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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이야기/게임 리뷰



*PS4 버전을 기준으로 작성된 리뷰입니다.


콜 오브 듀티 시리즈는 지난 10년 동안 가장 흥행한 게임 프랜차이즈다:이는 아무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모던 워페어(콜 오브 듀티 4) 이후로 콜옵 시리즈는 즐기기 편한 게임 시스템, 자극적인 싱글 시나리오와 영화적인 연출 그리고 자유로운 케릭터 커스터마이징에 기초한 멀티플래이를 무기로 삼아 게임 시장에 있어서 하나의 흥행문법을 다지는데 성공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매년[각주:1] 게임을 우려먹는다는 게이머들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시장 내에서 자신의 독점적인 위치(밀리터리 FPS로써)를 꿋꿋하게 지켜내고 있다. 그리고 콜옵의 성공 이후로 수많은 밀리터리 슈터류의 게임들이 쏟아져나오기 시작했지만[각주:2], 아무도 콜옵만큼의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는 것은 콜옵이라는 시리즈가 현재 시장에서 갖는 상징적인 의미가 무시할 수 없다는걸 방증하는 지점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콜 오브 듀티 시리즈의 성공이, 흥행공식 하나만을 우려먹고만 있으며 동시에 시장선점 효과[각주:3]에 기초하여 그저그런 무난한 물건들을 찍어내는 시리즈라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실제로도 인피니티 워드의 핵심 개발진이 인피니티 워드를 빠져나와 EA 산하 리스폰 스튜디오를 만들어 냈을 때[각주:4] 나왔던 모던워페어 3의 경우, 모던워페어 2[각주:5]나 블랙옵스에 비교하여 대단히 아슬아슬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었다. 하지만, 판매량이나 게임의 재미 측면에 있어서 모던 워페어 3는 전작에 비해서 모자란 점이 없었으며, 이점이 바로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본인이 여태까지 즐겼던 콜옵 중에서 가장 별로였으며 전에 나왔던 것들을 계속해서 우려먹기만 했었던 모던워페어 3조차도, 모든 것들을 다 합쳐서 평가했을 땐 '안정적'으로 재밌었다고 할 수 있었다. 또한 모던 워페어 3 이후로, 블랙옵스 2라는 걸출한 변종이 나오면서 콜옵 시리즈에 대한 걱정은 한풀 꺾여들어가는 것 같았다. 콜 오브 듀티:고스트가 나오기 전까지는.


결론을 먼저 이야기하자면, 고스트는 안일한 콜옵을 뛰어넘어서 재앙 그 자체이다. 사실, 모던 워페어 3라는 안일함의 결정체와 고스트라는 재앙적인 물건 사이의 차이는 극히 미세할 정도로 적다:어디서 본듯한 싱글 연출에, 콜옵 전매특허인 뚝뚝 끊기는 시나리오, 역전된 인과관계로서의 스토리, 불만족스럽지만 안정적인 멀티플래이 까지[각주:6]. 모던3와 고스트는 서로 많은 지점에서 유사한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모던 3에 비해서 고스트가 더 엉망이며 처참하다고 느껴지는 지점은, 미세한 종이 한장의 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고스트의 싱글플래이는 파괴된 미국으로부터 미국을 지키기 위해 분연히 떨쳐일어난 전설적인 특수부대 고스트에 대한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이러한 고스트의 스토리는 극우적이며 파시즘적이며 심지어는 미국인들이 싫어하는 나치즘에 비유할 수 있을 정도로 끔찍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에 대한 글은 다음을 참조하면 되겠다(http://leviathan.tistory.com/1842) 물론 고스트의 스토리라인이 고스트에 대한 안좋은 평을 남기는데 결정적인 역활을 수행하기는 했지만, 여기서 중점적으로 다루고자 하는 지점은 고스트의 싱글플래이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먼저 게임은 전형적인 콜 오브 듀티 시리즈의 그것이다:쏘고 달리고, 컷씬을 보고, 이벤트 스테이지에서 버튼 몇개좀 눌러주다 보면 자연스럽게 끝나는 콜옵식 싱글 플래이 그 자체인 것이다. 그러나 전작들에 비해서 이번작을 문제삼고 싶은 것은, 게임의 컨셉과 게임 플래이 사이에서 느껴지는 괴리 때문이다:포스트 아포칼립스[각주:7]적인 분위기를 지향하는 고스트는 황폐화된 미국과 그것에 맞서는 유일한 미국의 무기 고스트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이런 시도는 상당히 긍정적이다. 전작의 블랙옵스 2가 과거와 현재를 돌아다니면서, 증오의 연쇄와 근미래적 분위기에 대한 세련된 아름다움을 보여주었다면 고스트는 묵직하게 파괴된 잔해를 되돌아봄으로서 '우리에게 남은 것은 과연 무엇인가?'라는 컨셉을 보여주려는 시도를 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고스트에서 그런 포스트 아포칼립스적 폐허의 매력은 얼마 드러나지 않는다. 게임의 초반부 황폐화된 미국의 모습을 매력적으로 보여주었다면 그 후에는 전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여기저기 불지르는 콜옵 특유의 산만한 선정성의 미학을 게임 전반에 깔아놓는다. 유일하게 다른 시리즈와 차별성을 드러낼 수 있는 지점을 고스트는 스스로 걷어참으로서, 더이상의 전작과 비교됨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전작과 비교해서 자신을 스스로 낮추기를 원하는듯이 보여지게 되는 것이다. 또한 이후의 싱글플래이 전개도 이전 콜옵들과 동일하다:어째 망했다고 보여지는 미국의 전력이 전쟁 이전이나 이후나 그닥 차이가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착각이 존재하지만 말이다. 블랙옵스 2가 근미래적인 가제트들의 다양성과 그것의 아기자기한 재미를 보여주는데 초점을 맞추었고, 고스트 역시도 일부 그러한 지점을 차용한다.[각주:8] 하지만 문제는, 고스트가 블랙옵스 2로부터 밴치마킹한 지점은 대단히 제한적이며, 그 이후의 스테이지 구성이나 이벤트 스테이지의 구성은 여전히 모던 워페어의 연장선으로 인식해야한다고 봐야할 것이다:A10 공격기를 불러서 적을 요격하는 지점은 전작들의 AC-130이 떠오르게 하며, 수중 미션은 움직임이 자유로워졌을 뿐이지 과거 작품들의 이미지의 연장선상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모던 워페어 3 역시도 그러했으나, 이는 인정해야 한다. 모던 워페어 3의 이미지가 전적으로 구작들을 안정적으로 그리고 통일감 있게 구현하고자 시도하였고 그런 안일함(?)이 게임을 무난한 게임으로 만들었다면, 고스트의 문제점은 구작들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면서도 동시에 구작에 얽메이려고 하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사도-마조히즘적인 구속과 가학의 추구로 인해서 틀어지게 된다. 과연 고스트는 싱글 플래이를 통해서 무엇이 하고싶었단 말인가? 폐허가 된 미국의 황홀하면서도 아찔한 아름다움? 파시즘적인 스토리 추구를 통해서 더이상 미국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아야 한다? 전혀 알 수가 없다. 게임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그런 애매한 모습을 보여주며 가뜩이나 모던 3의 그림자가 겹쳐보이는 고스트에 있어서 더 안좋은 이미지를 심어줄 뿐이다.


고스트의 멀티플래이는, 전작들의 망령에 사로잡혀서 팬들에게 아쉬움을 주는 싱글에 비하면, 객관적으로 더 끔찍해진 물건이다. 원래 콜옵 시리즈가 멀티 플래이의 안정적인 재미로 인해서 싱글플래이가 어느정도 실망스럽다하더라도 멀티플래이는 항상 괜찮았다. 하지만 고스트는, 정말이지 두눈 뜨고 못봐줄정도로 엉망진창인 게임 구성을 보여준다. 먼저 모던 워페어 2의 몇몇 초거대형 맵을 연상케하는 대부분의 맵 구성은 과거 길리수트 스나이퍼들의 전성시대를 다시 보는듯 할 정도다. 조준경으로 봤을 시에 적이 콩만하게 보이는 일은 예삿일[각주:9]이며, 맵이 넓어졌을 뿐만 아니라 복층 구조가 되는 바람에 게임을 하는 사람으로서는 눈으로 흟어서 탐색해야하는 지점이 배이상으로 늘어버리고 말았다. 결국 끝없이 배후를 습격하는 적들에게 아무런 대처를 하지 못한체 무력하게 당하는 일 역시 배로 늘어나버렸다.


하지만 맵구성은 약과에 불과하다:문제는 리스폰 시스템이다. 게임의 리스폰 시스템은, 그야말로 천지창조 이전의 심연의 혼돈을 바라보는 듯 하다. 보통은 아군 근처에 리스폰 되거나 적이 없는 아군 후방에 리스폰되서 시작하자마자 죽는 스폰킬 사태를 막는 것이 보통의 게임들이 멀티플래이 리스폰 시스템을 구성하는 기본이다. 하지만, 고스트에서는 그러한 기본조차 지켜지지 않고 있다:리스폰되자 마자 적의 총에 맞아 죽거나 심지어는 가끔식 적이 리스폰 하는 것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일까지 발생한다. 고스트 멀티플래이의 리스폰에는 어떠한 규칙성이 존재하지 않는다.[각주:10] 게이머들은 저기서 리스폰 되었다가 여기서 리스폰 되었다가 하기를 반복하며, 맵리딩의 의미는 사라지게 된다. 보통의 멀티 게임에 있어서 맵리딩이란, 아군의 위치와 아군이 존재하지 않는 위치를 파악하고 어디에 적이 있을 것인지, 그리고 어느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지를 결정하는 중요한 작업이다. 하지만 고스트의 리스폰 시스템은 아군과 적군이 서로 모여있고 하나의 방향을 향해서 뛰어나가는 것이 아니라, 각자 산만하게 흩어져서 각개전투를 벌이는 형태이기 때문에 게임을 하는데 있어서 대단히 짜증이 난다고 할 수 있다. 도대체 적은 어딨고, 나는 어디로 가야한단 말인가? 고스트의 멀티플래이는 마치 실존적인 질문을 게이머에게 던지는 듯 하다.


또한 이해가 안되는 것은 플4 버전에서 보여지는 듯 하는 '랙'의 문제다:전통적으로 콜옵 시리즈는 콘솔에서 60프레임 고정을 지향해왔었고 대부분 이를 달성했었다. 하지만 문제는, 고스트는 그러한 공식을 스스로 깨는 듯이 보인다는 것이다. 물론 고스트의 그래픽은, 차세대 표준이라 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지만 과거의 콜옵 시리즈의 그래픽에 비교하면 좋아졌다. 하지만, 애시당초에 좋아진 지점이 차세대를 상정하고 계산되어 만들어진 지점이 아니라, 원래 있던 것을 억지로 늘려서 좋아지게 만들었다는 티가 난다:배틀필드 4를 예로 들어본다면, 배틀필드 4에서 프레임 드랍은 '아 이런 복잡한 지점에서는 일어날 수도 있구나'라는 생각이 드는 지점에서 일어난다. 하지만 고스트의 프레임 드랍은, 그래픽이 엄청나게 뛰어난 것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일어나며 그리고 그것은 대단히 불쾌할 정도로 가다듬어지지 않은 인상을 준다. 


그렇기에, 고스트는 진정한 의미에서 콜 오브 듀티 시리즈의 위기라고 볼 수 있다:물론, 팔리기는 많이 팔렸다. 그것은 인정해야 할것이다. 하지만, 판매량이 게임의 모든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퀄리티의 콜옵이라면, 게임을 하고 많은 사람들이 더 짧은 시간안에 실망하고 다른 게임으로 갈아탈 확률이 크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떡할것인가? 액티비전은 고스트를 최단시간에 반값 할인[각주:11]에 몰아넣는 기염을 토함으로서 스스로의 실패를 인정했다. 하지만 동시에, 개발사 3개가 3년에 한편씩 콜옵 게임을 개발하는 공장 시스템을 더욱 강화하는 지점을 만들어냈다:트라이아크의 안정적이면서 동시에 변형되는 콜옵은 기대가 되나, 전혀 자신만의 콜옵을 만들어낸 경험이 없는 슬렛지해머나, 모던 3에 이어서 고스트로 땅바닥을 파고 있는 인피니티 워드가 과연 고스트의 패망의 흐름을 뒤집을 수 있는 힘이 있을까? 고스트는 그렇기에 대단히 부정적인 작품이며, 동시에 콜옵 시리즈의 모든 문제점이 집약되어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1. 과거에는 개발사 둘(인피니티 워드, 트라이아크)이서 2년 개발, 1년 텀으로 하나의 콜옵이 나왔다면 이젠 3개의 개발사(트라이아크, 인피니티 워드, 슬렛지해머)가 3년 개발, 1년 텀으로 하나의 콜옵이 나온다. [본문으로]
  2. 배틀필드 시리즈가 2인자 자리를 차지하고 있긴 있지만... [본문으로]
  3. 모던 워페어의 성공 [본문으로]
  4. 현재 이들은 이번 3월에 타이탄폴을 발매할 예정이다. [본문으로]
  5. 심지어 모던워페어 2도 모던워페어의 무난한 카피켓이라는 혹평을 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인걸 생각하면... [본문으로]
  6. 하지만 고스트는 불만족스럽기만한 멀티플래이를 보여준다. [본문으로]
  7. 거대한 재난을 만난 미국. [본문으로]
  8. 라일리 조종하기 라던가, 라일리 조종하기 라던가, 라일리 조종하기 라던가. [본문으로]
  9. 체감상 배틀필드 4 데스매치 맵 수준으로 늘어나버린것 같다. 즉 대충 전작이 50미터 정도가 최대 한계였다면, 본작에서는 100미터 정도 거리에서의 교전도 심심치 않게 일어나며 맵 역시 그정도로 넓어졌다고 볼 수 있다. [본문으로]
  10. 일단 본인이 느끼기에는 말이다. [본문으로]
  11. 스팀, 다이렉트 게임즈 기준. [본문으로]
게임 이야기





*https://medium.com/p/68006c0e7b21 를 블로그에 맞게 편집해 올린 글입니다.




콜 오브 듀티 시리즈는 고스트 이전에서부터 이미 미국 찬양 혹은 팍스아메리카를 주창하는 스토리 일변도를 달린다는 평가를 들어왔다. 물론, 고스트도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문제는 고스트가 그런 콜 오브 듀티 시리즈의 전통(?)을 따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시리즈에서 찾아볼 수 없는 고스트 자체의 문제점들이 있다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고스트의 싱글 스토리에 있어서 게이머는 남아메리카에 기반을 둔 남미연방과 전쟁중인 미국을 수호하기 위해 활약하는 고스트의 부대원의 역할을 맡는다. 그리고 게임 내에서 미국은 자신들의 첨단 무기인 신의 지팡이 오딘이 남미연방에 의해 탈취당하고 그에 의해 공격당하면서 몰락하며, 남미연방의 진군을 막기 위해서 거대한 벽을 세우고는 과거의 영광들 폐허가 된 미국을 지키고자 안간힘을 쓴다. 폐허가 된 미국, 미국을 지키기 위해서 분투하는 고스트 부대원들, 한때 고스트였지만 남미연방에 의해 세뇌되어 적들에게로 전향한 로크와의 갈등 등등 게임은 다양한 갈등과 문제들이 서로 얽이고 섥혀서 하나의 거대한 이야기를 만들려는 시도를 한다.


물론 그런 시도 자체는 콜옵답게 시도에만 그치며(전작인 블랙옵스 2가 성공 아닌 성공을 거둔 지점과 대조된다) 어떤 조화를 이루어내지 않으며 케릭터들은 밋밋하며 재미없는 모습을 보여주며 케릭터 간의 갈등은 마치 설익은 밥을 씹는것 마냥 어색하며 딱딱하다. 하지만 고스트가 흥미로운 지점은 그런 어색하며 거대한 대치상태나 거대한 줄거리의 부분이 아니다(물론 밑에서도 다루겠지만):오딘에 의해서 파괴되기 시작한 미국을 다루던 첫 스테이지 이후, 게이머는 불현듯 10년 후의 폐허가 된 세계로 넘어가게 된다. 그리고 게이머들은 남미연방의 정찰대들이 미국 민간인들을 ‘처형’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전쟁중에서 민간인을 몰살한다는 이 엄청나게 자극적인 지점에도 불구하고, 게임은 거기에 대한 어떠한 이유나 설명을 제공하지 않는다. 또한 과거 로크-일라이어스 사이의 관계를 드러내는 지점의 브리핑을 보자:거기서는 남미연방이 결성되고 미국 국적을 가진 시민들이나 미국의 피가 섞인 사람들을 모두 사형시키거나 집단 수용소로 보냈다는 잔혹한 이야기가 마치 ‘지나가듯이’ 서술된다. 고스트는 이런 선정적이면서 잔혹한 이야기를 너무나 당연하게 하고는 지나쳐버린다.


물론 게임에서 남미연방의 미국에 대한 구체적인 증오에 대한 이야기는 위의 두가지 사건이 끝이다:하지만, 이 두 사건의 존재로 인해서 남미연방-미국 사이의 증오와 갈등이 단순히 전쟁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보기에는 뭔가 더 뿌리가 깊은 것이 있음을 게이머들은 어렴풋하게나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미국을 향한 증오에 대해서 게임은 그것이 마치 ‘원래부터 존재해왔던 것처럼’ 다룸으로서 그 증오를 이해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우리(미국)를 향한 증오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며, 그 일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 근본을 이해하고 증오를 멈추는 것이 아닌, 증오 자체에 증오와 폭력으로 맞서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경향성은 콜옵 시리즈 전반에서 찾아볼 수 있다:모던 워페어의 자카예프, 모던워페어 2,3의 마카로프 같이, 그들이 미국을 증오하고 미국 본토를 향한 무차별적 공격을 벌이려는 것에 대한 것처럼 말이다. 그들의 행동 원인은 어떤 사건 등의 문제가 아닌 ‘그 놈은 원래부터 그런 놈이니까’라고 하는 케릭터의 문제로 귀결된다. 그들의 증오는 증오를 향한 증오이다. 하지만, 고스트의 경우에는 특별하다:그런 ‘당연스러운’ 증오를 넘어서서, 그 내부에는 이전 콜옵 시리즈의 시나리오가 갖고 있지 않았었던 쇼비니즘적이며 파시즘적인 색체를 갖고 있으며 이는 대단히 위험스러운 수준이라 할 수 있을 정도다. 


 (블랙옵스와 블랙옵스 2는 예외적인 지점들이 있다. 블랙옵스 1의 경우에는 그 노림수가 60년대 이후로 지속적으로 서브컬처 내에서 돌고 돌았던 거대한 음모론에 대한 이야기이자 스릴러적인 지점을 풀어내기 위한 쪽에 맞춰져있다. 그렇기에, 블랙옵스 1은 똑같은 선정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주요한 지점’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블랙옵스 2는 후술할 문단에서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다.)


콜 오브 듀티 모던 워페어 이후, 시리즈는 지속적으로 미국 본토 침공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하지만 독립전쟁 이후로, 미국이 겪은 전쟁에 있어서 미국 본토가 직접적으로 ‘침공’받은 적이 있었던가? 물론 진주만 기습같은 케이스나 미국의 영향력 내에 있는 영역에 대한 다양한 형태의 테러리즘 같은 경우를 예로 들 수도 있겠다. 하지만, 미국이 본토 침공의 위험성을 직접적으로 인지하게 된 계기는 911 세계무역센터 테러 사건이다:적들은 언제 어디서나 부지불식간에 미국 본토에 대한 공격을 감행할 수 있다. 이것은 전쟁이란 더이상 선전포고도, 군인들만 투입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게 된다:전쟁은 언제 어디서나,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불현듯 내쳐짐을 당하듯이 경험하고 휘말리며 동시에 희생자가 되며, ‘테러리즘’이라는 단어와 그것을 관리하기 위한 시스템으로서 국가 안보의 개념이 강조되는 원동력이 된 것이었다. 그리고 콜옵 시리즈의 국토침공의 이미지는 이런 911적인 이미지에 기초하고 있다:그것은 어떤 예고도 없이 부지불식간에 찾아온다.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본토의 방공망을 뚫고 들어온다던가(모던 워페어2), 생화학 테러를 시도하던가(블랙옵스, 모던 워페어 3), 혹은 전산 시스템을 박살내서 미국의 무기로 미국을 공격하는(블랙옵스 2) 등등의 급작스럽고 파괴적인 형태로 표출된다. 그리고 이는, 911의 거대하면서 전면적인 형태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콜 오브 듀티가 그런 본토 침공이라는 선정적인 소재와 이미지를 끊임없이 차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미국인들이 겪었던 트라우마적 경험에 대한 성찰과 공동체를 돌아보는 형태는 결코 아니다:조나단 샤프란 포어의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처럼, 그것을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으면서도 그런 엄청난 비극이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그리고 그들은 그것과 어떻게 화해하고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콜옵에 있어서 본토침공이란 소재는, 정확하게는 미국이 갖고 있는 위험(특히 테러와 폭력에 대한)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표지’이자 동시에 그것을 제거하기 위한 ‘정당화’의 기제로서 존재한다:그들은 미국 바깥에 미국을 증오하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그것을 구체화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미국을 침공하는 하나의 세력의 형태로 고정을 시켜야하는 것이다. 동시에 그 자신들을 증오하는 외부를 제거할 수 있는 정당화 기제와 명분(저들이 죽어야, 우리가 산다)을 동시에 획득한다. 그렇기에 콜옵 시리즈의 스토리들은 대부분 상대방 수장 케릭터를 살해함으로서 완결된다:하지만,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으며, 고통받고 서로를 증오했는데 그것이 ‘단 한명의 의지를 꺾는 것’(모던 워페어 3 트레일러에서 이야기한것처럼)으로 끝이 날까? 혹은 뒤집어서 단 한명의 의지로 그런 거대한 전쟁과 폭력이 일어난다는 것이 정말로 가능한 것일까?


재밌는 점은 이러한 전쟁의 위협과 폭력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이들이 설파하는 것은 미국적 가치의 세계화를 통한 미국에 의한 세계평화, 팍스 아메리카가 아니라는 점이다:정확히는, 콜 오브 듀티 시리즈의 세계에는 ‘미국 이외의’ 세계란 존재하지 않으며, 동시에 미국이 흔들리면 전세계가 흔들리며 미국이 평화로우면 전세계가 평화로워진다. 즉 미국이 곧 전세계인 것이다. 모던 워페어 3에서, 왜 미국이 러시아를 향해서 벌인 테러행위(물론 마카로프가 꾸민 거지만)가 전쟁이 진행중인 미국을 넘어서 유럽으로 확대되는 것일까? 왜 미국을 향한 증오가 전세계를 향해서 전염적으로 퍼져나가는가?(동유럽에서는 러시아군이 사람들을 총살하며, 아프리카에서는 사람에게 기름을 끼얹고는 불을 붙인다. 이 모든 것이 단순하게 어떤 연관성없이 일어난 것일까, 아니면 ‘이미지의 연쇄작용, 미국의 혼돈이 전세계로 전염하는 듯한 이미지’에 기반해서 이렇게 의도적으로 구성한 것일까? 본인은 후자쪽에 가깝다고 본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시리즈에서 게이머들은 전세계를 돌아다니면서 평화를 지키려 노력한다: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그들은 단 하나의 공격(미국을 향한 공격)을 막기 위해서 뛰어다닐 뿐이다. 미국을 향한 공격을 막기 위해서 모든 법과 절차, 심지어는 미국이라는 법경계를 넘어서 버린 이 초인적 주권자들의 행동은 미국적 가치의 전파라는 외부를 상정하는 것이 아닌 더욱 뻔뻔한 명제를 선언하고 있다:’외부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곧 세계이며 세계의 주권자이다’라고.


(모던 워페어의 경우에는 시리즈 첫 작품이다 보니 이러한 설명에 맞지 않는 지점도 많다:하지만 재밌는 점은 모던 워페어 역시 그런 선정성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지점은 바로 ‘핵’의 존재다:게임 중 게이머는 핵을 맞고 점점 죽어가는 병사의 시점으로 게임을 진행하기도 한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체, 게이머는 무력하게 죽어갈 뿐이다. 그리고는 그것의 공포를 미국에게로 전이시킨다:자카예프가 마지막에 미국에게 핵을 발사하는 것을 보라. 그것 역시 미국을 향한 증오이자 파괴행위이다. 다만 후속작과 다르게 실패했을 뿐이다.)


다시 고스트로 돌아와보자:고스트가 다른 시리즈와 비교해서 가장 특이한 지점은 게임의 풍경이 재앙이 도래하고 난 뒤의 세계, 즉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세계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이다. 모든 것은 파괴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 남은 사람들은 남은 것을 지켜야 한다. 재밌는 점은 이러한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장르적 문법은 우리를 구성하고 있었던 모든 것을 벌거벗겨 버림으로서 ‘무엇이 진정한 우리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데 효과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고스트 역시도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장르 문법을 따름으로서 ‘도대체 우리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던지려는 시도를 한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미국’ 그 자체이다:고스트의 세계에 있어서 미국은 우리가 알고 있던 미국의 이미지에서 많이 벗어났다. 그들의 과학력은 그들을 파괴하는 도구로 전락했으며, 그들의 부와 아름다움은 그들 자신의 무기에 의해서 산산조각나고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아있는 것이 있다:그것이 바로 ‘고스트’ 부대다.


고스트란 초자연적인 존재이며, 전설 그 자체이다:처음 인트로 영상에서 이 특수부대들이 생존불가능의 상황에서 살아남아서 도저히 과학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무적의 존재로 포장되는 지점을 보자. 재밌는 점은 이 이야기가 아버지가 아들들에게 전해주는 방식으로 전승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가족은 훗날 모두 고스트 특수부대에 들어서게 된다. 즉, 전설은 아버지에서 아들로 전승되며, 아버지가 죽어서도 아버지의 유지는 아들들이 이어받아 고스트의 전설은 계속된다. 미국이 물질적인 부분을 잃었지만, 그럼에도 잃지 않은 정신적인 지점, 그것이 바로 전승되는 전설이자 무너지지 않는 신화인 고스트 부대이며 이들은 전통적인 사회를 이루는 가장 작은 소집단인 ‘가족’이기도 한 것이다. 이런 지점에서 고스트라는 존재는 보수주의자들이 본 미국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미국적 정신이 지키고자 한 것이 무엇이었나’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그들은 그들에게 남은 세계, 폐허가 된 미국을 지키기 위해서 싸운다. 그렇다면 그들이 지키고자 하는 살아남은 미국이란 어디있는가? 장벽으로 남미 연방의 진군을 막고, 그들은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 전세계를 돌아다니면서 불을 지른다. 하지만, 그들이 지켜야 하는 민간인, 일상의 삶, 세계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이 지켜야하는 일상의 모습이 전혀 안드러남으로서 고스트는 기묘한 결론에 도달한다:고스트 특수부대가 지키면서 동시에 ‘이것이 미국이다’라고 할 수 있는 시공간은 바로 남미연방이라는 타자가 들어오지 못하게 높게 쌓아올린 거대한 ‘벽’뿐이다. 모던 워페어 2나 3의 경우에는 극단적으로 선정적이긴 하지만, 그에 의해서 피해를 입는 민간인들이 나왔다. 블랙옵스 2에서도 민간인들이 존재하는 지역에서의 전투가 일어나기도 했었다. 하지만 지켜야 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여주기를 거부함으로서, 고스트는 미국이 지켜야하는 요체란 타자의 배격이며 더이상 순수한 미국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서 싸워야 한다는 지점이라고 설파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로크-고스트 사이의 갈등과 아버지 일라이어스가 죽은 뒤에 이를 포장하는 지점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로크의 존재는, 그것은 분명하게 작위적이며 어쩔 수 없이 들어간 대적자라고 밖에 할 수 없다:그는 타락한 고스트다. 12년전 임무 실패로 낙오된 그를 남미연방이 잡아서 그들을 위해 싸우는 하수인으로 세뇌시킨 것이다. 하지만 전설이나 신화는 꺾을 수 없다. 그렇기에 게임은 새로운 전설을 가져온다:남미 아마존의 한 원시부족은 독특한 고문 방법으로 인간의 육체와 정신, 그리고 영혼을 굴복시킨다고 한다. 이런식으로 전설에 대비되는 새로운 선정적인 전설(절대적 타락)을 만들어냄으로서, 게임의 이야기는 고스트 부대원들에게 가장 극명한 공포를 심어준다:그 어느 누구도, 로크처럼 타락할 수 있다. 즉, 미국이란 존재는 타자에 의해서 더럽혀질 수 있다, 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일라이어스의 죽음을 다루는 서사로 구체화 된다:아버지를 우리쪽으로 데려왔다, 그가 더렵혀지지 않도록, 그리고 그가 우리를 지켜볼 수 있게, 라고 아들인 해쉬는 이야기한다. 이러한 서사를 다룰 때 영상은 극명한 흑백대비를 통해서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바를 분명하게 전한다:하얀색의 실루엣이 검은색으로 물들어가면서 타락하는 장면을 암시하는 로크의 모습과, 마찬가지로 하얀색의 실루엣이지만 동시에 그것이 빛을 향해서 끌어올려짐을 당하는 지점에서 순수함을 지키는 일라이어스의 모습처럼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고스트는 콜옵 특유의 역전된 인과관계로 포장한다:서사가 있기에 스펙타클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스펙타클을 일으키기 위해서 서사의 인과관계가 재정립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고스트의 서사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간다. 스펙타클을 위해서 역전된 인과관계를 보여준 게임은 이제 증오를 폭력으로 제거하기 위해서, 그리고 미국이라는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 모든 인물간의 관계를 평면화 시키고 서사를 ‘역전’ 시킨다. 이야기는 절대무적이자 죽일 수 없는 존재로서의 고스트를 상대하기 위해서 타락한 고스트인 로크를 삽입하고, 지키고자 하는 민간인이나 가치도 없이 ‘너무나 당연한듯이 반복되는’(그리고 밑에서 다룰 블옵2의 스토리 때문에 그것은 당연하지 않다) 미국을 향한 증오를 향해 똑같이, 아니 더욱 무서운 형태(죽일 수 없는 초자연적인 공포)로 적들을 사냥하고 괴롭히겠다고 말한다. 또한 고스트의 스토리는, 다른 콜옵들도 그런 경향이 있긴 하지만, 증오를 마주하고 해결하기 위해서 싸우는 것이 아니다. 증오를 너무 당연하게 설명하기 거부하는, 아니 더 끔찍하게 그것을 신격화 시키고 그것이 우리를 타락시킬 것이라고 이야기하면서 미국이라는 정수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우리는 우리를 향한 공격을 모두 제거해야한다 라고 선언하기도 한다. 이런 파시즘적이며 도발적으로 보자면 나치즘에 가까운 이야기를 뻔뻔하게도 서사의 구조로 역전시켜서 녹임으로서 증오를 위한 증오를, 순수함을 지키기 위한 성전의 형태를 지지하는 역전된 서사를 보여준다:증오와 파괴가 있기에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증오와 파괴는 원래부터 존재해왔던 것이기에 해결불가능하다고 뻔뻔하게 선언하기 위해서 서사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즉, 해결을 위한 서사가 아니라, 존재를 정당화하는 서사로서의 역전된 서사라고 볼 수 있다. 


사실 모든 콜옵 시리즈의 스토리 역시 고스트와 같은 극우적이며 도발적인 서사에 기초하고 있다고 혹평할 수 있겠다:하지만 중요한 점은 시나리오적인 완성도를 차치하더라도, 모던 워페어 이후로 모든 게임들은 형식적이라도 어떤 ‘공정함’을 집어넣고자 노력을 했다는 점이다. 모던 워페어 에서는 플래이어의 아군으로서 러시아 군이 나오기도 하며, 모던 워페어 2에서는 최종적인 적으로서 쉐퍼드 장군이 나오고, 모던워페어 3에서는 마카로프 같은 국수주의자였지만 자신의 죄를 참회하고 반대편에 서서 싸우는 니콜라이가 등장하기도 한다. 블랙옵스에서는 소련군 장교가 적으로 나오긴 하나, 그는 소련군을 더럽히는 암적인 존재로서 묘사되며 러시아 군인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인 레즈노프가 강제 수용소에 갇혀있었다는 지점들을 통해서 진영을 넘어서는 선악의 분명한 이분법적 구도를 만들어내려는 시도를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며, 가장 변형되어 드러나는 지점은 바로 블랙옵스 2라고 할 수 있다.


블랙옵스 2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인 라울 메넨데즈는 시리즈 최초로 미국을 증오할만한 구체적인 이유가 있는 존재다:니카과라에서 이란-콘트라 사건을 실제로 보고 미국에 대한 반감을 키웠으며, 미국인 소유의 헛간에서 잠을 자다 보험금을 노린 미국인에 의해서 자신의 여동생이 평생 불구가 되는 것을 목도하기도 했었다. 또한 아버지가 미국에 의해서 살해당했으며(물론 마약 카르텔 일을 하긴 했었지만), 동시에 자신의 여동생마저도 자기 부대원의 복수에 눈이 먼 우즈의 정신나간 행동 때문에 잃게 된다. 그리고 그는 수십년의 세월에 걸쳐서 미국을 공격하고 무너뜨릴 준비를 착실하게 진행한다. 그것은 자신의 복수를 위해서 99%를 대변한다고 이야기하는 코르테스 디아를 조직하고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며, 마지막에는 엔딩에 따라서 그의 복수는 성공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미국을 향한 증오와 미국과의 관계는 메넨데즈와 알렉스-데이빗 메이슨 부자와의 악연으로 구체화된다:미국을 증오하는 메넨데즈와 메넨데즈의 증오로 인해 자신의 부대원이 몰살당해 분노하다 실수로 메넨데즈의 여동생을 죽인 우즈, 그리고 그 복수로 자신의 아버지 시체를 눈앞에서 목도하는 끔찍한 트라우마를 겪은 데이빗까지. 모든 갈등은 서로를 향한 이유있는 증오의 원환을 돌면서 생성된다. 어찌보면 데이빗이야말로 ‘나와 함께 고통받아라 Suffer with me’라는 메넨데즈의 대사처럼, 끝없이 물고 물리는 증오의 연쇄의 가장 막바지 이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이라 볼 수 있다:메넨데즈의 모든 음모가 결실을 거두는 바로 그 지점에서 그로 인해 고통받은 피해자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중요한 행위자로서 등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블랙옵스 2는 여전히 콜옵이라는 한계에 잡혀 있다:과연 메넨데즈라는 초인 한명의 존재로 그 모든 것들(군수 기업 물자 빼돌리기, 테러, 그리고 전세계적인 호응)이 가능했을까? 재밌는 점은 게임은 메넨데즈 개인의 복수라는 지점에는 자세하게 초점을 맞추고 ‘그’가 미국을 증오하는 이유는 자세하게 다루지만 정작 그가 조직한 ‘코르테스 디아’가 왜 미국을 증오하는가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는다. 그런 지점이 명확하게 드러나는 지점이 살라자르의 배신이 밝혀지고 그가 잡히는 지점일 것이다:살라자르가 그의 미국에 대한 배신행위를 당당하게 설명하려 할때, 그의 변명은 묵살당하고 그는 끌려나가서 극 바깥으로 사라진다. 심지어는 하퍼가 살아있을 경우에는, 그가 변명할때 하퍼가 투항한 그를 처형함으로서 그의 입을 막아버린다. 왜 게임은 극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배신자이자 코르테스 디아의 열렬한 추종자인 살라자르의 이야기를 듣지 않고 왜 그를 곧바로 극 바깥으로 추방하는가? 이는 게임이 미국과 미국을 향한 증오의 구도를 메넨데즈-메이슨 부자의 악연의 형태로만 고정시키기 위한 것이며, 만약 이야기를 더 이상 확장하게 된다면 거기서부터 블랙옵스 2는 콜옵일 수 없게 됨을 인정해버리게 되는 것이다:메넨데즈만을 잡아서 세계의 평화를 지킬 수 없다 라는 것, 세계가 미국을 증오하는 것은 단순히 개개인의 경험의 문제가 아닌 ‘구조적인’ 문제, 미국패권주의적인 문제가 깔려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블랙옵스 2는 기존의 콜옵이 갖고 있었던 한계에서 벗어나서 스토리를 다각화시키는데 성공한다. 왜냐면, 그들은 왜 사람들이 미국을 싫어하는가에 대해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물론 그것이 한명의 케릭터의 형태로 응축되어 나타나긴 하지만) 그리고 게임의 엔딩은 그런 지점에서 더 건설적이다:마지막에 데이빗 메이슨이 메넨데즈를 죽일 것인지 살린 것인지를 결정하는 지점이 있다. 만약 메넨데즈를 죽인다면, 데이빗은 메넨데즈를 죽임으로서 증오의 연쇄를 이어갈 것을 결정하며 동시에 미국에게 죽임을 당한 순교자라는 상징물이 되고자 했던 메넨데즈의 계획을 완성시키는게 된다:그리고 이것은 전세계가 전쟁의 화염에 휩싸이는 배드 엔딩이다. 반면, 메이슨이 메넨데즈를 죽이길 거부한다면 메넨데즈의 계획은 틀어지게 되며 동시에 세계는 전장의 화염속에서 구원을 받게 된다. 그것은 증오의 연쇄를 이어가지 않겠다는 의지의 발현이다. 또한 마지막 메이슨이 메넨데즈를 보고 이야기하듯이 ‘그는 헛소리하는 불쌍한 노인네일 뿐이야’라고 이야기하는 지점에서 그의 존재를 죽이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인정하며 동시에 그의 비극(불쌍한 노인네)을 인정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렇기에 콜 오브 듀티:블랙옵스 2는 콜옵 시리즈에 있어서 가장 기묘한 게임이며 동시에 콜옵이라는 한계에 붙잡혀 있지만 콜옵을 벗어나려고 애썼던 이단아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유념해야하는 점은, 콜 오브 듀티 시리즈 시나리오의 문제점은 편견과 증오를 ‘생산’해서 파는 형식이 아니라는 것이다:콜 오브 듀티 시리즈 시나리오의 특징은 세련된 척하면서 뒤로는 대단히 허술하고 최소한의 인과관계에 의해서 지탱되고 있다는 것이다. 콜 오브 듀티 시리즈의 이야기를 논파하는데 있어서, 세련된 철학이나 현학적인 말장난, 혹은 미학적인 깊은 탐구따위는 전혀 필요하지 않다. 누구나 단순히 스토리에 대해서 의문을 던지는 것만으로도 그 문제를 확실하게 드러내는 것이 콜 오브 듀티 시리즈 시나리오의 특징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리즈는 꾸준하게 팔리고 있으며, 어떠한 논쟁도 불러일으키고 있지 않다. 어째서인가?


이렇게 볼 수 있다:사실, 콜 오브 듀티 시리즈가 하는 것은 편견과 증오의 ‘재생산’이다. 게임은 기존에 존재하는 불안과 편견, 특히 미국 외부를 향한 증오를 가져와서 콜옵 스타일식으로 포장한 것에 불과하다. 즉, 콜옵의 시나리오는 증오와 편견을 만들어내는 주범이 아니라 ‘종범’인 것이다. 본질적으로는 콜 오브 듀티, 더 나아가서는 고스트라는 나치즘에 가장 근접한 게임이 창창한 성공가도를 달렸던 것은 대중이 그러한 스토리를 ‘원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고스트라는 작품이 갖고 있는 문제는 그외에도 심각하며 장기적으로 시리즈 전체에 타격을 입힐 수도 있다는 점, 동시에 블랙옵스 2의 성공이나 다양한 작품들의 성향에 비추어보았을 때 대중의 취향과 경향에 대해서 여기서 판단하고자 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 그렇기에 이에 대한 이야기는 이정도에서 마무리짓도록 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하게 문제가 되는 것은 고스트의 시나리오이다:그것은 민주주의를 넘어선 초인이 전세계 국경을 넘나들며 법을 정지시키고는 누가 죽을지 살지 결정하는 묵시록의 4기사이자 정복의 기수 샘 피셔의 이야기를 다룬 블랙리스트보다 더 파시즘적이며 나치즘적이다. 본인이 블랙리스트를 주권권력의 위험성을 다룬 호모 사케르의 분석에 근거하여 분석했었다면, 고스트의 스토리는 나치 시절 레니 리펜슈탈의 선전영화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올림피아나 의지의 승리 같은 작품을 통해서 나치와 국가를 장엄하며 위대한 신화시대의 도래로 포장하고 재해석했었다면, 고스트는 모든 것이 잿더미가 된 세계에서 이전 세계의 신화이자 유령들이 전세계를 배회하면서 자신들에 대한 증오를 더한 증오와 폭력으로 맞받아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는 또다른 신화의 미화이자 포장이다:다만 그것이 나치의 하켄크로이츠의 기치를 올리지 않았으며, 분명하게 유대인을 죽이자고 주장하지 않을 뿐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더 끔찍한 사실은, 블랙리스트의 샘 피셔라는 케릭터가 자신의 권한을 남용하지 않고 민주주의를 위해서 헌신할 수 있을 거라는 주권자로서의 믿음을 줄 수 있었다면 고스트에 있어서는 그런 믿음을 줄 수 있는 근거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고스트는 더 끔찍하다. 감당못할 정도로 끔찍한 작품이다.



게임 이야기







*런칭 당시에 플4를 구매하고 굴리면서 느낀 소감입니다.


많은 매체들이 플래이스테이션 4를 이야기할 때, 기본적으로 그것이 이전 콘솔보다 향상된 성능을 지니고 있으며 동시에 게임을 더 빠르고, 더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러한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다. 이러한 선언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일단 첫째, 본인은 이러한 전문적인 이야기에는 잼병이며, 단지 내 눈에만 보이는 것을 이야기할수 있는 막눈이기 때문이고 동시에 그런것들은 전문 웹진들이 잘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차세대이기에 이전 기기보다 더 뛰어난 성능을 보여준다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다(조금 별개의 문제지만 위유의 문제 역시도 이렇게 볼 수 있다:다만, 위유는 사양선정에 있어서 타겟팅이 다르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이유는, 플래이스태이션 4를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 성능을 이야기하는 것이 주로 타기종과 그 팬층을 밟아짓뭉게기 위한 선정성을 향한 논쟁의 형태로 변질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플4의 성능 논쟁은, 선정적인 자극을 위해서 행해지는 무언가이다:플4는 어떤어떤 칩셋을 박았으며 이는 어디서 어떤 성능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단순한 사실의 선언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사실의 선언이 논쟁적이고 선정적인 것은 그런 사실 자체가 아닌 그 사실과 비교되며 대비되는 지점이 존재한다는 것이다:그리고 이 경우에 있어서 이 공격의 목표는 바로 엑스박스 원이다. 그리고 마치 사실을 이야기하는척 하면서 은근슬쩍 비교대상을 옆에다 가져다 놓고 객관적으로 열등한 게임기 엑스박스 원을 만들려는 극렬 팬들의 행동들은 성능이 더 뛰어나면 더 좋은 게임기가 된다는 것, 그리고 기능이 뛰어나면 소프트도 부차적으로 따라올 것이라는 일종의 ‘성능’에 대한 선정적 판타지에 기초하고 있다:하지만 사실은 다르다. 게임기의 성능은, 그것이 갖고 있는 잠재력의 문제에 불과하다. 오히려, 그 잠재력을 어떻게 사용하는가, 혹은 얼마나 그것의 한계를 교묘하게 회피해서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가 라는 지점으로 기기의 성능은(특히 엑원과 플4의 정도의 차이에 있어서는) 극복될 수 있는 지점이 존재한다. 물론 현재 엑스박스 원의 개발 및 마케팅적인 실수로 인해서 엑스박스 원의 출발점이 플4보다 더 뒤떨어지게 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인터넷상에서 양산되고 있는 논쟁들의 출발점이란 타자를 벌레밟듯이 짓밟는 쾌감을 느끼려는 뒤틀린 심성의 극렬팬들에 의해서 대부분 조장되고 있음을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서 지적해야하는 것이다.


성능적인 문제는 그렇기에, 오히려 부차적인 무언가이다:플4가 어떤 기계이고 무엇을 지향하는가는 성능이라는 디테일을 넘어서, 그 디테일들로 구성된 전체 그림을 보고 그 그림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다루지 않는다면 이런 이야기들은 무의미해질 것이다. 그렇다면 플4는 어떤 게임기인가? 그리고 이들은 무엇을 지향하는가? 우리는 먼저 과거의 플래이스태이션들의 특징들과 변화들을 되짚어서 볼 필요가 있다:광학미디어를 사용한 플래이스테이션과 DVD를 탑재하고 인터넷 회선 사용을 최초로 시도한 플래이스태이션 2, 그리고 블루레이 재생과 미디어 서버의 기능, 셋톱박스의 기능을 탑재한 플래이스태이션 3 등등. 플4와 비교해서 재밌는 지점을 많이 갖는 것은 전세대인 플래이스테이션 3이다:플3은 인터넷이라는 매체가 대중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단계의 콘솔이다. 인터넷을 통한 업데이트나 멀티플래이가 자연스럽게 진행되며, 셋톱박스(국내의 경우에는 그것이 뚜렷하지는 않지만, 해외에서는 넷플릭스의 존재를 감안하면)의 기능 역시 뚜렷하게 이 시기부터 등장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기에 거실에서 TV와 함께 종합 미디어 엔터테인먼트를 위한 기기로서 기능한 것은 사실 엑원이나 플4 이전에도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엑원이 셋톱박스로서의 기능을 강조하고 실제 TV와의 결합(녹화, 방송 등등의)을 시도했었다면, 플4는 그것과는 조금 다른(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기능을 잘라낸 것은 아니지만) 독특한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다.


플4에서 가장 주목해야하는 기능은 바로 게임 방송을 위시한 ‘공유기능 Share’이다. 플4는 기본적으로 공유버튼이라는 존재를 통해서, 자신의 게임 스샷, 영상, 심지어는 생방송까지 공유할 수 있게 되었다. 기존의 게임기들이 외부적 장치의 도움들(캡쳐보드, 방송용 마이크-헤드셋 등등)과 복잡한 설정들(기계를 통해서 직접적으로 전송하는 것이 아닌, 게임-컴퓨터-방송 이라는 단계를 거쳐야했기 때문에 설정조작 등의 번거로운 작업이 필요했었다)을 거쳐야지만 게임 방송을 공유할 수 있었다면, 플4는 오로지 버튼 하나의 조작만으로 모든것을 쉽게 공유할 수 있다:물론, 전문적인 장비를 쓰는것에 비교하면 플4라는 기기 자체의 영상/스샷/방송 공유의 질은 확실히 떨어진다. 하지만 우리가 방점을 찍어야 하는 것인 질의 저하가 아닌, 그것이 표준화된 기기를 통해서 ‘대중화’되는데 성공했다는 점이다. 게이머는 어떠한 제약없이 플4를 사는것만으로 게임을 방송하거나 영상을 올리거나 스샷을 올릴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은, 그것이 게임이 단순히 소비되는 상품 이상의 무언가가 되었다는 점을 암시한다.


공유 기능이 갖고 있는 지점은 게임이라는 매체의 경계가 확장하며 변화하고 있음을 암시한다:기본적으로 게임은 ‘하는’ 매체이며, 하는 것으로 소비되는 매체이다. 하지만 공유라는 것은 게임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게임을 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게임기 플4가 따로 패드에 공유 버튼을 분리하면서까지 공유 기능 자체를 강조한 것은 플4라는 기기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지점으로 볼 수 있다:공유가 될 수 있다는 것은 개개인이 게임 내에서 만나서 경쟁/협동하는 것을 경험하는 것, 혹은 혼자 플래이하는 경험 이외에 무언가 ‘공유할 수 있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이며, 이는 게임이 단순히 경험으로 소비되는 상품이 아닌 ‘문화’ 그 자체로서 기능하는 것을 강조하기 시작했음을 암시한다. 물론, 게임은 이전에도 문화였으며 스샷/영상/방송의 형태가 아닌 형태로도(글이나 리뷰 등등) 공유되었었다. 하지만, 그것이 플4의 공유 버튼의 형태 같이 양식화되고 ‘대중적’으로 보급되기 시작된 것은 아마도 플4가 최초의 형태라고 단언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런 칭찬에 앞서서 우리는 스팀의 스크린샷 찍기 기능이라던가, 다양한 형태로 그런 영상/스샷/방송을 쉽게 공유할 수 있는 시도들이 있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현재의 공유가 양식화되고 자연스러운 지점을 만들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플4가 대단한 지점은 SNS라는 것이 거품일지도 모른다는 불안들에도 불구하고 가장 용기있게 첫발을 내딛고, 그것을 훌륭한 완성도로 완성시켰다는 점이 있다.


공유 시스템은 SNS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은 사실이다. 트로피 비교, 게임 친구와의 대화를 위한 ‘파티 앱’ 등의 다양한 기존 기능들을 플4에서는 확장했다는 점(친구수의 증가, 기존 헤드셋을 이용한 파티 음성 체팅 같은)이나 소셜미디어와 연동시키는 것이 기본적인 옵션으로 포함되어 있다는 점은 그렇게도 볼 수 있다. 하지만, 본인이 보았을 때는 플4가 노리는 것은 공유이상을 넘어서 게임이 게임 콘솔이라는 기기의 시공간적 한계(게임기를 켰을 때만 만날 수 있는 게임 친구들 같은)를 넘어서기 위한 노력으로서, 그리고 모든 게이밍 경험의 ‘중심’이자 ‘서버’로서 플4를 기획한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다. 전자의 경우에 해당되는 것은 바로 플래이스태이션 앱이다:게이머는 이제 게임 내의 친구들을 게임기를 키지 않고도 핸드폰을 통해서 간단한 채팅을 나눌 수 있으며, 트로피 비교등의 간단한 일들을 수행할 수 있다. 이는 더이상 게임 콘솔의 시공간은 게임 콘솔이 켰을때만 존재하고 껐을 때 사라지는 존재가 아니라 항시 상호작용할 수 있는 무언가가 되었다. 기존의 게임들이 소셜 게임적인 시도로서 게임과 상호작용하는 스마트폰/패드 어플리케이션으로 게임을 가볍게 통제할 수 있게 만든 것처럼 플4는 게임을 단순하게 콘솔의 키고/끔에 의해서 플래이되는 것이 아닌, 그 이상의 무언가, 하나의 생활양식의 형태로 변화시키고자 한 것이 아닐까 라고 생각해보는 것이다.


후자의 경우에는 비타와의 연동을 예로 들 수 있으며, 이 지점은 상당히 흥미롭다:비타는 기기 그 자체로서는 훌륭하지만 그것을 다루는데 있어서 어떻게 다룰건지에 대한 철학이 부재하기에 실패한 기기라고 할 수 있다. 재밌는 점은 소니는 이 기기를 플4에 ‘종속된’(오해하지 마시라:비타 역시도 독립적인 기기이다. 하지만, 플4와의 관계에 있어서 비타는 종속된 기기라고 보는 것이 적당하다) 형태의 관계로, 서버에 접속된 하나의 ‘단말기’로서 설정한다. 리모트 플래이라는 기능은, 플4를 서버로 정해놓고 플4가 게임의 화상을 비타로 보내면, 비타는 그것을 스크린에 띄워놓고 게임을 조작하면 비타가 플4에게 조작 신호를 보내는 형태로 진행된다. 솔직히, 비타의 리모트 스크린 기능은 아직까지는 ‘쓸모 있는’ 기능이라 볼 수 없다. 기본적으로 그것은 거대한 화면으로 보여주기 위한 스펙타클이 비타라는 휴대용 기기의 제한된 형태로 구현된다는 점에서 많은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다:눈이 편한 큰 화면을 일부러 버리고 작은 화면으로 누가 플래이하겠는가? 또한 휴대용 기기가 갖는 조작성의 한계의 경우는? 휴대용 기기는 장시간 손에 들고 할경우에 패드와 다르게 손에 무리가 갈 수 밖에 없는 구조다. 하지만 오해해서는 안된다:비타 리모트 기능은, 전적으로 기기 사이의 새로운 형태의 관계이며, 이것이 어떤 가능성을 갖고 있는가는 좀더 장기적인 안목에서 지켜볼 필요가 있다. 즉, 장기적으로 봤을 때(물론 소니에게 그만한 시간이 남아있다면) 하나의 콘솔을 중심으로 모든 기기들이 서버에 접속하는 단말기처럼 게임을 하거나/게임이라는 경험 자체의 지평을 넓히는 그런 독특한 관계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플래이스태이션 4는, 소니가 ‘게임’이라는 문화를 놓고 그것을 하나의 시공간으로 응축하고 포섭하려고 했던 시도라고 볼 수 있으며, 지금까지로서는 상당히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일단 셋톱박스 자체는 한국에서 시험하기에는 많이 부족하며 또 알 수 없기에 그부분은 생략한며, 소니가 바라보는 미래는 현재로서는 상당히 미래지향적이며 야심차다. 문제는 이 플4라는 기기가 가져오는 미래를 장기적으로 바라볼 수 있을 만큼 SCE의 모기업인 소니가 오래 버틸 수 있는가? 라는 문제다(잘 알려진대로 소니는 최근 장기적인 부진을 겪고 있다) 하지만 플래이스테이션 나우(과거 플래이스테이션 3 이전의 게임을 서비스하는 것) 등의 서비스로 엑원과의 경쟁에서 자기 색깔을 뚜렷하게 드러낼 수 있다면 플래이스테이션 4의 전망은 기업의 부정적인 상황에도 불구하고 확실하게 자기 미래를 개척해나갈수 있는 저력을 보여줄 수 있으리라 믿는다. 플래이스태이션 4는 그만큼 자기 철학이나 개성에 있어서는 뚜렷한 기기이기 때문이다.


(기기의 내구성…문제가 있을 수 있으나, 현재로써는 확실치 않다:분명한 점은 과거의 초기 불량에 비교한다면 엑원이나 플4나 모두 안정적인 지점을 보여준다는 것이며 전세대의 개발 노하우가 이번 세대에 접목되지 않았나라는 생각을 해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그래도 불안하신 분들은 매년 나오는 신공정 플4를 기다리셨다가 구입하는 것도 방법이라 할 수 있겠다)





게임 이야기






어김없이 찾아오는 땜빵용 포스팅입니다.




울펜슈타인 더 뉴 오더는 

5/20일에 발매한다고 합니다.












게임 이야기






*스포일러 있습니다.


*http://www.extmovie.com/xe/mreview/68030 를 참조했습니다.


세계 최고의 게임 디자이너 엘레그라 겔러(Allegra Geller: 제니퍼 제이슨 리 분)는 개발사인 안테나 리서치사에서 몇 명의 고객들과 함께 신제품 테스트를 하게 된다. 엘레그라의 신개발 게임은 생체 컴퓨터 게임 '엑시스텐즈'. 인간의 신경계와 직접 연결되어 가상현실을 체험하게 만드는 차원 다른 시뮬레이션 게임의 일종이다. 이 게임을 시작하면 테스트 참가자 12명은 현실을 떠나 아직 한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게임 속 새로운 인물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그러나 막 테스트를 시작하려는 순간 시뮬레이션 게임으로 인간성을 잃어 가는 것을 반대하는 현실주의자에게 테러를 당한 엘레그라는 상처를 입고 몸을 피한다. 이때부터 그녀를 보호하게 된 견습사원 테드(Ted Pikul: 쥬드 로 분)와 엘레그라는 필사의 도주를 시작한다. 도피 도중 엘레그라는 엑시스텐즈가 무사한지(엑시스텐즈의 게임기는 생체이다) 확인하기 위해 테드에게 같이 '엑시스텐즈'에 접속할 것을 부탁하지만 테드는 게임 접속에 필요한 바이오 포트(게임과 인간을 연결해주는 장치로서 척추에 구멍을 뚫어 사용하는 연결장치)를 뚫지 않는 상태였다. 한적한 주유소에 도착한 엘레그라와 테드는 게스(윌리엄 데포)의 도움으로 테드의 척추에 바이오포트를 뚫지만 게스의 목적은 엘레그라에게 걸려있는 5백만불의 현상금. 둘은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하나 게스가 뚫어준 바이오포트가 감염된 것을 모르고 엑시스텐즈에 접속하다 게임기까지 감염되고 만다. 진퇴양란에 빠진 엘레그라와 테드. 이들은 마지막 피난처인 게임 전문가 카이리 비노코(이안 홀름)의 연구소를 찾아 그의 도움으로 게임기를 수술한 뒤 엑시스텐즈의 세계로 들어간다.(네이버 영화 시놉시스)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영화 엑시스텐즈는 게임을 소재로 하고 있는 SF영화이다:현실인줄 알았던 세계가 사실은 게임이었다는 진부한 내용의 엑시스탠즈는, 영화의 완성도는 차치하더라도 크래쉬나 비디오드롬 등을 통해서 이미 위대한 SF 걸작들을 만들어내었던 그에게 있어서 다소 '평범한' 지점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미 듀나는 그의 글에서 지적하였듯이, 엑시스텐즈는 가상현실이라는 모티브를 띄고 있으며 상당히 '뚝뚝 끊기는' 네러티브와 함께 크로넨버그 특유의 그로테스크한 묘사가 맞물린 범작이라고 결론내린적이 있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듀나의 견해에서부터 조금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 보고자 한다:엑시스탠즈의 서사들이 뚝뚝 끊기는 것처럼 보이는 네러티브에 문제가 있기 때문인가, 아니면 본질적으로 크로넨버그가 이러한 뚝뚝 끊기는 서사를 통해서 '표현'하고자 하는 지점이 있어서 그런 것인가?


들어가기 앞서서 우리가 지적해야하는 점은 엑시스탠즈가 '게임'을 다루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하지만 근래의 소위 게임이라는 매체를 주제로 다루고 있는 영화들과 엑시스탠즈는 다르다:기본적으로 그런 영화들이 게임의 감각적이며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테마들(알록달록하게 채색된 폭력들, 점수화 등의 요소들)을 다루는데 치중했다면, 엑시스탠즈에서의 게임의 문법은 전적으로 '네러티브'의 문제이다.(사실 엑시스탠즈의 룰은 점수화에 기초한 일반적인 게임의 룰이라기 보다는 TRPG적인 무언가에 가깝다.) 적당한 대답을 해주기 전까지는 게임 진행 자체가 불가능한 게임 시스템 루프의 존재라던가, 게임 속 케릭터와 인간의 결합을 통해서 케릭터가 인간을 통해 행동하는지 인간이 케릭터를 통해 하는건지 불분명하게 하는 등 영화가 주목하고 있는 지점은 JG발라드에게서 크게 영향을 받은 크로넨버그 특유의 문제의식과 맞닿아있다:이질적인 두 존재의 융합과 경계의 허뭄, 그리고 그 융합이 가져오는 파국적인 결과. 그 융합의 과정들은 '섹스'나 섹스의 비유로서 표현되며, 크로넨버그가 섹스에 관해서는 영화사에 길이 남을 족적을 남겼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영화의 네러티브가 뚝뚝 끊기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게임이라는 매체의 문법을 따르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게임의 문법으로 보자면 레벨이나 스테이지로 규정되는 분절적인 시공간의 맞닿음을 영화는 각각의 케릭터(=플레이어들)를 만나기 위한 역전된 인과의 형태로 재구성한다:즉, 영화는 그것이 사건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따라서 움직이는 것이 아닌, '그것이 일어나야 하기에 거기로 도달하는' 형태의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영화는 주유소 주인 아저씨 이름을 개스Gas 지으며, 테드가 포트 설치를 끊임없이 거부하는데도 결국은 별다른 설명없이 포트를 설치하게 되고 엑시스탠즈를 플래이하게 되는 등, 노골적으로 영화전반에 이러한 문법(루프의 암시, 너는 특정행동을 하기 전까지는 거기서 벗어날 수 없다)을 깔아둔다. 심지어는 이 영화의 초반 교회시퀸스 마저도 눈썰미가 좋은 관객에게는 '처음부터 게임이 아닐까?' 라는 의심이 들 정도다:엑시스텐즈라는 게임을 소개한 뒤에(배경 설명), 일레그라 겔러라는 케릭터를 소개한다(목표의 등장). 그러고는 겔러를 죽이기 위한 현실주의자 암살범이 등장(적대세력, 알레그라 겔러에게 죽음을!)하고, 테드는 사명을 받은 뒤에(겔러를 지켜라) 여정을 떠난다. 이러한 과정들은 일반적인 영화의 인트로라고 볼 수도 있지만,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겔러를 암살하려는 암살범을 처치하는 경호원들의 '이질적'인 모습이다:마치 자연스러운 일을 하듯이 당연하게 암살범을 총으로 쏴죽이는 폭력을 통해서, 영화는 이 세계가 마치 '이질적'으로 느껴지게 만든다. 그러고 이어지는 장면에서 겔러가 테드와의 대화에서 왜 총을 갖고 다니지 않느냐? 라는 질문을 당연하다듯이 하는 지점 등, 영화는 폭력이라는 테마가 너무나 자연스럽게 깔려있음을 드러낸다:마치 게임에서의 자연스럽게 행해지는 폭력처럼 말이다. 오히려 그렇기에 영화의 클라이막스에서 '겔러, 이건 게임 같아요'라고 테드가 속삭이는 지점은 순진무구한척 하는 뻔뻔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그들은 이미 모든 것을 만천하에 뻔뻔하게 드러내고 있었는데 말이다.


그리고 영화는 이러한 이질적인 세계를 말초적인 형태이자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를 한 '결합'으로 드러낸다. 돌연변이를 일으킨 양서류의 내장을 이어붙여서 만든 살아있는 엑시스텐즈라는 게임기를 척추에 연결함으로서, 게이머는 게임을 한다, 아니 게임과 동화된다. 이러한 동화과정을 통해 보았을 때, 겔러가 지속적으로 테드에게 엑시스텐즈를 하자고 제안을 하는 것은 게임기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상대방이 나에게 우호적인가 여부를 확인하는 섹스의 은유로도 볼 수 있다. 동시에 겔러가 어떤 소통을 거부하고 게임하기만을 주장하는 지점은 언어나 어떤 커뮤니케이션이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파국적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재밌는 점은 엑시스텐즈라는 게임기의 접속 포트의 위치다:일반적인 사이버 펑크물(매트릭스 같은)들이 접속하는 목과 후두부 사이의 애매한 경계, 뇌의 끄트머리(의식)와 연수(무의식)가 닿아있는 모호한 경계에 존재한다면, 엑시스텐즈의 접속은 둔부와 등줄기가 맞닿아있는 은밀하게 내밀한 공간에 위치한다. 생명체인지 기계인지 모르는 물건과 태아의 탯줄 같은 접속포트, 그리고 마지막으로 태아처럼 웅크린 자세로 게임에 동화되는 모습은 인간과 게임의 그로테스크한 결합을 드러내는 지점이라 할 수 잇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가 이것이 게임이다 라고 선언하는 지점은 조금 색다르다. 엑시스텐즈는 게임의 바깥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게임의 내부에서 게임의 문법을 발견하고, 그것이 외부에도 확장되어 있음을 발견함을 통해서 그것이 게임임을 인지하는 방식이다. 네러티브를 진행시키기 위해서 정답을 이야기하지 않는한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루프라는 기제, 그리고 케릭터와 인간의 경계가 허물어져서 서로 구분이 없어지는 융합의 지점 등등에서 테드는 엑시스텐즈의 외부가 게임임을 인지하게 된다. 하지만 동시에 게임의 특유의 폭력과 그로테스크함에 주목해보자:테드가 게임속의 세계(엑시스텐즈 생산 공장)가 너무 현실적인 동시에 비현실적인(이런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수술을 하다니!) 점을 지적하거나 게임이 진행되기 위해서 사람을 쏴죽여야하는 지점에 대해 거부감을 드러내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폭력과 그로테스크함은 인물이 케릭터와 동화되어 가면서 점점 익숙해지고 쉽게 받아들여진다:역겹게 생긴 변종 양서류 요리를 맛있게 먹으면서 동시에 저항하는 모습을 통해서 말이다. 그리고 이는 비현실적이고 자극위해서 선정적으로 구축된 세계를 압도적인 리얼리즘(감각의 구현)을 통해서 재현한다. 테드가 몸서리 치는 지점은 바로 여기다:압도적인 리얼리즘에 의해서 현실-가상의 경계와 구분이 불가능하게 된다면 도대체 무엇이 현실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가? 테드의 그런 폭발(이 게임에도 정지가 있나요? - 당연히 있죠. -엑시스텐즈를 중지한다!!!!)과 게임과의 동화(난 뭐가 뭔지 확신이 안서, 심지어 당신마저도 케릭터로 보여)에도 불구하고, 게임과 완전히 동화된 알레그라는 그런 테드의 동요를 키스로 얼버무린다. 


하지만, 게임 속에서 맞닿아있음을 확인한다 라는 것은 결국은 일종의 나르시즘적인 문제로 귀결된다. 애시당초에 겔러라는 인물도 그렇지만(방안에 틀어박혀서 게임만 하는 천재 디자이너-케릭터, 그리고 이를 이용하는 플레이어), 다른 인물들 역시 이 게임(그러니까 엑시스텐즈의 바깥)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자기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 타인을 사용한다:그들은 게임에서 만나서 소통하는 것이 아닌, 한명의 승자만 남을 때까지 지극히 현실적이지만(신경으로 직접 감각을 전달받음) 동시에 지극히 비현실적인 경쟁과 살인을 반복한다:겔러가 마지막에 자신의 편인척 속이고 있었던 테드를 죽이고는 이겼다! 내가 이긴거 맞죠? 라고 외치는 지점을 보라. 거기에는 타인이란 '케릭터'로써만 존재할 뿐이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사용되는 존재로써만.


겔러의 승리로 게임이 끝나자, 게이머들은 모두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이 현실로 돌아오는 과정은 마치 잠에서 깨듯이 불현듯 일어나는 각성의 형태가 아니다:풀밭위의 현실의 사물이 불현듯 침범하면서 들어오고, 점점 주변의 풍경과 사물들이 점차적으로 섞이기 시작하는 모습을 통해서 드러난다. 엑시스텐즈의 생물적인 모습과 대비되게, 현실의 게임기는 금속재질의 차가운 느낌의 물건이며 모든 혼돈(현실-가상의 경계)이 끝난 것처럼 보인다:하지만 테드와 겔러의 플레이어들(둘은 현실에서는 커플이다)은 게임 디자이너에게 이렇게 이야기한다:당신은 정말로 위대한 게임 디자이너이고, 현실을 왜곡시키는 가장 악독한 범죄자라고. 이는 게임속에서 엑시스탠즈에 반대하는 현실주의자 케릭터들이 내뱉는 말이다. 이 지점에서, 게임속의 이야기는 더이상 게임에 머물지 않고 현실로 확장된다. 게임 디자이너를 총으로 쏴죽인 다음, 같이 게임을 즐긴 플레이어를 향해서 총을 겨누는 주인공 커플. 그리고 플레이어는 이렇게 이야기한다:아, 이런. 이것도 게임이라고 이야기해줘. 게임은 더이상 게임이 아닌, 현실과 융합하여 현실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다. 이질적인 두 존재의 결합에 의한 종말적인 파국인 것이다.


영화 엑시스텐즈는 솔직히 이야기해서 대단한 걸작은 아니다. 이 영화는 이런 해석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듀나의 표현대로 딱딱하고, 정제되지 않았으며 더 잘만들어질 수 있는 부분이 있었다.(듀나의 표현대로, 이 작품은 크로넨버그 라이트의 느낌이 강하다:크래쉬 같은 작품과 비교해서는 지극히 소품적이다) 하지만, 영화는 게임에 대한 날카로운 고찰(역전된 인과, 게이머와 케릭터의 결합 등등)을 보이고 있으며, 동시에 크로넨버그 특유의 그로테스크함과 게임-인간-현실의 융합을 통한 종말을 보여준다고도 볼 수 있다. 모두에게 추천할 수 있는 작품은 아니지만, 크로넨버그 영화를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꼭 한번 보시길.








소설 및 책 이야기





공리주의utilitarianism은 현대철학 사조에 있어서 중요한 흐름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기본적으로 공리주의는 인간 행위의 윤리적 기초를 개인의 이익과 쾌락의 추구에 두고, 무엇이 이익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개인의 행복이라고 하며, '도덕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목적으로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최대행복의 원리Greatest Happiness Principle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러한 최대행복의 원리에 근거한 공리주의는 본질적으로 산업사회와 자본주의의 발달, 그리고 민주주의의 도래라는 사회적 배경을 전제하고 있다:실제로도 공리주의의 등장에는 자본론이라는 자본주의 시스템을 설명하는 기저가 등장하면서 드러나기도 했지만, 위에서 언급한 도덕의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말에는 역사에 있어서 유의미한 귀족, 왕족에 의한 사회가 아닌 최대다수라는 '대중'이라는 균질화된 집단이 유의미하게 등장한 부분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리주의 이론들의 많은 부분은 실제로 근대 민주주의 정부를 구성하고, 정책을 정하는데 있어서 주요한 기준으로 쓰이기도 했다.


하지만, 공리주의는 동시에 현대철학 사조에 잇어서 뜨거운 감자이기도 하다:과연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야말로 도덕 그 자체인가? 라는 전제에 대한 의문에서부터 현실에 적용하기에 모호한 부분들(밑에서 다루겠지만) 등등으로 인해서 많은 철학자들은 공리주의에 대해서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기도 한다. 하지만, 산업화와 자본주의, 그리고 대중이라는 거대한 집단을 다루는데 있어서 최초로 등장한 '공리주의'라는 도구의 유용성 때문에, 반대하는 철학자들의 숫자만큼의 철학자들이 공리주의를 옹호하기도 한다. 


재밌는 점은 JS 밀이라는 이 철학자는 위에서 언급하는 공리주의의 대표적인 철학자로 인지되기는 하지만, 정작 밀의 자유론은 벤담식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공리주의 자체에 대해서 제동을 거는 쪽에 가깝다는 것(다수는 소수에게 침묵하라 억압할 수 없다)이다. 10대 부터 경제학자인 아버지와 스승인 벤담으로부터 엘리트 교육을 받은 밀은 20대가 되기전에 이미 벤담과 공리주의이론에 통달하였으나, 20대 이후 스승과 노선을 달리하면서 전통적인 '공리주의자'의 길을 벗어나게 되었다. 그후 그는 오랜 저술활동과 말년의 의원활동을 통해서, 여성의 참정권과 노동자의 참정권을 주장하기도 했다. 19세기 중반 당시에는 획기적인 발상이었던 밀의 주장은, 훗날 노동당의 계보를 잇는 페이비언 사회주의의 형태로 계승되었다.


밀의 대표저작으로 분류되는 자유론은 그 내용 자체는 의외로 '평범'하다:자유론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표현과 사상의 자유를 인정해야하며, 사회(혹은 행위자 이외의 사회 구성원)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 선 하에서는 개인의 자유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지금으로써는 대단히 '평이한' 의견이라 볼 수 있으나, 이게 150년전의 과거의 이야기라는 것을 가정하고 볼 때에는 대단히 급진적인 의견개진이라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150년 전의 의견이 지금에 와서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점은, 이 글이 근현대 민주주의 사회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가에 대한 방증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관련된 요약은 자유론 요약 노트(https://medium.com/p/26a9cd442a40)를 참조하시길 바라며, 이 글에서는 자유론에 대한 몇몇 반박의견들과 그에 대한 생각들, 그리고 공리주의 전반에 대한 개인적인 몇몇 의문을 표현하는 형태로 진행될 것이다.


몇몇 사소한 문제들(오리엔탈리즘 및 자유를 제한하는 케이스의 왜곡사용:일제의 경우) 자유론이 가장 크게 공격받는 지점은 '과연 사회에 영향을 주는지 안주는지는 어떻게 판단을 할 것인가?'의 문제일 것이다. 특히 개인의 행동이 엄청나게 다른 사람에게도 쉽게 영향을 미치는 현대 사회의 경우에는 그러한 뚜렷한 구분을 하기 쉽지않다는 문제가 있다. 하지만 이러한 지적은 밀의 이론에 대한 '피상적'인 공격에 불과하다:밀의 선언하는 '사회의 영향을 끼치는 개인의 행위'란 시간과 공간적인 상황에 따라 유동적으로 해석될 수 있으며, 그것은 어떤 고정된 원칙으로서 기능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예를 들어, 민법의 가장 기본 원칙이라 할 수 있는 민법 신의성실의 원칙의 경우, 모든 민법의 조항들이 그 신의칙이라는 원칙에 근거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신의칙이 민법의 구체적인 조항을 '정지'시킬 수 있는 예외적 상황을 만들어내는 강력한 권한이기는 하나, 동시에 그것이 모든 상황에서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무언가라고 주장하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오히려 구체적인 사항에 맞춰서 만들어진 법에 대해서, 신의칙은 그것에 근거를 마련하지만 모든 판단을 그것에 의거해서 하는 등 자신은 뒤로 사라진다:즉 신의칙은 가장 강력하며 모든 민법의 근원이며 전제이나, 구체적인 사항에 대해서는 그 구체적인 상황에 대한 논의에 입각한 법에게 모든 것을 양보하는 최고이며 동시에 (적용에 있어서)최종적인 법조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밀의 선언 역시도 그와 비슷하게 볼 수 있다:밀은 자신의 이론에 입각해서 거대한 기반이자 대전제(사회의 영향을 끼치는 개인의 행위)를 정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어떤 것인지는, 시대와 상황, 공간별로 각기 다른 이해를 상정하고, 그 이해를 바탕으로 밀의 선언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토론을 해야할 것이다. 밀의 선언은 오히려, 절대적인 진리의 선언이 아닌 '진리'(사실 진리의 불가변성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을 생각해볼때, 진리라는 단어는 어울리지 않으나 여기서는, 그리고 후술할 문제에 의해 어쩔 수 없기에 진리라는 단어를 선택한다)를 향한 일종의 안내이자 지침으로서의 기능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오히려, 밀의 자유론이 갖는 문제들은 자유론이라는 저서의 주장이 아닌, 그 저변에 깔려 있는 근대적 한계성과 그가 기초하고 있는 '언어적/인식적인' 문제 때문에 생겨난다. 예문을 들어보겠다.



"적어도 인류가 '여전히 불완전한 상태'에 있는 동안에는 여러가지 상이한 의견이 존재하여야 하고, 마찬가지로 여러가지 상이한 생활의 실험이 있는 것이 '유익'하다. 또한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다양한' 성격에 자유로운 영역이 부여되어야 한다. 그리고 누군가가 생활의 다양한 양식의 가치를 시도해보는 것이 그들에게 적합하다면, 그가 그것을 시도하도록 하여 실제로 증명할수 있도록 해야 한다. 요컨데 근본적으로 타인과 관련되지 않는 사항에 대해 개성이 스스로를 주장한다는 것은 바람직한 것이다. 그 개인 자신의 성격이 아니라, 타인의 전통이나 관습이 행동의 규범으로 되어 있는 곳에서는, 인간 행복의 중요한 요소의 하나이자 '개인적/사회적 진보'의 주된 요소를 이루는 것이 결여되게 된다." 


-3장, 복지의 요소인 개성 중에서



'여전히 불완전한 상태', '유익', 성격의 '다양함', '개인적/사회적 진보' 등등 밀의 언어 사용은 지금 관점에서 보면 살짝 기묘하다고 볼 수 있다:밀의 이론은, 전적으로 근대적인 인식의 한계에 기반하고 있다. 이는 사회는 어떠한 방향성을 띄고 운동하며, 그러한 '시대정신'에 의해서 인류는 완벽으로 향하는 중이라는 믿음이자, 사회에 대한 '순수 논리적인' 접근이라 볼 수 있다:이는 헤겔은 예술에 있어서 '예술은 인간의 불완전한 지성이 세계를 인지하는 방법이며, 동시에 이성이 완벽에 도달하게 되면 예술은 그 역할을 상길하게 될 것이다'라고 선언하였던 것과 유사하다. 도대체 완벽한 이성의 상태는 어디이며, 그리고 그것은 어디로 가는가? 이러한 이론들은 전적으로, 어떤 실증적인(실제로 보여지는 현상) 것이 아닌, 사변적이고 관념적인 논리 실험이자 가정에 불과하다. 그것은 정상 상황의 경우에 한해서 헤겔은 완벽한 철학자라는 한병철의 평가와도 같이(권력이란 무엇인가) 완벽한 정상상황의 경우를 상정하면 그리 이해할 수 있을 것이나, '지금이 비상상황이 아니다:역사는 언제나 비상 상황이었다' 라는 벤야민의 지적을 생각해보면 이는 꿈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헤겔 이후의 철학의 흐름이 유물론(포이어바흐-마르크스), 언어라는 도구에 대한 고찰(비트겐슈타인), 실존의 문제(하이데거와 그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 니체 등등의 길을 걸었다는 것은 그런 철학의 '한계'를 분명하게 드러내는 지점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다시 자유론으로 돌아와보자:밀이 자유론에서 주장하는 바는, 인간 개성의 존재가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며, 유능하며 건강한 사회는 개성이 발현된 사회(밀에 따르면 중국과는 정반대로!)라는 것이다. 1차적으로 '개인의 개성은 사회의 건강성을 위해서 존재되어야 하는 어떤 전제적인 존재인가?'라는 지점은 재껴두도록 하자. 밀이 이러한 개인의 개성을 강조하는 것은, 거대한 대중이라는 절대 다수가 개개인의 개성을 말살하는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함으로도 볼 수 있다(심지어 그는 3장 소단원 중에서 '집단속에 매몰된 개인'이라는 챕터를 쓰기까지 하였다) 재밌는 점은, 대략 100년 뒤의 한나 아렌트 역시 활동적인 삶Vita Activa라는 저서를 통해서 인간의 개개인의 삶이 거대한 흐름에 매몰될것이라고 보고, 거기서 벗어나기 위한 자기 자신의 삶을 살아야 하는 활동적인 삶에 대한 주장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한병철의 피로사회는 이를 정면으로 비판한다:현대에 있어서 개성은, 대중이라는 익명성에 매몰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대중은 '과잉 개성'에 의해서 고통 받는다. 대중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이 되라는 이야기에 시달리는데, 그것은 자기계발 교육에서부터 성형, 다이어트의 문제 등등으로 우리에게 있어 구체적이고 세밀한 지점으로 드러나게 된다:강신주가 노숙자를 '인간으로서의 긍지를 버린' 존재라고 역설한 것처럼, 개인의 스스로의 개성을 포기하면, 그는 '인간'이 아니게 된다. 하지만 동시에 그러한 무한한 자기계발은 인간을 우울증이라는 영혼의 소진상태로 밀어넣는다:인간은 '그 자신'이 되지 못한다. 결국 그 자신과의 셰도우복싱에서 밀려서 인간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개인의 개성을 위해서 사회가 장려해야 한다는 밀은 이러한 문제를 보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무한한 자기계발에 근거한 영혼의 소진. 그것이 한병철 식의 영원히 쳇바퀴를 돌리는 햄스터든, 아니면 보들리야르 식의 시스템을 숨기기 위한 외부의 끝없는 주입이든 말이다.


또한 자유론과 별개로 공리주의의 문제는 현대사회의 가장 중대한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자유론은 아슬아슬하게나마 여기서 비켜서있다:최대다수라는 대중의 존재와 별개로(물론 이것도 문제삼으라면 문제 삼을 수 있겠지만) 과연 '최대행복'이라는 지점은 어떻게 인지할 것이냐 라는 문제인 것이다. 밀이 중요하게 근거하고 기반하고 있는 토크빌의 경우는 민주적인 사회들은 사회적 불운의 해소와 모든 인간운명의 평등화로서 보다 많은 복리를 항상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한 것에 대하여, 보들리야르는 '(이 경우에 있어서)행복은 사물과 기호로 측정될 수 있는 복리, 물질적 안락이어야 한다'라고 지적(소비의 사회)하였다:균질화된 행복, 부의 추구. 그것은 공리주의가 기본적으로 그러한 부가 가시적인 형태(숫자나 화폐 등)로 드러나는 '자본주의적인' 인식에 근거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지점이다. 행복은 '측정될 수 있다':공리주의의 등장이 자본주의 발달과정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는 지점이 여기서 뚜렷하게 드러난다고도 볼 수 있으며, 밀 역시도 리카르도의 차익지대론에서 큰 영향을 받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러한 공리주의의 믿음과 별개로 개개인의 각기 다른 행복의 지표는 돈이라는 사용가치 하에서 재구성되고 균질화되며 고유의 가치를 잃어간다(보들리야르는 이를 가리켜 '모든 것은 균질하게 소화된 똥이 된다'라는 극언을 하기도 했다) 


모든 행복은 지표화되서 인지될 수 있는가? 그것이 균질화 계량화 되어서 똑같이 인지할 수 있는가? 우리는이에 대해서 쉽게 부정하지만, 동시에 그에 대한 대안은 쉽게 제시하지 못한다. 이는 대단히 어려운 문제다:허나 분명한 점은, 그러한 계량화와 균질화가 '편리한 도구'라는 점과 계량화와 균질화를 통해서 현대 자본주의-민주주의 사회가 성립되었다는 것이다. 보들리야르가 간과하고 있는 점은, 물질문명의 혜택이 단순하게 인간을 타락시켰다는 것이 아닌, 긍정적/부정적인 의미로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지점이다. 보들리야르는 '세탁기는 그 사용 가치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위세와 행복이라는 이미지의 소비로써도 기능한다'라고 선언하였다:보들리야르의 위대성은 세탁기가 단순한 도구 이상의 이미지의 소비라는 지점도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한데 있지만, 동시에 그는 세탁기가 도구로서 여성들을 하루에 절반 이상의 시간을 소모하는 '빨래'(빨랫감을 들고 우물이나 개울까지 가서, 빨래를 하고 다시 그걸 들고 집으로 들어오는)로부터 해방시켰다는 지점에서 눈돌려버리면서 길을 잃고 해매게 된다. 자본주의 사회와 산업화된 시스템과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공리주의적 가치관이 그 자체의 문제가 심각한 것은 사실이지만, 동시에 그것으로 인해서 인간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부여했다는 점을 쉬이 간과한다:냉장고를 부엌에서 내쫒아 자본주의에 저항하고 '인간적'인 것을 다시 불러일으켜야 한다는 강신주의 발언은 냉장고라는 음식 보존의 도구적 속성을 무시한 단순한 러다이트적인 발언에 불과하다. 냉장고나 세탁기는 단순한 행복이라는 이미지의 소비의 지표가 아닌, 기능으로서도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찬성/반대 한쪽을 주장하기에는, 공리주의 혹은 '균질한 행복'이라는 지점은 상당히 복잡한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는 극론을 제기하기 보다는, 전체를 보고 숙고하는 사고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겠다.


밀의 자유론은 한계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가장 기본적인 원칙으로서, 우리가 사유할 수 있는 가장 근저에 깔린 사상의 다양성 존중의 문제를 기본적으로 다루고 있는 저서이기에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논리적으로만 치열하기에 읽는 재미는 덜한 책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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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이야기/게임 리뷰


*비타 버전 기준으로 작성된 리뷰입니다.


*제가 처음으로 다룬 무쌍 시리즈입니다. 그 점은 양해해주시길.



게이머들 사이에서 잘 팔리고 팬층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저평가 받는(?) 시리즈를 꼽자면 코에이 테크모에서 지속적으로 내고 있는 '무쌍' 시리즈를 대표적인 사례로 들 수 있겠다. 무쌍 시리즈는 수백 수천명의 적들이 득시글 거리는 전장속으로 플래이어 단 한명이 난입[각주:1], 이야기 속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한명의 장수가 천명을 상대하는 일기당천一騎當千의 매력을 보여주는 게임 시리즈였다. 하지만 동시에 무쌍 시리즈는 버튼 하나만 눌러도 클리어하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단순한 게임 플래이와 엄청난 수의 가지치기[각주:2]와 케릭터 및 복장을 DLC로 팔아먹는 코에이식의 악랄한 상술까지 가미되면서 게이머들 사이에서도 여러의미로 악명높은 게임 시리즈였다. 하지만 동시에 일본 내 게임 판매량 30위 권에 무쌍 시리즈가 9개가 들어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등의 엄청난 저변을 갖고 있는 시리즈이기도 하다.[각주:3]


물론 매년 그 나물에 그 밥인 게임을 내면서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게임 시리즈라는 타이틀을 방어하고 있는 콜 오브 듀티 시리즈도 있으니, 무쌍 시리즈의 성공 역시도 콜옵 시리즈나 피파 시리즈의 성공의 연장선상에서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재밌는 점은 콜옵 시리즈가 듣는 욕(매년 똑같은 게임이라니 투덜투덜)에 비하면 무쌍 시리즈는 매도의 가까울 정도로 비판받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게이머들(특히 국내 게이머 커뮤니티 사이트 같은 경우)이 무쌍 시리즈를 놓고 '이런 게임이나 많이 팔리는 일본 시장은 망했다'라는 식의 조롱을 자주 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 본인은 이렇게 되묻고 싶다:과연 무쌍 시리즈가 그렇게까지 조롱받아야 할 정도로 엉망인 게임 시리즈인가? 그냥 단순히 한 버튼 눌러서 클리어가 가능한 대충 만든 게임 플레이를 숨기기 위해서 유명한 인기 대중문화나 고전들과의 콜라보레이션으로 게이머를 기만하고 우롱하여 게이머의 등골을 빼먹는 파렴치한 게임 시리즈인가?


본격적으로 리뷰에 들어가기 앞서 먼저 밝히고 싶은 점은, 진건담무쌍이 본인의 첫 무쌍 시리즈 입문 게임이라는 것이다:물론 과거에 있어서도 본인은 친구 자취방에서 술마시면서 낄낄 거리면서 삼국무쌍을 즐기기도 했다. 하지만, 게임을 직접적으로 사서 클리어[각주:4]한 게임은 진건담무쌍이 최초다. 


진건담무쌍은 미션마다 그 내용이 각각 다르지만, 기본적으로는 '땅따먹기'라고 할 수 있는 점에 베이스를 두고 있다:적들은 거점에서 무한히 리스폰되며, 게이머는 거점에서 적이 리스폰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적의 거점 영역으로 들어가 쏟아져 나오는 적들을 처리하고 거점을 점령하면 된다. 거점을 점령하면 이제 아군들이 점령된 거점에서 충원되며, 충원된 아군들은 자동으로 적의 거점을 향해 움직인다. 기본적으로 땅따먹기를 지향하고 있지만 유념해야 하는 점은, 게임에는 뭔가 복잡한 '전략'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다는 것이다:게이머의 행동과 별개로, 아군들은 각자 자기 갈길을 가며 적들과 싸우며 게이머는 아군의 행동에 일체 어떠한 영향을 끼칠 수 없다. 게이머의 존재는 일종의 '별동대' 같은 개념으로서, 맵 도처에서 일어나는 이벤트나 점령당하면 게임오버가 되는 거점을 지키면서 미션을 수행하는 구조라고 할 수 있다. 즉, 진건담무쌍에서의 게이머는 전략게임 같이 전장을 제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AOS 같은 게임에서처럼 각 라인에서 일어나는 미니언들의 현상태의 유지를 무너뜨리기 위해서, 혹은 시작부터 불리한 미션의 전세를 역전시키기 위해서 분주하게 뛰어다니는 가장 강력한 히든 카드로서 활약한다. 하지만 AOS에서 요구되는 정밀한 컨트롤[각주:5]과 다르게 진건담무쌍에서 요구되는 전장 통제는 이동 및 섬멸이라는 단순한 기제에 근거하고 있다.


또한 전투에 있어서 진건담무쌍은 상당히 '충격적일 정도로' 단순하다:물론 진건담무쌍은 이전 건담무쌍 시리즈와 차별되는 차지샷 캔슬이라던가 SP 어택 변경점 같은 '소소한' 변화들이 존재하긴 한다. 기본적으로 진건담무쌍의 경우, 공격은 아주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진다:네모 버튼을 통해서 나오는 평타 공격과, 평타 공격 콤비네이션 중에 사격 버튼(세모 버튼)을 눌러서 발동하는 차지 공격나누어 진다. 차지 공격의 경우 평타를 몇번 입력했는가에 따라서 각기 다른 차지 공격이 발동하는데, 예를 들어 평타 공격 한번+사격 버튼=차지 1 공격, 평타 공격 두번+사격 버튼=차지 2 공격...이런 식으로 세분화 된다. 하지만 근래의 액션게임들이 다양한 버튼 및 스틱의 조합을 통해서 다양한 공격이나 기술을 지원하고 게이머가 이것을 자유자재로 조합해서 콤보로 엮어나가는 점을 강조했다면, 진건담무쌍의 전투 시스템은 기술들의 조합을 이끌어내는 것이 어떤 차지 공격을 발동할 것인가? 라는 단 하나의 문제만이 존재한다. 물론 게임은 사격 버튼을 모았다가 때면 나가는 차지샷의 개념과 차지샷 캔슬링 개념을 도입하고 있으며, 공격중 대쉬(엑스 버튼)로 대쉬 캔슬링을 넣는 등의 시스템을 지원하고 있으나 가장 근본적인 것은 '차지 공격을 어떻게 쓸것인가?' 혹은 '몇 차지 공격을 쓸 것인가?'[각주:6]라는 아주 단순한 문제가 핵심이라 볼 수 있다.[각주:7]


이렇게 본다면, 게임은 대단히 단순해보인다. 그리고, 실제로도 단순하다. 하지만, 단순하다고 해서 진건담무쌍이 재미가 없다던가, 혹은 대단히 질이 떨어지는 게임이라고 할 수는 없다. 오히려 진건담무쌍을 넘어서 무쌍 시리즈는 그런 단순함을 무기로 삼는 게임이라고 할 수 있다:친구 자취방에서 술마시면서 스트레스 받을 일 없이 낄낄 거리거나 대화를 주고 받으면서 즐길 수 있는 게임, 혹은 비타로 이동하면서 정밀한 컨트롤 없이 즐길 수 있는 게임으로서 말이다. 하지만, 그런 단순함의 문제를 넘어서 진건담무쌍은 '세밀하게' 만들어진 지점들이 있으며, 무쌍 시리즈 공통이라고도 볼 수 있겠지만 어떤 '노하우'가 녹아들어있다고 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진건담무쌍의 한 레벨은 20분을 넘지 않는 선에서 구성되어 있다. 게이머는 그 동안 정신없이 스테이지를 뛰어다니면서 적들을 제거한다. 하지만, 게임은 단순하게 이벤트가 일어나는 지점에서 지점으로 이동하는 '일직선적'인 스테이지 구성을 보여주지 않는다. 오히려, 게임 내에서의 전장의 상황은 짜여진 스크립트에 따라 진행되는 것이 아닌 예측불가능하게 진행된다:아군에는 거점을 수호하는 지역관문장 유닛만 존재하지만, 적들의 경우에는 자신의 주위에 지속적으로 증원을 불러낼 수 있는 유닛이나 부장 유닛 등등의 유닛들이 존재하며 심지어 적진영에도 플래이어 같은 파일럿들이 별동대 개념으로 움직이기도 한다.[각주:8] 그렇기에 기본적으로 서로 비슷한 숫자의 거점을 점령하고 있더라도, 게임은 게이머측에 불리하게 돌아간다. 그렇기에 하나의 목표를 달성하고 다음 목표로 이동하는 것이 아닌, 게이머가 밑빠진 물독을 막으려 뛰어다니듯이 이리 뛰어다녔다가 저리 뛰어다녔다가 하는 바쁘게 뛰어다니는 것이 기본이 된다.


바쁘게 뛰어다니는 것이 기본이긴 하지만, 위에서도 명시하였지만 게임은 단순하며 동시에 호쾌하다. 진건담무쌍이 호쾌하게 다가오는 지점[각주:9]은, 바로 다수의 적을 한꺼번에 섬멸하는 액션의 지점이다. 게임은 수백 수천의 적을 무찌르는 것을 컨셉으로 잡고있는 게임답게 한 화면에 엄청난 숫자의 적들이 등장한다. 또한 타격음이나 이펙트 같은 효과들이 화려하며 시원시원하기 때문에 게임 플래이 자체도 즐겁게 느껴진다. 그리고 게임의 액션 시스템은 단순하다:그러나 게임의 진행은 녹록하지 않다. 수백기의 적들을 상대하는 게임인 만큼, 다수의 적들을 묶어두는 매스컨트롤과 다수의 적을 한꺼번에 처리하는 기술을 적재적소에 활용해야 게임을 쉽게 풀어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딜링과 메스 컨트롤을 담당하는 것이 차지 공격이다:각각의 차지 공격들은 기체마다 모두 다르며, 자기만의 특색을 갖는다. 그렇기에 게이머는 기체들의 특성을 파악하고 어떻게 적들을 몰아서 한꺼번에 처리할 것인가 라는 지점을 분명하게 이해해야 한다. 


진건담무쌍의 플래이의 다양성은 터무니 없을 정도로 많은 기체수에 의해서 보장된다:물론 기체들은 다 제각기 특성을 갖고 있지만, 모두들 공통된 문법(평타-차지공격)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각주:10]에 게이머는 큰 어려움없이 여러 기체들을 쉽게 이해하고 다룰수 있다. 그리고 게임은 여기에 '강화 플랜'과 스킬 요소를 집어넣어서 육성과 커스터마이징과 어떤식으로 적들을 상대하고 싸울 것인가 라는 지점을 만들어낸다. 예를 들어서 뉴건담이나 Z건담의 경우에는 사격에 강하며, 더블오라이저나 갓건담 같은 경우에는 격투에 강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한 특성들을 잘 살펴보고, 플레이어는 기체의 특성을 잘 살리는 쪽으로 기체를 강화하거나 스킬로 지원할 수 있다:원거리 위주의 기체에 일격사나 추가 데미지를 주는 스킬을 붙여서 사격 위주의 차지 공격으로 운영할 것이냐, 아니면 격투 위주의 기체에 적들을 모으는 스킬과 유폭시키는 스킬을 달아서 적들을 몰아서 한꺼번에 터뜨려 제거할 것인가, 아니면 오리지널 건담처럼 벨런스를 맞춰서 양쪽을 혼합해서 운용할 것인가. 이런식으로 각기 다른 기체들은 제각기 운용하는 즐거움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종합하자면 진건담무쌍이란 게임은 극단적으로 단순하다 할 수 있지만, 게임 플래이 자체는 전혀 지루하지 않으며 각각의 케릭터들은 뚜렷한 특징과 개성을 갖는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또한 각기 다른 건담들이나 케릭터들이 각기 다른 방법(어떤 차지공격을 쓸것인가)으로 전투에 임하나, 동시에 그것을 익히는 것 역시 극단적으로 단순한 문법(평타-차지 공격)에 기초하고 있기에 이 기체에서 저 기체로 갈아타거나 새로운 기체에 적응하는 것이 적응하는 것이 전혀 어렵지 않다. 물론 DmC나 갓 오브 워 시리즈 같은 서양의 전통적인 액션 게임들에 비교하면 진건담무쌍은 대단히 가벼운 게임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면 게임이 기초하고 있는 문법은 극단적으로 단순하며, 게이머가 어떤 전략적으로 접근을 해서 게임 내의 전황을 세밀하게 조정하거나 혹은 게임 내에서 화려한 공중 액션으로 적을 농락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진건담무쌍은 그런 게임들이 갖지 못하는 강점을 지닌다:게임은 접근하기 쉽고 재밌기에, 액션 게임의 문턱을 낮춤으로서 많은 게이머들이 부담없이 즐기기 좋은 게임이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여기서 추가적으로 다루고자 하는 것은 진건담무쌍이라는 게임과 비타라는 플랫폼의 궁합의 문제다. 기본적으로 휴대성을 강화하기 위해서 극단적으로 줄인 스틱으로 인해서 세밀하거나 격렬한 조작은 불가능한 비타라는 플랫폼의 특성상, 단순한 시스템과 복잡하지 않은 조작에 기초하고 있는 진건담무쌍과의 궁합은 상당하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게임의 플래이타임 역시 휴대용과의 시너지가 뛰어나다고 볼 수 있는 지점인데, 한 미션을 클리어하는데 10분 내외로 들어간다는 점에서 부담없이 켜서 즐기고 슬립모드로 전환시킬 수 있다. 또한 비타의 경우에는 플삼판과 대부분의 지점에서 유사하다는 평가를 들을 정도로 게임 진행의 유사성을 보여준다. 프레임 드랍은 거의 존재하지 않으며, 그래픽적으로도 납득가능한 수준에, 게다가 무쌍 시리즈에 있어서 중요한 적병의 숫자 역시 상당한 숫자로 나오기 때문이다.[각주:11] 


다만 진건담무쌍에서 아쉽다고 뽑을 수 있는 지점은 DLC를 이용한 상술이라고 볼 수 있는데, 특히 윙건담 0 커스텀 같은 물건을 DLC로 팔아먹는 등 굳이 이런걸 돈받고 팔아야 하나? 싶은 물건들을 돈을 받고 파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물론, 게임에서 기체는 차고 넘치기 때문에 DLC 기체에 대해서 애착을 느끼지 못하는 분들은 굳이 사지 않아도 되긴 하며, 그것들이 어떤 게임을 풀어나가는데 필요한 사기 기체라고 할 수 없다:애시당초에 게임은 무난하게 쉽기 때문이다.[각주:12]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부분이 없는 건 사실이다.


결론을 내리자면, 진건담무쌍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대작' 게임은 아니다:시대를 바꾸거나, 게임 역사에 있어서 새로운 획을 긋거나, 혹은 대자본이 들어가서 우리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해주는 그런 게임이 아니란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건담무쌍의 가치란, 잘만들어진 게임으로서 우리를 즐겁게 해주는데 있어서 게임 소프트 값어치 이상은 확실하게 해내는데 있다. 그리고 가끔식은, 그런 세계를 바꾸는 위대한 게임들보다는 소소하게 즐길만한(특히 들고다니면서 즐기기에는 진건담무쌍은 최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런 게임들이 더 사랑스럽기도 하다.







  1. 물론, 우리편 병사들도 존재하긴 한다. [본문으로]
  2. 원류인 삼국무쌍을 넘어서 전국시대를 배경으로한 전국 무쌍, 무쌍 오로치, 북두의권을 모티브로한 북두무쌍에 원피스를 모티브로 한 해적무쌍 등등 게다가 지금 여기서 리뷰를 할 진건담무쌍까지 있다. 심지어 진건담무쌍의 경우 이번이 4번째 작품이다. [본문으로]
  3. http://bbs2.ruliweb.daum.net/gaia/do/ruliweb/default/ps/93/read?articleId=742356&objCate1=&bbsId=G003&searchKey=subjectNcontent&itemGroupId=&itemId=1&sortKey=depth&searchValue=%EB%AC%B4%EC%8C%8D&platformId=&pageIndex=3 [본문으로]
  4. 스토리 모드 클리어, 얼티밋 모드 미션 해금중. 현재 30시간 돌파했습니다. [본문으로]
  5. 막타 먹기, 라인 밀기/당기기 등의 관리. 갱킹의 위협을 관리하거나, 시야를 확보하는 등의 다양한 행위들. [본문으로]
  6. 차지 공격마다 모션 및 성능이 모두 다르다. 이는 뒤에서 자세히 다루겠다. [본문으로]
  7. 차지샷, 대쉬 공격, 대쉬 중 피격 판정을 이용해서 '공중콤보'를 구사할 수 있긴 있으나 문제는 진건담무쌍은 다른 게임에서 아주 중요하게 강조했을법한 '저글링'(적을 공중에 띄우는 것)을 크게 강조하지 않는다. [본문으로]
  8. 어떤 적 부장 유닛이 있고, 그것이 어떤 역활을 하는가는 아쉽게도 본인의 짧은 일본어 실력으로는 파악할 수 없었다... [본문으로]
  9. 다른 무쌍류 게임도 그러리라 생각하지만. [본문으로]
  10. 다만, 임펄스 건담과 스트라이크 건담의 경우는 살짝 그 문법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본문으로]
  11. 한 화면에 40~50, 혹은 그 이상 정도의 기체가 나온다. [본문으로]
  12. 본인 역시도 익숙해지니 쉬워져서 하드 모드를 기본으로 게임을 진행하는 중이다. [본문으로]
게임 이야기




2월말에 나온다고 합니다.




...요즘 너무 바빠서, 주말에 글을 쓰도록 하죠...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스포일러 있습니다.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73517 를 참조했습니다.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아도, 기억은 흔적을 남긴다...아마드는 4년 째 별거 중인 마리와 이혼하기 위해 파리로 향한다. 오랜만에 찾아 간 그녀의 집에는 전남편 사이에서 낳은 두 명의 딸과, 곧 마리와 결혼하는 사미르, 그리고 사미르의 불만투성이 아들이 있다. 한편, 아마드는 자꾸만 엇나가는 큰 딸 루시에게 사미르의 전 부인이 현재 혼수 상태이며, 그것이 엄마 마리 때문이라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네이버 영화 시놉시스)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는 상당히 기묘한 영화다:어떤 진실(왜 루시는 엄마인 마리에게 화를 내며, 그 뒤에 숨겨져있는 진실이란 무엇인가)을 쫒아가는듯이 보이지만, 동시에 그 진실은 어떠한 '해결'로 귀결되지 아니한다. 어떤 반전이나 진실이 명백한 변화와 결과를 불러오는 보통의 영화들과 다르게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는 배경음악이나 인위적인 구성을 최대한 배제하면서 관객에게 있는 그대로의 일상을 보여주려고 하고 있다. 하지만, 감독은 일상을 재현하는 듯 하면서도 그 아래에 아주 세심한 서사구조를 깔아두고 있다. 재밌는 점은 원제인 le passe(=The Past)라는 '과거'라는 단순한 명사와 다르게 한국에서 개봉한 제목은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라는 것이다:왜 단순하게 '과거'라는 제목을 쓰지 않고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라는 선언으로 제목을 구성한 것일까? 영화는 전적으로 다루는 지점은 '과거'와 '현재'의 관계이다. 하지만 한국어 제목이 선언하는 지점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라는 것은 단순히 영화가 '과거'라는 소재를 쓰는 것을 넘어서, '과거와 현재의 관계'를 드러내는 중요한 관계로서의 선언을 볼 수 있는 지점이 있다.


과거를 다루는데 있어서 영화는 이야기를 낯설게 만드는데 주력한다:아메드는 전처와 별거이후 4년만에 테헤란에서 파리로 전처를 만나러 온 '이방인'이다. 그는 사미르와 마리의 관계에 끼어든 낯선 자이며, 동시에 그가 없는 동안 진행된 그들만의 인생(마리와 자신의 가족들)에 있어서도 이방인이기도 하다. 심지어 그가 과거에 살았던 그의 집을 사미르가 자신의 '색'으로 꾸미는 등의 모습을 통해서 그에게 한때 친숙했던 공간은 낯섬의 형태로 다가오며, 이후의 서사에서는 그조차도 그 가족에 있어서 '자나가는 사람'이었다는 것(그는 루시와 그녀의 동생의 생부가 아니다;아메드 역시도 마리가 재혼한 남자중 하나였을 뿐이었다)이 드러나면서 극대화된다. 그는 시공간적으로 두 곳에 걸터앉아있는데(현재 살고 있는 테헤란-과거에 살았던 공간인 파리), 현재 영화가 일어나는 시공간(파리)은 그가 어떤 유의미한 세계를 창출하기 위해서 머무는 공간이 아닌 '과거에 일어났던 일들을 마무리 짓기 위해서 돌아온 공간'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그에게 있어 파리라는 시공간은 머무는 곳이 아닌 '거쳐가는 공간'이자 '떠나야 하는' 공간이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의 과거의 문제(가족-사미르 사이의 오해와 진실)가 해결되는 순간, 모든 것을 뒤로한체 다시 테헤란으로 떠난다. 


하지만 이는 단순히 아메드에게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오프닝 시퀸스에서 관객은 일종의 낯섬을 느낀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마리와 공항에 도착한 아메드는 과연 어떤 관계인가? 친구? 연인? 아니면 부부? 영화는 이들이 이혼 소송중이며, 4년전부터 이미 별거하였다는 이야기는 어떤 충격적인 전개나 복선, 암시등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닌 일상의 언어 속에서 조금조금씩 그 정체를 드러내는 형태로 나타난다. 영화는 이런점에서 관객을 이야기에 대해서 친절함을 보여주지 않는다:오히려 관객은 극에 있어서 이야기를 듣는 청자가 아닌, 기묘한 상황에 내던져진 낯선 이방인이다. 이런 지점에서 영화는 독특한 진행을 보여주는데, 몇몇 장면에서는 관객이 이야기를 직접적으로 듣는 것이 아닌, 내부의 공간에서 외부의 공간에서 대화를 하는 인물들을 보고 있기만 하는 형태를 드러내는 등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과거의 잔향이자 여파Aftermath이다:모든 중요한 사건들은 이미 과거에 일어났었거나(과거완료), 혹은 과거에서 지금까지 여파를 미치는(현재완료) 형태로 드러나고 있다. 관객에게 영화는 마치 괴멸적인 핵전쟁 이후 수천년이 지난 지구를 돌아보는 포스트아포칼립스의 장르처럼 다가온다. 물론 어떠한 의도에 따라 사건 이후에 오밀조밀하게 재구성되며 관객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미학적으로 재구성된 종말 이후의 세계와 다르게, 영화는 자신의 의도를 감추고 숨기면서 일상을 따라서 덤덤하게 진행될 뿐이다. 그리고 영화는 인물들이 과거를 찾아서 진실을 재확인하지만, 그것이 어떤 결정적으로 '현재'를 변화시키지 않는것처럼 묘사한다:오히려 그렇기에, 영화는 삶에 있어서 현재-과거의 관계를 새롭게 재조명한다.


영화는 이러한 현재-과거의 관계를 작은 구조로 쪼개서 영화 내에 반복적으로 삽입한다. 가장 뚜렷한 지점은 인물들의 동선과 행동이다:비단 아메드 뿐만 아니라, 극 내에서 모든 인물들은 어떤 행위를 한 뒤에 그 장소를 떠났다가 다시 불현듯 다시 돌아온다. 예를 들어서 루시가 집에 들어오지 않자, 사미르와 아메드, 그리고 마리가 루시를 찾겠다고 대화를 장면을 보자:마리와 아메드는 중요한 정보가 담긴 대화(루시는 사미르의 아내 셀린이 자살한 이유가 사미르와 마리의 불륜때문이었다고 알고 있다)를 진행한다. 이 동안 사미르는 이 대화의 낯선 이방인으로서 공간에서 공간으로 이동(차 키를 찾으러 움직임)하면서 전혀 의도치 않은 방식으로 이 둘의 대화를 방해한다. 영화는 이런식으로 갔다가-다시 돌아옴이라는 행동 구조를 많은 곳에 깔아놓는다.


또다른 재밌는 지점은 영화의 컷의 편집 방법이다:몇몇 장면에서 컷의 배경음은(영화는 마지막까지 배경음악을 쓰지 않는다) 그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마리가 집에 있는 장면을 보여주다가도 갑자기 낯선 배경음이 들리더니, 영화는 사미르와 그의 아들이 지하철이 타고 있는 장면으로 넘어간다. 이런 지점에서 영화는 배경음을 마치 '잔향'처럼 장면-장면 사이를 연결시키는 독특한 장치로 사용한다. 이는 영화의 내용과도 잘 어울린다. 영화가 다루고 있는 지점은 전적으로 아오야마 신지가 이야기한 '삶의 노이즈가 낀 영화'를 재현하는 것이다:과거의 사건들의 노이즈는 현재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 그것은 어떤 그들을 적극적으로 괴롭히는 '망령'의 형태가 아니다. 물론 그로 인해서 그들이 고통받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사건(사미르 아내 셀린의 자살시도)은 이미 과거의 일로서, 현재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은 그저 그 사건의 머나먼 반향일 뿐이다. 그리고 이는 멀리서 들려오는 천둥처럼 시끄럽지는 않지만 묵직하게 인물들을 뒤흔든다.


영화는 이렇게 과거의 잔향이 지배하고 있으며, 이야기는 그 과거의 잔향을 따라 도덕적 책임을 추궁하기 위한 여정을 따라간다:루시는 셀린의 자살시도의 원인을 사미르와 마리 사이의 관계라고 고발한다. 하지만, 이후 사미르는 셀린의 자살이 우울증과 불행한 사건(얼룩이 묻은 옷에 대한 클레임) 때문이라고 항변하며, 루시는 사미르와 마리 사이의 연애편지를 자신이 보냈다고 토로한다. 하지만, 셀린에게 전화를 걸었다는 루시의 증언과 다르게 셀린은 전화를 받은적이 없었으며 셀린에게 있어서 사미르와 관계를 의심받았던 나이마가 셀린인척하면서 셀린에게 소소한 복수를 꾸몄다고 진술한다. 하지만, 영화는 가장 중요한 연결고리를 일부러 누락시킴으로서 모든 과거의 진실을 드러내지 않는다:셀린은 과연 누구에게 화가 나서 자살시도를 한걸까? 나이마? 아니면 사미르와 마리? 이 모든 과거 사건의 인과관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연결고리인 셀린은 자살시도 이후 코마에 빠져서 병원에 누워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을 뿐이다. 


결국 영화는 그것이 누구의 잘못이라고 단정적으로 선언하지 않는다. 마치 양파처럼 벗기면 벗길수록 더 많은 진실이 드러나며, 책임 소재는 더욱 불분명해진다. 영화가 보여주고 싶은 것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미래에 있어서 뒤돌아보아서 정리하기 위한 곳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정리와 되돌아봄의 시간은, 아메드라는 이방인과 이혼이라는 정리의 시간을 통해서 드러난다:그는 자신의 현재(테헤란)에서 과거(파리)를 정리하기 위해서 과거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는 이방인으로서의 '친절함'을 드러내는데, 한때 가족이었던 그들(마리와 그녀의 딸들, 그리고 심지어는 사미르와 그의 자식에게까지)을 위해서 과거의 진실을 뒤쫒아서 드러내는 것이다. 그래서 과연 그들은 구원받았을까? 글쌔, 일단 확실한 것은 그들이 '구원'이라는 성스러운(완벽한) 상태에 도달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여전히 그들은 과거(코마 상태에 빠진 셀린)에 붙잡혀있다:다만, 그것은 이제 각자가 생각하는 방식의 죄의식(자신의 잘못이라고 생각한 루시, 문제를 외면하고 있었던 사미르-마리)에서 벗어나서 모두가 짊어져야 하는 문제로 화했다.


하지만 아메드는 떠나야한다:친구가 이야기했듯이, 그는 과거와 현재, 파리와 테헤란, 둘 중 어느 한쪽만을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그의 현재로 돌아간다. 그것은 마리와의 관계는 과거의 것이며, 과거에 자신이 왜 떠나야했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하려는 아메드에 대해서 마리가 그 이야기를 듣기를 거부하는 형태로 드러난다. 하지만 자신의 현재인 테헤란으로 돌아간 아메드와 다르게, 사미르의 현재와 과거는 모두 파리에 존재한다:그렇기에 영화는 기묘한 결말로 도달한다. 과연 코마상태에서 영원히 알 수 없는 과거이자, 결혼을 했으면서도 자신에게 관심조차 안쏟은 생판 남이라 생각했던 셀린에게 사미르는 그녀가 한때 좋아했었던 향수를 뿌리고 그녀와 소통을 시도한다:하지만 왜 향수인가? 영화는 '(코마상태에 빠져있어도) 후각은 마지막까지 남아있으니까요'라는 의사의 말로 이를 정당화시키지만, 좀더 근본적으로는 후각이라는 감각의 특징에 기초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시각, 청각에 비해서 후각은 그 은은한 잔향이 오래 남는다:냄새란, 오랫동안 그 장소에 머물면 그 장소에 베어들어 그 장소의 일부가 된다. 그렇기에 후각은 금방사라지는 시각의 잔상이나 청각의 잔향보다 더 오랫동안 살아남는다. 사미르가 셀린이 좋아했던 향수를 뿌리고 그녀와 소통을 시도하는 것은 닿을 수 없는 과거와 화해하기 위한 그의 의지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의지에 부합하듯이 셀린은 그의 말에 화답해서 손을 부여잡는다. 이로써 영화는 막을 내린다.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는 대단히 독특한 영화다:영화는 화려한 드라마나 서사 장치를 이용하지 않고, 진실을 끝도 없이 밝히고 누군가를 무한히 고발하고 책임의 굴레를 씌우지 않는다. 대신에 묵직하게 남는 여운과도 함께, 영화는 삶의 일부를 훌륭하게 재현한다. 물론 그것은 삶 그 자체를 재현하는 것이 아닌, 삶의 일부분을 메타포의 형태로서 재현함으로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과거와 화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엿보여주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기회가 된다면 꼭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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