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4'에 해당되는 글 6건

게임 이야기/게임 리뷰





어려운 게임이란 무엇인가? 목표에 도달하기 어려우며 반복된 죽음을 야기하는 게임이 어려운 게임인가? 사실, '어려운 게임'의 정의는 자주, 그리고 쉽게 간과되는 문제중 하나이다. 보통은 반복된 죽음을 야기하는 것을 어려운 게임의 기준으로 잡는다:죽음의 반복이란, 보통의 게임에 있어서는 실패와 어려움을 표지하는 주요한 척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자주 죽고 목표에 쉽게 도달할 수 없는 게임을 두고 어렵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빅리그나 게티스버그 같은 완벽하게 '실패한' 게임(이들 역시도 반복된 죽음을 유발하고 게임 클리어라는 목표에 도달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마저도 어려운 게임의 카테고리에다가 분류해야 할 것이다. 물론, 빼도박도 못하게 어려우면서 성공한 게임들도 분명하게 존재한다:닌자 가이덴 시리즈의 경우, 타 게임 디자이너 마저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게임의 시스템을 빡빡하게 잡아 게임을 클리어하기 어렵게 만든 경향도 있다. 그렇다면 닌자 가이덴 2와 빅리그-게티스버그 사이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그리고, 단순하게 '많이 죽는다'고 해서 게임이 어렵다고 할 수 있을까?


데몬즈 소울, 다크소울, 그리고 여기서 리뷰할 다크소울 2까지, 프롬소프트가 만들고 있는 통칭 소울 시리즈는 보통 '세계에서 가장 어려운 게임'이라는 칭호가 붙는 게임이다. 게이머는 소울 시리즈에서, 허구한 날 죽는다:다크소울 2에서 적들은 플레이어를 죽일 듯이 달려들고, 스테이지는 함정과 낙사를 유발하는 구간으로 가득차 있으며, 보스는 1:1이라는 정당한 결투라는 컨셉 따위는 갖다버린 체 몹들과 함께 여럿이서 플레이어 한명을 구타한다. 죽음은, 이미 소울 시리즈에 있어서 중요한 '컨셉' 중 하나이다. 하지만, 죽음이 '어려움'으로 직결되는가? 만약, 소울 시리즈가 세계에서 가장 어려운 게임이었다면, 게이머들 사이에서 어떤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을 것이다:계속되는 죽음과 좌절, 그것이 반복됨에 따라 사람들은 쉽게 지쳐 떨어져 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울 시리즈는 '팔린다'. 물론 그 판매량이 천만장, 2천만장을 파는 대형 프랜차이즈에 비하면 초라할 지는 모르겠지만, 그 명맥을 근근히 이어가며 게이머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회자될 정도로는 팔린다. 이러한 것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소울 시리즈가 단순하게 죽음을 반복하게 만들어서 어려움을 유발하는 게임이 아니라는 것, 그 내부에는 그 죽음과 어려움이라는 피상적인 지점을 넘어서는 중요한 무언가가 있으며 그것이 게이머를 지속적으로 끌어들이는 지점이 있다는 것이다. 


엄밀하게 이야기하자면, 기본적으로 소울 시리즈는 소위 이야기하는 '자유도가 높은 게임'은 아니다:게임은 전적으로 고전적인 일본 RPG의 재래에 가까우며 후술할 지점들에서 '온고지신'이라는 표현이 적절한 게임이라 할 수 있다. 구조적으로는 '자유도'라 불리는 지점은 찾아볼 수 없으며, 게임 서사에 있어서 게이머가 선택할 수 있는 지점도, 그리고 게이머의 선택에 따라 세계가 변화하는 지점도 존재하지 않는다.(혹은 적다:데몬즈의 경우와 다르게 다크소울에서는 엔딩은 마지막에서 선택 가능했으며, 다크소울 2는 엔딩이 오로지 하나 뿐이다.) 게임은 전적으로 불친절하며, 게이머는 어떠한 예고도 없이 불현듯 다가오는 위협들을 마주하게 된다. 그렇기에, 게이머는 다크 소울 2를 플래이할 때, 조심스러운 접근을 할 수 밖에 없으며, 게임은 곳곳에 비밀을 숨겨놓음으로서 게이머의 이러한 느린 접근을 장려한다:게임 내에서 일어나는 이벤트와 이벤트 사이의 간격은 기존의 게임들에 비교하여 보았을 때 훨씬 더 넓고, 게이머는 이 간격 사이에서 돌아다니면서 이 주위에 무엇이 있고, 무엇을 해결해야하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다크소울 2은 배경음악을 사용하지 않음으로서, 게임의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다크소울 2가 기존 게임들과 '특출나게' 다른 점이 있다면, 위에서 언급한 난이도와 그에 따른 긴장감을 주기 위한 게임 시스템 전반의 조정이라 할 수 있으며, 그리고 그 중심에는 '죽음'이 있다. 소울 시리즈에는 화려한 그래픽도, 호쾌한 게임 플래이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게임은 전반적으로, 특히 '죽음'이라는 지점에 있어서, 대단히 불친절한 게임이다. 게이머는 뻑하면 부조리한 이유로 죽음을 맞이하게 되며, 심지어 게임은 '죽을 준비를 해라'(다크 소울)라던가 '죽음을 넘어서라'(다크 소울 2) 같은 캐치 프레이즈를 집어넣음으로서, 죽음이라는 실패상황 마저도 게임의 일부로 묘사하기도 한다. 하지만, 도전과제를 모으는 사람들에 대해서 심리학적인 분석은 '(도전과제에서 요구하는 이상한 행동들을 달성하고도)살아남음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달성감'이라는 지점을 드러냄으로서 도전과제에 대한 사람들의 열정을 설명하기도 했었다:다크소울 2 역시 그런 '도전과제'를 향한 열정과 유사한 지점이 있는데, 게임 자체가 도전과제이며 넘어서야할 장벽을 게이머에게 제공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넘어서야할 장벽'을 제공한다는 것, 즉 게이머에게 '합당한 대적자'를 제공한다는 것은 게이머가 이 소울 시리즈에 대해서 매력을 느끼고 게임에 적극적으로 도전하게 만드는 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죽음의 반복은 난이도의 상승으로 직결되며, '실패'의 반복이라는 지점에서 게이머를 쉽게 지치게 만든다. 또한 최근 게임들이 게임을 친절하고 알기 쉽게 만들어나가는 방향으로 발전한데 비하여, 다크소울이 내세우는 불친절함이란 어찌보면 요즘 게임에 길들여진 게이머들로 하여금 게임을 쉽게 포기할 수 있는 지점으로 다가올 수 있다. 그렇기에, '불친절한 죽음'이라는 다크소울 2의 컨셉은 게이머들을 유인하는게 아니라 오히려 게임을 포기하게 만드는 지점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다크소울 2의 성공은 소울 시리즈의 도발적인 컨셉(불친절한 죽음)이라는 지점이 우리가 예상하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게이머와 상호작용하고 있으며, 또한 소울 시리즈가 요즘 게임들과 차별적인 지점을 만들어낸다고 할 수 있다.


소울 시리즈에서 '죽음'은 삶의 일부분이다:게이머가 소울 시리즈를 플래이하면서 가장 먼저 인정해야 하는 것은 죽음이 익숙하며 학습의 한 과정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게이머는 게임에서 반복적으로 죽음을 맞이하고 그 죽음을 통해서 게임의 구조를 학습한다. 그 어느 누가 죽어보지 않고 복도 뒤에 매복한 적들과 바닥에 교묘하게 설치된 함정을 단숨에 찾아낼 수 있겠는가? 이러한 요소들은 게이머가 '죽어봄'으로서 관찰하고 확인할 수 있게 되며, 그것을 피해가거나 정면으로 돌파해나갈 해법을 찾아내게 된다. 이러한 원칙은 보스전에서 단순하지만 더욱 가혹한 방식으로 적용된다:보스의 움직임은 수수하지만 움직임 하나 하나가 게이머에게 '치명적'이다. 그렇기에 게이머는 '언제 치고 언제 빠질지'를 신중하게 판단해야하는데, 이를 판단하고 보스를 공략하는 방법을 찾아내는 방식이란 역시 죽음을 통한 '반복 학습'뿐이다. 그렇기에 소울 시리즈의 게임 플래이는 '죽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에 가깝다. 하지만 이는 '실패'가 아니다. 기존의 게임들이 '죽음'이라는 요소를 게이머의 실력부족, 공략의 미숙지 등으로 인한 실패의 결과의 형태로 표현했다면, 소울 시리즈에서 죽음이란 누구나 거쳐야 하는 자연스런 하나의 '과정'이며 잘못된 선지를 하나씩 제거해나가는 '가지치기'의 과정에 가깝다. 


이러한 '가지치기', '학습'의 과정으로서 죽음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게임은 많은 지점에서 죽음을 '자연스러운 무언가'로 만들어낸다. 다크소울 시리즈의 게임 서사에 있어서 주인공은 죽은자도 산 자도 아닌 '망자'로 설정되어 있다:이 망자는 게이머의 상황을 비유하는듯이 보이는데, 특히 다크소울 2에서는 처음에는 멀쩡한 살아있는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다가 죽음을 반복하면 반복할수록 썩어서 메마르게 변하는 시체의 모습으로 변한다. 이는 계속된 죽음과 실패로 정신이 무뎌져가는 게이머에 대한 비유로도 볼 수 있으며, 동시에 게이머와 자신의 비유로서의 케릭터 사이에 긴밀한 유대감을 형성하는데 도움을 준다. 또한 후술할 혈흔과 메세지의 존재로 인해서, 게이머는 이 다크소울의 세계에 '죽음'과 '실패'가 가득한 것을 인지하게 되며 그것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하지만, 죽음만으로는 다크소울은 완성되지 않는다. 이 무수한 죽음들로 인해서, 죽음의 반대명제인 '살아남음'과 '성공'이 더욱 가치있게 된다. 게이머가 다크소울 시리즈를 통해서 경험하는 것은, 게임을 클리어하는 것이란 그만한 고난과 역경을 이겨냈을 때 의미가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렇기에 소울 시리즈에서 죽음이란 게임 플래이라는 삶의 일부분인 동시에 죽음을 통해서 삶(=게임 플레이)을 살며 성공을 더욱 값어치 있게 만드는 지점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죽음의 일상화와 적지 않은 패널티(레벨업 수단 및 화폐인 소울의 소실)로 인해서, 게이머는 스스로 게임을 진행하는 템포를 늦출 수 밖에 없다. 게다가 게임은 곳곳에 숨겨진 비밀 아이템들과 지름길들을 설치해 놓았기에 게이머들은 이것저것 건드려보고 관찰하면서 게임을 풀어나갈수록 게임을 편하고 쉽게 풀어나갈 수 있게 된다. 이는 빠른 진행과 여유를 허용하지 않는 요즘 게임들에 비교하여 보았을 때 소울 시리즈만이 갖는 강력한 장점이다:콜옵 고스트에서처럼 남용되는 폭발이나 슬로모션 컷씬을 마주할 때 게이머가 느끼는 지루함이란, 그것이 결국은 게임 플래이에게든 게이머에게든 간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지 못하며 그로인해서 어떠한 긴장관계를 형성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게이머가 다크소울 2를 플래이할 때, 게이머가 마주하는 것은 정적과 함께 언제 어디서 마주할 지 모르는 죽음의 위협이다. 그리고, 이 때문에 게이머는 전적으로 게임에 집중하며, 단순하게 플래이하는 것을 넘어서 게임을 자신의 내면으로 끌어들이는 독특한 경험을 마주하게 된다.


소울 시리즈는 여기서 더 나아간다:과거 게임들의 경우, 게임을 플레이 하는 게이머들 사이에 정보와 공략을 공유하는 폐쇄적인 커뮤니티를 만들었다. 이 당시에는 인터넷이라는 공간을 통해서 정보와 공략을 얻기 어려웠으며, 게임은 현재의 게임에 도달하기 까지 불친절함을 유지하던 시절이었다. 그렇기에, 제한된 환경에서 정보를 공유하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행위였으며, 다크 소울 2는 이를 혈흔과 메세지의 개념으로서 게임 외부가 아닌 게임 내에서 과거 커뮤니티가 가졌던 특성들을 제한적으로 구현하는데 성공한다.


보통 소울 시리즈의 게임 플래이 특징을 게임 웹진에서 표현할 때, 싱글플레이Single와 멀티플레이Multi의 합성어로서 밍글플레이Mingle라는 표현을 많이 쓴다. 소울 시리즈의 게임 플레이는 항시 연결되어 있다:게임 내에 나타나는 혈흔들을 만짐으로서 지금 현재 게임을 플래이중인 다른 게이머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죽었는가를 확인할 수 있고, 게이머들이 짧게 남긴 메세지를 확인함으로서 주변에 무엇을 주의하고 어떤 보물이 숨겨져있는지를 파악할 수 있다. 또한 희미한 환영으로서 다른 게이머들을 보여줌으로서 그들과 직접적으로 같이 플래이하는 것은 아닌, 희미하지만 뚜렷한 유대감을 만들어내는데 성공한다. 이러한 다른 게이머로서의 제한적인 정보의 피드백(혈흔, 메세지)은 게이머의 잘못된 선지의 '가지치기' 과정을 수월하게 해준다:매세지를 남긴 사람이나 혹은 죽은 사람이 남기는 정보란, 이미 그 상황을 경험하거나 실패의 과정을 거친 사람들이 남기는 단편적인 공략이다. 그리고 이렇게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정보와 공략을 제공해줌으로서, 소울 시리즈를 플래이하는 게이머들은 제한적이지만 분명한 커뮤니티를 형성한다.


싱글과 멀티의 경계가 애매모호해짐으로서, 게이머는 다른 게이머와의 느슨한 커뮤니티 이외에 다른 독특한 경험을 맞이한다:게이머는 어디서든 다른 게이머의 세계를 침입할 수 있으며, 역으로 자신이 침입당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경험이 '온라인 게임'이라고 이야기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기본적으로 소울 시리즈의 게임 플래이는 싱글 플래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오히려 멀티가 게이머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지점은 대단히 제한적이며, 게이머의 주된 경험은 자신의 세계-게임에 집중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싱글-멀티의 경계가 모호한 지점은 인상적인 지점인데, 기본적으로 전술한 게이머들 사이의 느슨한 유대관계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임은 특정 상대(특히 친구 같이)와 만나서 하는 멀티플래이를 지원하지 않으며, 심지어 음성대화마저도 막아둔 불편한 형태의 멀티플래이를 보여준다.(다크소울 2에서는 지원하긴 하지만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는 의도된 불편함이라 할 수 있는데, 게임 내에서 게이머들은 온갖 제스처를 이용해서 서로와 소통하려 하며(심지어 2편에서는 음성쳇을 지원함에도 불구하고!) 인사나 절 같은 제스처를 이용하여 상대에게 예의를 갖추려는 노력을 한다. 물론 그런거 안하고 침입해서 무작정 달려드는 사람들도 부지기수이지만, 그런 불편함 속에서 서로와 소통하려는 지점을 만들어내려는 게이머들의 노력을 노리고 '원시적인' 소통 방식을 집어넣은 프롬의 의도는 편리함을 강조하는 요즘 게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함을 게이머에게 선사한다.


기본적으로 다크소울 2는 전작들의 많은 부분을 훌륭하게 계승하고 있다. 그렇기에 시리즈의 후속작으로서 다크소울 2는 훌륭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전작들(1편과 데몬즈 소울) 달라진 지점이 몇몇 부분 존재하기도 한다. 이제 게이머는 죽을 때마다 체력이 줄어들게 되며 전작에서 강했다고 판단되었던 부분들(방패와 가드 공격이 가능한 창 같은)은 너프가 되는등 실질적인 부분에서 난이도가 상승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화톳불에서 다른 화톳불로 이동이 가능해진 점(전작에서는 일부 화톳불에서만 가능했다), 메세지 자체가 아이템을 쓰지 않고 메뉴의 일부로 통합된 점 등등에서 게임은 전작에 비해서 불필요하게 난이도가 오르는 지점을 줄이고 편의성을 보장한다. 그렇기에 이런 지점에서 게임은 전작들을 더욱 다듬은 게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아쉬운 지점 역시 존재한다. 다크소울 2에 대해서 모든 게임 내 그래픽을 인게임 CG 영상 수준으로 끌어올리겠다던 프롬 소프트의 포부와 실제로 거기에 근접하게 만들었던 E3 데모에 비교하면 다크소울 2는 거의 사기 수준에 가까울 정도로 그래픽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것이 물론 테크 데모이며, 게임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지점이기는 하지만 팬들에게 잔뜩 기대감을 안겨주고는 다시 다크소울 1편의 그래픽 수준으로 돌아가는 것은 많이 아쉬운 지점이라 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현재 나온 다크소울 2의 그래픽과 프레임은 대략 다크소울 1편 보다 살짝 나은 수준 정도다.


결론적으로 다크소울 2와 소울 시리즈는 게임 역사에 길이남을 게임이며, 위대한 이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은 게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과거의 게임을 플래이했던 경험을 현대로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그 경험을 현대적인 특성으로 알맞게 포장하여 재해석하였기에, 그리고 요즘 게임들과는 다른 흐름과 계보를 보여주며 유행과는 다른 게임의 가능성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가치가 있는 게임이다.



덧.게임의 분위기와 관련하여 토포필리아(공간미학)로 재해석하는 칼럼은 따로 분리합니다.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스포일러 있습니다.

*미디엄에 올린 글입니다.


세계 최고 부호 마담 D.의 피살사건! 범인은 전설적인 호텔 지배인이자 그녀의 연인 구스타브?! 1927년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어느 날, 세계 최고 부호 ‘마담 D.(틸다 스윈튼)’가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 다녀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의문의 살인을 당한다. 그녀는 유언을 통해 가문 대대로 내려오던 명화 ‘사과를 든 소년’을 전설적인 호텔 지배인이자 연인 ‘구스타브(랄프 파인즈)’ 앞으로 남긴다. 마담 D.의 유산을 노리고 있던 그의 아들 ‘드미트리(애드리언 브로디)’는 구스타브를 졸지에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하게 되고, 구스타브는 충실한 호텔 로비보이 ‘제로(토리 레볼로리)’와 함께 누명을 벗기기 위한 기상천외한 모험을 시작한다. 한편, 드미트리는 그녀의 유품과 함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까지 차지하기 위해 무자비한 킬러 ‘조플링(윌렘 대포)’를 고용하기에 이르는데…(네이버 영화 시놉시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시작은 이렇다:먼저, 한 작가의 묘지 앞에서 여성이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라는 소설을 읽는 것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그리고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작가는, ‘소설은 끝없이 영감을 얻어 소설을 쓰는 것이 아닌, 인물들에게서 영감을 받아 소설을 쓰는 것’이라고 이야기하며, 자신이 영감을 받은 실화와 인물을 이야기하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거기서 젊은 작가는, 무스타파를 만나고 무스타파가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소유하게 된 경위를 듣게 되고, 다시 영화는 1927년의 과거로 돌아가게 된다. 이와 같이 영화에는 4개의 층위(현재-늙은 소설가가 소설을 집필하는 시점-젊은 소설가가 늙은 제로 무스타파에게서 이야기를 듣는 시점-실제 영화의 내용인 구스타프와 제로의 모험의 시점)가 존재한다. 물론, 영화가 주로 머무르는 층위는 구스타프의 이야기와 늙은 제로의 이야기지만, 어째서 이렇게 복잡한 시공간의 층위를 쌓아올린 것일까?


감독 웨스 엔더슨은 특유의 연출방식을 통해서, ‘어른을 위한 동화’를 만들어내는데 초점을 맞추는 감독이다. 그의 전작인 문 라이즈 킹덤의 경우에는, 아이들이 주인공임에도 불구하고 그 아이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카메라는 약간 삐딱하게 엇나가있으며, 단순하게 가출하는 고전 명작 동화를 재현하는 것이 아닌 강박적으로 구현되어 있는 영화 내의 세계와 미장센들, 어린이를 다루고 있는것처럼 보이지만 분명하게 함의를 갖고 있는 어른들의 이야기들을 배경에 깔아둠으로서 그것이 단순하게 좋았던 ‘어린 시절의 추억’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노골적으로 숨겨놓고(분명하게 거기 존재하는 경찰 서장과 어머니 사이의 불륜 관계를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는 것) 그것을 보는 어른 관객들이 즐기게 만드는 것이다. 엄밀하게 이야기하자면,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도 그러한 연장선상에 놓여있다고 볼 수 있다:강박적으로 짜여져 있는 미장센과 영화의 세계, 그리고 인물들의 강박적인 행동과 표정 등등. 하지만,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도 거기에 어떤 긴장관계를 부여하지 않는(꼬마애들이 키스를 하다가 발기된 성기를 확인하지만, 그것이 성적인 긴장감으로 이어지지는 않는 것 같은) 문라이즈 킹덤과는 다르다. 여전히 미학적으로 맞닿아 있으며 ‘추억’을 다루고는 있지만,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 도달하고자 하는 지점은 ‘사라져버린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더 강하게 드러난다고 볼 수 있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웨스 엔더슨 특유의 강박적인 대칭으로 가득차 있다. 이것은 극단적인 ‘양식미’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양식미가 그 시대의 특징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웨스 엔더슨이 영화 내에서 영상으로 다루어내는 이 영상미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 지점’에서 그러하다는 점에서 강박적이라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건물이나 컷 내의 구도들은 그러한 모습을 발견할 수도 있지만, 인물들이 컷 내에서 움직이는 동선이나 행위들 자체도 그 강박적인 영상미에 지배당하고 있다. 심지어, 인물들의 행위들마저도 강박적인 대칭에 의해서 지배당한다:이 영화의 주인공인 구스타프가 가장 대표적인 사례인데, 구스타프가 마담 D의 살해용의로 감옥에 들어갔을 때, 매번 직원들 아침식사 때 하던 연설과 시 읊기를 사환인 제로를 시켜서 하게 하는 지점이라던가, 장면과 분위기에 맞지않게 시를 읊고 향수를 뿌리는 지점 등에서 그의 강박증적인 인물상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구스타프가 컨시어지 연합을 소환할 때, 다들 다른 상황에서 다른 일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면서도 동시에 서로가 하는 행위 자체가 강박증적으로 유사한 지점을 발견할 수 있다(구스타프-제로, 컨시어지-사환의 대칭적인 관계, 무슨 일을 하고 있든 컨시어지 연합의 전화가 온 순간에 거기에 화답하는 존재 등등)


물론 풍경이나 인물들의 강박적인 행동은 이미 전작 문라이즈 킹덤에서도 웨스 엔더슨이 영화를 만들어내는데 쓴 핵심적인 도구이긴 하다. 하지만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 문라이즈 킹덤과 대비되는 지점은, 이 강박적인 행동과 대칭성에 대한 집착이 양식미를 만들어내는 지점을 넘어서 영화의 구조(4개의 층위로 구성된)의 영향을 받아서 관객들에게 ‘화학적인 변화’를 보여주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엄밀하게 본다면 문라이즈 킹덤 역시 그러하긴 하지만,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경우에는 그것을 전면에 제시함으로서 전작과 다른 차별성을 드러내고자 한다. 


이미 전작인 문라이즈 킹덤에서도 그랬었지만,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도 폭력이나 성에 있어서 대단히 무심한듯 시크하게 이야기를 넘겨버린다:컨시어지 구스타프는 호텔을 찾아오는 노부인들과 바람을 피는 바람둥이였으며, 나이가 84세인 마담 D와는 19년에 걸친 연인 사이였다(구스타프 왈, 나는 그거보다 더 늙은 여자랑도 자봤어) 하지만 그를 둘러싼 염문이나 섹스에 대한 묘사는, 그야말로 ‘지나가듯이’(마치 페이지를 넘기듯이 슥슥 넘어가는 컷들) 넘어갈 뿐이다. 또한 살인에 있어서도, 사람을 직접적으로 죽이는 장면이나 폭력이 휘둘러지는 지점을 노골적으로 숨겨버림(탈옥중에 간부와 동귀어진 하는 탈옥 동료의 최후 라던가)으로서 마치 그것이 주요하지 않은 것처럼 묘사한다. 분명,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 있어서 폭력과 섹스는 중요한 모티브 중에 하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노골적으로’ 숨기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장면이 있다:사과를 든 소년을 챙기는 구스타프와 제로는 그림이 놓인 자리가 텅 비자 그 자리에 전혀 어울리지도 않고 저속한 ‘자위하는 레즈비언들’ 그림을 걸어놓고는 자리를 떠난다. 그림을 도둑질하는 장면에 있어서도, 그들은 ‘그림이 비어있는 자리’를 채워넣는 강박증적인 행동에 집착하는데 이들의 행위는 다소 우스꽝스러워 보일지는 모르지만 어떤 확고한 ‘원칙’에 사로잡혀 있는 것처럼 보인다.(심지어 마지막 클라이막스의 군인들의 총격씬 마저도, 그것이 후술할 구스타프의 최후와 비교하여 보았을 때 총을 쏘는, 정당한 적을 향한 폭력을 원칙에 강박적으로 집착하면서 우스꽝스럽게 재현한다는 점에서 구스타프와 같은 시대의 인물임을 드러낸다)그리고 영화 내의 인물들이 강박증적으로 사로잡힌 원칙이란, 일종의 ‘균형감각’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 구스타프 처럼, 영화 내부의 인물들은 앞에서는 세련되고 엄격한 호텔 컨시어지처럼 행동하지만 뒤에서는 노부인들과 섹스하며 그녀들을 ‘비계’에 비유하는, 다소 모순된 인물상을 취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구스타프는 어느 한 극단으로 가지 않은 체, 천박함과 우아함 사이에서 일종의 ‘양식미’를 지킨다. 그리고 이 양식에 집착함으로서, 그들은 어느 한 극단(섹스나 폭력 같은)으로 치우치지 않는다. 또한 이 양식미란, 구스타프가 어디에 가더라도 적용된다:심지어 구스타프가 마담 D 살해 누명을 뒤집어 쓰고 감옥에 가서도, 그는 그 나름대로의 품위를 지키려고 노력한다.


이러한 품위를 지키려는 구스타프에 대해서, 세계는 그를 존중하는 형식으로 화답한다:구스타프에게 옥수수 죽을 받은 뒤에 탈옥을 간수에게 밀고하려는 죄수를 조용하게 제압하는 것으로 보답하는 동료 죄수나, 동료의 요청을 받아들이는 컨시어지 연합, 과거의 친절을 생각해서 제로의 3등급 비자를 특별히 허가해주는 군장교 등등. 심지어, 이들은 이 우스꽝스러운 ‘품위 지키기’를 삶의 양식으로 받아들인다:형무소에 있던 구스타프가 자신의 연설과 함께 기나긴 시를 동봉했을 때, 제로는 ‘이거 너무 기니까 그냥 들으면서 먹죠?’라고 이야기하고 호텔 직원들은 식사를 시작한다. 이와 같이, 강요된 품위지키기도 아니며, 허세기는 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역겨움을 유발하는 허세가 아닌 천박함과 우아함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는 우스꽝스럽지만 사랑스러우며 동시에 어딘가 아련한, 신사다움이다.


그리고, 영화는 이 시대의 마지막 신사로서 구스타프를 제시한다:탱크가 국경을 넘고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음에도 자신의 연인의 장례식을 참석하는 모습이라던가(속물적인 동시에  연인에 대한 예의), 탈옥을 하고 뒤에 말도 안되는 요구로 제로를 괴롭히다가도 자신의 예의에 어긋난 말에 대해 사과를 하며, 쫒기는 와중에서도 마담 D에 대한 충정을 지킨 집사에 대해서 잠시나마 묵념의 시간을 갖는 등등의 우스꽝스럽지만 동시에 예의와 양식을 존중하려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시대의 마지막 신사의 우스꽝스러운 모험은 마담 D의 유산을 물려받으면서 완결나는듯 하다:늙은 제로 무스타파의 표현대로, 구스타프는 품위가 있고 적당히 공허했던 시대의 최후의 신사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최후는 불현듯 찾아온다:총천연색과 대칭적인 구조로 폭발할거 같았던 스크린은 갑자기 아련한 흑백으로 전환되며, 다시 열차 검문에서 제로 무스타파는 넝마주이 비자를 제시했다는 이유로 열차바깥으로 끌려나갈 위험에 처한다. 그에 대해 구스타프는 과거 군인이 자신과의 특별한 관계 때문에 주었던 특별통행증을 제시하며 사태를 무마하려 하지만, 군인은 무뚝뚝하게 그 통행증을 찢어버리고 구스타프는 이 무례함에 반발하여 맞서싸우는 시점에서 갑자기 회상은 끝나버리고 만다. 


그 사건 도중, 구스타프는 총을 맞아 숨지게 된다:예의와 양식에 대한 존중이 불현듯 끝나버린 야만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실제로도 영화의 시작은 세계대전과 함께 시작했으며, 영화의 마지막인 구스타프의 죽음도 역사적으로 봤을 때는 세계대전의 도중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영화는 그의 죽음을 직접적으로 카메라에 담지 않는다:늙어버리고 구스타프에게 물려받은 재산 이외에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제로 무스타파의 아련한 표정과 함께, 시대의 마지막 신사이자 예의가 사라져 버림을 슬퍼한다. 그리고 자신의 모든 재산을 바꿔서, 이제는 너무 낡아서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지키는 제로 무스타파의 모습은 그런 시대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음을 슬퍼하는 과거 신사의 마지막 모습인 것이다. 그리고, 영화를 복잡한 다층 구조로 구성한 것은, 1930년대에서부터 현재까지 관통하는 시간축을 통해, 잃어버렸던 예의와 양식에 대한 미학과 그에 대한 그리움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그렇기에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그 우스꽝스러움에도 불구하고 단순하게 웃기다기 보다는 어딘가 애잔하며 슬프다:그것은 서구 문명이 잃어버렸던 예절과 양식에 대한 존중이 사라졌음을 쓸쓸하게 반추하기 때문이다.




"거칠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 신사답지 않으면 살아갈 자격이 없다."

Play back, 필립 말로.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노예 12년은 훌륭한 영화다:굳이 아카데미 수상을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영화 자체가 갖고 있는 담백하지만 묵직한 묘사는 관객으로 하여금 노예제에 대한 불편함을 느끼게 만드는데 충분하다. 하지만, 노예제가 구시대의 유산이 되고, 인종차별 및 인종에 대한 증오가 주요한 ‘범죄’가 되어버린 현대에서 과거의 노예제를 굳이 현 시점에서 다루어야할 필요가 있을까? 시드니 포이티어의 초대받지 못한 손님(1967) 처럼, 어떤 인종차별적인 편견을 깨뜨리기 위한 계몽적인 영화는 그 목적을 상당부분 달성하였기에 대중문화에 있어서 효력을 상실한 것 처럼 보인다. 또한 과거에 비해서 인종차별은, 그것이 아주 주요한 문제임에 분명하지만(그리고 충분하게 우리가 대처하고 있지 않다는 것 또한 숙지하여야 한다), 이전과는 다른 형태의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으며 과거의 문제를 현재에 그대로 대입하기에는 문제가 있는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렇기에, 실화에 바탕하고 있음이 뚜렷한 노예 12년가 그런 ‘과거에 이랬다더라’ 식의 계몽을 주된 내용으로 하는 영화였다면, 이정도로 파문을 불러일으키지 않았으리라 본다.


노예 12년이 갖고 있는 특징을 다루기 위해서는 다른 영화와 비교해보아야한다. 노예제를 다룬 아예 다른 영화지만, 노예 12년과 장고:분노의 추적자(Django Unchained, 2012)를 서로 비교해보면, 이 두 영화가 노예제를 다루는 시선에 있어서 어떤 뚜렷한 차이점을 발견해낼 수 있다. 육체와 그에 가해지는 어마무지한 폭력이라는 점에서 장고와 노예 12년은 같은 테마를 공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장고는 그것을 선정적인 내용(그것이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긴 하지만)과 도저히 받아들여질 수 없는 궤변과 역겨움으로 포장한 뒤, 그것을 향해 정당한 폭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파괴와 해방의 카타르시스를 주는데 집중하였다면, 노예 12년은 그런 폭력과 폭력을 향한 분노,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으로부터 빗겨나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장고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폭력을 직설적으로 드러냄으로서 불편함(물론 그것이 마지막에는 파괴와 살육으로 해방감을 심어주지만)을 주는데 주저하지 않았다면, 노예 12년의 카메라는 육체에 가해지는 폭력으로부터 빗겨나있음으로서 심지어 관객을 어느정도 ‘편안’하게 만든다. 이런 기묘한 편안함, 혹은 빗겨나있음이야말로 노예 12년의 핵심된 미학이며 그리고 다른 인종차별-노예제를 다룬 영화들에 비해서 더 높게 비상하는 지점이라 할 수 있다.


노예 12년이 기초하고 있는 독특한 묘사는, 분명하게 섞일 수 없는 두 개의 세계가 육신이라는 매게를 통해 겹쳐지는 지점을 통해서 하나의 공간에 화하는 것을 통해 드러난다고 볼 수 있다:영화의 초반 시퀸스, 사탕수수 농장에서 고된 노역을 하고 피로한 육신을 누인 솔로몬(플렛)이 옆자리에 누은 여인에게서 성적인 유혹을 받는다. 솔로몬이 보이는 미적지근한 반응에 여인은 돌아서며, 솔로몬은 자신과 자신의 아내가 침대에 누워있는 장면을 회상한다. 이 두 시공간은 전적으로 만날 수 없는 평행함(노예로서의 삶-자유민으로서의 삶)을 드러내며, 이 두 시공간의 평행함은 솔로몬이라는 인물을 통해서 구체화 되며 영화 내내 이러한 평행함이 드러난다. 이는 분명하게 섞일 수 없는 세계가 솔로몬이라는 존재를 통해서 만나는 점에서, 영화 장고에서 무고한 피해자이면서 정당한 가해자로 등장하는 장고의 존재와는 차별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평행함은 솔로몬 뿐만 아니라 노예제가 노예라는 인간의 육체에 가하는 폭력을 다루는데 있어서도 주된 표현방법으로 작용한다. 노예제가 인간의 육체를 두고 가혹한 행위를 벌이는 것은 익히 잘 알려진 사실이다:노동, 체벌, 고문, 원치 않은 섹스 등등. 노예 12년도 그런 지점에 주목한다. 하지만, 그것을 가해자의 가학성과 피해자의 고통이라는 지점에서 선정적으로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펫시와 앱스가 갖는 성관계를 보자. 어떠한 교감도 이루어지지 않은체로 혼자 몸을 움직이는 앱스와 그것을 묵묵히 받아내는 펫시의 관계는, 인간들이 서로 할 수 있는 가장 내밀한 형태의 교류인 성관계를 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콘돔보다도 더 두꺼운 ‘막’으로 가로막혀 있다. 심지어, 앱스가 피스톤 운동을 끝마친 뒤 펫시의 목석같은 반응을 보고 뺨을 후려갈길 때도, 그러한 갑작스러운 폭력마저도 펫시에게 있어서는 ‘받아들임’의 대상이 되며 거기에는 ‘되받아침’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게 가해자의 가학성이나 피해자의 고통을 선정적으로 포장하지 않은 노예 12년은 가해자-피해자의 관계라기 보다는 인간-사물의 관계에 더 알맞다고 보여진다. 실제로도 앱스의 이웃농장에 사는 노예 정부는 펫시에게 이렇게 충고한다:주인(앱스)이 너를 사물처럼 대하더라도 그걸 받아들여라. 그리고, 너와 주인 사이의 애정을 공개적으로 과시함으로서 나처럼 노예 생활을 탈출해라. 노예는 하나의 사물이다:인간이 아닌 완벽한 객체이며, 앱스가 광기에 사로잡혀 한밤중에 노예들을 깨워서 춤을 추라고 강요하는 것에 어떠한 되받아침 없이 수용하면서 무기력하게 춤을 추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노예들이다. 그런 사물로서 노예가 인간으로 끌어올려지는 것은 이원화된 세계, 사물로서의 노예의 세계와 인간으로서의 주인들의 세계에서 노예가 인간으로 끌어올려짐(애정의 공개화를 통한 탈출)을 당하는 것을 의미한다 볼 수 있다. 하지만, 영화는 그러한 객체화의 구도를 선정적이진 않지만 이후 밑에서 다룰 노예제를 직간접적으로 반대하는 코드들을 삽입함으로서, 노예제를 비판한다.


노예 12년이 마주하고 있는 문제는, 죽어도 되는 인간, 인간이 아닌 인간으로서의 호모 사케르 그 자체라고 볼 수 있다:이미 호모 사케르가 출발하고 있는 전제가 의미있는 삶과 없는 삶으로서의 조에-비오스의 구분, 아테네 폴리스 내부의 시민과 ‘노예’-외국인을 구분하기 위한 명제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호모 사케르의 문법이야말로 노예 12년이 다루고자한 문제 의식에 걸맞는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영화 역시 그러한 지점들을 드러내는데, 단순히 남부의 노동집약적인 플랜테이션에 노동력을 공급하기 위한 노예제뿐만 아니라 인간이 되지 못한 인간으로서의 노예, 그리고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반명제로서의 육체이자 인간이 아닌 노예의 존재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앱스를 예로 들어보자:인간쓰래기임이 자명하며 부인에게까지 멸시받는 앱스가 자신의 인간다움, 남자다움을 과시할 수 있는 지점은 자신을 괴롭히는 아내에게 맞서는 것이 아닌 노예를 학대하는 지점에서 드러난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또한 전적으로 그럴 자격이 없어보이는 앱스가 주일에 노예를 모아두고, 성경 말씀을 인용하는 지점은(너희는 두드려 맞을 것이다) 인간이 되지 못한 노예들에게 노예들은 가질 수 없는 인간의 문화를 보여주고 인간이 비인간에게 인간이 무엇인지를 설파하는 지점으로 작용하게 된다.(재밌는 점은 솔로몬은 글을 읽을 줄 알며, 그것이 그러한 내용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는 후술할 내용과 맞물리는 부분이다)하지만 과연 노예에게, 인간의 특질이라 할 수 있는 문화나 감수성이 존재하지 않을까? 영화는 노예들의 노동요와 가스펠을 극전반 은연중에 깔아둠으로서, 노예주들이 갖고 있는 문화와 대비되는, 억압받는 인간이자 절대 객체화 될 수 없는 인간들을 그려낸다.



이러한 과정 중에서 솔로몬(이자 플랫)은 극의 서사를 구축하는 중심이자 두 세계의 경계, 그리고 서로 만날 수 없는 ‘막’으로 등장한다:엄밀하게 이야기하자면 자유인이지만 인종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노예가 된 그는 노예도, 자유인도 아닌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은 인간이다. 또한 글자를 알고, 지식을 안다는 점, 그리고 특출난 능력을 보여준다는 점(바이올린 연주 같은)에서 처음부터 교육받을 권리도 없었던 노예들과는 차별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앱스가 노예를 밤에 춤추게 시킬 때, 솔로몬의 위치는 춤추는 노예가 아닌 연주하는 노예로서 그 위치가 집단으로부터 빗겨나있다고 할 수 있다)그리고 처음부터 그렇게 살았어야 하는 노예들과 다르게, 그는 ‘살아남기 위해서’ 아무것도 배우지 않은 노예인척 한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자세는 결과적으로는 일반 대중이라 할 수 있는 ‘노예’에 섞여들지 못하게 함으로서 그를 겉도는 하나의 관찰자로 만든다. 이런 그의 시선을 보여주듯이 카메라는 폭력으로부터 ‘살짝 비켜나간’ 지점을 만들어냄으로서, 그가 폭력의 직접적인 희생자가 아닌 하나의 관찰자인 것처럼 묘사한다:탈주 노예를 목메달때 그 장면에서 솔로몬의 시선을 따라 노예의 죽음을 ‘배경’으로 처리하는 지점 등등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관찰자적 위치에도 불구하고 그가 피해자가 될 거 같은 아슬아슬한 감각은 호모 사케르, 처분 당해도 상관없는 인간이라는 지점을 강력하게 드러내는 지점이라 볼 수 있는데, 이러한 ‘아슬아슬한’ 감각을 통해서 영화는 이야기를 단순한 노예 유람이 아닌 극적 긴장이 살아있는 지점을 확보하게 된다.


솔로몬이라는 인물을 따라 진행되는 노예 12년의 이야기는 전적으로 오딧세이아의 형식을 따른다. 솔로몬이 살았던 세계는, 물론 그것이 연출된 것이긴 하지만, 노예제-인종차별이나 그로 인한 비극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세계이며 백인과 흑인이 한 레스토랑에서 같이 술을 먹고 음식을 먹는 그당시 세계라고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공정하며 ‘현대적인’ 세계이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남부라는 야만과 폭력의 세계가 존재한다:중요한 것은, 그 두 세계가 완전히 분리되어있는 것이 아닌, 하나의 시공간에 ‘공존’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가 안락하며 공정한 집과 북부의 세계로부터 쫒겨나서 어두운 세계인 남부로 쫒겨나 다시 집으로 돌아오기를 바라며(실제로도 귀환에 성공했으니) 그 여정을 견뎌내는 지점은 전 세계를 ‘돌아보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솔로몬은 오딧세우스가 신화적인 공포와 야만에 대면한 것과 유사하게 세계의 공포와 야만에 대면하고 거기서 살아남고자 한다. 


하지만, 오딧세우스가 영웅으로서 신화적 폭력에 맞서고 집으로 계몽을 가져다 주는 존재였다면, 솔로몬은 그것을 받아들이고 자신을 낮춤으로서 살아남고자 하는 ‘소시민적’인 존재이며 카메라 역시 그런 소시민이자 어디에도 낄 수 없는 솔로몬의 존재를 따라간다. 그는 심지어 노예와  자신을 분리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고 하기도 하는데, 확장해서 본다면 이는 ‘관객’의 입장과도 맞닿아있다고 볼 수 있다:과연 노예 12년의 시대가 우리의 시대에 그대로 부합할 수 있는가? 그것은 이미 과거가 아니지 않은가? 그렇기에 이는 우리의 이야기가 아니며, 우린 그저 지나가는 관객에 불과하다:물론, 영화가 다루고 있는 역사는 분명 과거의 역사이다. 하지만, 영화가 다루고 있는 문제, 호모 사케르나 죽어도 되는 존재로서의 인간은 여전히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문제라고 볼 수 있다. 그렇기에, 안락한 세계(북부)로부터 내쫒겨져서 지옥같은 세계(남부)를 바라보는 관객(솔로몬)이라는 지점에서 영화의 문법을 확대해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재밌는 점은 그런 그가 점점 그런 노예 대중의 문화를 받아들이는 지점이 있다는 것이다:노예가 죽자, 그 죽은 노예를 위해서 노예 대중이 가스펠을 부르는 것에 솔로몬이 참여하는 지점, 노예가 가질 수 있는 몇안되는 원시적인 문화에 자신의 육체를 리듬에 맞춰서 거기 동조하는 지점에서 그는 단순한 관찰자가 아닌 ‘대중’의 일부분이 된다. 그것은, 어떤 새로운 가능성이, 맞닿아있으며 연대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일말의 실마리로도 볼 수 있을까?)



하지만, 솔로몬은 돌아간다:역사에 따르면 그는 영원히 노예제에 의해서 고통받지 않으며, 돌아와서 그의 저서 ‘노예 12년’을 저술해야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우리는 이 실화가 어떻게 마무리될지 알고 있기에, 결말에 있어서 일말의 ‘희망’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노예 12년에서 가장 잔인한 장면은 바로 이 지점에서 등장한다:영화의 마지막, 노예의 이름인 플랫이 아닌 12년 만에 되찾은 이름인 솔로몬으로, 노예라는 물건에서 다시 인간으로 들어올려지는 지점에서 솔로몬의 여정은 끝이 난다. 하지만 앱스에게 학대받고 동시에 앱스의 아내에게 까지 학대받는 펫시가 솔로몬을 붙잡을 때, 솔로몬은 어떠한 것도 해주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제 솔로몬은 북부와 남부, 인간이 사는 세계와 노예가 고통받는 세계의 이원화된 세계의 경계에 선 것이 아닌 완전히 북부-인간이 사는 세계의 주민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카메라는 일말의 동정도 없이 냉정하게 그를 따라가며, 여전히 앱스에게 고통받을 노예들과 뒤에 남겨질 수 밖에 없기에 희망조차 잃어버린체 무너져버리는 펫시를 ‘배경’으로 다룰 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솔로몬의 여정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그 어느것도 끝맺음을 맞이하지 못한’ 끔찍한 찝찝함을 느끼게 된다. 오딧세우스는 오딧세이아의 끝에서, 세계의 질서를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솔로몬은 세계가 여전히 끔찍한 상태로 남아있을 수 밖에 없음을 확인하고 도망치듯이 집으로 돌아올 뿐이다.


그렇기에 12년만에 자신의 집으로 돌아온 솔로몬이, 가족에게 미안하다고 고백하는 장면은 ‘가족’을 향한 것이 아니다:그것은 자신이 버리고 떠나온 모든 것을 향한 ‘사죄’인 것이다. 동시에, 우리는 솔로몬이 노예 12년을 써야 했었던 문제의식과 마주하게 된다. 우리는 안락한 삶을 살고 있지만, 여전히 이 세계의 이면에는 부조리에 의해서 고통받는 인간 미만의 인간들이 있다. 솔로몬이 무기력하게 돌아와서 그 광경을 잊지 못해 자신의 남은 생을 노예제 철폐에 헌신하였듯이, 우리 역시도 그런 되돌아봄과 우리의 세계가 아닌 그 밑바닥에 있는 인간 미만의 인간들의 세계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영화는 간접적으로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노예 12년은 단순하게 인종차별과 노예제에 대한 역사적인 계몽과 고발에 대한 이야기를 뛰어넘어서, 현재의 우리에게도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소설 및 책 이야기








우리가 일반적으로 갖는 근현대의 시간에 대한 문제인식이란, 시간의 '가속화'이다:기술 문명의 발달을 바탕에 두고 있는 대중의 등장은 시간을 측정할 수 있으며 통일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물건으로 만들었으며, 그리고 이를 더욱 빠르게 가속함으로서 더 빨리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주었다. 기차를 예로 들어보자. 목표를 향해서 일사분란하게 진행되는 기차는 기차가 도착하는 지점마다 기차역을 설치하고 정확한 '시간'을 알려주는 지표로서 기능했었다. 제각기 다르게 흘러갔던 시간이, 기차와 기차역을 통해서 하나의 통일된 시간축을 갖게되었다는 분석은 이미 익히 알려진 사실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렇게 통일된 시간,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은 인간에게 기계의 시간에 맞춰서 더 빠르게 움직일 것을 강요하고, 그 결과 이러한 시간의 흐름에 맞출 수 없는 사람들은 뒤떨어짐으로서 지친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병철이 '시간의 향기'를 통해서 주장하는 바는 다르다:문제가 되는 것은 시간이 가속화되는 것이 아니다. 현대인들이 시간에 대해서 느끼는 감각은 단순하게 시간이 빠르게 흘러가기에 생기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아도르노의 다음 구절을 인용한다.



"불면의 밤:그것을 표현하는 하나의 공식이 있다. 새벽이 찾아와 끝날 가망도 없이 공허한 지속을 잊으려는 허망한 노력 속에서 늘어지는 고통스러운 시간들, 하지만 경악을 일으키는 것은 시간이 수축되어 아무런 결실도 없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그런 불면의 밤이다...그런데 그런 시간의 수축 속에서 드러나는 것은 충만한 시간의 반대상이다. 충만한 시간 속에서 경험의 힘이 공허한 지속의 저주를 깨뜨리고 지나간 것과 미래의 것을 현재로 끌어모은다면, 조급한 불면의 밤 속에서 지속은 참을 수 없이 끔찍한 전율을 불러일으킨다." 

-테오도르 아도르노, 미니마 모랄리아.



한병철에 따르면 이렇다:시간이 빨라진다는 것은, 더 빠르게 목표에 도착한다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시간을 2배로 더 빠르게 돌린다면 더 빠르게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것이고, 그리고 이를 통해서 압축적이기는 하나 우리의 삶은 이전이나 이후나 큰 변화 없는 만족을 누리게 될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가 겪고 있는 시간에 대한 의식, 특히 불안이란 아도르노가 저술한 것, '불면의 밤'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무엇에도 도달할 수 없기에 느끼는 불안감, 24시간 깨어서 24시간 움직이지 못하기에 느끼는 절망감(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기계가 아니기에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지한다;그럼에도 인간은 이에 대해서 절망을 느낀다), 그리고 '시간이 손가락 사이로 세어나가는 것처럼 느껴지는' 감각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인지하는 시간에 대한 문제의식이다. 하지만, 이러한 시간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감각들은 일사분란하게 목표로 나가는 시간, 가속된 시간과는 어딘가 다르다고 볼 수 있다:왜냐하면, 가속된 시간에는 '목표'를 향해서 나아가는 분명한 방향성과 운동성이 존재하지만, 우리가 일반적으로 느끼는 이 '막연한 불안감'이란 목표로 나아가는 '움직임'은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뒤떨어짐'과도 거리가 멀다고 볼 수 있다:인간이 아무리 기계를 빠르게 돌려서 목표를 향해서 움직이려 해도, 결국 기계는 기계를 움직이는 주체인 인간에게 예속되어있을 수 밖에 없다. 그렇기에, 단순히 기계가 빨라졌기에 인간이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은 틀린 명제라 볼 수 있다:기계가 여전히 인간에게 매여있다면, 기계가 가속할 수 있는 시간은 여전히 인간의 영향력과 한계에 얽메여있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기계가 인간에게 얽메여있듯이, 기계는 역으로 인간을 옭아매기도 한다:유사 이래, 인간은 가장 싸면서 가장 복잡한 '기계' 또는 '기계 부품'으로서 작동하였다. 한때는 그것은 노예제였으며, 장원의 농노였고, 혹은 산업혁명기의 여성 노동자와 아동 노동자 였었다. 인간에게 기계의 삶을 요구하는 것, 인간에게 모든것을 박탈하고 착취하여 극한의 기계의 효율을 이끌어내는 것은 이미 역사적으로도 증명된 사실이기도 하다. 하지만 한병철이 제기하고자 하는 문제는, 우리 사회 일반이라는, 즉 근현대사회-모더니티라는 '정상 사회'라는 지점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이런 사회에서는 단순하게 인간이 가장 싸면서 복잡하고 정밀하게 작동하는 기계의 부품으로서 착취의 대상이 된다고는 말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유념해야하는 점은 세계뿐만 아니라 실제 우리 사회에 있어서도, 우리가 바라보지 못하는 이면에 이렇게 착취당하는 기계로서의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다만 여기서는 그 문제를 중점적으로 다루지는 않도록 하겠다)


한병철은 현대 시간 인식에 대한 문제를 과거로부터 지금까지의 시간에 대한 관념이 어떻게 바뀌어왔는가에 초점을 맞춰서 이야기를 전개한다. 고대의 시간은 신화적인 시간으로서, 신의 이야기들, 그리고 끝이 존재하는 시간으로 존재하였다:여기서 인간은 신이 만들어낸 시공간의 풍경에 불과하였다. 하지만, 신의 죽음과 함께 근대의 시간관념이 도래하면서 이야기는 바뀌게 된다:한때, 풍경에 불과했던 인간은 이성이라는 도구를 통해 시간의 중심축으로 거듭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절대이성이라는 이상적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서(헤겔이 미학에 있어서 절대 이성의 순간에 도달하면, 이라는 전제를 깔은 지점이나, 마르크스가 한때나마 역사발전에 있어서 단계를 설정하며, 밀의 자신의 자유론 저서에서 하나의 궁극적 목표를 간간히 드러내는 지점 등등) 인간은 '시간'을 가속해야할 의무를 지게 된다. 이런 지점에서, 시간은 하나의 '이야기'가 된다. 이 이야기에는 인간이라는 주역이 있으며, 이야기의 끝을 향해서 인간은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의무가 있다. 중요한 점은, 근대의 시간에서 신이 죽음으로서 시간은 인간에게 귀속되었으며, 동시에 '목표'를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즉, 신화의 시간에서 근대의 계몽의 시간으로 바뀌면서, 스스로 미래를 향해 몸을 던지는 인간들이 등장하며 시간을 조작한다는 개념이 생겨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답을 향한 조급성이 인간과 시간 사이의 내적부조화를 불러일으키기 시작한 것을 한병철은 현대의 시간 문제의 단초로 본다.


하지만, 20세기의 일련의 역사적 사건들을 거치면서(2차세계대전 전후를 위시한 다양한 사건들), 인간에게 도달해야하는 '절대적 이상'은 사라지게 되었다(혹은 그것이 갖는 폭력성과 위험성을 파악하게 되었다) 그 결과, 시간은 자신을 구성할 수 있는 중심축, 중력을 잃게 된다. 한병철이 주장하는 현대 시간 문제의 근원은 바로 이 지점이다:현대의 시간에는 '중력'이 없다. 시간에 중력이 없기 때문에, 시간은 부유하며 무의미하게 소모되는 것 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시간의 가속화란, 어찌보면 시간 문제에 있어서 하나의 '편린'에 불과하다. 부유하는 시간속에서 시간은 가속하기도 하며 감속하기도 한다. 문제는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이 어떤 규칙성을 갖고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제멋대로 무의미하게 흩날린다는 점에서 현대인들은 시간에 대해서 무기력한 감각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한병철이 주요하게 문제를 제기하는 시공간은 바로 '인터넷'이라는 시공간이다. 재핑Zapping이라는 방식으로 움직이는 이 시공간은 수용자에게 오로지 '자극'을 주느냐 안주느냐의 여부에 따라서 머무름이 결정되는 세계이다. 만약 그 페이지가 재밌으면, 사람은 그 페이지를 보며 그 페이지에 머무른다. 하지만 그 페이지가 재미가 없으면, 수용자는 자연스럽게 그 페이지에서 이탈에서 다른 재밌는 페이지를 향해서 나아갈 뿐이다. '재미'라는 자극만 남아있는 이 공간에서, 인터넷 상의 시공간은 경쟁자들에 비해서 더욱 더 큰 자극을 줘서 사람을 머무르게 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그렇기에 인터넷 미디어는 점점 더 선정적인 방향으로 발달할 수 밖에 없다. 이처럼, 시공간에 '머무를 수 있는' 중력이 부재하다는 것은 인간이 시간을 무기력하게 또는 자극적인 방향으로만 소비하게 만드는 주요한 문제라는 것이 한병철의 견해다.


한병철이 제시하는 문제의 해결방법은, 시간에 머무를 수 있는 중력을 재발견하는 것이다:시간의 향기라는 개념은 바로 이 지점에서 등장한다. 금방 사라지는 시각과 청각적인 자극이 아닌, 장소와 밀접한 관련을 맺으며 뇌에 깊숙한 여운을 남기는 향기, 즉 '후각'의 개념은 하나의 시공간에 머무르고 거기서 머무름으로서 느낄 수 있는 안정감을 선사한다는 것이다. 시간과 향수, 추억에 대해서 수많은 유럽 철학자들이 인용하는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보자(이 역시 한병철도 인용한 부분이다.)



"(마들렌의 향과 맛에 대해서)그 무엇에도 의존하지 않는 완전히 독자적인 전대미문의 행복감, 그 근거가 무엇인지 나 자신도 알 수 없는 그런 행복감이 내 온몸에 흘러 퍼졌다. 단번에 나는 삶의 굴곡에 무관심해졌고, 삶의 재앙도 그저 대수롭지 않은 불운이었으며, 삶의 짧음도 단순히 우리 감각의 기반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리하여 내 안에서 무언가가, 보통은 사랑만이 이룰 수 있는 무언가가 일어났고, 이와 동시에 나는 어떤 진미의 물질로 채워진 듯이 느꼈다. 아니, 이 물질이 내 속에 있다기보다는 내 자신이 그 물질이었다. 나는 더이상 내가 평범하다거나, 공연한 존재라거나, 죽어 없어질 몸이라고 느끼지 않게 되었다."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시간에 머무른다는 것은, 시간에 있어서 서사를 다시 되찾자는 의견은 아니다:한병철은 장 프랑수와 료타르의 순간에 대한 미학, 수평적인 시간의 흐름에 따른 미학이 아닌 그 순간에만 느낄 수 있는 존재의 수직적 미학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평가한 지점에서(물론 그것이 시간의 부유함을 막을 수 있다고 보지는 않지만), 그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다시 근대의 목표가 있는 시간축의 설정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한병철의 주장은 '사색적 삶'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것이다:머무르는 시간이란, 단지 목표를 향해서 나아가든, 아니면 목표없이 불안에 떨며 방황하는 시간이 아닌, 그 순간에 지나치며 느끼는 정념의 문제라 할 수 있다. 하이데거가 후기 저서에서 '들길이라는 시공간에서 느끼는 감정'에 집중한 것을 한병철은 중요한 지점으로 파악한다(여담이지만 한병철은 독일 철학, 특히 하이데거의 철학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시각과 청각과 다르게 향기가 뇌의 감각기관으로 들어와서(냄새는 후각 수용기로 빨려들어온다), 거기에 강렬한 자극을 주며 머무르는 것처럼, 현대인들도 시간이라는 그 순간에 머무르는 미학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한병철은 이 지점에서 니체를 인용하는데, "우리 문명은 평온의 결핍으로 인해 새로운 야만 상태로 치닫고 있다. 활동하는 자, 그러니까 부산한 자가 이렇게 높이 평가받은 시대는 일찍이 없었다. 따라서 관조적인 면을 대대적으로 강화하는 것은 시급히 이루어져야 할 인간 교정 작업 중 하나이다")


한병철의 현대의 시간에 대한 분석은 날카로우며, 핵심을 찌르고 있다. 물론 이 지점에 있어서 본인의 독서력이 얕은 관계로, 한병철이 갖고 있는 한계와 모순점을 발견해내지 못한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본인이 한병철을 높게 평가하고, 독서토론에 있어서도 평가가 좋은 지점은, 근래의 소위 '철학자'라 불리는 자들의 말장난에 비견하면 한병철의 저서들은 '논리적인' 구조에서 크게 벗어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의 문제의식은 과거 본인이 리뷰했었던 멋진 신세계에서 드러나는 죽음의 문제와 맞닿아있다:인간이 시간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면, 그의 삶은 '불현듯' 끝장나게 된다. 한병철이 인용하는 니체의 최후의 인간과 불시Un-zeit(독일어로, 부정과 시간의 결합어다) 개념은 멋진 신세계에서 드러나는 신세계인들이 죽음을 맞이하는 방식인데, 죽음이라는 존재를 전혀 모르는 상태로 그들은 문자의미 그대로 불현듯 '끝장'나버린다. 죽음을 받아들인다는 것, 그것을 준비하고 현재의 삶의 일부로 받아들인다는 개념 자체가 부재한다는 것은 멋진 신세계의 문제뿐만 아니라, 현대의 우리 역시 경험하는 문제이며 '적절히 머무르다, 적절하게 떠난다'는 적절함의 개념의 부재한다는 지점으로도 볼 수 있다.


하지만 그의 날카로움과 별개로, 본인이 그의 저서에 대해서 느끼는 찝찝함이란 그가 분석하고 있는 사회현상의 '한정됨'이라는 지점일 것이다:물론 그는 이미 충분히 복잡한 현대사회의 문제들을 철학적/미학적인 지점에서 고찰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며, 동시에 그에 대한 추상적이지만 큰틀에 있어서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본인이 지적하고 싶은 점은, '세계'와 '역사'와도 같은 어떤 구체적이고도 분명한 문제들에 대한 통찰이다. 우리는 선인들의 경험과 인터넷을 통해서 다양한 세계와 역사의 문제를 마주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분명하게도, 우리가 마주하지 않고 눈돌림으로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고 볼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에 대처하여야 하는가?


물론, 이는 비겁한 '반칙'이다:하나의 포커스로부터 시작된 이야기를 시야를 넓혀서 다양한 포커스를 다루지 않았다는 점을 공격하는 점은 논쟁이나 반박을 하는데 있어서 비겁한 형식의 이야기 확장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한병철이 다루고 있는 '일반 정상 사회'라는 개념은 어찌보면 먼 거리에서 흝어보는 대단히 추상적인 이야기들이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마주할 수 있고, 실제로도 마주치고 있는 문제에 들어오면 한병철의 담론 이외에도 수많은 다양하며 구체적인 담론들이 얽이고 섥였다는 사실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그가 '머무름'에 대해서 이야기한 지점에 대해서 주목하고 싶어진다:그는 사람은 현재에 머무르고 그것을 즐길 수 있는 미학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의 시공간에 머무를 수 있는 것에는 다양한 것들이 개입한다. 수많은 역사적/사회적인 얽이고 섥힘의 관계, 나무에 메달린 보트를 보며 '이것이 어떻게 여기에 도달하였을까?'라는 신비함, 그리고 이 시공간에 함께함이라는 지점이 우리에게 시간의 향기를 느끼게 하는 지점이라 볼 수 있다. 그렇기에, 이 모든 시공간의 엮임, 과거와 미래가 교차하는 이 현재라는 지점에 있어서 모두가 함께함이라는 것이, 어찌보면 시간의 향기의 미학에 가장 중요한 지점이 아닐까? 그렇다면, 단순하게 그 장소에 머무를 줄 아는 것 뿐만이 아니라, 이 시간의 엮임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하는 윤리와 도덕에 대한 문제의식도 필요한 것이 아닐까? 이러한 순간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면, 같은 시공간에 있음에 대한 소명의식도 필요한 것이 아닐까? 아직까지는 본인으로서도 정리가 안된 혼란스러운 지점이지만, 분명한 점은 그런 머무름과 함께있음의 어떤 맥이 닿아있음을 본인은 책을 읽으면서 느꼈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한병철의 시간의 향기는 현대의 시간 문제에 대한 날카로운 시각을 갖고 있는 저서이며, 현대인들이 느끼는 시간 감각의 문제를 근원에서부터 파고 들어가는 문제라고 볼 수 있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몇몇 의문점에 대한 대답과 함께 더 큰 의문점을 갖게된 책이기도 하지만, 이런 지점에 대해서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읽어야하는 책이라고 추천할 수 있을 것이다.






'소설 및 책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간단 감상]키스 해링 저널  (0) 2014.12.18
[간단 감상]지적사기  (0) 2014.05.28
[간단 감상]멋진 신세계  (0) 2014.03.26
[간단 감상]밀의 자유론  (0) 2014.02.14
[간단 감상]피로사회  (0) 2013.10.06
잡담/개인적인 이야기







일단 복귀 신고합니다.


그리고 글은 지금 시간의 향기 감상 및 노예 12년, 다크소울 리뷰 및 칼럼 등등을 쓰고 있습니다.

최대한 빨리 써보도록 하죠....






'잡담 > 개인적인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141027, 잠깐의 여유  (0) 2014.10.26
141007, 잠시 착각했습니다.  (0) 2014.10.06
잠시간 잠수  (0) 2013.11.06
8/6까지 블로그 휴업합니다.  (0) 2013.08.04
당분간 바쁠듯 합니다.  (0) 2013.06.03
잡담/새로운 소식

제목 그대로입니다...

망할 중간고사...



TistoryM에서 작성됨

'잡담 > 새로운 소식'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복귀+매드 맥스:분노의 도로 트레일러  (0) 2015.05.14
당분간 바쁠듯 합니다.  (0) 2013.09.03
이 시간 이후로 댓글 막습니다.  (0) 2012.06.10
복귀했습니다.  (2) 2011.02.28
500,000  (5) 2010.01.29
1
블로그 이미지

IT'S BUSINESS TIME!-PUG PUG PUG

Leviath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