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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이야기/게임 리뷰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새 술에는 새 부대가 필요하다:언제나 그렇듯이, 새로운 차세대 콘솔에는 차세대 기기에 걸맞는 철학과 성능을 갖춘 작품이 필요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각각의 콘솔들은 그런 자신들만의 매력을 발산할 수 있는 '독점작'을 확보하는 것이야말로 경쟁기종에 비교하여 더 경쟁력있는 지점을 만들어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플4와 엑원이 런칭된지 4개월이 넘어가는 지금 시점에서, 양측 모두 다소 '아쉬운' 지점이었다. 특히 경쟁자에 비해서 소비자들을 확 끌어들일만한 무언가, 그리고 이 게임 하나만으로 이 콘솔을 살 수 있다 라는, 소위 킬러 타이틀의 부재는 분명히 플4가 리드하는 상황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결정타를 먹이지 못하는 미진한 상황을 드러내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플4와 소니 진영은 킬존 쉐도우 폴의 실패를 극복하려는 듯이 플삼 독점 프랜차이즈였던 인퍼머스 세컨드 선을 발표하였고, 많은 사람들은 세컨드 선이 과연 차세대를 사야하는 '이유'를 만들어줄 수 있는가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보였다.


결론적으로, 인퍼머스 세컨드 선은 게이머에게 그래픽이나 게임의 호쾌함에 있어서 충분히 플4를 사야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타이틀이다:하지만 문제는, 인퍼머스 세컨드 선은 잘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꺼림칙한 인상을 잔뜩 안겨주는 게임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못만들었기에 느껴지는 불쾌함이나 짜증남과는 다른 지점이다. 오히려, 더 잘만들어지고 잘 다듬어질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맞지 않는 옷을 입은듯한 어색함을 게임 도처에서 발견할 수 있기에,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밌게 즐길 수 있다는 지점에서 어딘가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기묘한 게임이라 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인퍼머스 시리즈가 지향하는 지점은 GTA 류의 오픈월드 게임에 만화에서 나오는 초능력자들의 문법을 도입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위험에 빠진 도시가 있고, 초능력을 가진 초인이 도시에 등장한다. 도시를 좌지우지 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초인(=게이머)은 어떻게 할 것인가? 게임은 만화나 애니메이션 등의 각종 서브컬처에서 나오는 상상력을 게임에 접합시킨다:게이머는 자동차나 헬기 같은 현대적인 교통수단을 이용하지 않고 맨몸으로 건물을 거꾸로 타고 올라가며, 혼자서 수십명의 특수부대와 탱크, 헬기 등등을 쓸어버리기도 한다. 또한 GTA 같은 게임들이 도시라는 풍경을 배경으로 세상과 교류할 수 있는 소소한 서브 미션 등등의 요소를 집어넣어 풍경이 단순하게 풍경으로 머무는 것이 아닌 상호작용을 할수 있는 지점을 만들었다면, 인퍼머스 시리즈의 경우 그보다 더 나아가는 지점을 드러내기도 한다:게임의 기본 컨셉 자체가 만화 등의 초인을 다루는 서브컬처에서 영향을 받은 것을 드러내듯이, 게임은 카르마 라는 시스템을 도입하여 선한 행동과 악한 행동을 하였을 시에 그에대한 피드백을 주고 스토리와 게임 플래이에 영향을 미치는 지점을 만들기도 한다. 컨셉 자체로만 본다면 인퍼머스 시리즈는 대단히 흥미롭고 매력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인퍼머스 세컨드 선은 상당히 기묘한 전투 방식을 보여준다:기본적으로 우리가 초인에 대해서 기대하는 것은 압도적인 강함으로 상대를 농락하는 것일 것이다. 하지만 인퍼머스 1편과 비슷한 시기에 발매된 프로토타입의 경우, 그러한 압도적인 파괴력을 여실히 잘드러냈었다. 하지만 인퍼머스 시리즈의 경우 초기의 이미지와 다르게 사격전 위주의 짤짤이가 주를 이루었으며, 이로 인해서 초창기 게임을 기대했던 사람들에게 충격과 공포를 안겨준 것도 사실이다. 세컨드 선 역시도 그 경계에 사로잡혀 있는데, 게임의 재미와는 별개로 전투가 사격에 치우쳐 있기에 갖는 아쉬움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카르마 스트릭의 호쾌함이나 대형탄으로 파괴할 수 있는 사물들의 파괴 효과 등등은 아름답기는 하나, 기본적으로 게임은 '짤짤이'라고 폄하될 수 있는 사격전이 기본 베이스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짤짤이 위주의 사격전과는 별개로 게임의 전투는 잘 짜여져있다:게임 내내 상대하는 통합보안부 적들은 크게 4종류(콘크리트 점프로 이동하는 경보병, 게이머의 발목을 묶는 마법사형 적, 중무장하고 근접공격만 하는 적, 차폐물을 만들어내는 적)로 구분이되며, 각각의 적들은 각자 맡은 역활이 있고 게임을 상시 긴장하게 만든다. 전작들과 다르게 이번작 세컨드 선에서 통합보안부 적들은 기본적으로 매게체라는 설정을 달고 있으며 적들은 게이머를 따라 건물 위로 건물 아래로 뛰어다니면서 게이머를 성가시게 만든다. 그리고 중무장한 적들은 군중제어기가 먹히지 않고 지속적으로 데미지를 가하거나, 아니면 근접공격으로 쉴드를 부숴야 하는 등의 각자의 격파 방법이 다르다. 이런식의 다양한 적들이 배합되서 나오고 적들의 화력 역시 막강하기에 게임의 전투는 혼돈을 달리게 된다. 그리고 게이머는 이 난관을 플어나가기 위해서는 전투중 체력 회복 수단과 무적 판정이 달려있는 기술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한다. 그렇기에 게임은 무적 판정이 붙어있는 대쉬를 이용해서 정신없이 이동하며 적들을 상대하고, 밑에서 다룰 능력에 따른 카르마 획득 및 체력 회복 기제를 적극적으로 이용해야 하는 것이다.


능력은 크게 연기, 비디오, 네온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능력별로 각기 게임을 풀어나가는 방식이 다르며 게이머의 선악 카르마에 따라서 게임의 진행 방식도 달라지게 된다. 가령, 연기 능력의 경우 선한 카르마로 진행할 시에는 헤드샷을 날리면 적들이 비틀거리는 상태에 빠져서 이를 제압하는 것으로 선한 카르마를 획득하며 능력 업그레이드 상태에 따라서(보통은 필수적으로 찍겠지만) 자동적으로 체력을 회복하게 된다. 반면, 네온의 경우에는 머리가 아닌 발목을 공격함으로서 적을 제압하고 선 카르마를 획득할 수 있으며, 헤드샷을 하는 경우에는 악 카르마를 획득하며 체력을 회복한다. 이와 같이 능력에 따라 선과 악 카르마에 따라서 전투 방식을 판이하게 만든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할만 하다. 그러나, 게임은 각각의 능력에 있어서 고유하고 매력적인 공격 패턴을 넣기는 했지만, 그것이 다양하지 못하다는 점, 능력간의 변환이 쉽지 않다는 점 등등으로 인해서 전투 시스템의 매력을 깎아먹는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능력이 다양하지 못한 점은 대단히 심각한 지점이라 볼 수 있는데, 게이머가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 연기-네온-비디오 밖에 되지 않는다는데다가 각기 전투를 풀어나가는 기술이 대략 3-4개 밖에 되지 않는 점은 상당히 아쉽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전투에 있어서 능력이 많지 않다는 점, 그렇기에 전투가 몇몇 파워를 반복해서 쓰는 감이 없지 않아 있다는 점에서 인퍼머스 세컨드 선은 결점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으나, 세컨드 선의 치명적인 문제는 그런 전투의 단조로움이 아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투는 재밌기도 하니까) 인퍼머스 세컨드 선의 가장 큰 문제는 오픈월드 게임이면서, 왜 이 게임이 오픈월드로 만들어졌어야 했는가를 설명하지 못하는 지점에서 비롯된다. 예를 들어보자:GTA 시리즈의 경우, 게이머는 도시에서 범죄를 저지르는 범죄자이며, 도시는 게이머에게 있어서 범죄의 공간이자 기회의 공간, 그리고 일상으로부터의 일탈의 공간이다. 그렇기에 게이머들은 메인 스토리가 진행되지 않는 지점에서도 자연스럽게 범죄를 저지르며 범죄에 가담하는 서브미션을 하게 된다. 어크 4:블랙 플래그의 경우에는, 게이머는 해적이며 바다를 배경으로 약탈을 하고, 해적 답게 보물을 찾아 여기저기를 뒤지게 된다. 레드 데드 리뎀션의 경우, 게이머는 최후의 무법자가 되서 서부시대의 황혼을 만끽한다:무법자 사냥, 야생마 길들이기 등등... 이처럼 광대한 시공간을 제공하는 오픈월드 게임들은 보통 '이러한 시공간이 필요한/배경으로 선택한 이유'를 제공하며, 그것은 게이머가 세계와 소통하는 방식이나 게이머가 그 공간에서 자잘하게 할 수 있는 다양한 미션들이나 시스템 등의 게임 서사 형태로 드러나게 된다.


하지만, 인퍼머스 세컨드 선에는 그러한 '활동'과 시애틀이라는 세계와의 관계 맺음이 거의 전무하다:게이머는 일정 구역에서 무한히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이벤트들(마약상 단속 같은)을 무한하게 반복해서 해결을 하는 것, 그것이 카르마가 오르고 게이머가 시애틀이라는 세계를 향해 관계맺는 방식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여태까지 다양한 오픈월드 게임들이 해왔던 다양한 시도들을 무시하는 처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단순하게 서브미션이 부족하다는 것은 세컨드 선의 문제에 대한 정확한 문제제기가 아니다. 인퍼머스 세컨드 선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게임 서사와 게임 시스템 사이의 긴밀한 연관관계가 없기에 생기는 문제이다:왜 초인은 시애틀이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통합안보부와 싸우는가? 물론 게임은 대하 서사시 급은 아니지만 작고 친밀한 지점에서(아코미쉬 라는 자신의 부족을 위해서) 서사를 시작하며, 네이티브 아메리칸이면서 악동이며 체제의 반항아가 매게체 동족들인 펑크족 소녀와 찌질이 너드를 데리고 통합안보부의 압제로부터 시애틀을 구해낸다는 반항적이며 전형적인 이야기를 잘 다루어내고 있다. 그 중에 소소한 반전과 이야기거리, 생각거리를 던져주는 지점(인간과 매게체는 서로 공존할 수 있는가? 빌런은 매게체의 자유를 뺏음으로서 매게체를 지켰다는 논리를 펼치기도 한다.) 등등에서 플롯의 전반적인 짜임은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이들의 싸움에는 시애틀이라는 공간은 전적으로 배제되어 있다:매게체들의 싸움은 여전히 매게체들 간의 문제에 집중되어 있으며, 그 바깥에서 매게체와 세계가 어떤식으로 관계 맺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전무한 것이다. 어찌보면, 세컨드 선에 있어서 시애틀이라는 공간은 그저 풍경이며, '텅빈' 공간에 불과하다:민간인들은 풍경처럼 어제와 똑같은 일상을 반복할 뿐이며, 게이머가 접할 수 있는 민간인들과 세계란 그저 부조리하게 길가다 자빠져서 도와달라고 몸비트는 무언가에 불과한 것이다.


물론 마지막에 있어서, 게임은 게이머가 해왔던 행동들의 결과물을 보여준다:선 카르마로 진행한 경우, 시애틀의 시민들은 통합보안부에 맞서서 게이머를 대변하는 이야기를 해준다. 이런 지점에서의 시민들의 반응을 보여주는 지점은 나쁘지 않다. 그러나 이것은 게임 전반에 깔려있는 미학이 되었어야 했었다:우리 동네에 초능력자가 왔어요, 그렇다면 적어도 우리마을과 우리가 달라지거나 상호작용을 하는 모습을 보여줘야하지 않을까? 가뜩이나 카르마 시스템을 도입해서 서로 교류하는 지점을 만들어내었는데, 세계와 교류할 수 있는 지점이라는게 지정된 지점에서 무한하게 반복되는 이벤트를 무한히 클리어해서 카르마를 쌓는 것 뿐이라면 그것은 대단히 아쉽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몇몇 사람들의 표현에 따르면 '인퍼머스 세컨드 선은 마치 스테이지 형식의 게임을 한다'라는 극론까지 제기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세컨드 선에서의 시애틀이라는 시공간의 크기가 크냐 작으냐는 문제가 아니다:시공간이 내밀하게 짜여져 있다면 인퍼머스 세컨드 선의 시공간은 전적으로 작다고 할 수 없다. 다만, 그 시공간을 채워넣는데 있어서 세컨드 선은 적절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게임의 그래픽은 인상적이다:가변 프레임(20~60프레임을 오가는)이긴 하지만, 게임이 플래이 불가능할 정도로 출렁거리거나 끊기지는 않는다. 그러나 게임 내에서의 그래픽의 디테일은 압도적이라 할 수 있을정도로 훌륭한데, 특히 능력과 관련있는 광원의 경우에는 여태까지 나온 차세대 게임과의 비교를 불허할 정도로 아름답다 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게임 내에서 묘사되는 시애틀이란 도시의 풍경인데, 뚜렷한 랜드마크 없이 반복되고 구분하기 힘든 도시 이미지로 인해서 시애틀은 게이머에게 뚜렷한 이미지를 심어주는데 실패한다. 


인퍼머스 세컨드 선은 차세대 게임이 가능성이 어디까지 뻗치는가를 보여주며, 그리고 기본은 충실하게 수행하는 게임 플래이를 보장한다. 하지만, 세컨드 선의 본질적인 문제는 과거 오픈월드 액션 장르의 게임들이 초창기에 경험했었던 문제들을 고스란히 반복하는 지점이다:세컨드 선은 자신이 갖고 있는 게임 서사나 게임 플래이의 잠재력을 모두 터뜨리지 못하고 어영부영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게임이 전혀 재미가 없지는 않다. 하지만, 차라리 이 게임을 어설프게 오픈월드를 재현하기 보다는 일반적인 일직선 형의 스테이지 기반의 게임으로 만들되, 좀더 다양한 서사와 가능성들, 게임 플래이들을 만들어내었으면 이거보다는 훨씬 더 재밌고 대단한 게임이 되지 않았을까, 라고 생각해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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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및 책 이야기








…진정으로 새로운 세기가, 즉 지식인들과 지식 계급들이 유토피아를 회피하면서 비유토피아적이며 조금이라도 완전하지 않은, 조금이라도 자유로운 사회로 되돌아가려 온갖 수단방법을 꿈꾸게 되는 세기가 되었다.

-니콜라스 베르자예프.



멋진 신세계는 디스토피아 소설의 시조라고 볼 수 있는 작품이다:무려 1932년에 쓰여진 이 소설은 인간 사회의 타락한 그 절정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일견 이 소설에 나오는 멋진 신세계이자 미래사회는 유토피아적으로 보이기도 한다:인간은 태어날때부터 계급으로 분류되긴 하지만, 그의 반대급부로 행복하고 편안한 삶, 그리고 자유로운 성적 유희를 즐기며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젊음을 유지하는,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측면에서 보았을 때 그야말로 완벽한 사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소설 속의 사회에 대해서 막연하지만 동시에 강렬한 반감을 느끼기도 한다:왜일까? 이는 같은 디스토피아 소설의 대표작이긴 하지만, 동시에 정반대의 디스토피아를 보여준다 할 수 있는 1984에 비교하여 보았을 때 좀더 명확하게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1984가 보여주는 디스토피아는, 우리가 역사적으로 경험하였던 정치적 권리에 대한 탄압의 은유로 읽혀질 수 있다. 즉, 1984가 보여주는 암울한 미래세계란 전적으로 우리가 그러한 경험을 하였고(주로 나치즘을 통한 프로파간다를 통한 대중 선동, 언어와 지식의 말살/재교육, 타집단을 향한 증오와 제거를 통한 내부결속 등등), 교육을 통해서 그러한 경험을 거부해야한다는 믿음이 기저에 깔려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1984의 세계에 대한 명백하고 교육된 거부감과 다르게, 멋진 신세계를 향해서 우리가 느끼는 모호하지만 확실하게 존재하는 거부감이란 상당히 기묘하다:즉, 우리는 이 소설 속의 사회를 막연하게나마 이상향으로 인식하고 있지만, 그것이 우리 머릿속의 어떤 개념들(세비지로 대변되는)과 동시에 상충되고 있기에 분명하게 이것을 거부할 수 있는 감정이나 논리를 확립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따라서 우리가 이 멋진 신세계를 정면으로 부정하기 위해서는, 이 디스토피아 세계의 기저에 깔려 있는 문제점을 분명하게 드러내야 할 것이다.


멋진 신세계에서 가장 인상적이며 중요한 부분은 모든 육체는 과학적으로 통제된다는 것이다:인간은 태어나면서 계급에 의해서 분류되고 재생산된다. 섹스는 즉각적인 쾌락을 얻기 위해서 자유롭게 행해지지만, 동시에 아이를 낳는 행위는 극단적으로 경멸되는 무언가로 전락한다. 인간은 우울하면 소마를 복용함으로서 우울을 통제하며, 심지어 이들의 대중문화 말초적인 촉각과 후각을 통제하는 형태로 구현된다. 멋진 신세계의 사회는 어떤 이성이나 사유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체로 인간개개인의 감각기관을 직접적으로 통제하며, 문제가 생길 수 있는 근본적인 원인을 즉각적으로 차단한다. 이렇게 사회 구성원 개개인의 육체를 통제하는 멋진 신세계의 방식이란 일찍이 푸코가 국가가 국민, 사회 구성원의 육체를 통제하는 것, 영토에 기초한 주권을 대체하는 국민에게 영향을 끼치는 주권과 정치/통치의 형태를 강조한 부분과 유사하다. 그리고 아감벤은 이러한 푸코의 논지를 확장 발전시켜서, 무엇이 국민이고 무엇이 국민이 아닌지를 결정하는 근대적 주권 국가의 주권 및 국민 개념과 2차세계대전 당시의 나치즘의 홀로코스트, 그리고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학살과 법이 멈추는 수용소라는 시공간에 주목하여 호모 사케르(신성한 인간)란 저서를 썼다.



이 연구 과정에서 다음 3가지 테제가 잠정적인 결론으로 도출되었다.

1.근원적인 정치적 관계는 추방령(외부와 내부, 배제와 포함 사이의 비식별역으로서의 예외상태)이다.

2.주권권력의 근본적인 행위는 벌거벗은 생명을 근원적인 정치적 요소이자 자연과 문화, 조에와 비오스 사이의 결합의 비식별역으로 산출하는 것이다.

3.오늘날 서양의 생명정치적 패러다임은 국가 공동체가 아니라 수용소이다.

-호모 사케르, 조르조 아감벤



아감벤은 호모 사케르(죽일 수는 있지만, 희생 제물은 될 수 없는)를 법의 근원적인 문법으로 보았으며, 그리고 이러한 기저에는 그리스 폴리스의 삶의 양식 조에(단순하게 살아있음)와 비오스(의미있는 삶)의 분리가 깔려있다고 아감벤은 자신의 저서 호모 사케르를 통해서 주장한다. 조에란 자연에서 단순히 태어나고 죽고 하는 것은 어떠한 가치 판단의 기준도 아닌, 단순하게 거기 있다 사라지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의미있는 삶, 비오스란, 그것의 태어남과 삶에 의미가 존재하고 동시에 중요하게 여겨진다. 아감벤은 폴리스에 있어서 시민과 함께 조에, 의미없는 삶들이 함께 살았음에 주목하였다. 아감벤은 즉, 비오스란 조에라는 ‘예외상황’을 통해서 규정된다고 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예외상황을 통한 자신의 규정’은 호모 사케르-맘대로 죽일 수 있지만, 희생물로 바쳐질 수 없는-의 법의 문법을 통해 실현된다:예를 들어보자. 사형의 경우, 사형수는 국가에 의해서 죽음을 선언받은 자들이다. 이들은 국가의 처분에 따라서 마음대로 죽임당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어떠한 숭고한 가치를 위한’희생물’은 될 수 없다. 그들은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는 헌법과 가치질서의 예외에 속하면서도, 동시에 그러한 예외를 통해서 역설적으로 헌법적 가치질서이자 주권권력의 결정을 ‘재확립하는’ 존재들인 것이다. 이러한 생명을 통해서 정치를 하는 것, 인간의 생명을 통해서 무엇이 예외상황임을 선언하는가를 ‘결정’하는 것이 주권권력이자, 동시에 아감벤의 문제의식인 ‘생명정치’인 것이다.


아감벤이 주목하는 지점은, 이런 호모 사케르의 문법이 ‘수용소’라는 공간을 통해 드러난다고 본다:수용소는 모든 법이 ‘멈추는 시공간’이다. 아감벤은 주권권력이 수용소라는 공간을 만들어냄으로서, 무엇이 국민이고 비국민인지를 구별하는 생명-죽음 정치의 장을 연다고 보았다:나치 독일이 유대인 수용소를 통해서 유대인을 학살한 것은, 유대인이라는 ‘비국민’을 만들어내어 무엇이 ‘국민’인지를 구별하고자 한 것이다. 이보다 좀더 독특하며 명확한 지점은, 나치 독일이 ‘장애인’을 소개하려고 한 행위들을 통해서 뚜렷하게 드러난다:왜 전쟁에서 패망하는 순간에 있어서도 나치독일은 장애인을 제거하는 작업에 많은 자원과 관심을 쏟은 것일까? 그것은 그 행위를 통해서 ‘무엇이 국민인가’라는 테제를 실현하기 위한, 주권권력의 생명정치의 ‘핵심’이기 때문이다.(다섯번째 자유와 게임에서 발췌, 편집 및 재인용)


아감벤의 생명정치, 생정치에 대한 이론은 많은 지점에서 멋진 신세계의 세계와 부합한다:인간은 재생산하는 과정은 개개인의 결합이 아닌 국가라는 집단이 독점하고 있으며(초반부에서 보여지는 인간 재생산의 과정을 통해 이는 극명하게 드러난다), 무엇이 어떤 인간이 될지를 결정하는가에 있어서 인간의 유전자와 육체를 통해 판단하기 때문이다. 일찍이 헤겔이 왕에게 있어서 주권이란 앞에 있는 상황에 대하여 예 또는 아니요 라 말함으로서 무엇이 불법인지 합법인지를 결정할 수 있는 힘이라고 보았으며, 실제로도 여기서도 그러한 긍정과 부정의 과정은 매우 중요하게 보인다:일견 긍정적인 삶에 대한 무한한 긍정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세계에 있어서, 주역이라 할 수 있는 세 인물은 너무 잘만들어져서 문제거나(헬름홀츠), 너무 못만들어져서 문제거나(버나드), 아예 외부에서 온(세비지)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이들 중 헬름홀츠와 버나드는 특이개체들만 사는 섬으로 강제 추방되며, 세비지는 사회를 감당하지 못하고 자살하게 된다. 즉, 인간이 아니라고 선언된 자들은 다들 사회에 의해서 직간접적으로 제거당함으로서, 사회는 스스로의 정상성을 지키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이러한 멋진 신세계의 주권은 아감벤이 나치즘의 홀로코스트 논리를 분석하면서 사용한 '정치적 과학, 과학적 정치'에 의해서 정당화된다:과학의 논리에 따라 엄정하게 정치적인 사안을 구분하는 것, 예를 들어서 나치의 홀로코스트 학살에 있어서 무엇이 유대인인가 혹은 무엇이 정상적인 아리아인이고 죽여야하는 열등 국민인가를 결정하는 지점을 혈통과 우생학이라는 '과학적' 근거로부터 구했다는 점에서 과학과 정치의 결합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이것은 건강 관리Health Care라는 지점에서, 현대의 건강관리 및 보험과 맥이 닿아있다. 다만, 그것이 인간을 제거하는 형식으로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나치가 열등한 인종을 쓸어내기 위해서 장애인들을 불임시술을 하는 법안을 제정하였는데, 이것이 종전 후에도 '나치 인종주의적인 법안'으로 인지되지 않고 그대로 존재했다는 점, 심지어 폐지 이야기가 제기되던 1961년에는 독일의 지성이 모였다 할 수 있는 막스 플랑크 연구소에서 '현대의 핵가족이라는 시스템에서 우생학은 필요하다'라며 이 법안을 보호하려 했다는 점은 많은 점을 시사한다) 동시에, 과학은 정치가 된다:죽음의 경계를 나누어서, 무엇이 살아있고 무엇이 죽은 상태이냐를 분류하는 것은 대단히 복잡한 논제들이 얽혀있는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을 칼로 자르듯이 '과학적'인 잣대로 깔끔하게 나누는 것, 명백하지 않은 문제를 마치 과학인양 포장해서 과학적인 문제로 환원시키는 지점에서 과학 바깥의 정치적 의도와 결합된 정치적 과학이 등장한다.(나치즘의 우생학의 개념도 이렇게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학적 정치와 정치적 과학의 개념은 멋진 신세계를 구성하는 기저 논리가 된다:인간의 육신을 통제해서 '행복'을 퍼뜨리는 것이 지상목표인 '과학적'인 사회에서, 과학은 행복이라는 사회의 지상가치를 어떠한 논의나 이야기도 없이 절대적으로 도파민으로, 아드레날린으로, 엔돌핀으로 치환한다. 그렇기에, 이 둘은 서로 꼬리에 꼬리를 물며 순환논증적으로 완벽한 구조를 구축한다:무엇이 사회가 지향해야하는 가치인가? 그것은 바로 과학적으로 검증된, 물질화된 행복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 물질화된 행복은 구조를 강화하기 위해 은밀하게 정치적으로 재조정된다:과연 행복은 물질적인 행복밖에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과학적인 육체가 통제의 대상이 되면서, 모든 인류는 주권에 의해서 마음대로 처분당할 수 있는 호모 사케르가 된다:이를 두고 아감벤은, 의미있는 삶을 향유하던 귀족들만의 세계가 민주주의 혁명으로 무너지면서 의미없는 삶을 사는 평민들이 의미있는 존재로 승격되었지만 동시에 모든 인간들이 '의미없는 삶'을 사는 무언가가 되었다 라고 보았다. 즉, 인간은 평등한 존재가 되었지만, 동시에 평등하게 학살당할 수 있는 존재로 격하되기도 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지점에서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는 멋진 신세계와는 다른 지점이 생긴다. 멋진 신세계의 본질은, 의미없는 것을 제거함으로서 의미있는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오히려 이는 1984에서처럼, 정치적으로 다름이라는 것을 배격하고 내부의 결속력을 강화하기 위해서 다른 생각을 탄압하는 형태에 가깝다고 보아야할 것이다. 그리고 1984적 디스토피아란, 아감벤이 호모 사케르의 마지막에서 이야기하였듯이 누구나 제거당할 수 있기에 자신의 내부를 끝없이 자기검열해야하는 경지에 도달함으로서 완성된다. 하지만 멋진 신세계의 세계란, 그런 자기검열이라는 고상한 언어를 쓰기에는 너무나 저차원적이며 즉물적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즉물적인 세계의 기저에서 멋진 신세계의 세계는, 모든것을 무한한 행복이라는 찬란함으로 만들려는 어떤 '내부적 기제'가 존재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아감벤적인 생명정치의 관점에서, 그리고 일반적인 우리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지옥처럼 보이는 이 세계에서 내부의 구성원이 어떠한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 것은 어째서일까? 과학적인 행복과 인류 문명에 대한 왜곡된 믿음, 그것을 사회구성원들이 '내면화'하였으며 무한하게 이를 긍정하고 있기 때문이다:한병철의 피로사회에서 니체의 '신이 죽은 자리에 건강의 여신이 들어선다'라는 구절을 인용하였듯이, 세계가 절대적인 기준과 근거, 신과 악마, 선과 악 등등의 서사를 잃어버리게 됨으로서, 멈춤 없는 무한한 긍정의 세계를 맞이하게 됨으로서, 멋진 신세계의 사회는 반론조차 존재할 수 없는 무언가가 된다.(게다가 그럼으로 인해서 생겨나는 현대사회의 우울의 문제를 소설은 소마라는 마약으로 극복한다) 저자가 서문에서 공리주의적인 세계관과 철학이 무한하게 팽창하는 것을 경계하였듯이, 계측될 수 있는 행복에 대한 믿음이 그것을 부정할 수 있는 요소들이 사라짐에 따라 무한하게 팽창하는 것이다:자극만이 존재하는 사회, 마약, 촉각과 후각에 기반한 대중문화, 인간의 육체로 가장 강하게 얻을 수 있는 쾌감인 성을 자유화시킨 것 등등은 이미 공리주의적 세계가 현현한 그 자체로 볼 수 있을 것리다. 그리고 이것은 아감벤의 생명정치적 개념에 의해서 실체화되며,사회구성원들은 이를 내재화하고 스스로 그 개념을 구현하기 위해서 무한하게 나아감으로서, 이 사회는 논리 뿐만 아니라 실제적으로 완결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레니나를 보자:그녀야말로 이 멋진 신세계에 있어서 가장 일반적인 인물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너무 잘만들어졌거나, 너무 못만들어졌거나, 아예 외부에서 온 인물과는 다르게 레니나의 분석할 가치조차 없는 유치하고 허접한 심리상태야말로 이 사회 일반 구성원들의 모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 역시 호모 사케르이다:한병철은 아감벤의 무한히 제거되기 위해서 존재하는 호모 사케르의 개념을 뒤집어서, 무한히 살아야하는 호모 사케르의 개념을 주창한다. 그리고 멋진 신세계의 인물들은 무한히 살기 위해서 존재한다. 이 사회에는 노화가 없다:그들은 60세까지 젊음을 유지하다가 불현듯 죽음을 맞이한다. 또한 죽음은, 개개인의 상실이나 슬픔이 아닌 '훈련으로 인해서 극복되는 불쾌함' 이상 이하도 아니게 된다. 이 죽음이 거세된 사회에서, '생명'은 영원하게 그리고 무한하게 팽창한다. 하지만, 죽음으로서 완결되는 삶이 없다면, 어떤 것에 끝이 없다면 그것이 과연 삶이고 생명이라 할 수 있을까? 받아들여야할 죽음도 없고 짊어져야할 탄생도 없기에, 사회 구성원 개개인은 의미있는 삶이 아닌 그저 사회를 구성하는 하나의 '풍경'에 불과할 뿐이다. 멋진 신세계의 사회 구성원은 그저 사회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존재, 언제라도 사라져도 상관없는 무의미한 존재가 되어버린, 그야말로 자신에게 소여되며 사회가 정해준 삶을 살기 위해, 그리고 사회를 위해서 영원히 살아야하는 호모 사케르이자 사회의 가치가 주입되고 내면화된 호모 사케르인 것이다.


그러나 한병철의 통찰이 내부를 향해 날카로운 지점을 드러내었지만 동시에 그것은 한계 역시 갖고 있다:한병철과 후기 모더니즘, 혹은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불리는 철학사조는 정교하고 복잡한 분석을 통해 사회 내부의 문제를 정확하게 고찰하지만, 동시에 내부의 문제에 집중한 나머지 외부의 문제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다는 문제가 있다. 한병철의 분석은 날카롭지만, 사회 외부에서 볼 수 있는 문제들, 사회 내부의 환경을 구성하기 위해서 과학적인 '통제'가 가해지는 지점을 놓치고 있다:멋진 신세계에서도, 그런 완전한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형태의 통제가 일어나고 있으며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을 관장하는 내부(미래 사회)와 외부(원시사회) 사이의 과학작 관리자이자 주권자(사회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라는 지점에서)의 상징이지 대표로서 무스타파 몬드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와 대등하게 대화할 수 있는 것은 무스타파 몬드와 같은 경계인(그는 과거의 세계를 경험했으며, 동시에 이 세계를 만들어내는데 있어서 핵심적인 철학을 제시한 사람이다. 그는 세비지가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를 알며 이해하고 동시에 즐기기까지 한다)인 존 세비지 뿐이다. 그 역시도, 신세계로부터 온 여인의 아들로서 원시의 사회로부터도 신세계의 불길한 존재로써 배척당하고 동시에 신세계에 있어서도 그저 흥미거리이자 구경거리에 불과한 경계인이다. 하지만, 이 경계인들은 내부(헬름홀츠나 버나드)와 외부(원시사회와 과거의 사회)의 경계에 서서 현재의 문제를 인지한다:그것은 인류가 여지껏 쌓아왔던 문화와 문명을 신세계라는 사회가 완전히 부정하고 망가뜨리고 있으며, 동시에 이 사회가 병들어있고 문제가 있음을 인지한다. 그것이 단순하게 내부의 인간들이 사고하지 않음을, 내부의 문제를 떠나서 이 사회가 존속되기 위해서 행해지는 무수히 많은 모순들(과학의 정의, 노동을 창출하기 위해 일부러 기술의 발전을 후퇴시키는 지점들 등등)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도 인지한다. 하지만 무스타파는 과거의 위험을 보고 사회를 붕괴시키지 않기를 선언하며, 세비지는 어디에도 도달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여 자살한다.(1950년대 작자 서문에는 이러한 결말이, 세비지에게 너무나 크나큰 비극과 짐을 지웠다고 토로하기도 한다.)


이러한 이야기들과 분석을 통해서, 우리는 멋진 신세계가 갖고 있는 문제를 드러내었다:하지만, 가장 중요한 지점이기도 하지만, 우리들 스스로가 이러한 생명정치-무한 긍정의 디스토피아를 부정할 수 있는지 여부가 남아있다. 무스타파와 세비지의 마지막 대화에서, 세비지는 이렇게 답을 한다:"나는 불행할 권리를 주장합니다:늙어서 추해지고 무능하게 되는 권리는 말할 것도 없고, 매독과 암에 걸릴 권리를, 굶주림의 권리를, 더러워질 권리를, 내일은 무슨 일이 일어날까 끊임없이 조바심할 권리를, 장티푸스에 걸릴 권리를, 말할 수 없는 온갖 고통에 시달릴 권리를" 불행해질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하는 것, 이것이 이 디스토피아를 무너뜨릴 수 있는 해답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기에 대해서 '거부감'을 느낀다. 왜냐하면 인류는 지난 인류의 역사 기간동안 '불행'을 극복하기 위해서 노력하였으며, 실제로 그러한 불행을 극복함으로서 인류는 더 많은 기회를 얻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과학과 테크놀로지는, 수많은 사람들이 공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었다. 과학을 이용한 통제와 관리는, 현대사회의 핵심이며, 축복이자 저주이다. 그렇다면, 과학과 기술의 혜택과 불행할 권리는 '공존할 수 없는 것일까?'


우리는 이렇게 봐야할 것이다:세비지가 제시하는 극론의 '불행할 권리'는 어떤 '멈춤'의 미학에 대한 이야기로도 볼 수 있다. 한병철은 자신의 저서 시간의 향기에서, '시공간에 머무르는 힘'에 대해서 이야기한 적이 있다. 현대사회의 시공간은, 중력을 잃어서 어지럽게 흩날리는 모습을 보여주며, 그것은 때로는 빠르게, 때로는 느리게 흘러가기도 하지만 결국은 어떤 방향성 없이 부유하는 시공간에 불과하다. 하지만, 하나의 시공간에 머문다는 것, 부유하는 시공간의 흐름을 '스스로' 멈추고 거스르는 힘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한병철의 분석은 주요한 명제를 우리에게 던져준다:흐름의 거부, 우리가 멈추는 것, 그것은 '부정의 미학'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0이란 단지 비어있음을 드러내는 형용사가 아닌 음의 흐름과 양의 흐름을 멈춘 '동사'라고 이야기한 션 큐빗의 말처럼, 우리는 무제한적인 관리의 긍정과 멈추지 않는 세계를 멈출 수 있는 사유와 철학, 미학이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단순하게 극단적으로 매독에 걸리고, 암에 걸리고, 모든 고통에 시달리는 것을 절대적으로 선택하는 것이 아닌, 우리가 그런 고통을 감수하더라도 지켜야하는 것, 과연 인간이 무엇이고 무엇을 위해 사는가에 대한 단순하지만 중요한 명제에 대한 사유가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철학과 사유와 함께, 관리와 기술, 과학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사회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작동하는가 역시도 알아야 할 것이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는, 1930년에 쓰여진 작품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사회와 과학 사이의 문제를 정밀하게 짚고 있는 작품이며, 고전이라 불릴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그리고 1940년대에 다시 쓰여진 작가 서문은 그의 경고가 그의 시대를 넘어서 우리 세대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드러내며, 그리고 우리는 그가 예견한 다음과 같은 종말을 막기 위해서 많은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모든 것을 고려해볼 때 유토피아는 15년 전에 어떤 사람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온 듯 여겨진다. 그러므로 나는 이러한 것을 앞으로 600년 뒤의 세계속에 투영시켰던 것이다. 현재 1세기 이내에 우리에게 이러한 공포가 닥치리라는 것이 아주 확실한 것처럼 여겨지고 있다. 만약 우리가 이 기간 내에 우리 자신을 산산조각 내지 않은 체 벗어나지 않는 한 그것은 그렇게 보인다. 실로 우리가 스스로에게 적용된 과학을 인간이 만든 수단에 대한 목적이 아니라 자유로운 개체 종족을 생산해내기 위한 수단으로서 이용하고 분산시키지 않는다면, 우리는 단지 두 개의 선택안 가운데에서 하나를 택해야만 한다. 


원자탄 위협을 자신들의 자신들의 기본전략으로 삼고 결과적으로 도시 파괴나 전쟁을 제한할 경우, 영원한 군사화를 보유하게 되는 민족주의적 군국주의의 형태의 전체주의와, 일반적으로 급속한 기술진보와 특별히 원자개발로 일어나는 사회적 혼란, 효율과 안정성을 원하는 욕구 안에서 유토피아의 복지전체정치로의 발전으로 생기는 무질서가 불러올 수 있는 초국가적 전체정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자 그럼 돈을 지불하고 나서 선택을 하십시오.


-올더스 헉슬리, 1947년판 서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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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어머니와 나는 같은 피를 나누어 가졌다기보단 어쩐지 똑같은 울음소리를

가진 것 같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김경주, ‘주저흔’


영화 만신은 나라무당이라 불리우는 만신 김금화의 일생을 다룬 다큐멘터리이며 독특한 형식을 보여주는 영화이다. 만신 김금화의 일생을 본인의 진술과 나레이터의 나레이션, 그리고 배우들의 재연을 통해서 재구성하는 영화 만신은 특이하게도 무당이라는 ‘미신’을 다큐멘터리라는 ‘사실’을 다루는 형식으로서 다루려 한다. 또한, 영화는 시간 순서대로의 이야기를 진행하면서 그 과거의 재연과 현실 자료영상을 과거-현재-미래가 서로 교차한다:김금화가 내림굿을 받을 때, 그녀의 미래의 모습이 스쳐지나가듯이 그녀에게 예지를 내리며, 그녀가 굿을 한 자료영상은 그녀의 인생사와 함께 교차되어 등장하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 듯이 보여진다. 다큐멘터리라는, 정보의 보존과 전달이라는 영화 장르(http://ko.wikipedia.org/wiki/다큐멘터리_영화)를 영화 만신은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가 서로 간섭하며 정보를 재구성하려 하고 있기에 다큐멘터리로서 만신을 바라본다면 대단히 생소하고 낯설게 느껴지는 부분이 많다고 할 수 있다.


먼저 영화가 다큐멘터리라는 장르의 소재로서 무당을 바라보는, 샤머니즘을 바라보는 시각은 독특하다:이것이 종교인가? 혹은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과학으로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초자연적인 세계의 단면을 드러내는 것일까? 영화는 이런 선정적인 서사에 빠지지 않는다. 차력쇼로서 무당이 작두를 타는 자료화면처럼, 영화는 우리에게 초자연적인 이야기를 단순한 호기심 위주로 소모하기 위해서 이야기를 전개하지 않는다. 만신이 기초하고 있는 서사는 무당과 굿에 대해 매료됨, 그리고 그것에 대한 향수이다:눈파란 서양인들이 만신 김금화에게 내림굿을 받는 장면에서 일반적인 한국인이라면 거부감을 느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어째서 우리보다 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그들이 미개하게 작두나 타는 무당에게 내림굿, 강신무를 받는 것일까? 영화는 그것이 사실임(진짜 무속적 신이 존재하는 것)을 강변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이 한때 우리에게도 있었고 서양인들에게도 있었으며, 동시에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 내려오는 원시적인 믿음, 세계 어디에나 존재하는 근원적이며 원시적인 것에 대한 향수로서 샤머니즘, 무당을 다루어내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영화는 샤머니즘의 미학에 따라서 영화의 서사를 배열한다:작두를 타는자, 귀신의 세계도 인간의 세계에도 머물 수 없는 무당이란 존재가 작두 위라는 아슬아슬한 시공간 위에서만 자신의 존재, 그리고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는 만신 내에서 인용한 민속학자의 견해를 재인용해보면, 무당의 신체야말로 과거(귀신들), 현재, 그리고 미래(예지몽 같은)가 한꺼번에 존재하는 시공간인 것이다. 그렇기에, 만신 김금화의 이야기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서로에게 간섭을 하면서 하나의 이야기를 구축하게 되는 것이다. 즉, 영화는 전반적으로 샤머니즘에서의 샤먼, 무당이라는 존재의 특징을 영화 전반의 구조에 적용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영화가 김금화라는 무당의 육신과 그녀의 인생내력을 통해서 구축하려하는 것은 한국 근현대사의 질곡을 그대로 경험한 전통문화 그 자체인 것이다.


이런 지점에서 김금화가 보여주는 전통 문화, 굿이라는 전통예술은 독특한 미학을 보여준다:예로부터 ‘신은 인간에게 내렸으되, (먹고살기 위해서는)재주는 네가 배워야한다’(노름마치에서 인용)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굿이란 단순하게 신내림과 작두타기로써만 행해지는 무언가가 아니다. 그것에는 형식이 존재하며, 또한 그 형식 와중에 무당은 관객(굿을 보는)들의 상황에 맞춰서 굿을 풀어나가야한다. 그렇기에, 일반적인 근대적 무대예술과 다르게 굿은 관객과의 참여, 그리고 극을 풀어나가는 무당의 역량 역시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경계가 불분명하고 자연스럽게 굿이라는 무대를 이끌어가야하는 김금화의 굿은, 어떤 의미에서 김금화라는 인물의 삶 그 자체가 되어버린다:굿을 할 때, 굿이 시작도 끝도 그 구분이 모호하다. 그녀는 일상속에서 자연스럽게 노래를 하며, 자연스럽게 노래를 끝마친다. 그리고 이는 무대의 개념이 모호하고 관객과 공연자 사이의 교류를 중요시여기는 전통예술 전반에 적용시켜 볼 수 있을 것이다. 전통예술을 예술로서 따로 보존하고자 했던 현대적 개념의 예술가들이 아닌 삶과 함께 예술을 하고, 그것으로 밥을 벌어먹고 살았고, 그것에 의해서 탄압받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과 함께 살기를 희망했던 광대, 기생, 판소리꾼, 한량, 사당패, 무당 등등의 이야기들은 결국은 전통예술이 겪었던 근현대사의 혼돈의 영향을 그대로 받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영화는 그런 분절적인 시공간의 구분인 과거-현재-미래를 무너뜨리고 김금화의 삶들을 서로를 교차시키면서 스스로 ‘굿’이 되기를 희망한다. 해방 이후, 혼돈스러웠던 정국에서부터 천대받았던 무당의 삶과 6.25 전쟁과 분단현실, 그리고 죽은 넋을 위로하는 굿이 교차한다. 그리고 무당이라는 이유로 이혼당했던 김금화가 시간이 지난 뒤에 전남편과 만나는 장면에서는 남편과 처가 만나는 형식의 대동굿의 영상을 겹쳐 보이게 한다. 미신 타파를 외치던 새마을 운동에 의해서 도망치듯이 굿을 하고 굿으로 쌓인 울분을 굿으로 풀어내며, 굿을 하던 중에 기독교에게 까지 박해를 받던 이야기까지 굿은 이 모든 주요한 사건의 핵심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영화는 굿이 행해지는 시공간을 통해서 이런식으로 영화는 한 맺힌 과거와 현재, 그러한 앙금들이 삭아서 가라앉은 미래(동시에 현재)를 하나의 시공간에 넣음으로서, 이 거대한 타임라인을 하나의 덩어리로 뭉치려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영화는 역사의 질곡을 한데 모아서 그 상처를 치유하려는 씻김굿을 내리고자 한다. 그렇기에,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단순하게 김금화 라는 만신, 무당의 이야기가 아니다:영화 만신은 하나의 ‘이야기’를 전달하고자 한다. 그것은 우리가 잃어버렸고, 외면하였지만 다시금 되찾고자 하는 것을 한 사람의 인생의 끄트머리에서 다시금 재조명하고 그것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자 하는 초혼의 과정인 것이다.


그렇기에, 어떤 의미에서 만신은 다큐멘터리의 경계 내에서 머물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알렝 레네의 유대인 홀로코스트를 다룬 다큐멘터리 밤과 안개나 범죄에 있어서 진실을 밝혀내고자 영화외적이며 사회적인 시도를 보였던 에롤 모리스의 가늘고 푸른선과 같이, 다큐멘터리가 다루는 어떤 사건이란 단순하게 객관적인 정보를 전달하는 것만으로 부족할 때가 있다. 파트리시오 구즈만 감독의 다큐멘터리 ‘빛을 향한 그리움’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말이다:다큐멘터리 영화가 다루려고 하는 것은 엄밀한 사실의 전달을 넘어서 그 시대나 사건, 현상, 상황이 가졌던 어떤 특징 그 자체라고도 볼 수 있다. 빛을 향한 그리움에서, 천문학과 민주주의를 향한 사람들의 노력과 고난들, 그리고 아타카마 사막 어딘가에 묻혀있을 자신들의 가족을 찾는 사람들의 형용할 수 없는 슬픔까지 다뤘던 것처럼 말이다.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단순한 칠레 천문학과 민주주의를 다루는 것이 아닌 사실의 전달이 아닌 별과 사람, 천문학과 민주주의, 그리고 우리와 같이 질곡으로 가득찬 칠레 근현대사 그 자체인 것이다. 그렇기에 무당과 그녀가 살았던 삶의 질곡을 굿이라는 시공간을 통해서 과거-현재-미래의 틀을 부수고 그 속에서 이야기를 만들고 화해하고자 하는 것은 그녀가 살아왔던 삶과 전통 예술을 다뤄내는 방식으로 있어서 적합한 방식이라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만신의 마지막은 애잔하다:무당을 위한 도구들을 만들기 위해서 어린 김금화가 쇠를 모으러 마을을 돌아다닌다. 그리고 여기에는 단순히 마을 사람들뿐만 아니라, 미래의 자신들, 스쳐지나갔던 사람들, 심지어는 자기 자신과 카메라 프레임 바깥의 스태프들까지 쇠를 모으는데 참여한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스스로 마지막에 굿이 되기를 선택한다:단지 김금화의 삶을 메타 시공간적으로 다뤄내는 것이 아닌, 영화 스스로도 프레임 바깥이 아닌 프레임 안으로 걸어들어오면서 모두가 맞닿아있는, 죽은자 산자가 어울려 노는 굿판에 걸맞게 프레임 내부와 외부의 모두가 만나고 화해하는 굿의 미학을 성립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미학은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 분절되어있는 시공간이 굿 이라는 예외적인 시공간을 통해서 만났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예외일뿐이며 그것이 일반적인 상황이 될 수 없다. 그렇기에 배우들과 김금화 본인 모두 어린 김금화를 남겨둔체 프레임 바깥으로 사라진다. 그 애잔함, 신명나게 놀고 화해하기 위해서 모두 모였지만 다시 돌아갈 수 밖에 없다라는 것, 한 인물의 삶의 끄트머리에서 그것들을 다 모아서 다시 돌아보는 아련한 슬픔은 어쩌면 김금화 본인과 굿이라는 장르를 떠나서 전통예술이라는 미학 전체로 확대해서 볼 수 있는 무언가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멸종하고 있다는 것은 어떤 종의 울음소리가 사라져간다는 것이다 나는 멸종하지 않을 것이다

-김경주, ‘우주로 날아가는 방 5' 중


게임 이야기







*스토리 스포일러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게임의 서사는 보여주기에 기초하고 있다:스크린으로 출력되는 영상과 영상매체 및 문화에 기반하고 있는 게임이라는 매체가 갖는 특성이다. 그렇기에 많은 게임들은 기존의 영상매체의 선배라 할 수 있는 ‘영화’로부터 많은 것을 인용하고 차용한다. 그리고 헐리웃 블록버스터식 보여주기 라는 지점에서 게임의 서사를 집중하고 있는 사례로는 콜 오브 듀티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콜옵 시리즈의 경우, 이 보여주기 위한 연출이 극에 달해서 역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인과관계가 재정립되는’ 역전된 인과관계의 형태를 보여준다. 그리고 콜옵 시리즈가 게임 내부의 이야기와 서사를 구성하고, 그리고 이벤트를 구성하는데 있어서 가장 기본적으로 내재하는 원칙은 한 장면에서 많은 양의 정보를 표출하는 것, 즉 정보의 과잉에 기초한 스펙타클이다.


콜옵 고스트의 예를 들어보자:무너지는 빌딩에서 탈출하는 시퀸스에서, 게이머는 도망가지도 않고 게이머를 향해서 달려드는 수많은 적병과 대치하게 된다. 건물은 무너지며, 적들은 총을 쏘고 달려들며, 게이머는 정신없는 상황을 경험하게 된다. 하지만 이렇게 수많은 정보량을 게이머에게 주입하고 정신없게 만들고 거기서 살아남게 스테이지 구성하고 영상을 연출함으로서, 게이머는 그런 복잡한 정보들에서 비롯된 화려함과 거기서 살아남는다는 아슬아슬한 쾌감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복잡한 구조의 경우, 넘쳐나는 화면상의 정보를 게이머가 모두 처리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렇기에 이런 경우에 있어서 게임들은 시공간을 느리게 함으로서(슬로 모션) 게이머들이 이를 인지할 수 있게 만든다:하지만 이러한 시공간의 느려짐은 일종의 예외상황으로서, 이것이 지속적으로 반복된다면 게이머들은 이것에 쉽게 지루해지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예외가 상시로 지속되게 된다면, 게이머들은 모든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것’처럼 느끼게 되며 쉬이 지루하게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루고자 하는 소울 새크리파이스의 스토리는 대단히 무난하다:이야기는 무한히 반복되는 평행세계와 세계의 부조리, 그리고 거기서 탈출하려는 인간들의 노력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것이 일반적으로 SF적인 ‘평행세계’를 드러내고 있지 않을 뿐이다. 또한 이야기 역시 일본 서브컬처에서 찾아볼 수 있는 흔한 동료애 찬양쪽에 가깝다. 하지만, 소울 새크리파이스의 서사가 인상적이며 효과적으로 게이머의 감성을 자극할 수 있는 점은 바로 게임이 사용하고 있는 ‘서사의 방식’ 덕분이다. 소울 새크리파이스의 서사는 영상이라는 매체에 기초하고 있지 않다. 게임의 서사는 인물의 독백이자 일기의 형태로 게이머에게 전달된다.


게임의 시작은 세상이 대충 멸망하고 게이머는 감옥 안에 갇혀서 죽을 날만은 기다리는 주인공의 시점에서 진행된다. 하지만 이 주인공은 리브롬이라는 신비한 책을 만나며, 이 책을 매게체로 하여 이 일기의 저자가 과거에 경험했었던 일을 ‘추체험’하게 되며, 이 추체험의 내용이 게임 플래이가 된다. 즉, 게임은 게이머가 곧바로 케릭터를 통제하는 것이 아닌 게이머가 통제하는 케릭터가 일기속의 과거의 마법사를 통제하는 것으로서 이어진다. 이러한 복잡한 형태의 서사-게임 층위구조는 게임의 이야기를 산만하게 만들 위험성을 내포한다:어새신 크리드 시리즈의 서사가 대표적이다. 어크의 이야기를 보자. 어크에는 주인공이 총 두명이 있으며, 게이머는 데스몬드를 플래이하면서 동시에 데스몬드는 역사속의 인물을 추체험한다. 어크에서 역시도 소울 새크라파이스에서처럼 세명의 인물이, 동시에 하나의 게임 시공간을 점유한다. 그것은 다른 게임에서처럼 단순하게 게이머=케릭터의 이야기 서사가 아니라, 매게자가 끼게 되면서 게이머는 누구에 자신을 이입을 해야할지 혼란을 느끼기 쉽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세명의 케릭터가 발산하는 정보가 많아지거나 세명의 케릭터가 서로 조율을 이루어내지 못한다면, 케릭터들 사이의 긴장관계는 어그러져서 결국은 리벨레이션 이전의 데스몬드에 대해서 많은 게임 플래이어들이 비판했던 지점들, 즉 케릭터 자체의 비중이 공기화되는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는 것이다(즉, 게이머들은 보통 자신을 데스몬드를 거쳐서 역사속 인물의 추체험에 도달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닌, 자신이 곧바로 역사속 인물에게로 추체험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데스몬드의 비중은 제작진들의 의도에도 불구하고 거의 공기처럼 취급받게 된다)그렇기에 여기에서 달성하고자 한은 목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와 같은 복잡한 기제의 서사 방식은 게임의 이야기를 흐트러뜨리는 독이 되는 것이 자명해보인다.


하지만, 소울 새크리파이스는 기존의 어쌔신 크리드-리벨레이션에서 보여주었던 미학을 통해서 이를 극복한다:세 명(게이머-케릭터-게임속의 게임의 케릭터)의 서로다른 시공간을 점유하는 인물들이 하나의 시공간에 나란히 겹쳐진다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 즉 하나의 케릭터의 유지가 다른 케릭터에게로 이어지고, 또다시 그 케릭터의 유지가 게이머 또는 다른 케릭터에게로 이어지는 모습을 통해서 이런 복잡한 형태의 서사를 정당화시킨다. 리벨레이션에서 보여준 삼중 동기화, 에지오-알테어-데스몬드로 이어지는 유지의 이어짐, 서로 분절된 시공간에서 각자의 이야기를 펼쳐나가는 것이 아닌 찰나의 순간이나마 서로가 연결되고 유지가 이어졌다고 느껴지는 지점을 통해서 말이다. 이를 통해서 어크 특유의 복잡한 서사 방식은 나름대로의 당위성을 얻으며 이 시리즈를 오래한 게이머들에게 벅차오르는 감동을 선사한다. 그리고 제작진은 이후 게임 시리즈의 복잡한 이야기에 당위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다양한 방법을 사용한다:예를 들어, 어크 4의 경우 게임 내부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어찌보면 현재에서도 여전히 일어나고 있는 문제다. 그렇기에 마지막 아이타가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을때, 많은 게이머들은 충격을 느꼈으리라.


소울 새크리파이스 역시 어크 리벨레이션과 유사하다:리브롬은 무한한 멀린과의 싸움을 통해서 자신의 육체를 잃어가면서도, 누군가 멀린을 구해줬으면 하는 바람에 자신의 경험을 전달할 수 있는 매게체인 책의 형태로 변화해버린다. 그리고 모든 이야기를 읽은 뒤, 리브롬을 희생함으로서 게이머는 게임 속에서의 리브롬의 모습으로 화한다(물론 능력도 그대로이다) 리브롬의 유지는 게임 속의 케릭터가 이어받으며, 그렇기에 리브롬의 모습을 한 게임 속의 케릭터가 멀린을 쓰러뜨리고 다시 세계를 원래의 모습으로 복구시킨다. 케릭터에서 케릭터로 유지가 이어진다는 지점에서, 게임은 리벨레이션의 삼중 동기화가 보여주었던 미학을 실현시키고 게임의 독특한 구조를 정당화시킨다. 다만 리벨레이션과 소새크가 다른 지점이 있다면, 소새크는 가상현실이라는 기믹이 아닌 책의 기록과 경험을 게이머(=게임 속의 케릭터)가 읽어나가는 형식이라는 것이다. 이런 지점에서 독특한 것은, 게임의 서사진행이 전적으로 독백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게임은 이러한 독백에 있어서 게임은 철저하게 게이머에게 주는 정보를 압축적으로 통제한다. 하지만 이는 게임의 대사들이 시적으로 느껴지는 무언가는 아니다:소새크의 이야기는 일기의 주인 리브롬의 직설적이고 거친 독백에 의존하고 있으며, 케릭터를 제시하는 방식도 사건을 통해서 인물을 간접적으로 제시하는 것이 아닌 리브롬이 직접적으로 해설이나 주석을 다는 방식쪽에 가깝다는 것이다.(그리고 대부분 이 독백의 정보들은 옳다) 자칫 잘못하면 게임은 전지적 리브롬 시점(실제로 게이머는 일기 바깥의 세계를 볼수 없으니, 리브롬의 시점이 전지적이라고도 볼 수 있다)에서 모든것을 다 가르쳐주는 밋밋한 독백을 읽는 형태가 되기 십상이겠지만, 게임이 그러한 함정에 빠지지 않는 것은 어떤 복잡한 플롯에 기초하고 있다기 보다는 단순하고 금방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를 서사로 다루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다양한 상황에서 리브롬의 독백을 다뤄내는 성우의 연기가 효과적이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이런 지점에서 서양에서의 영문 더빙이 엉망이었다, 라는 게임 웹진들의 평가는 치명적이다:소새크의 스토리의 대부분은 리브롬의 튀지 않고 절제되어있는 성우 연기로 완성된다.)


절제할 줄 아는 성우의 연기와 유지의 이어짐, 그리고 독백과 기억이라는 메소드를 통해서 정보량 자체를 통제하는 서사방식이 소울 새크리파이스의 이야기를 매력적으로 보이게 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의 내용들은 여전히 지독한 클리셰에 사로잡혀 있다:영원한 파트너의 개념이나 모양이 달라지더라도 전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 등의 식상한 이야기들이 소새크 이야기의 근저에 흐른다. 또한 매력적이라 보이는 케릭터들 조차도 독특한 형태로 이야기를 뒤틀었을 뿐이지(돈이 모든것이기에 돈으로 인간과 마물을 구원하려는 마법사 라던가, 아무도 죽이지 않는 마법사 킬러라던가), 그 근저에는 기믹적인 지점 이외에는 케릭터의 깊이가 없다고 할 수 있다. 애초에, 인물들은 리브롬의 짧은 독백 속에서 등장하는 이레귤러이며, 인물들은 만난 뒤의 리브롬의 독백이라는 필터링을 거쳐서 게이머에게 전달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임의 서사는 감동적으로 다가오는 지점이 있다. 이는 게임이 보여주는 과도한 그로테스크적 이미지와 세계관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마법사는 사람이었던 마물을 죽여서 세계를 지킨다. 하지만 그런 싸움 중에서 마법사들은 세상의 멸시와 천대를 받고, 동시에 마물을 죽여서 제물로 삼으면서 제물로 삼은 혼의 원망과 저주를 받으며 자신의 기억마저도 그 싸움 속에서 혼탁해지고 빛마저 바래저가게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키고 싶은 마음이 있다, 후대에게 넘겨주고 싶은 의지가 있다. 오늘 세상이 멸망하더라도, 괴물이 되어버린 파트너를 위해서 타인에게 내 마음을 전달하고 싶다. 이런식으로 흔하디 흔한 이야기들은,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그로테스크함과 극명한 대비를 이루면서 이야기를 전달하는데 있어서 효과적으로 다가온다. 소울 새크리파이스가 보여주는 그로테스크함은, 물론 그것이 여전히 시장에 유통될 수 있다는 점에서 허용범위기는 하지만, 대중이 일반적으로 소비하는 그로테스크함과는 차이가 있다.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를 제물로 삼고 그 어머니를 무기로 만든 괴물미노타우르스), 풋페티쉬에 지네와 인간이 결합된 마물(신데렐라), SM(토끼와 거북이, 개구리왕자) 등등. 소새크의 세계관은 단순하게 설정이나 컨셉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게이머가 부딪히는 세계 그 자체로서 게이머에게 시각적, 정서적 충격을 준다. 그리고 이렇게 그로테스크하고 잔혹한 세계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를 전달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다는 것은 게이머에게 클리셰 투성이의 이야기를 전달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효과적이다.


마지막으로 소새크의 서사와 게임 구조에 있어서 특기할 사항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플랫폼과의 궁합’이다. 비타라는 휴대용 게임기는 와이드 스크린을 지원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휴대용의 특성상 거대한 스펙타클을 보여주기에는 스크린이라는 물리적 한계가 크다. 근래의 스펙타클이란 화면에 비례하는 경향이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많은 게임들이 속기 쉬운 지점들, 예를들어 킬존 머서너리 처럼 콘솔 게임의 연출 문법 그대로를 휴대용 게임에 접합하면 그것이 여전히 비타라는 기기에서도 그대로 연출될거라는 미신적이며 잘못된 믿음들을 소새크는 정면으로 회피한다:소새크의 이야기 전달은 전적으로 영상에 기초하고 있지 않다. 물론, 글씨가 쓰여지는 묘사나, 책에 나오는 일러스트들 등등에서 게임은 여전히 영상적인 전달 방식을 보여준다. 하지만, 영상이나 영화적 연출, 콜옵 처럼 영상에서의 정보의 과잉에 기초한 스펙타클이 아닌 비타에서 보여줄 수 있는 제한된 스크린에서의 정보의 선택과 집중(독백)에 기초한 서사를 게임은 보여준다. 또한 게임은 이러한 서사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게임의 구조 자체를 하나의 책에 비유하며 플랫폼의 기능역시 여기에 맞춰서 구성한다:가령 게임은 몇몇 분기를 지원하는데(마물을 구원하느냐, 희생하느냐), 만약 다른 분기를 경험해보고 싶다면 그 책의 내용을 ‘고쳐써서’ 다른 분기로 넘어갈 수 있다. 또한 게이머는 버튼 조작 이외에도 전면 터치스크린을 이용해서 책의 페이지를 ‘넘겨볼 수 있다’. 이런식으로 게임은 책이라는 구조를 게임 전체에 통일적으로 적용하기 위해서 노력한다. 이런 점에서 소새크는 비타의 많은 기능들을 십분 활용하는데, 단순히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다 라는 과시로서 게임을 구성한 것이 아니라(비타의 후면터치를 이용한 조작 같은) 플랫폼의 한계에 대한 고민과 동시에 그런 한계를 어떻게 장점으로 승화시킬 것인가(책과 독백의 이용)라는 해결책이 모두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새크는 전혀 문제가 없는 게임은 아니다:게임이 취하고 있는 과도한 그로테스크함은 게임 내적 완결성을 높이지만 동시에 게임에 진입하려는 초심자들에게 많은 거부감을 선사한다.(잔혹한 세계관 역시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런 높은 허들은, 독립된 장르로서 그렇게 풀이 깊다고 할수는 없는 헌팅 액션 장르에 있어서는 치명적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아쉽게도, 소새크는 나름대로의 철학아래서 이런저런 시도와 몇몇 훌륭한 업적은 거둔 게임이지만, 이것이 팔려서 장기적으로 존속가능한가에 대해서는 많은 의문이 생길 수 밖에 없는 게임이다.




게임 이야기/게임 리뷰

 

 







일본 시장에서 휴대용 게임기, 그리고 그 휴대용 기기에 기반하고 있는 몬스터 헌터류의 '헌팅 액션' 장르는 독보적이다:몬스터 헌터 4는 3DS 기종 단독에 일본시장 한정으로만 400만장을 판매하였으며[각주:1], 소프트웨어가 하드에 영향을 미친다 라는 명제를 보여주는 강력한 소프트며,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즐기는 일본의 국민 게임으로 추앙받는 위치에 등극하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몬헌의 찬란한 성공 밑에는 무수히 많은 도전자들의 시체들이 있었다. 수많은 게임들이 몬헌의 아성에 도전했었고, 실패했었다. 물론 갓이터 같은 성공 케이스도 있었지만[각주:2] 많은 도전자들이 갓이터 정도의 성공을 거두지도 못한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는걸 감안한다면, 헌팅 액션 장르란 개발자들에 있어서 달콤한 독약과도 같은 지점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4명이서 협력하여 멀티를 하고, 파고드는 요소에, 압도적인 보스 몬스터와 자웅을 겨룬다는 매력적인 컨셉과 잘하면 몬헌과도 같은 성공을 거둘수 있다는 유혹 너머에는, 개성있는 디자인을 가진 보스를 '다수' 만들어내기 어렵다는 현실적인 문제[각주:3]와 가장 기초적인 지점에서 자신을 꾸준하게 확장했던 몬헌과 비교해서 어떻게 자신의 매력포인트를 설정할 것인가? 라는 차별화의 문제가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장르의 도전자들에게는 크게 두가지 선택지밖에 존재하지 않는것처럼 보인다:적당히 몬헌처럼 만들고 현실에 안주할 것인가, 아니면 몬헌 바깥으로 나아가서 험난한 광야를 해맬 것인가.

 

소울 새크리파이스는 당당하게 광야로 나아가는 모험을 한다. 소울 새크리파이스도 그런 헌팅액션 장르를 표방하지만[각주:4], 게임은 소모재인 공물과 극단적으로 짧은 게임 사이클, 그리고 그로테스크한 이미지에 기반해서 만들어내는 독특한 스토리라인까지. 소새크는 몬헌이라는 경계에 사로잡혀있으면 그저그만한 무언가가 될 것이라는 것을 잘 파악하고 있었으며, 확고한 철학 아래서[각주:5] 그 바깥으로 도약하려 했다. 하지만 도약은 소새크만의 아이덴티티를 만들어주었지만 동시에 추락을 수반했다:소새크의 공물 밸런스, 특히 원거리와 근거리 공물간의 벨런스 문제는 심각했으며, 초기에는 치명적인 게임 시스템상의 헛점이 발견되고[각주:6], 마물들의 개성은 고만고만했었다. 게임은 컨셉 자체는 훌륭했지만, 여기저기가 덜다듬어진듯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물론, 제작진들은 자신들의 문제가 뭔지 빠르게 파악하고 대처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나, 엄밀하게 이야기해서 처음 나온 소새크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실망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몬헌 바깥에서 몬헌 이외의 헌팅 액션의 가능성을 보여준 작품은 소새크가 처음이라고 할 수 있었다:소새크는 캡콤을 나온 이나후네의 신생 제작사가 하나의 가능성을 보여준 작품으로서, 물론 많은 결함을 갖고 있었지만 동시에 그자체로 즐길만한 지점도 있었다는 점에서 만족스럽진 않지만 인정할만한 '첫 걸음'으로 봐줄만 했었다.[각주:7]

 

그리고, 완전판인 델타가 나왔다. 완전판의 개념이란, 어찌보면 게임 자체가 갖고 있는 한계를 제작진 스스로가 인정하며 우리는 불완전한 물건을 팔았습니다, 하지만 그걸 보완해서 또 물건을 팔아먹겠습니다 라고 선언하는 뻔뻔함을 드러내는 지점으로 팬들에게 보일수도 있다. 팬들을 기만하는 게임으로서의 완전판인가, 아니면 기존의 단점들을 보완하고 팬들을 만족시키기 위한 완전판인가 의 문제는 전적으로 미묘한 뉘앙스의 문제이며 제작자들이 얼마나 그것을 깔끔하게 만들어내고 불만스러운 팬들을 만족시키느냐에 따라서 갈려지는 어려운 문제다. 그런 지점에서, 결론부터 말하자면, 소울 새크리파이스 델타는 모범적인 완전판이며 동시에 '이게 작년에 나왔다면 좋았을텐데'라는 아쉬움마저 만들어낸 게임이 되었다. 그리고 1년 동안 이정도까지 게임을 다듬어낸 제작사의 역량[각주:8]이라는 지점에서 앞으로 더 기대할만한 지점도 있다고 본다.

 

델타의 기본적인 컨셉-그러니까 게임이 내새우는 '뒤틀린 동화'라는 컨셉이 아닌-은 원작의 단점들을 보완하는 지점들에서 출발한다. 기존의 공물간의 밸런스의 조절, 공물간 조합 시스템의 추가 및 세력 시스템을 추가함으로서 게임 플래이 스타일을 분화시키고 다양한 게임 스타일을 인정하기, 엔드 컨탠츠의 추가와 마물 및 맵에 대한 조정을 가하는 등 원작 컨셉만 계승할 뿐 게임 자체를 거의 대부분을 뜯어고쳐버렸다. 하지만 이 과격한 변화는 유저들의 피드백에 기초하고 있다:게이머들은 원작때부터 원거리-근접의 밸런스 문제와 다양한 플래이 스타일[각주:9]의 인정의 요구, 다양한 마물의 추가 및 엔드 컨텐츠와 더 고난이도의 게임 플래이를 요구하여왔다. 실제로도, 제작사들은 작년동안 지속적으로 패치를 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하지만 델타가 놀라운 지점은, 그런 지점을 단 1년만에 후속작도 아닌 완전판으로 거의 대부분 완벽하게 고쳐내었다는 점이다.[각주:10]

 

델타의 게임 플래이에 있어서 가장 큰 변화점은 다양한 플래이스타일의 보장이다:몬헌의 장비와 유사한 개념으로서 소새크의 각인은 공물의 위력이나 방어력, 속성 방어 등의 수치를 조절하는데 쓰인다. 하지만, 방어 각인은 성 계열로, 공격 각인은 마 계열로, 이도 저도 아닌 각인은 균등 계열로 모두 몰아놓은 시스템 때문에[각주:11][각주:12], 커스터마이즈 자체가 제한적으로 작동하는 문제가 있었다. 또한, 공물의 수급에 있어서 '희생'은 공물을 수급하고 '구원'은 체력을 회복시키는 이분법적인 구조로 인해서 '육성'에 있어서 게이머는 많은 차질을 겪는다:필연적으로 '구원' 위주로 키우려하는 플래이어는 공물의 수급에 있어서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며, 리브롬의 눈물로 끊임없이 레벨을 낮추고 팔의 상태를 조절하려는 번거로운 작업을 해야했었다. 하지만 델타는, 희생-구원 이외에 운명 이라는 제 3의 선택지를 추가하고, 플레이어가 세력을 선택해서 자신이 키우고 싶은 케릭터 육성 방식에 따라서 희생-구원-운명의 효과가 달라지게 바꾸었다:가령, 희생이 주력인 아발론의 경우에는 희생으로 공물을 회복시키고 구원으로 체력을, 그리고 운명으로 이동속도 및 공격속도 버프를 받는다. 하지만 구원이 주력인 생츄어리의 경우, 구원으로 공물을 회복하고 희생으로 공격력 버프, 운명으로 이속 공속 버프를 받는 형태로 아발론이나 그림과 다른 형태를 보여준다.[각주:13]


그렇기에 육성은 전작에 비해서 더욱 수월해졌다. 게이머는 자신의 플래이 스타일과 목표에 따라서, 공물을 수급하고 체력을 회복하며 자유롭게 육성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각 진영별로 진영별 팔의 상태(균등, 성완, 마완)에 따른 공격 각인을 얻게 되었으며, 각 플래이스타일/진영별로 공격력은 어느정도 평준화되어 효율측면에서 서로 비슷한 수준에 도달했다. 거기에 게임은 전작의 원거리-근거리 공물들의 밸런스를 원거리 공물들을 약화시키는 대신, 마법 연계라는 기믹을 추가함으로써 조절한다. 전작에서는 한번에 하나의 마법, 하나의 공물만 발동할 수 있었다면, 델타에서는 두 개의 공물을 동시에 발동해서 그 효과를 강화시킬 수도 있다:예를 들어서 회피마법과 무기 마법을 동시에 발동하면, 회피와 함께 적을 공격하는 기술이 나간다. 이런식으로 델타는 다양한 마법의 연계를 통해서 기존에 버림받았었던 공물들을 재조명하고[각주:14], 특히 패턴을 피하기 어려웠고 자기 키보다 높은 저주부/흉주부를 노리기 어려웠던 근접공물들에게 다양한 대안들을 제공함으로서[각주:15] 게임은 다양한 플래이스타일을 인정하고 효율적인 플래이를 위한 공물 조합(주로 원거리)에서 벗어난다. 또한, 몇몇 조합의 경우에는 두 사람이서 함께 호흡을 맞출 수 있는 지점을 만들어내는 등[각주:16] 기존의 멀티플래이가 같이 싸운다 이상의 의미가 없었다면 델타에서는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을 주면서 다양한 방법으로 게임을 풀어나갈 수 있는 지점을 만들어낸다. 그렇기에 마법 연계는 전작에서의 공물 편중 현상을 줄이면서 멀티플래이를 해야하는 이유를 만들어냈다고 할 수 있다.


게임 플래이의 질적인 변화와 함께, 델타는 게임의 양적인 확장을 꾀한다:델타는 신규 공물의 대규모 추가와 함께, 기존의 무료 DLC로 풀었던 마물들과 신규 마물들을 게임에 집어넣었다. 물론 델타의 몬스터 디자인은 여전히 몬스터 헌터 시리즈의 디자인과 비교해 보았을 때 부족한 지점이 있다고 할 수 있으나, 신규마물의 추가와 흉폭화 개념의 추가, 위에서 이야기했던 다양한 마법 연계와 플래이스타일의 보장으로 이전과 다른 게임처럼 느껴진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추가 난이도를 추가함으로서, 마치 몬헌에서 G급 난이도의 추가와 함께 컨텐츠를 양적으로 늘리는 모습까지 보여준다. 또한 기존의 맵에서 지속적으로 이벤트가 발생하거나 변화가 일어나서 특정 속성의 공물이 강해진다던가, 마물이 벽을 부수고 나가는 등의 연출이 나오는 등 게임이 정적인 상태에 사로잡히지 않게끔 노력한다.


원작에서 제기되었던 엔드 컨텐츠의 문제를 델타는 백지페이지라는 컨탠츠 생성 기제와 심장각인이라는 노가다를 추가함으로서 해결하려 한다. 기존의 꾸미기용 액세서리가 상당히 제한적이었던 지점을 보완하기 위해서 게임은 다양한 복장을 상하의 조합 등을 통해서 게이머가 직접 꾸미게 할 수 있는 지점을 만들어내려 한다. 이런 다양한 액세서리와 복장을 얻기 위한 기제로서 백지 페이지는 기존의 요청록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조합의 퀘스트를 만들어내며, 액세서리를 모으기 위해서 백지페이지를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겹치지 않고 지루하지 않게 하려는 시도라고도 볼 수 있다. 또한 엔드컨탠츠로서, 케릭터를 대폭강화해주는 심장 각인의 경우, 만렙을 찍은 뒤에 다시 레벨을 초기화시키는 과정을 통해서 케릭터를 더 강하게 키울 수 있는 지점과 함께 케릭터 육성의 폭을 대폭 늘린다.[각주:17] 또한 델타는 추후 마물을 잡으면 또다른 마물이 나오는 앨리스의 미궁이라는 무료 DLC를 배포할 계획이라고 하며, 파고들기 및 게임이 끝난 뒤에도 지속적으로 게임을 붙잡을 수 있는 지점을 만들어내고자 많은 노력을 들이고 있다.[각주:18] 그리고 소셜 네트워크로 자신의 전적을 알릴 수 있거나, 서버에 들어가서 마물 토벌수를 기록하고 다른 세력의 유저들과 경쟁하는 등의 요소를 집어넣는 등 델타는 비타의 스마트폰적인 기능을 십분 활용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소울 새크리파이스 델타는 이상적인 형태의 완전판이라고 볼 수 있다:기존의 컨셉을 살리면서 문제점들은 대부분 해결한 작품으로서 보완한 완전판이란 개념에서 말이다. 물론, 기존의 원작이 갖고 있는 '근원적인 문제'들은 여전하다고 볼 수도 있다. 가령, 게임의 템포가 지나치게 빠른 점 등등에 있어서 게임이 극단적으로 빠르게 소모되는 지점 등에서 말이다. 하지만, 그런 지점은 단순하게 단점으로 지적하기에는 복잡미묘한 지점이다:휴대용 기기라는 특성을 고려하여 보았을 때, 소새크가 취하고 있는 게임 템포는 올바른 선택으로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일종의 선택과 집중, 그리고 포기이다:게임은 일사분란하게 자신이 취하고자 하는 것은 취하고, 버리고자 하는 것은 과감하게 버린다. 그런 과감성이 소새크를 만들었고, 소새크라는 물건을 제작자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다듬은 것이 델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소새크와 델타의 과감성은 어떤 지점에서는 '치명적'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그것은 게임 내적인 완성도의 문제가 아니다(이는 완성도라기 보다는 장점이자 단점, 매력포인트-구매의욕 감소포인트로 작용하는 지점이다):소새크와 델타는, 어떤 의미에서는 너무 과격하기에 게임에 진입할 수 있는 허들을 너무 높여버린 경향이 있다. 가장 큰 문제가 바로 소새크 특유의 성인취향의 암울한 그로테스크함이다. 게임은 파괴적이고 암울하며 꿈도 희망도 없는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서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를 게임 곳곳에 삽입한다. 마물의 디자인에서부터 이블데드의 인간 가죽으로 만든 네크로미콘을 연상케하는 리브롬의 이미지, 끝없이 마물을 제물로 삼아 강해지는 케릭터 등등에서 평범한 사람이라면 거부감을 느낄 지점이 너무나 많다. 물론, 이는 게임에 대한 개개인의 취향의 문제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이러한 과감성이 받아들여지고 존속되기에 헌팅 액션을 하는 대중의 폭은 너무나 좁다. 일본 시장 또는 좀더 넓게 잡으면 아시아권 시장에서도, 주된 콘솔도 아닌 2군이라 할 수 있는 휴대용 기기 시장에서만 헌팅 액션 장르는 잘 팔리기 때문이다. 몬스터 헌터 시리즈가 PSP라는 소니 휴대용 기기를 버리고 닌텐도 진영에 가세한 것도 이 때문이다:캡콤은 몬스터 헌터 게임의 세계화를 끝없이 노리고 있었다. Wii로 트라이를 내거나, 텀이 길기는 하지만 3DS로 몬헌 시리즈를 내며 북미시장을 노리는 것[각주:19]은 절대적으로 북미시장에선 PSP과 PS VITA가 약세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델타가 과연 이후에도 프랜차이즈를 존속시킬 수 있을것인가?


이런 지점에서 소새크의 미래는 부정적이다. 소새크와 델타는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서 자신의 길을 개척하는 길을 택했다. 하지만, 그 결과물이 이제 납득할만하며 즐길만한 수준의 델타에 도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즐기고 이해하는 집단의 수는 대단히 적기 때문에 이 프랜차이즈의 앞날은 풍전등화라고 할 수 있다. 심지어, 소새크의 해외 웹진의 반응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는데[각주:20], 과연 해외에서 델타가 발매된다한들 상황이 변화할까?


물론, 게임은 재밌다. 어떤 의미에서는, 휴대용 게임이라는 특성과 게임의 파고들기 요소 및 다양한 재미를 보장한다는 점이나 비타의 스마트폰적 성격을 잘 활용한다는 측면에서 델타는 비타의 '레퍼런스' 타이틀로서 전혀 손색이 없는 게임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헌팅 액션 장르로서, 갖고 있는 한계가 델타의 성공을 발목을 잡고 있다는 것이다. 몬스터 헌터로부터 벗어나서 몬스터 헌터가 아닌 자신만의 독창적인 게임 플래이와 세계를 만들어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즐기는 사람이 적은 점은 델타의 가장 안타까운 지점이자 저주받은 지점이라 평할 수 있을 것이다.









 

  1. 2013년 12월 기준, 출하량 400만장 돌파. [본문으로]
  2. 갓이터는 1편+버스트 한정으로 100만장을 달성하기도 하였다. [본문으로]
  3. 뒤집어서 본다면 몬헌의 매력은 다년간에 축적해온 몬스터 디자인의 실수와 성공에 기반하고 있다. 즉, 몬헌에게 있어서 역사는 단순한 역사 이상의 매력이자 후발주자들이 따라잡을 수 없는 강점이기도 한 것이다. [본문으로]
  4. 엄밀하게 헌팅 액션이라는 장르적 구분을 쓰는 것은 아니지만, 소새크의 게임 기본 구조는 몬헌의 구조(준비-사냥-보수 획득-다시 준비...)를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5. 특히 극단적인 게임 사이클, 몬헌보다 더 짧은 게임을 만들어내려 했다는 지점에서 소새크의 모험은 단순한 차별점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닌 과격한 형태의 모험이 되었다. [본문으로]
  6. 속성-추격의 강력함. [본문으로]
  7. 어떤 의미에서, 이런 실험작이 나오고 또 델타까지 나올수 있었던 것은 비타 독점 타이틀을 절실하게 필요로 했었던 소니의 전략적인 판단이 존재했기에 그런것이 아닐까 라고 생각해본다. [본문으로]
  8. 혹은 사람을 갈아넣었던가. 어쩌면 양쪽일수도 있고. [본문으로]
  9. 극희생, 극구제, 혹은 그 중도로서 균형잡힌 게임 플래이의 문제. [본문으로]
  10. 어떤 의미에서는, 이미 작년 소새크가 나오는 시점에서 델타를 낼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 아닐까? 이런 생각도 해본다. [본문으로]
  11. 구제-성, 희생-마. 균등은 둘의 비율이 1:1로 같은 케이스를 이야기한다. [본문으로]
  12. 기본적인 효과는 있지만, 추가효과를 보기 위해서는 게이머는 팔의 상태를 일정 수준에 맞춰야한다. [본문으로]
  13. 생츄어리의 경우에는 구원 레벨이 높기에 체력 회복량이 늘어난 상태이기에 따로 회복 메카니즘을 추가하지 않은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우월한 방어력 때문에 회복공물 하나만 섞어주면 잘 안죽는 것이 생츄어리 계열 마법사들이다. [본문으로]
  14. 옷감 류의 깔아두기 마법같은. [본문으로]
  15. 지중 이동+근접 공물=어퍼컷, 융기 마법 등등. [본문으로]
  16. 가령 강완 마법+변신 돌진 마법 같은. [본문으로]
  17. 심장각인은 총 10번까지 업그레이드가 가능하며, 각인은 마법 카테고리 별로 거의 대부분 있기 때문에 이걸 100% 모은다는 것은 엄청난 노동이라고 볼 수 있다. [본문으로]
  18. 이런 지점에서는 몬스터 헌터 4의 길드 퀘스트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정해져 있는 퀘스트가 아닌,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퀘스트. [본문으로]
  19. 한글화부터 시작해서 츠지모토 료조가 한국까지 와서 특별 닌텐도 다이렉트에 출연하거나 퀘스트 업데이트가 빠릿빠릿하게 진행되는 것은 한국시장이 캡콤에게 있어 일종의 '테스트배드' 역활을 한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코어 유저를 잡기 위한 닌텐도 코리아의 요구와 해외에서도 몬스터 헌터가 먹히기 위해서는 어떤 전략이 필요한가를 검증하길 원하는 캡콤이 이전부터 몬스터 헌터 시리즈에 지속적으로 노출되어왔었고 팬층도 많다고 판단되는 한국에서 직접적으로 몬스터 헌터 프랜차이즈의 가능성을 테스트하는 것이다. [본문으로]
  20. 여기에는 소니 플랫폼의 약세도 한몫했지만, 현지화의 문제도 큰 영향을 미쳤다:대부분 웹진의 소새크 리뷰에는 게임 성우가 끔찍하다고 써놓았다. 사실, 소새크 이야기에 있어서 리브롬 성우의 중요성은 게임 서사 전개와 맞먹을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하다. 그런데 그런 지점에서 미숙한 성우 연기를 보여주었다는 점은 현지화에 있어서 소니가 대단히 소홀했다는 점을 받아들일수도 있는 것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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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이야기





(트위치 포켓몬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은 http://rigvedawiki.net/r1/wiki.php/Twitch%20Plays%20Pok%C3%A9mon 를 참조해주시라)


게임은 이제 문화가 되어가고 있다. 그것은 더이상 그것을 플래이하기 위한 상품으로서 소비되는 존재가 아닌 상품을 뛰어넘어서 서로가 공유할 수 있고, 함께할 수 있는 존재로서의 문화의 속성을 게임은 지니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과거에 있어서도 게이머들 사이의 공유 양식인 문화는 존재하였다. 하지만, 게임의 경험을 공유하고 같이 향유하는 형태로서의 게임 문화는 게임이라는 매체의 첨단성(가장 기술적인 지점에서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측면에서)으로 인해서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실험적인’ 지점들을 내포하고 있으며, 기술과 매체가 빠르게 발달하면 거기에 발맞춰서 게임과 그 주변을 포함하는 문화권역 역시 빠르게 변화하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소셜 네트워킹과 공유의 문화양식이 등장한 이래로, 플래이스테이션 4 같이 ‘Share’라는 버튼을 직접적으로 도입하여 공유하는 것을 하나의 ‘양식화’시켰다. 물론, 다른 문화들 역시 기술의 변화에 따라 함께 변화하기도 하나, 게임과 같이 ‘기술에 가장 밀접한 영향을 받는’ 매체일수록 기술의 변화에 대한 민감도는 타매체에 비교하면 더 극심할 것이라 볼 수 있다. 트위치 포켓몬스터의 경우, 그러한 실험적인 지점이 가장 극대화된 지점이라 할 수 있다.


게임 방송을 보는 사람들이 채팅으로 명령어를 내린다. 그러면 그 채팅 명령어에 따라서 케릭터가 움직인다. 아주 단순한 개념이며 살짝 특이한 개념의 게임방송이지만, 이것이 수천명, 수만명 단위에서 명령어가 입력된다는 점에서 트위치 포켓몬은 기존의 게임방송과는 달라지게 된다. 과연 트위치 포켓몬은, 플래이되는, 또는 하는 것일까? 하지만, 트위치 포켓몬은 하는 것도 아니며 보는 것도 아닌 기묘한 언저리에 놓여있다. 기존의 방송이라는 개념이 스크린이라는 막을 통해서 시청자와 방송자 사이의 시공간적 분절이라는 한계가 있었다면, 트위치 포켓몬은 그러한 한계를 뛰어넘어서 시청자가 방송에 끝없이 개입하고 있으며 그 개입이 수천, 수만명의 단위로 이루어지고 있기에 단순한 게임 방송을 넘어서 하나의 흥미로운 ‘사회적 실험’으로 변하게 된다. 재밌는 점은 이미 플4의 트위치 방송 기능에 있어서 시청자가 방송에 참여하는 기능들을 시험적으로 끌어들이고 있다는 점이다:예를 들어 진삼국무쌍의 경우, 시청자가 특정 단어를 입력하면 방송자의 방송에 일정한 ‘이벤트’가 발생한다. 이미 채팅이라는 기능을 통해서 ‘상호작용함’은 게임 방송 또는 인터넷 방송에 있어서 주요한 성질이 되었지만, 그것이 스크린 안의 세계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여지껏 매체가 경험하지 못했던 참여라는 새로운 지점이며 트위치 포켓몬스터는 그런 지점이 극대화되며 동시에 대규모로 일어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만한 지점이 많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과거의 TV 프로그램에 있어서도 ARS로 참여할 수 있다던가 등의 ‘참여’의 개념은 존재해왔었다:하지만 그것이 갖는 한계도 분명했다. 방송이란 기본적으로 ‘녹화’되어 방송되는 형태가 기본이다. 생방송이란 방송 기술이나 대본에 있어서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으며, 동시에 ARS로 참여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반영되기 까지는 시공간적인 거리감이 상당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트위치 포켓몬 같이, 물론 그것이 몇초간의 딜레이가 있어서 게임에 심각한 지장이 있다고는 하지만, 즉각적이며 대규모의 참여가 일어나며 동시에 그 참여로 인해서 생기는 다양한 상황들이 발생한 케이스는 지극히 드물거나 혹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단정지어도 무난하지 않나 생각해본다)


게임이 하나의 목적(클리어, 엔딩 등등)을 향해서 나아가는 움직임이라고 본다면, 트위치 포켓몬의 움직임이란 일정한 방향성을 얻지 못하고 정신병자처럼 발광하는 무언가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혹자는 무한 원숭이 정리를 비꼬아서. ‘무한한 시간을 주고 하나의 게임을 플래이시키는데 반 정도는 게임을 정상적으로 플래이하려고 애쓰고 반 정도는 게임을 망치려고 애쓰는 것과 같다’라고 촌평하기도 했으며, 이는 대단히 정확한 평가이다. 게임에는 정상적으로 시간을 움직이려는 사람들과 게임을 망치려는 사람들 반으로 나뉘어져있다.


(무한 원숭이 정리: http://ko.wikipedia.org/wiki/%EB%AC%B4%ED%95%9C_%EC%9B%90%EC%88%AD%EC%9D%B4_%EC%A0%95%EB%A6%AC)


한병철의 시간의 향기에 따르면, 근대적인 역사적 시공간에는 하나의 방향을 위해서 나아가는 시공간의 상정이자 그 지점으로 빨리나아가기 위한 ‘가속화’의 지점이 있었으며, 현대에서는 시간에 있어서 시공간을 구성하는 ‘중력’이 존재하지 않기에 가속하든 감속하든 어떤 방향성 없이 나아간다고 보았다. 또한, 그러한 방향성 없는 시공간이란 인터넷의 하이퍼링크처럼, 자극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다음 자극으로 뛰어넘는(하이퍼링크) 끝없는 자극의 공간, 머무름이 존재하지 않는 무중력의 공간의 형태로 드러난다고 주장하였다. 한병철의 견해에 따르면, 트위치 포켓몬 역시 그러한 무중력의 광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무언가이다. 무의미하게 시간을 낭비하면서 메뉴를 열었다가 닫았다가 벽에 부딪혔다가 나갔다를 반복하는 방향성 없는 광기의 산물, 그것이 바로 트위치 포켓몬의 ‘대부분의 시간’동안 발생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분석은 간과하고 있는 지점이 있다:실제로, 트위치 포켓몬스터는 ‘클리어’되었다. 트위치 포켓몬은 첫번째 관장인 웅을 9시간 12분 만에 격파하였으며, 라이벌 그린을 16일 7시간 45분만에 격파하여 클리어 했다(물론 일=24시간이다) 어떤 무작위의 광기, 어디에도 도달할 수 없는 무중력의 공간에서 어떻게 이들이 엔딩이라는 결과에 도착하였는가? 유념해야하는 점은 트위치 포켓몬의 시공간은, 분명하게도 ‘방향성이 존재하는 힘’에 의해서 지배되었다:한쪽은 정답을 향해서 나아가며, 다른 한쪽은 정답으로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이 팽팽한 두 힘의 충돌과 긴장관계는,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광기에 가득찬 발광의 형태로 채워넣는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런 두 힘의 팽팽한 대립속에서도 트위치 포켓몬의 시공간은 하나의 방향으로 발광하듯이, 하지만 꾸준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그 움직임이란, 그 과정을 보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불가능’에 가까운 하나의 기적으로 보였으며, 트위치 포켓몬스터와 관련된 밈들이 ‘신화’의 형태로서 드러나는 점은 이를 명확하게 지적한다:즉, 트위치 포켓몬은 인터넷 시대에 있어서 신화가 성립하는 과정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지점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과정에서 아나키즘-민주주의 시스템의 기여도 상당하였다(자세한 내용은 맨위의 링크를 참조하시라) 그리고 이러한 아나키즘과 민주주의 시스템의 대립은, 민주주의에 대한 기묘한 메타포로서 작용하게 되었다:다양한 견해의 대립과 어디에도 도달하는 것처럼 보이지 못하는 발작적인 움직임들, 그리고 그들을 방해하려는 세력들 등등.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자들은 꾸준하게 목표를 향해서 움직였다. 하지만 만약 아나키스트들, 반대자들이나 방해자들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그들의 움직임을, 과대 포장해서 보자면, 비효율적이지 않은가? 재밌는 점은 포켓몬스터 레드 클리어에 있어서 최단 루트로 클리어하는 영상은 예전부터 존재하였으며, 그것은 대략 한시간 이내로 걸렸다:그렇기에 민주주의는 목적을 향해 나아가기에는 너무나도 비효율적이다. 어찌보면 이러한 스피드런이야말로 테크노크라시의 정점이 아닐까? 아나키스트들은 어떠한가? 아나키스트들은 민주주의의 흐름을 초치는데 있어서 그들의 재미를 충족한다. 하지만, 민주주의자들의 존재가 없었다면 그들의 재미와 존재가 존재할 수 있었겠는가? 역설적이게도 민주주의자와 아나키스트 시스템은 서로가 서로를 보완하며, 서로가 서로를 규정한다. 그렇기에 이들의 공생은 기묘하다.


시즌 2의 경우에는 전설적인 동시접속자수를 자랑했던 시즌 1에 비해서는 다소 주춤해진 경향이 있다:전 시즌에 비해서 동접자 수가 줄어든 점은, 1시간 단위로 민주주의 시스템으로 이행하는 방송 시스템의 변화로 인해 더욱 부드러워진 진행을 보여주는 시즌 2가 시즌 1의 재미보다 떨어졌다고 보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즉, 트위치 포켓몬스터의 재미란, 그런 서로 극단적인 두 힘의 팽팽한 긴장관계에서 일어나는 기적적인 상황의 연출에 기반하고 있기에 그러한 긴장관계가 다소 완화된 지점에서는 결국은 아쉬운 지점이 될 수 밖에 없는게 아닐까?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https://medium.com/p/c277ee49fa33 를 블로그에 맞게 편집한 글입니다.



고스트 앤 다크니스(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7746) 라는 영화를 아는가? 여기서 발 킬머는 마이클 더글라스와 함께 아프리카 오지의 낯선땅에서 철도 공사를 방해하는 차보의 전설적인 식인 사자 ‘고스트’와 ‘다크니스’를 사냥해서 제거하려고 한다. 발 킬머는 고스트를 사냥하는데 성공하지만(다크니스가 먼저 사냥당했을 수도 있다, 본인으로서도 기억이 가물가물한지라) 남은 사자가 마이클 더글라스를 물어죽여버리고, 발 킬머는 여기로 오고 있는 아내와 아이가 남은 사자에게 물려 죽는 악몽을 꾼다. 결국 두려움과 마주한 발 킬머는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남은 사자를 사냥하는데 성공하고, 자신의 아내와 아이를 어떠한 위협없이 아프리카 땅에서 맞이한다. 


사실, 영화 자체의 재미는 그냥저냥이었던 고스트 앤 다크니스에 대해서 엉뚱한 질문을 던지고자 한다:과연 식인 사자 고스트와 다크니스는 동물이었을까, 아니면 괴물이었을까? 상당히 기묘한 질문이다. 고스트와 다크니스는, 명백하게도, 사자들이다. 그들은 현대적인 영화에서 등장하는 특수효과로 만들어진 상상의 동물이나 B급 호러 영화의 하위장르로서의 크리처물들에 나오는 괴물들과는 명백하게 다르며, 실화에 기초하고 있다. 하지만 극중에서 수백명을 물어죽이고, 자신의 배우자를 죽였기에 나도 네녀석의 동료와 배우자를 물어죽이고 복수하겠다 라는 공포로 당당하게 도발하고 선언하는 이 사자들을 ‘동물’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 부분은 상당히 미묘하다. 그것을 뚜렷하게 구분하기 위해서는 먼저 동물과 괴물의 차이를 분명하게 나누어야 할 것이다.


…제물은 동물이라는 이유 때문에 벌써 신성했다. 신성이란 폭력과 관련된 저주를 거침없이 표현하는 것을 말하는데, 동물은 저주를 주저없이 선동하며 폭력을 포기하지 않으니 신성한 존재였다. 원시인들은 동물도 기본적 규칙을 모를 리 없다고 생각했으며, 폭력과 충동 자체가 이미 규칙의 위반임을 모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잘 알면서도 동물은 근본적으로 규칙을 위반하는, 다시 말해 의식적이고도 절대적으로 그것을 위반하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바타이유, 에로티즘.


바타이유는 인간이 ‘노동’이라는 조직화 방식으로서 삶을 살아가기로 선택한 그 시점에서부터, 인간은 비생산적인 성에 대한 충동이나 파괴적인 폭력을 금기로서 금지하게 되었다고 보았다. 하지만 성에 대한 금기와 폭력에 대한 금기로 금지되었어도, 인간의 어둡고 은밀한 욕망은 여전히 존재할 수 밖에 없으며 그것은 특별한 상황에서의 ‘금기의 위반’을 통해서 분출된다고 보았다:살해에 대한 금기는 전세계 공통이지만, 그것이 전쟁 등에서 살해를 인정하는 지점, 즉 전쟁에서의 살해를 속죄하는 과정을 통해서 금기의 위반을 인정하는 지점에서 말이다.(바타이유는 금기는 ‘위반되기 위해’ 존재한다고 말하기 까지 하였다) 하지만 동물은 다르다:동물은 그러한 금기가 존재하지 않으며, 폭력(물리적/물질적의미의 폭력이 아닌 무질서한, 질서를 파괴하는 의미에서의 폭력)이란 그들의 삶의 방법론 그 자체였다. 그들은 아무렇게나 먹이를 사냥하고 죽이고 먹고 교미를 한다. 인간이 그런 행위들을 했을 경우, 금기를 위반했다는 원죄의식에 시달릴 수 밖에 없는 지점에서 동물들은 어떠한 거리낌도 없이 자유로운 것이다. 그렇기에 인간은 금기를 자유롭게 위반하는 그들을 신성시 하지만, 그들을 두려워할 수 밖에 없다:인간은 노동을 통해서 질서를 세웠고, 그것을 통해서 살아간다. 질서를 파괴하는 것은 인간 내부에 내재된 폭력성(섹스를 향한 파괴적 충동과 타자를 죽이려는 살해충동)이며, 인간은 동물과도 같이 살 수 없다는 지점에 동물의 폭력은 경외의 대상인 동시에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괴물은 거기서 탄생한다:그것은 인간 내부의 폭력성을 동물의 형태, 폭력을 행사하는데 있어서 거리낌이 없는 형태로 결합된 것이다. 즉 괴물이란 동물과 인간의 기묘한 형태의 결합인 것이다. 스핑크스를 예로 들어보자:머리는 사람이며, 사자의 몸통, 조류의 날개를 단 이 기묘한 괴물은 문을 지키며 여행자에게 수수깨끼를 던진다. 그리고 답을 맞추지 못한 자를 잡아먹는다. 만약 동물이었다면, 그들이 이런 양식화된 행위(수수깨끼를 던지고, 틀리는 자만을 잡아먹는다)를 했을까? 이 괴물은 동물이라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양식화 되어있으며 스핑크스가 행하는 폭력은 영웅(오이디푸스)이 넘어서야하는 통과의례이자 금기를 위반하는 존재(사람을 잡아먹는)이며 동시에 살해-식인의 폭력에 대한 공포를 드러내는 존재이다. 물론, 다양한 동물들의 결합의 결과물들로서의 괴물도 존재하며, 이들이 드러내는 폭력과 공포는 좀더 직관적이다:미궁 속에 사는 반인반우 미노타우로스, 수십개의 머리를 가진 히드라, 머리 셋 달린 마견 케르베로스 등등. 



그로테스크한 것은 감각적으로 표상할 수 있는 것을 최고도로 고양시킨 것이다…이러한 의미에서 그로테스크한 형상물들은 동시에 한 시대의 넘쳐흐르는 기운의 표현이다….물론 그로테스크한 것의 원동력을 두고 보면 이와는 극단적으로 대립되는 점이 있다는 사실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퇴폐적인 시대나 병적인 두뇌를 가진 자들도 그로테스크한 형상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이 경우 그로테스크한 것은 퇴폐적 시대와 병적 개인들에게는 세계와 삶의 문제들이 해결될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는 사실에 대한 충격적인 반작용의 표현이다…이 두경향 가운데 어느 경향이 창조적 추진력으로서의 그로테스크한 판타지의 배후에 있는가 하는 것은 금방 알아볼 수 있다.

-에두아르트 푹스, 당조의 조형예술;발터 벤야민, 수집가이자 역사가 에두아르트 푹스에서 재인용.


하지만 과거의 신화시대의 괴물들과 현대의 괴물들은 다른 형식으로 만들어진다. 과거의 괴물들이 동물과 인간의 결합을 통해서 인간이 갖고 있는 동물성을 이미지화 시키는데 주력했다면 현대의 괴물들은 산업화된 대중문화인 영화와 특수효과, 분장이 일반화된 세계에서 그로테스크함을 드러내기 위해 만들어졌다. 괴물들은 이제 단순한 인간과 동물의 결합을 뛰어넘어서, 기능적으로 '폭력'을 행사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다. 더이상, 괴물은 동물의 형태에 얽메일 필요가 없어졌다.새로운 특수효과 기술의 등장은 그들의 모티브이자 원형인 동물로부터 괴물을 해방시키면서도 동시에 '사실적'인 괴물을 만들어낸 것이다. 괴물은, 점점 더 순수한 '폭력'의 형태에 가까워졌다:에두아르트 푹스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꿈틀거리는 시대의 에너지가 극단화된 괴물인 것이다. 그리고 괴물의 미학에는, 인간이 느끼는 폭력에 대한 공포가 폭력이라는 에너지가 꿈틀거리는 그로테스크의 형태로 구체화되며, 그것은 괴물들의 신체나 특징적인 '기능적 기믹'의 형태로 자신의 특징을 명백하게 드러낸다.


다시 고스트 앤 다크니스로 돌아와보자:이 점에서 명백히도, 고스트와 다크니스는 괴물이라고 볼 수 있다. 철길이라는 서구의 문명이 아프리카라는 미개한 검은대륙을 계몽시키고자 할 때, 최초이자 최후의 장애물로서 유령Ghost과 어둠Darkness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들은 서구문명의 마지막 저항세력으로서, 이성과 대영제국의 최전선에서 부딪히게 되며, 발킬머가 사냥한 것은 대화나 타협이나 계몽의 대상이 아닌 이성 너머에 존재하는 미개한 야만의 신화이자 폭력을 행사하는 최후의 괴물인 것이다. 물론 그들은 현대 영화나 특수효과적인 의미에서 괴물은 아니다: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현대와 근대, 혹은 그 너머의 고대적인 의미에서의 괴물이 서로 맞닿아 있는 무언가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에일리언.=>기능적인 아름다움과 그로테스크함. 성기의 은유. 좀더 살펴보자면 대단히 모순적인 괴물-비정상적인 호전성, 이해불가능한 생식 방식, 기묘한 형태의 공격방식과 자기 모순(산성 피)//하지만 아름답다, 왜? 디자인이 잘되었다 등등. 괴물의 미학이란, 인간을 기능적으로 괴롭히기 위한 그로테스크 성에서 시작된다->그것은 인간의 폭력성을 드러내기 위한 것. 그것들 모두 인간의 ‘은유’으로부터 출발하였다/동시에 그 존재가 영화내 서사에서 기능하는 것도 하나의 인간을 드러내는 지표이다:에일리언 2, 나쁜 엄마 대 착한 엄마의 구도. 썅년과 자식을 지키지 못한 어머니의 사투. 여성성의 이중성? 인간과 폭력 그 자체의 대결.


"그것은 완벽한 생명체다. 전혀 도덕적 거리낌없이 순수한 살육을 할 수 있으며, 신체적으로도 완벽히 전투형인 생명체이다. 인간이 그 생명체와 정면으로 맞서서 승리할 가능성은 제로다. 그리고 나는 그 순수한 잔인성을 존경한다."

- 에일리언 


괴물에 대한 두가지 예시를 들어보겠다. 현대적 괴물의 직관적이고 유명한 사례는 에일리언의 제노모프가 있다. HR 기거가 디자인 초안을 맡은 제노모프의 모습은 남성의 성기 형태를 연상케하는 머리를 한 끈적거리는 모습을 한 불쾌한 모양새다. 그리고 이 불쾌한 괴물이 나오는 에일리언은 SF 영화와 괴물영화의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악명높은 디자인들(이중턱, 뼈가 겉으로 튀어나온 듯한 외골격 스러운 몸매들, 강산성 피 등등)과 별개로 에일리언에서 이 제노모프라는 괴물이 갖는 독특한 지점은 바로 독특한 생식 방식과 이해불가능할 정도의 호전성이다:숙주의 몸에 들어가서 숙주의 DNA를 바탕으로 새로운 특성과 형태를 가진 괴물이 되는 번거로운 지점이나(물론, 설정의 사실성에 테클을 거는 것이 아니다;하지만 우리가 제노모프의 번식에 대한 첫인상이란, 도대체 저런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하는 이유가 뭘까? 이다), 제노모프의 호전성이란 어떻게 소통조차 되지 않은 사악하고 지능적인 존재로서의 제노모프를 상정하고 있는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제노모프의 번식 행위는, 어떤 '필터링'의 과정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즉, 제노모프의 번식 행위란 숙주가 되는 대상 생명체로부터 폭력만을 걸러내기 위해서 숙주에게로 잠입한 뒤에(페이스 허거) 그 숙주의 폭력을 응축하여 밖으로 튀어나온다(체스트 버스터) 제노모프의 그로테스크함은, 그런 생식과정을 통해서 폭력을 응축해서 배출한다는데 있으며, 그렇기에 제노모프는 각각의 숙주의 모습에 근거하고 있지만 숙주와는 동떨어져있는, 꿈틀거리는 폭력의 모습으로서 그로테스크함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지점에서 제노모프의 미학은 기묘한 지점을 만들어낸다:2편을 예로 들어보자.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자식을 잃은 어머니 리플리는 어머니를 잃은 소녀를 구하기 위해서 퀸 에일리언과 파워로더를 타고 사투를 벌인다. 이 과정에서 리플리는 퀸 에일리언을 썅년Bitch이라 부른다:물론 리플리의 욕설이 문자 의미 그대로 퀸 에일리언이 여성이기 때문에 어울리는 욕설이기도 하나, 여기서는 고아인 뉴트를 지키고 자신의 자식을 지키지 못했던 어머니 리플리와 제노모프의 어머니로서 자신의 자식들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동시에 자신의 자식들의 복수를 위해서 싸우는 퀸 에일리언의 모습이 '여성성'이라는 공통분모 아래서 서로 빛과 어둠과 같이 극명하게 분리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제노모프의 생식과정이 대상의 폭력성을 응축시켜서 배출시킨다고 본다면, 퀸 에일리언이야말로 리플리의 분신같은 존재이자, 모성이 갖고 있는 폭력성과 어둠을 응축시켜놓은 존재라고 볼 수 있다(모성은 항상 아름다운 무언가가 아니다:봉준호 감독의 마더는 그런 지점에서 대단히 날카로운 지점을 만들어낸다)


더 씽의 경우는 조금 독특하다:더 씽의 문제삼고 있는 것은 '폭력의 전염'의 문제이다. 물론 제노모프 역시 그런 폭력의 전염을 시공간적으로 형상화시킨다. 그들은 어떻게 만들었는지조차 이해할 수 없는 형태로 공간을 자신의 형태로 '전염'시키고는, 그 자리가 우리의 영토이다 라고 선언한다. 그리고 에일리언 2에서처럼, 그 공간에서 제노모프들은 일방적으로 해병대를 학살하면서 그 폭력이 단순히 상징적인 공간이 아님을 드러낸다. 하지만 더 씽에서의 폭력의 전염은 신체강탈자의 문법을 변용하면서 출발한다:우리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우리가 아닌, 원래의 존재들을 감금하고는 원래의 존재들인척 하면서 음모를 주도하는 신체강탈자들의 클리셰는 1960년대 '우리 주변에 숨어있는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공포'를 드러내는데 초점을 맞춘다. 하지만 더 씽은 신체강탈자의 클리셰나 모호하고 도회적인(타인에 대한) 공포에 초점을 맞추는게 아니다:더 씽이 드러내는 폭력에 대한 공포는 원초적이다. 더 씽의 신체강탈자들은 전혀 신사적이지 않다. 그들의 개종방식은 그 자체로 폭력이며, 기괴한 형태로의 신체의 융합과 뒤틀림을 유발하며 그 자체가 유쾌하지도 않을 뿐더러 고통스럽게 묘사함으로서 그로테스크한 생명력을 발산한다:주인공인 맥크레디는 괴물의 세포 하나 하나가 모두 하나의 생명체로서 살아있다는 가설을 세우고는 혈액 검사법(피를 뽑아서 불을 붙여보는 것)을 통해서 괴물을 가려낼 수 있다고 보는 지점에서 그들은 세포 하나 하나가 살아있는 '폭력'의 화신 그 자체인 것이다.


하지만 더 씽의 폭력이 더 무서운 것은, 기저에 숨겨진 기묘한 신체의 변형과 파괴의 표면은 지극히 평범한 인간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더 씽에서 괴물이 인간의 모습을 할 수 있으며 심지어 개종자조차도 자신이 개종되었을 사실을 모를 수도 있다는 사실이 발견되는 시점은 이미 '늦은' 상태다:그들에게는 개종자들을 찾아낼 방법도, 전염을 격리시켜서 확산을 방지할 수 있는 방법조차도 남아있지 않다. 그들에게 있어 남은 것이란 오로지 모두가 멸망할 것이라는 숙명적인 종말 뿐이며, 이 끔찍한 종말과 폭력의 변주곡에서 심지어 주인공인 멕크레디마저도 의심의 대상이 된다(그는 추락한 헬기에서 겨우 살아남았다:과연 그는 살아남는데 성공한 것일까, 아니면 그들중 하나일까?) 인간 내부의 꿈틀거리는 폭력의 그로테스크함과 서로를 불신하며 파멸을 향해서 착실히 나아가는 형태의 종말을 다루었다는 점에서 더 씽은 괴물이라는 존재의 폭력성과 인간의 근원적인 공포(인간 내면에 숨어있는 폭력)를 다룬 걸작이라 칭송할 수 있을 것이다.


(더 씽 리메이크-프리퀼 작품의 경우에는 대부분 더 씽 원판을 따르지만, 세밀하지만 아주 중요한 지점에서 차이가 난다:더 씽의 원판의 경우, 주인공인 멕크레디 조차도 믿을 수 없는 인물로 설정함으로서 인간 불신을 향한 파국은 더욱 깊어진다. 그러나 리메이크-프리퀼 작의 경우에는 믿을 수 있는 구심점적인 인물을 설정하고, 동시에 우리가 그녀의 동선을 모두 파악할 수 있었고, 그녀가 감염으로부터 안전하다는 사실을 확답받는 인물이라는 지점을 관객들에게 확보해주면서 안전장치를 만든다. 또한 원판이 세포 하나 하나가 폭력에 가득찬 존재를 가려내는데 원시적인 폭력, 불이라는 기제를 사용하여 그것을 가려내고자 한데 반해, 리메이크-프리퀼은 치아의 충전물, 즉 인공적인 요소가 존재하는가의 유무로 괴물과 인간을 분리하려고 한다. 많은 지점에서 리메이크는 원판의 밑도 끝도 없는 공포들을 뒤집어서 안전한 지점으로 만들면서, 영화를 원판에 비해서 안전한 공포영화가 되었지만 그 자신을 한발 물러나는 지점을 통해서 원판에 대한 존경과 함께 교활하게 자신의 몸을 움츠리고 사리는 기묘한 영화가 되었다) 


오늘날 동물들의 괴물성을 만든 것은 그들에 대한 모든 폭력을 흡수함으로서이다. ‘내밀성’(바타이유에게서)의 폭력인 제물로서의 폭력에, 떨어진 거리의 폭력인 감상주의적인 폭력이 뒤를 잇는다.


괴물성이란 그 의미를 바꾸었다. 원래는 공포와 미혹의 대상인 짐승들의 괴물성이란 결코 부정적 의미가 아니라 항상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으며, 제물과 신화, 맹수와 격투하는 투사, 그리고 우리의 꿈과 환상 속에서 교환과 은유의 대상인 짐승들의 괴물성이었다. 이러한 괴물성은 모든 위협과 변형에 있어서 풍부하고, 인간들의 살아있는 문화속으로 내밀히 녹아들어갔으며 그래서 인간과 동물들 사이의 결연의 한 형태인 이 괴물성을 우리는 공연장의 괴물성과 교환해버렸다…(중략)


옛날에는 영웅이 짐승, 용, 괴물을 죽였다. 그러면 그 흘러퍼진 피로부터 식물들이, 인간들이 문명이 탄생하였다. 오늘날은 짐승인 킹콩이 산업적인 대도시들을 박살내러 오고, 실제적인 모든 괴물성이 축출되어버리고 괴물성과의 계약을 파기하였기에(이 계약이 킹콩 영화에서는 여자의 원시적 증여로 표현되었다) 죽어버린 우리의 문명으로부터 우리를 해방하기 위하여 온다. 


-보들리야르, 시뮬라시옹.


하지만 이런 괴물 영화의 조류에 있어서 새로운 흐름이 등장하기 시작한다:피터 잭슨의 킹콩 리메이크 버전의 마지막 장면을 보자. 괴물인 킹콩은 자신이 사랑한 연인 앞에서 비행기의 기총사격을 맞고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서 떨어져 죽는다. 그렇게 죽은 괴물을 보고 인물은 이렇게 평한다:비행기가 죽인게 아니에요, 미녀가 야수를 죽인거죠. 이 영화에 있어서 거대 유인원 킹콩은 원시의 자연이 존재하는 밀림에서 거주하다가, 미녀를 따라서 문명의 한복판으로 온 뒤 조롱감이 되고 놀림감이 되다가(묶여서 전시되는) 문명의 폭력 앞에서 사라진다. 킹콩 역시, 폭력의 상징이자 폭력의 발현으로서 괴물이다(그가 티렉스의 턱뼈를 쑤셔넣어 죽이는 지점을 보라. 폭력과 에너지의 과잉으로서의 괴물, 킹콩) 하지만, 그는 제거되거나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가 아니다:오히려 그는 진정한 사랑의 이해자이며,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 세상을 향해 싸우는 로멘티스트다. 오히려, 미녀(여주인공)가 배우라는 지점을 통해서 쇼비지니스와 영화라는 기만과 거짓과 대비되는 원시이자 우리가 잃어버린 태초적 사랑을 향한 그리움이 킹콩을 통해서 형상화된다고도 볼 수 있으며, 원시와 우리가 잃어버린 것을 파괴하는 것은 문명 그 자체임을 암시하는 상징으로서도 작용한다.


그렇기에 이러한 괴물은, 기묘한 지점을 만들어낸다:그들은 폭력이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잃어버렸기에' 그리워하는 폭력 또는 폭력과 인간의 질서 사이의 조화로웠었던 가상의 과거를 향한 향수를 드러내는 지점이다. 현대적인 물질 문명과 기계문명에 의해서 거세당하고 삭제되었던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폭력, 그것을 향한 그리움이 괴물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들은 고귀하며, 바타이유가 이야기한 고귀한 존재로서의 동물과는 또다른 지점에서 고귀하다:금기를 자유롭게 어기는 자유로운 존재이자 금기의 위반자이자 표지로서의 괴물과 동물이 아닌,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을 갖고 있는 존재로서의 동물이자 괴물이다. 이 둘 사이에는 '미묘한' 차이점이 존재한다. 경외로서의 괴물의 폭력에 대해서 우리는 거기에 매료되지만, 인간은 그 지점에 맞닿을 수 없다. 인간은 폭력에 대한 금기를 위반할 수 있지만, 그것에 대한 원죄의식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인간은 자유롭게 폭력을 행사하고 그것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동물 또는 괴물과 동일한 존재가 될 수 없다. 하지만 향수로서의 괴물은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서 느끼는 아련한 추억이자 환지통Phantom Pain으로서, 심지어 극단적인 경우에는 문명을 박살내고 우리가 잃어버렸던 과거를 다시 살려야한다는 미학으로도 귀결되기도 한다. 그것은 질서를 파괴하는 폭력과 질서 사이의 조화로운 상태를 상정하고 있으며, 폭력 역시 삶의 일부이지만 삶 그 자체는 아닌 무언가로서 표지되기 때문이다. 즉, 이런 괴물들은 앞서 다루었던것과는 다른 독특한 형태로 인간과 동물이 결합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고대의 인간, 폭력과 질서과 조화를 이루었다고 생각하는 가상의(그것이 과연 존재할까? 아니 존재했었던 적이 있었을까?) 존재로서 동물과 인간의 결합인 괴물인 것이다.(쉬운 예로 고귀한 드래곤 같은 기믹을 생각하시면 편하다)


영화 아바타는, 그런 지점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향수로 가득차 있다. 지구는 환경오염으로 인해 파괴되었으며, 네이티브 아메리칸 철학에서 영향을 받은 것처럼 보이는 나비족의 생활과 나비족의 철학은 자연과 함께하는 삶 그 자체인듯 하다. 그리고 모든 자연과 인간은 맞닿아있다 라는 나비족의 철학은 모든 동물-식물-나비족이 물질적으로 연결되어 소통하는 USB(달리 이거말고는 표현할 방법이 없다)의 형태로 드러난다. 여기서 나비족이 사는 세계는 기반하고 있는 세계는 괴물들의 세계다:그들의 생태계는 우리와 다르며, 그들은 인간이나 지구의 생물체보다 더 빠르고 강하며 치명적이다. 하지만, 그들의 세계는 우리가 잃어버린 자연의 '또다른 원형'이자 '파생실재'이다. 그 내부에서 동작하는 기제란 기본적으로 '자연과 인간은 하나'라는 한때 미국을 구성하였지만 미국이 잃어버린(아바타는 헐리웃 영화이다) 네이티브 아메리카의 철학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주인공은 과격한 선택을 취한다: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을, 또다시 여기서 되풀이하며 잃어버리게 내버려둘 수는 없다. 인간의 육신을 버리고 나비족의 육신을 취하면서 끝나는 아바타의 결말은 어떤 의미에서는 윤리적인 문제나 다양한 문제를 우리가 잃어버린 것을 향한 향수와 그리움의 미학이 압도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게임 이야기







글쓸거리가 없으면 어김없이 올리는 트레일러 시리즈입니다.

전 예판 성공했고, 이번주 목요일날 온다고 하네요.




글은 쓰고 있는 중입니다...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스포일러 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랑이 끝났다고 믿는 순간, 그에게 두 여자가 다가왔다. 사랑하던 약혼녀와 이별한 뒤 자살까지 시도한 '레너드(호아킨 피닉스)' 앞에 그를 지켜주고 싶다고 말하는 다정한 성격의 '산드라(비네사 쇼)'와 이웃인 치명적인 미모의 소유자 '미쉘(기네스 펠트로)'이 나타난다. 그리고 '미쉘'에게 이미 다른 남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점점 그녀에게 빠져드는 '레너드'는 자신을 주체할 수 없는데... (네이버 영화 시놉시스)

리틀 오데사와 위 오운 더 나이트 등등을 만들었던 제임스 그레이 감독의 투 러버스는 정말로 '전형적'인 영화이다:영화는 부유한 유부남과 아슬아슬한 연애를 하고 있으면서도 레너드에게 서슴없이 기대는 자유분방한 미쉘과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것을 가족과 볼 수 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하는 안정적인 산드라 사이에서 어느쪽을 '선택'할 것인가의 문제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임스 그레이는 그러한 전형성을 비틀어버리며, 그 비틈은 상당히 기묘한 형태로 완성된다. 제임스 그레이의 투 러버스는 마치 엇박자와도 같은 영화다:영화가 서사나 컷의 배치, 영상의 편집을 극적인 결말을 위해서 통일되게 구성하였다면, 투 러버스는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극적인 '하나의' 결말을 향해서 영화를 구성하지 않는다. 오히려, 투 러버스는 극적인 통일성, 하나의 선택이라는 결말을 짓부수고 그 밖으로 탈출함으로서 전작인 리틀 오데사의 독특한 미학(슬픔의 확산과 폭력의 중지)과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영화에 들어가기 앞서서 먼저 분명하게 지적해야하는 점이 있다. 투 러버스는 어떤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제임스 그레이 감독 개인사가 녹아들어 있지만, 동시에 그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백야'에서 깊은 영향을 받았다고 이야기하였다. 밤도 아니고 낮도 아닌 기묘한 시공간에서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기적같은 만남과 사랑, 그리고 그 사랑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다루고 있는 백야는 그 신비로움 체험과 그 사랑의 경험이 주는 행복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 지점에서 투 러버스 역시 백야의 경험의 연장선상에 있다:두 여인을 한번에 사랑하는 것, 하지만 그것이 어떤 양측 모두를 소유하고 싶은 기만이나 진실된 사랑을 선택하는 선택의 문제가 아닌 레너드라는 인간의 삶에서 두 여인을 만남으로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에 대해서 다루는 이야기인 것이다. 그렇기에 어느 한쪽 여인(산드라/미쉘)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두 여인에 대해서 동등하게, 그리고 그들과의 사랑이 어떤식으로 레너드의 인생을 변화시키는가에 대해서 다루어야 할 것이다.

먼저 영화의 도입부를 보자:느릿한 시간의 흐름과 함께, 레너드가 물속으로 뛰어든다. 고요히 물속에서 잠겨가던 그는 전 약혼녀의 환영을 본 뒤에 살려달라고 발버둥친다. 우리가 주목해야하는 점은 구조를 받은 뒤, 그가 '나는 물에 (뛰어든게 아니라) 빠진거에요'라고 주장하는 지점이다. 어째서 그는 물에 뛰어든게 아니라 '빠졌다'라는 수동태를 쓰는가? 이는 그의 현재 상태(우울증도 있겠지만)가 감당할 수 없는 슬픔에 빠져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그의 케릭터, 사진을 통해서 구체화된다:그는 흑백 풍경 사진을 찍는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어째서 흑백 풍경사진만을 찍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이야기하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발터 벤야민이 사진에 있어서 제목이란 사진예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지점이라고 설파한 점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사진에 있어서 제목짓기가 가장 중요한 것은 범죄현장의 사진처럼 모든 요소와 맥락들이 그 사진에 숨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목을 통해서 구체화되지 않는다면 거기에는 어떠한 의미도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레너드라는 인물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겉으로는 멀쩡한 인물이다(주변인들에게 위트있게 대하는 그를 보라) 하지만, 그의 겉으로의 멀쩡함 속에는 약혼녀와의 비극적 이별과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내적 결함(유전자의 문제)이 존재한다. 그러한 문제를 다루는 그의 방식은 '숨김'이다. 그것을 그가 찍은 흑백의 풍경사진처럼, 자신의 프레임 내부로 인물을 들이지 않으면서(재밌는 점은 과거의 그가 남긴 유일한 인물 사진이 그의 약혼녀 사진 뿐이라는 것이다. 유일하게 그가 그의 세계 내부로, 그리고 증거를 남긴 인물) 빛바랬으며 비밀스럽기까지 한 풍경사진을 찍음으로서 자신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레너드와 다른 인물들의 관계는 레너드가 사는 아파트로 구체화된다. 모든 주요한 만남들은 아파트의 공간들에서 이루어진다:부모와 함께사는 아파트와 레너드의 방, 그리고 레너드의 이웃이자 창문으로 훔쳐볼 수 있는 가까운, 하지만 떨어져있는 공간으로서 미쉘의 아파트, 미쉘과 만나는 공간으로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옥상 등등. 여기서 주목할 점은 미쉘의 아파트와 레너드의 방 사이의 관계이다. 초기에 레너드는 미쉘의 아파트를 훔쳐보며, 그녀의 삶을 엿본다. 하지만 이는 관음증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타자를 향한 관심에 가까우며, 클라이맥스 직전 미쉘이 레너드의 방을 바라봄으로서 서로가 서로를 응시하는 지점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공간적 구분과 함께, 레너드가 경험하는 사랑 역시 두가지로 구분이 된다. 첫번째로 미쉘은 첫눈에 반한 사랑이자(그녀가 아파트를 떠난 뒤에 눈 구멍으로 훔쳐보는 그의 모습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상처받은 인간형이다:그녀는 약을 하고, 불안정하며, 레너드의 감정을 알면서도 레너드에게 감정적으로 기댄다. 하지만 미쉘의 대척점에 있는 산드라는 가족을 중시하며, 안정적이며, 레너드에게 안정적인 사랑을 준다. 하지만 유념해야하는 것은 산드라의 사랑, 혹은 그 배경에 깔려있는 조건의 문제다. 분명 산드라와 레너드의 교제는 가족간의 의도된(경제적인 문제) 것이긴 하지만 진실되다. 그러나 제임스 그레이 감독은 가족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하기도 했다:"아버지는 나에게 영화감독이 되지 말라고 하셨다. 물론 그는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 말을 했다. 하지만 그는 틀렸다. 나는 감독이 됐다. 모든 가족의 내부에는 무시무시한 감정적 지원과 감정적 파괴라는 양면이 숨어있다." 산드라의 사랑 역시 그러하다. 그녀의 사랑은 가족의 사랑처럼 따스한 것이지만 동시에 중력과도 같이 레너드를 옭아멘다. 산드라의 가족, 레너드의 가족 역시 그를 모두 사랑하지만, 가업을 잇고 그 어디에 갈 수 없는 구속감이 레너드를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레너드가 미쉘을 사랑하는 것은 영화의 서사상 당연한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러면서 동시에 레너드의 방이라는 레너드의 내밀한 공간에서 레너드와 사랑을 나눈 것은 미쉘이 아니라 산드라이다:미쉘은, 그야말로 방문자처럼 레너드의 아파트를 스쳐지나가듯이 갈 뿐이다. 미쉘이 자신과 사귀는 유부남이 과연 좋은 사람인지 봐달라고 레너드를 저녁식사에 초대했을 때, 레너드는 미쉘의 빰을 부드럽게 스치는 미쉘의 연인의 손길을 본다. 미쉘을 보고 첫눈에 반했지만, 거기에는 레너드를 위한 자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그는 미쉘이 연인과 함께 오페라를 보러갔을 때, 오페라를 틀고는 가족들의 사진 앞에서 산드라와 키스를 한다:여기서 오페라는, 미쉘을 향한 감정의 잔향 같은 존재이다. 여전히 미쉘을 향한 감정이 남아있음에도 산드라와 사랑을 나누는 것은, 미쉘에 대한 복수심 같은 문제가 아니다:그것은 미쉘을 어찌할 수 없다는 것, 그 다음날 미쉘을 만났을 때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거절 받기에 물러서는 것이다. 그리고, 산드라와 사랑을 함으로서, 그의 흑백사진 속으로 '사람'이 자연스럽게 들어오게 된다(산드라 동생의 성인식) 이는 그의 인생이 산드라에 의해서 점차 변화함을 직간접적으로 드러내는 대목이다.

하지만 그와 미쉘의 인연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아픈 미쉘의 전화를 받고 레너드가 그녀를 데리고 병원에 가고, 거기서 충격적인 소식을 듣는다:미쉘은 유부남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으나 유산했다는 것을. 이 지점에서부터 레너드는 그녀를 향한 사랑의 감정이 다시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의 아파트에 미쉘이 들어갔듯이 레너드 역시 그녀의 아파트에 들어가며, 그녀의 팔에 글자로 '나는 당신을 사랑해요'라고 적는다. 이는 레너드의 상처받았던 경험에 기반한다:정상적인 사람은 상처받은 사람을 구원할 수 없다. 그에게 결함이 있다는걸 알고 떠났던 약혼녀처럼, 만약 그녀가 그 남자의 아이를 임신하고 유산했다는 것을 알면 그 남자는 어쩔 것인가? 그에게는 이미 가족과 자신의 인생이 있다. 레너드가 보기에는 그녀는 그 사랑으로 구원받을 수 없다. 오로지 상처받은 자가 상처받은 자를 구원할 수 있기에 레너드는 그녀를 사랑할 수 있는 동력을 다시 얻는다. 

하지만 레너드의 열렬한 구애에 미쉘은 이렇게 묻는다:당신, 나를 정말 사랑하는건가요? 사실 레너드의 사랑은 자기 경험이자, 자신의 거울적인 존재로서 사랑에 의해 상처받고 구원받지 못했던 과거를 구원하기 위한 시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나르시즘적인 사랑이 아니다:이는 서로의 상처를 햟아주는 짐승들의 피로하면서도 편안한 안식에 가깝다. 그리고 이 또한 사랑이다. 하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소설 백야의 비극적 엔딩(연인이 떠난줄 알고 나스첸카와 이어지려는 찰나에, 연인이 되돌아오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과연 상처받은 사람은 상처받은 사람만이 구원할 수 있는가? 그렇기에 레너드가 사랑을 고백하고 미쉘과 섹스하는 장면은 서로를 열렬하게 갈구하지만 극에서의 온도(겨울, 야외의 옥상)는 쉽게 사그라질듯이 꺼지며, 어디까지나 상처받은 두명의 세계를 드러내고 있는 지점이다. 그리고 레너드 역시 그것을 안다:그녀의 방에서 그녀에게 키스할듯이 몸을 숙이다가 멈춰서 돌아선다.


재밌는 점은 미쉘을 향한 레너드의 사랑에도 불구하고, 레너드는 여전히 산드라의 사랑의 사정권에 잡혀있다. 미쉘에게 사랑을 고백하기 전 시퀸스에서 레너드는 산드라에게 사랑에 대한 이야기, 곁에 있어주고 싶고 당신의 그대로를 사랑한다는 산드라의 이야기가 레너드의 미쉘을 향한 고백에서도 드러난다. 이는 일종의 사랑의 디아스포라(확산)이다:레너드는 산드라를 통해서, 상처받은 자신이 타인을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얻는다. 그렇기에 산드라가 이야기했던 말들과 사랑이, 레너드가 미쉘을 향한 사랑에서도 드러나는 것이다. 이것은 양쪽을 향한 기만이 아니라, 자신의 일상을 넘어서 자신의 상처와 화해하기(미쉘) 위한 단단한 대지로서 가족애와 안정적인, 발돋움하기 위한 중력과도 같은 사랑(산드라)이 필요한 것이다. 그렇기에 상처받은 자들은 자신들의 세계에서 떠나서 새로운 곳에서 출발을 모색한다. 그리고 가족간의 관계와 비지니스가 걸려있는 중요한 문제(양측 가족은 산드라와 레너드가 결혼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어머니는 그들의 떠남을 축복한다:위에서 이야기했지만, 가족은 단순히 속박하는 공간이 아니다. 좀더 복잡하게, 그들은 구성원인 레너드를 속박하지만(세탁소 문제 및 산드라와의 연애를 장려하는 것) 그를 사랑한다. 그렇기에 그가 떠나는 순간에, 그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행복을 빌며 그를 떠나보낸다.  


하지만 백야의 비극적 결말을 떠올려보자:나스첸카와 주인공 사이의 사랑이 성립되려는 찰나, 나스첸카의 연인이 그녀에게로 돌아옴으로서 모든 것이 틀어지고 만다. 모든 것은 꿈처럼 사라져버리고 만 것이다. 그리고 레너드의 착각, 상처받은 자만이 상처받은 자를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은 미쉘의 연인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미쉘에게로 돌아오는 그 지점에서 무너지게 된다. 넓고 자유로운 옥상과 겨울날의 애잔한 풍경과 대비되게, 한밤의 지상 1층에서 만나는 그들은 백야에서 이야기한 신비한 시공간인 백야와 대비되는 아침과도 같은 시공간을 만들어낸다. 이제 그들의 사랑도 꿈에서 깰 시간이 온 것이다. 미쉘은 떠나고, 레너드만이 남아서 검은 밤바다를 바라보며 눈물 짓는다. 이는 또다시 첫 시퀸스의 반복이다:심연의 어둠과도 같은 밤바다를 마주하면서 그는 마치 빠질것 같은 아슬아슬함을 보여준다. 하지만, 산드라에게 선물받은 장갑이 떨어져서 파도에 떠밀려서 돌아오는 장면을 바라보면서 그는 다시 돌아온다. 미쉘에게 선물하려고 했었던 반지를 들고 그것을 산드라에게 선물한다.


산드라에게 선물하는 그는 조용히 눈물 짓는다:과연 그는 누구를 생각하고 있는걸까? 떠나간 사랑? 아니면 여기 있는 사랑? 그래서 그는 행복한걸까, 슬픈걸까? 우리는 알 수없다. 분명한 것은 백야의 마지막 글귀처럼, 그는 평생 경험할 수 없는 무언가를 경험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오, 하느님! 한순간 동안이나마 지속되었던 지극한 행복이여! 인간의 일생이 그것이면 족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에게 있어서 이 시간은 마치 영원한 것처럼 느껴진다:극에서 스쳐가는 연인의 손길, 살갗에 대고 쓰는 이야기들, 키스할듯이 굽히다가 물러서는 모습, 가족들 사진 앞에서 키스하는 모습 등등 그런 장면들이 다른 장면들과 차이나는 템포를 보여주면서 엇박자처럼, 마치 그 시간이 영원히 지속될것처럼 느껴지게 감독이 장면들을 연출했던 것처럼, 그 장면들이 그 순간과 맞닿아있음에 머무르고 설명을 하지 않음으로서, 제임스 그레이 특유의 유보의 미학을 완성시킨다. 그리고 이 마지막 장면에서 어느 해답을 제시하는 것이 아닌 그의 내면에서 넘쳐흐르는 무언가, 그리고 그 감정적 충만함과 미묘하면서도 신비로운 지점을 만들어내면서도 영화 투 러버스는 자신의 미학을 완성시킨다:그는 어디에도 없다. 그리고 그 어디에도 없는 그 지점이 영원히 지속되는 것처럼, 순간이 영원처럼 느껴지는 그 지점에서 우리는 쉽게 경험할 수 없는 감정의 동요와 아름다움을 느낀다. 



오, 하느님. 한순간이나마 경험했었던 신비로운 사랑이여! 인간의 일생이 그런 사랑이면 족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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