질병이 발병되는지 혹은 어떤식으로 발병되는지 어떤 증상이 특징적으로 드러나는지 여부가 다 달라진다면(물론 유념해야하는 것은 그것이 완벽하게 예측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하지만 동일한 현상이 반복되는 것 역시 아니다. 과학적인 측면에서는 그것은 여전히 허용 범위 내에 들어있는 것이지만, 이 영화 내에서 팬들이 소비하는 이미지는 그런 '허용범위'의 문제가 아닌 완벽하게 '동일한' 무언가에 가깝다) 과연 영화내에서 보여주는 '동일한 질병을 공유한다'라는 행위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또한 엔지니어링되어 소비자에게 주입되면 곧바로 발화되는 형태의 질병이 어떻게 원본의 질병, 다양한 원인이 겹쳐져서 만들어지는 유명인들의 질병과 '동일시' 될 수 있단 말인가? 위에서도 지적하였듯이 질병이란 하나의 이미지이다. 하지만 영화에서 질병 클리닉은 질병이 병원체와 함께 다양한 변인의 복합적인 결합 현상임에도 불구하고(유명인이 걸린 질병이란 질병원에 다양한 원인이 결합한 복합적 결정체라면), 그것을 바이러스라는 형태로 물화시켜 복제하고 100% 똑같은 결과를 얻어낼 수 있게 엔지니어링 하며, 심지어는 기존의 질병이 갖고 있는 전염 가능성을 삭제하고 '복제방지'를 걸어놓는 형태로 대량생산한다.


이런 점에서 봤을 때, 안티바이럴이 질병에 대해서 취하는 태도는 시뮬라시옹적이다:시드와 클리닉이 파는 유명인의 질병이란 상품은 실제 유명인들이 겪는 질병과는 다른 질병이란 '이미지'에서 파생된 파생 이미지이다. 그리고 유명인의 질병을 공유한다는 것은 유명인과의 관계맺음에 대한 믿음이자 환상이다. 이 환상을 실현하기 위한 주술행위로서 생명공학이 들어온다:이들이 만든 질병은 대량생산이 가능하며 100% 기능하는(분명, 그것이 100%기능한다는 이야기는 영화 내에사 공공연하게 드러나진 않는다:하지만, 상품이 100% 기능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상품으로서의 가치가 있을까?) 상품이며 이미지이다. 하지만, 이 만들어진 질병은 유명인이 경험하는 질병과 동일한 질병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위에서도 언급한 내용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그들은 이 질병을 공유하고 소비하는가?


영화 내에 드러나는 다른 장치를 통해서 보면 이는 좀더 명확하게 드러난다:열성적인 팬들은 유명인의 유전자를 이용해서 만든 배양육을 먹어치운다. 하지만 이 뭉글뭉글하고 기분 나쁜 근세포 덩어리가 어떻게 '유명인'과 접점이 생길 수 있는가? 유명인의 유전자로 만들었기에 유명인과의 접점이 생긴다는 것이다:즉, 유명인의 본질은 유명인이라는 인간 그 자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닌 '유전자'라는 물질로 해체되고 쪼개질 수 있는 '무언가'라는 믿음이 이러한 역겨운 행위를 가능케하는 것이다. 유명인의 존재와 그에 빠지는 팬덤에 대해 발터 벤야민이 실존하지 않는 '아우라'를 숭배하는 행위라 비판했었던 것이 이제는 보들리야르 식으로 존재하지 않는 유명인의 본질-아우라를 보이지 않는 단위의 유전자나 또는 병원체로 신비화시키고 그것이 본질이라고 믿는 것으로 악화된다. 그리고 팬이 유명인의 질병을 공유하는 행위조차 마찬가지이다:유명인이 경험하는 질병과 고통이 그것을 상품으로 소비하는 경험과 등치될 수 없음에도 그것이 연결되었다는 믿음 자체가, 질병이라는 이미지를 소비하는 기반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질병에 의해서 변화하는 신체와 고통은(포진 바이러스가 입가에 난 팬처럼) 이러한 믿음의 '증거'이다.


그리고 여기서 아들 크로넨버그와 아버지 크로넨버그의 접점이 생긴다:일찍이 보들리야르가 시뮬라시옹에서 한 챕터를 할애하면서 JG 발라드의 크래쉬를 분석하며 '시뮬라시옹 시대의 걸작'이라 찬미하였으며, 아버지 크로넨버그는 발라드리안이자 발라드 특유의 '이질적인 두 존재의 상호침투'(열기와 인간의 결합, 역진화-물에 잠긴 세계, 차와 인간의 섹스-크래쉬 등등)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특히 아버지 크로넨버그가 크래쉬를 통해서 집대성한 섹스의 이미지는, '하고 있지만 전적으로 행해지지 않는 섹스' 그 자체이며, 그런 점에서 시뮬라시옹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안티바이럴에서 다시 반복되는데, 시드가 볼&태서의 특별 제조된 바이러스에 감염된 한나 가이스트의 피로 인해 한나와 함께 천천히 죽어갈 때, 서로 '죽음'을 앞두고 있다는 점에서 감정적인 유대가 맺어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사이에서는 어떠한 '드라마'가 발생하지 않는다. 극중 시드와 한나 사이에는 같은 공간을 점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거리가 존재하며, 죽어가는 창백한 한나를 앞에 두고 시드가 취하는 그로테스크한 태도(마치 목을 조르려는듯이 손을 뻗는 장면과 그 행위의 멈춤 또는 좌절)는 이 둘의 관계가 단순하게 유명인을 사랑하는 팬과 유명인 사이의 관계가 아님을 알 수 있게 된다. 또한 그는 현실의 한나보다는 꿈속의 한나 가이스트에 더 친밀한 유대감을 느끼는 것처럼 보인다(반복되는 꿈의 이미지와 피를 뽑는 행위를 꿈속에서 하는 것 등):유대감에 대한 강력한 '증거'를 몸에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증거'에 집착할 뿐 실제의 원본을 보면 차게 식어버리는 이 기묘한 '팬심'이야말로 영화의 주제의식을 꿰뚫는다.


아들 크로넨버그가 안티바이럴에서 질병과 유명인을 소비하는 그로테스크한 방법론은 아버지 크로넨버그의 초기작들과 유사하며 그 '증거'를 몸에 드러내는데 집중한다:브루드에서 정신병이 육체의 일부로서 발화되는 모습이나, 스캐너스에서 스케너의 정신이 육체와 기계에 융합하며, 데드 링어에서는 쌍둥이가 완벽한 타자인 서로를 완벽하게 싱크로나이즈 하려는 시도를 하는 등등은 안티바이럴의 표현방법, 유명인의 DNA로 만들어진 유사 육체를 먹는다던가 유명인의 질병이 그로테스크하게 온몸을 지배하는 모습(특히 시드의 경우, 너무 많은 유명인의 질병을 몸에 보유함으로 인해 완전히 망가져버렸다는 인상마저 준다)과 맥이 닿아있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아버지 크로넨버그와 달리 아들 크로넨버그의 안티바이럴은 사진을 전공한 이력의 특수성이 그의 영화를 지배한다:마치 세계는 진공포장된 것처럼 병적일 정도로 정돈되어 있으며 미장센도 편집증에 걸린 것처럼 보일 정도로 대칭되어 있다. 혹자의 표현을 따르자면, '카메라로 배운 세계'가 영화 내에 그려진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안티바이럴의 영상은 인공성에 초점이 맞춰져있다. 그리고 그러한 인공적인 영상미에 대한 집착이(물론 주제의식에 의해서 의도되었기는 하겠지만), 아들 크로넨버그와 아버지 크로넨버그를 구분하는 주요한 기준으로 보여진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본다면, 아들 크로넨버그의 안티바이럴은 아버지 크로넨버그의 초기작의 훌륭한 재림이라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유념해야하는 점은 아버지 크로넨버그는 이미 자신의 초기작을 넘어서 어디론가 향해서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육체 또는 정신과 이물질의 결합, 폭력과 섹스는 여전히 아버지 크로넨버그의 주제의식이지만, 그것은 그로테스크한 육체의 변화를 뛰어넘어 사람을 뒤흔드는 '드라마'의 형태로 이행하였다. 스파이더의 거미와 오이디푸스 컴플랙스의 이미지, 폭력의 역사의 일반적인 중산층 가정 이면에 숨겨진 폭력의 내력, 이스턴 프라미스의 동구와 서구의 만남 등등을 통해 드러나는 아버지 크로넨버그의 미학은, 마치 데인저러스 메소드에서 '나는 그 이상을 보고 싶다.'라고 이야기하는 신경쇠약에 걸린 융의 이미지에 맞닿아있는 듯 하다:아버지 크로넨버그는 '융합' 이후에 어떻게 될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살 것인지를 보고 싶어한다. 그리고 지금 현재까지 걸어온 길로 보자면 아버지 크로넨버그는 꾸준하고 성실하게 걸어온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아들 크로넨버그는 어떨까? 안티바이럴은, 아버지의 영향을 강력하게 부정함(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아버지 영화의 이미지를 분명하게 자기 영화에 삽입한다:음부가 기형인 배우에 대한 이야기는 데드링어에 대한 분명한 오마주이다)에도 불구하고 분명하게도 성공적인 첫걸음이라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물론 호불호가 갈리는 평이 많지만, 어찌되었든 본인은 성공적이라 보고 싶다) 그렇다면 아들 크로넨버그는 어디로 갈 것인가? 단순하게 아버지의 전철을 밟을 것인가, 아니면 자신만의 길을 걸어갈 것인가?


여기서 아들 크로넨버그의 행보를 논하는 것은 무리가 있어 보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안티바이럴이 스플라이스와 같이 고전적인 B급 SF 호러를 원하는 사람들의 목마름을 충족시키는 작품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결말에서 드러내는 '악의'는 영화를 잊을 수 없는 무언가로 만드는데 성공한다. 기회가 된다면 꼭 보시길.







게임 이야기






6월 26일 한국 발매인데, 트레일러 자체로도 충분히 재밌어 보이네요.

기다리는 보람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게임 이야기






에일리언 아이솔레이션은, 여태까지의 에일리언 기반의 게임들과는 상당히 다른 기묘한 게임이다:기존의 게임들이 에일리언으로 통칭되는 '제노모프'를 학살하는 에일리언 2편과 4편의 컨셉을 이어가고 있었다면, 에일리언 아이솔레이션은 1편을 계승한다. 넓은 우주선과 단 한마리의 제노모프, 그리고 폐소공포증마저 느껴지는 1편의 공간과 분위기 속에서 인물들은 제노모프에 대항할 수 있는 상황은 전무한 상태에서 쫒기게 된다. 아이솔레이션과 1편이 맞닿는 지점은 그런 저항과 폭력의 되받아침이라는 지점의 부재이며, 리플리의 딸이 어머니의 행적을 쫒아서 우주로 나가 제노모프를 만난다는 지점에서는 단순한 컨셉의 계승 이상을 뛰어넘어서 '정신적인 계승'을 보여준다.

물론 아이솔레이션이 홍보로 제시하는 지점들, 단 한 마리의 제노모프가 게이머의 패턴을 학습하고, 그에 따라서 아이템 사용하는 것에 대처하게 될거라던가, 모션트래커의 존재 등등은 실제로 게임을 해보기 전까지는 판단할 수 없는 지점이라 할 것이다:실제 게임 내의 NPC의 AI는 그래픽이나 서사에 비해서 발전이 더딘 지점이었으며, 게이머의 동료를 강조했던 바이오쇼크 인피니트의 경우에는 아예 엘리자베스를 '무적'의 존재로 설정함으로서 AI의 멍청함을 가려버렸다. 하지만, '단 한 마리'만 나온다는 점에서 제작사가 공을 들여서 게임을 디자인을 한다면 게이머의 입장에서는 '악랄한 정도로 교활해 보이는' 제노모프를 만날 수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에일리언 아이솔레이션이 취하고 있는 컨셉의 과격성이다:수십, 수백마리의 제노모프가 나오고 그것들을 쓸어담는 일반적인 액션게임과 다르게, '단 한마리만의 제노모프'만이 나온다는 것, 그리고 게이머는 반격할 수 없는 생존자 역을 맡는다는 점에서 상당히 기묘한 지점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에일리언 아이솔레이션이 영화 1편을 인용하고도 있지만, 게임이 기반하고 있는 장르적 토대는 최근 인디 게임 사이에서 유행처럼 일어나고 있는 '1인칭 서바이벌 호러' 쪽이다. 


서바이벌, 생존이란 테마는 이미 게임에서는 자주 발견할 수 있는 테마이다. 그리고 이는 이전에도 존재했었고, 지금도 존재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최근에 들어서 게임 내에서 생존의 테마는 독특한 형태로 변화하고 있다. 과거 좀비 생존 게임인 레프트 포 데드가 살아남기 위해서 스테이지를 신속하고 재빠르게 달렸어야 했었다면, 요즘 생존 게임들은 게이머에게서 무기를 빼앗고, 적들을 더 똑똑하고 잔인하게 만들며, 게이머에게 온갖 패널티를 부여하기도 한다. 즉, 서바이벌 장르는 그 '생존'이라는 컨셉을 구현하기 위해서 게임이 게이머에게 더 잔혹해지는 방향으로 발달하고 있다. 그리고 이 방향성과 잔혹함은 게이머의 경험의 내밀함(주로 공포)을 보장하기 위한 방향으로 정향진화한다. 그리고 암네시아의 히트와 암네시아의 컨셉을 이어받는 게임들이 점점 늘어나는 것은 상당히 의미심장한 지점이다. 가혹한 상황에서의 생존과 내밀한 경험을 추구하는 게이머가 늘어나고, 동시에 그러한 장르가 게임이 생산되고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은 주류에서 벗어난 흐름이 우리가 인지하는 것보다 더 크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생존이라는 테마가 게임 뿐만 아니라 서브컬처, 심지어는 주류 문화에서조차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경향은 생존이라는 개념이 단순하게 '유행' 이상의 무언가로도 볼 수 있는 부분이다. 왜 대중은 세계가 멸망한 이후의 세계 속에서 생존하는 이야기에 끌리는 것일까? 대중이 사회, 법률, 도덕 등이 멈추고 원시적인 폭력이 지배하는 세계에 끌리는 것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긴 하지만, 대중이 인지하는 세계 자체가 '그러한 것'이 아닐까라고도 볼 수 있다. 90년대의 세기말적인 분위기가 2000년 초반의 911에서부터 일련의 경제 위기까지 현대사회가 근래 경험하고 있는 '멸망'에 가까운 이미지와 과거와 다르게 가혹한 세계라는 감각이 서브컬처를 넘어서 대중문화 전반을 지배하며 그 감각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것이 아닐까라고 유추해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생존, 특히 '생존 호러'같은 게임 장르의 유지-존속은 단순하게 내밀한 경험의 추구 이상을 넘어서 대중문화에 대해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아이솔레이션의 성공의 판가름은, 단 한마리 밖에 존재하지 않는 '제노모프'의 존재이다. 단 '한 마리'가 게이머를 얼마나 위협을 할 것이며, 그리고 게이머의 방해공작과 패턴을 얼마나 학습할 수 있을 것인가 라는 기술적인 이슈들이 대부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라면, 아이솔레이션은 전혀 멋지지도 않은 복고풍의 세계에 갖혀서 패턴에 따라 움직이며 멍청하게 물건 사이에 낑겨서 아무것도 못하는 제노모프를 게이머가 비웃는 최악의 게임이 될 것이다. 하지만 만약 제작사들이 제노모프를 충분히 교활하고 잔인하며 똑똑한 괴물로 만들고, 단 한마리만 우주선에 존재하지만 그 한마리가 최악의 악몽을 게이머에게 선사해줄 수 있다면 아이솔레이션은 게임에 있어서 새로운 장르를 개척할 수 있을 것이다:인디게임에서 시작된 서바이벌 호러 어드벤처의 흐름이 대규모 자본의 투자와 판매에 의해서도 유지될 수 있음을 증명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에일리언 아이솔레이션은 2014년 10월 4일에 발매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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