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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이야기



*https://medium.com/korean-medium-post/59b1da5a4aa7 의 글을 블로그에 맞게 재편집한 글입니다.


(이 글은 션 큐빗의 [The Cinema Effect]에서 Temporal Film: The Pixel라는 챕터에서 The Cinematic Event 부분의 번역에 모티브를 두고 있습니다. http://giantroot.tumblr.com/post/73471411009/the-cinematic-event-the-cinema-effect)





슈퍼 버니홉의 이 동영상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일종의 느긋한 시간Quiet Time에 대한 고찰이라 할 수 있다. 성공적인 대부분의 게임들은, 높은 텐션의 액션과 액션 사이에 이를 느슨하게 풀고 이야기나 경치를 감상하거나 퍼즐을 푸는 낮은 텐션의 구조를 집어넣는 레벨 구조를 보여준다. 일반적인 통념(게임에서 화려한 액션의 중요성)과 다르게 버니홉은 액션과 액션사이에 배치된 조용한 시간은 실질적으로 액션 파트만큼이나 가치가 있다고 선언한다.


이러한 조용한 시간의 부제로서 게임이 실패했다는 문제를 제기하는 예시가 바로 콜 오브 듀티:고스츠이다. 버니홉은 콜 오브 듀티:고스츠에서는 유의미한 조용한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한다. 게임은계속해서 게이머에게 선정적인 자극을 제공하는 연출 또는 액션을 주입하며, 혹은 그러한 연출이나 액션이 없을 때는 누군가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케릭터가 이야기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 말고는 없다는 것이다. 이는 콜옵 싱글의 열화카피판인 배틀필드 3과 4 싱글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난다. 게이머는 콜옵 싱글보다 더 넓은, 그러나 더 공허한 일직선 스테이지를 진행하면서 게임을 풀어나간다. 그러나 배틀필드는 액션과 액션 사이의 간극의 문제가 액션 자체를 한없이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어버려서 심지어 게임 자체를 역설적이게도 지루하게 만들어버리는 지점이 있다:3편의 항공모함-전투기 출격 미션이 대표적인데, 그것은 전적으로 ‘우리는 이러한 것이 가능하다’라는 단순한 선언에 불과하다.


버니홉이 지적한 조용한 시간은 션 큐빗의 [Cinema Effect]에서 언급한 영화에 있어서 ‘0의 시간’의 개념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자세한 원문은 위의 발췌본을 참조하면 되며,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뤼미에르가 영화를 발명하면서 그의 이미지스트로서의 성향이 영화라는 발명과 매체적인 특징에 녹아들기 시작하였다. 놀이공원의 유흥으로서의 키네틱스코프와 다른, 예술로서 이미지를 제현하기 위한 극장이자 재생되는 영상으로서의 시공간인 시네마토스코프는 필름의 한 컷 한 컷들을 연속으로 재생하여 하나의 ‘영상’으로 재현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컷들을 필름에다 모아두되 동시에 이들을 필름 내에서 구분하여 분절시킬 필요가 있다. 그렇게 초당 24프레임, 즉 1초를 구성하는 24컷의 필름들을 구분하는 지점을 가리켜 보통은 프레임 라인Frame Line이라 일컫는다.






컷과 컷 사이의 빨갛게 칠해진 공간이 프레임 라인이다.


이 프레임 라인은, 영화에 있어서 ‘존재하지 않는’ 시공간이다. 왜냐하면 프레임 라인은 오로지 필름의 컷과 컷을 구분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공간이나 그것이 ‘상영되지는 않는 무의미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존재하지 않는 시간은 필름의 문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지점이기도 하다:만약 컷들이 프레임 라인에 의해서 구분되지 않는다면, 영화가 상영될 수 있을까? 그렇기에 프레임 라인은 역설적이게도 무의미 하며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지만 동시에 중요한 공간이기도 하다. 그리고 션 큐빗은 이러한 프레임 라인의 공간을 가리켜 ‘0의 시간’이라고 표현한다.


션 큐빗은 0이란, 하나의 개념이 아니라고 선언한다. 일반적인 정수와 0은 다르다. 정수가 하나의 개념으로서 표지될 수 있다:예를 들어서 2라는 개념은 사과 두개의 형식으로 인지될 수 있다. 하지만 0은 오로지 어떤 사물들에 의한 표지가 아닌 하나의 형용사이자 상태로만 존재할 수 있다. 0이란 개념이 존재하는걸 눈으로 목격한 사람이 있는가? 하지만 0은 단순히 비어있음의 영역이 아니다. 0은 부정과 긍정의 총합으로서 원점이다:0은 단순히 멈춰있다 라는 개념이 아닌, 모든 개념이 출발하기 위한 원점으로서 기능한다. 컴퓨터 스크린에 있어서 래스터 그래픽Raster graphics이 성립하기 위한 픽셀들의 기준인 원점(0,0)의 존재처럼, 프레임 라인의 시공간은 그렇기에 0의 시간이라 부를 수 있다:그것은 분절된 컷들이 연결되어서 흘러가기 위한 비어있는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이전 컷이자, 다음 컷으로 넘어가는 시공의 흐름에 있어서 그 시공이 연속적으로 이어져 있는 것이 아닌, 유의미하게 분절하기 위한 공간으로서의 프레임 라인인 것이다.


게임에서의 조용한 시간은 어찌보면 영화 필름 문법으로서의 프레임 라인, 0의 시간과 맞닿아 있다:물론 필름 문법으로서의 프레임 라인은 ‘기계적인’ 문법으로서 의미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게임에서의 0의 시간이란, 어떤 스테이지 구성에 있어서, 기획 단계적인 측면에서 조명이 가능할 것이다. 버니홉의 지적대로, 게임에 있어서 조용한 시간은 액션이 존재하지 않는 시간으로서 ‘액션의 시간’과 비교되어 무엇이 액션이고 무엇이 액션이 아닌지를 비교할 수 있게 만든다. 그것은 컷과 컷의 구분으로서, 각각의 컷을 유의미하게 분절시키지만 그 자신으로서는 의미없는 프레임 라인의 기능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버릴리오는 우리가 신의 0의 시간으로부터 반기를 들은 것이 아닌가 라고 두려워하였다:“신에게 있어서, 역사란 사건들의 경관이다. 그에게 있어서, 그 어떤 것도 어떠한 것을 이어받지 아니한데, 이는 그에게 있어서 모든 것은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Virilio, 1996, 9) 이 동시성은 우리 인간들은 오로지 통시성에서만 인지할 수 있다. 아방가르드 영화들은 특히 겔러리에서, 하얀 라이트박스에 위치한 영사 슬라이드에 걸려서 전시된다. 이러한 형태의 전시들이 보여주는 역설이란, 움직이는 이미지란 현존하지 않지만-반면 영사 슬라이드는 실존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그러한 영사 중에서 이를 제대로 인지하고 있지 못한다-동시에 이는 영상의 움직임을 희생함으로서 그것이 현존하게 된다. 버릴리오의 신은 필름 자체를 보는 것이 아닌 영사 슬라이드를 인지할 뿐이다. 성스러우면서 변함없는 현실로서, 라이트 박스를 통해서 보여지는 영화 필름의 프레임라인은 오로지 존재할뿐 어떠한 행위도 하지 아니한다. 이 움직이지 않는 프레임의 전시는 박물관에 박제된 나비와도 같다;사랑스럽지만, 그것은 죽어 있다. 성스러운 현존에서, 그들의 시간은 정지해있으며 동시에 0은 공허가 된다.

-션 큐빗의 [The Cinema Effect]



하지만 션 큐빗은 여기서 한발자국 더 나아간다:0의 시간이란 단순하게 구분을 만들어내기 위한 데카르트적인 사분면의 원점으로서 기능하지 않고 그 이상의, 힘의 균형으로서의 ‘동사’로 기능한다는 것이다. 위에서 예시로 들은 아방가르드 예술 작품의 사례를 보자:각각의 분절된 컷은 빛에 의해서 쪼여서 전시당한다. 하지만, 그것은 움직이지 않으며 프레임 라인은 유의미한 구분이 아닌 공허한 ‘공백’으로서만 존재할 뿐이다. 하지만 이 아방가르드 작품은 어떤 의미에서는 영화 그 자체이다. 하지만 어디서 영화와 이 예술 작품 사이의 구분이 생기는가?여기서 0의 시간으로서의 프레임 라인은 기묘한 암시를 던진다:프레임 라인에 의해서 구분되고 상영되는 영상이란, 전적으로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0의 개념과 앞서 이야기한 형용사적인 0의 개념과 다르게, 움직이는 동사적 개념으로서의 0의 개념이 여기서 출현한다.



불후하는 삶은 잊을 수 없다. 잊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우리가 불후하는 삶을 인식하는 표지이다. 불후하는 삶은 기념비도 없고 추억도 없이, 어쩌면 증언도 없이 잊을 수 없는 것이어야 하는 삶이다. 그 삶은 잊을 수 없다. 이러한 삶은 말하자면 그것이 채워질 그릇이나 형식이 없이도 사멸할 수 없는 삶으로 남는다. 그리고 “잊을 수 없다”라는 것은 그 의미를 두고 볼 때 우리가 그 삶을 잊을 수 없다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그것은 잊을 수 없는 것의 본질에 들어 있는 어떤 것, 그 삶이 잊을 수 없이 되게끔 하는 어떤 것을 암시한다.

-발터 벤야민의 도스토옙스키 평론



동사적 0의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서, 여기서는 발터 벤야민이 도스토옙스키의 백치를 평론한 것을 인용하도록 하겠다:그는 어떻게 불후해지는가? 므쉬킨은 그 자신은 간질발작에 의해서 ‘(벤야민의 표현에 따르면)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과거 회상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루어지는 각 인물들에 대한 보고와 함께 인물들의 이야기는 므쉬킨 백작의 삶으로 각인된다. 하지만, 소설의 주인공인 므쉬킨 백작의 삶의 불후성은 전적으로 주변인물들에 의해서 인식되는 것이 아니다:그의 이야기는 ‘독자’에 의해서 불후성을 획득한다. 그가 비록 더이상 돌아올 수 없는 과거회상 속으로 사라진 것과 다르게, 그의 삶은 독자에 의해서 기억되고 잊혀지지 않게 되는 것이다. 잊을 수 없는 것이 불후한 삶을 인지하는 지표다, 즉 불후성이란 ‘기억’을 통해서 인지되게 된다. 그리고 더 나아가자면, 불후성이란 특성은 기억과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왜 불후하다는 것이 자연적인 영원성(산, 물, 바위와도 같은)이나 위대한 육신, 힘, 정신 과도 같은 미덕이 아닌 ‘기억하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일까? 이는 이렇게도 볼 수 있다:모든 물질은 사멸하는 운명을 타고났다. 그것은 열역학 제 2법칙에서 명시했듯이, 엔트로피는 끝없이 증가하는 방향으로 우주는 진행되며 결국 모든 것은 사멸하고 무한한 망각의 흐름속으로 사라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자연적인 영원성, 예를 들어서 자연의 법칙을 구성하는 수식은 우리가 이야기하는 ‘불후’의 개념에는 들어설 수 없을 것이다:불후라는 것은 썩지 아니함, 변하지 아니함이라는 어떤 ‘동적’인 개념이며 수식은 다르다:그것은 하나의 고정되어있는 법칙으로서, 그것은 이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렇듯이 변화하지 않을 것이다. 영원한 삶이란 것도 그렇게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조건이자 고정된 지점으로서, 살아있지 않은 무언가로서 작용할 것이다. 하지만, 불후성은 ‘무한한 과거 회상’에 의해서 획득되지 아니한다:므쉬킨 백작의 마지막처럼, 그는 돌아올 수 없는 과거회상으로 들어가 다시 ‘현재’로 돌아오지 않는다.


그렇다면 불후성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사라져버리는 망각의 거대한 흐름을 거스르는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사라짐에 대한 거부로서 무한한 회상에의 침잠으로 귀결되지 않는다. 기억으로 인해 획득되는 불후성이란, 현재에서 기억함으로서 획득된다:그것은 무한한 과거로의 회귀(음의 무한대)나 무한한 미래로의 나아감(양의 무한대)이 아니다. 이는 현재에 중심을 두고 그런 무한한 흐름의 멈춤을 선언하고 ‘기억’하는 것이다:그것이 바로 동사로서의 0의 시간이다. 그렇기에 단순히 정지되어 있는 0의 개념과 다르게, 0은 두가지 상반된 흐름의 긴장관계로서 존재하며 그것이 우리가 살아있는 현재이다. 그리고 버릴리오의 신이 세계를 인지하는 방식에 있어서 ‘멈춰있는 정적’인 시각을 이야기했다면, 션 큐빗은 인간은 불완전하기에 그런 전 시공에서 모든 정지된 정적인 시간을 인지하는 것이 아닌 상대적인, 찰나의 시간을 인지할 수 밖에 없다고 선언한다. 즉 션 큐빗의 0의 시간은 동사로서 이러한 지점을 갖는 것이다. 이러한 0의 시간을 잘 드러내는 지점이 바로 제임스 그레이 감독작 리틀 오데사의 마지막 장면이다.(6분 27초부터)





영화의 마지막 동생의 시체를 화장한 주인공은 병으로 죽은 어머니와 자신 대신 총에 맞아 죽은 동생, 그리고 자신이 같이 함께 앉아있는 장면을 상상(혹은 회상)한다. 그리고 다시 영화는 현실로 돌아온다:슬픔에 잠긴 그는 운전석에 앉아 있을 뿐이며, 카메라는 그를 천천히 클로즈업한다. 그는 과연 어느 시공에 있는 것일까? 미래? 과거? 그의 이야기는 회상하거나 앞으로 진행되지 않고 멈춰있을 뿐이다. 단순히 좋았던 과거로의 무한한 회귀도 아니며, 더나은 미래에 대한 무한한 긍정도 아닌 우울과 피로 속에서 그 둘을 멈추는 것. 이렇게 영화 리틀 오데사는 0의 시간을 구축한다.




그러나 0의 시간은, 신의 자리에서는 그것이 모든 시대에 동시에 현존하는 듯하지만 하나의 신은 인지할 수 없는, 인간의 원리이다. 그리고 신이 이를 인지하지 못하는 것은, 신은 스스로를 규정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오로지 그들의 존재가 불완전하고 타자화된 존재들만이, 오로지 객체가 된 자들만이, 다른 의미로는 비구분적인 것이, 그것이 바로 0이다, 그리고 그 0만이 시간 속에서 시간에 의존하는 것이 아닌 ‘살아갈 수’ 있다.

-션 큐빗의 [The Cinema Effect]


그렇다면 게임에 있어서 동사로서의 0의 시간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시 액션과 액션 사이의 간극, 버니홉의 표현에 따르면 조용한 시간에 대한 재발견으로 이어진다. 게임의 구성 자체로 보았을 때 조용한 시간이 갖는 의미란 액션을 부각하기 위한 비액션적인 지점으로 볼 수 있었지만, 그 조용한 시간이란 일종의 ‘소요’의 개념으로도 볼 수 있다. 아오야마 신지가 자신의 영화에 있어서 ‘삶의 노이즈’를 넣고자 한것 처럼, 이 조용한 시간은 네러티브에 의해서 앞으로 진행되어야 하는 유의미한 시간이 아니다. 이는 즐기기 위한 산책이자 무의미한 돌아다님으로서, 거기에는 목표가 없다. 목표없이 돌아다니는 소요의 시간이란 버니홉의 표현을 빌리자면 단순히 등산하듯이 돌아다니지만 그 자체만으로 즐거운 시간인 것이다.


그리고 게임에서의 소요는, 구성적인 측면에서 0의 시간을 뛰어넘는 동사적인 개념으로서의 멈춤을 내포한다. 그리고 이는 긍정/부정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는 0의 시간으로서, 그리고 비절대적인 우리가 현실을 인지하는 방식으로 상대적인 개념이자 영화적 0의 시간을 넘어선 역동적인 멈춤이다. 어떤 퀘스트나 스토리를 따라서 바쁘게 움직이는 것이 아닌, 경치를 바라보며 여행을 하는 소소한 즐거움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소소한 즐거움은 게임에 의해서 계획되고 짜여진 재미와 다른, 아니 그 이상의 기쁨을 찾아낼 수 있는 지점으로서 게임은 다른 매체에서 제공하지 못하는 독특한 경험을 게이머에게 제공한다. 이러한 베데즈다 RPG(폴아웃 3, 스카이림 같은)에서 명확하게 드러나는 지점이다:베데즈다 RPG의 특징들은 기본적으로 어떤 유의미한 점과 점을 따라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텅 비어있는' 공간을 전제로 자유롭게 이동하는데 의미가 있다. 이 텅비어있는 공간은 전적으로 '무엇이 앞에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는 하나의 가능성의 공간이며 동시에 아름다운 그래픽으로 구성되어 있는 '미학적'인 공간으로도 볼 수 있다. 하지만 메인 스토리 라인에 비하면 이 공간들은 대단히 성긴 구조에 기초하고 있는데, 이 공간이야말로 어떤 유의미한 '흐름이 유보된' 공간으로서 플래이어가 채워넣을 수 있는 공백인 것이다. 이는 '스토리'나 '게임의 진행' 과는 다른 새로운 경험을 창출해낸다:사람마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방식으로 이 공백을 체워넣을 수 있다는 점에서, 게임은 단순하게 획일적으로 전달되는 매체가 아닌 그 이상의 무언가가 된다.


하지만 이는 샌드박스형, 혹은 오픈월드 게임의 국한되어 있는 지점이 아니다:버니홉의 지적은 '플래이어의 자유'에 맡겨놓는 지점 이상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서, 바이오하자드 4의 스테이지들은 지속적인 액션과 공포를 주는데 주력하지 않는다. 오히려 유의미한 BGM이 아닌 무의미한 소음과 배경음들을 통해서 게임은 특유의 긴장감을 유지하며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게이머가 탐색할 수 있는 지점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이 무의미한 것처럼 보이는 공간은 단순히 액션을 강조하기 위한 비액션의 공간이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러한 공간들은 게임 내에서 독특한 긴장감을 만들어내며, 게이머가 그 긴장감을 즐기고 거기에 동화되어서 자신의 경험으로 체득할 수 있는 지점을 만들어낸다. 그것은 액션 시퀸스에 대한 게이머의 경험과는 다른 지점이다:액션 시퀸스는 어떤 의도된 공간이며 이를 풀어내는 방법은 그러한 의도에 부합하거나 그 의도 또는 룰의 헛점을 이용할 수 밖에 없다. 그렇기에 여기에는 결국 어떤 '균질한' 경험만이 존재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액션 시퀸스 사이에 존재하는 퍼즐과 탐색의 공간이자 무의미한 공간들의 존재란, 게이머가 그러한 의도에서 멈춰서서 긴장을 풀고 주변을 돌아볼 수 있는 경험을 제공한다. 그리고 그 지점은 오롯이 각각 게이머만의 경험이 된다. 


모든 이질적인 프레임들을 하나의 움직임으로 묶는 영사 슬라이드의 보이지 않으며, 인지불가능한 계속됨이란, 그럼으로 역설적인 지점에서, 차이의 계속됨, 0이란 공허가 아닌 모든 다름의 총합임을 드러낸다. 일시적인 차원으로서, 0이란 형용사도, 명사도 아닌 하나의 ‘동사’이다.

-션 큐빗의 [The Cinema Effect]



그 경험이란 독특한 형태의 불후성이다:게임은 이러한 0의 시간, 즉 소요의 시간을 통해 게이머의 기억에 독특한 형태의 각인을 세겨넣는다. 영화에서의 0의 시간이 부정/긍정 사이에서 멈추고 움직이기 않는 지점으로서의 힘의 균형, 동사였다면 게임에서의 동사로서의 0의 시간은 흐름에서 벗어나서 자신만의 추억을 만드는 지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게임이 네러티브에 의해서 밀려나가듯이 진행되는 빽빽한 매체였다면, 게임이 게이머에게 제공하는 경험이란 ‘균질’할 것이다. 하지만, 게이머가 액션을 강조하기 위한 비액션의 시공간이자, 동시에 게이머가 직접 채워넣는 빈칸인 공백의 시공간을 통해서 게이머는 게임의 경험을 오롯이 자신의 것으로 채워넣을 수 있는 지점을 갖게 된다. 물론 그러한 경험 역시 게임에 있어서 ‘만들어진’ 지점이다. 하지만, 그 경험이 의도되었다 하더라도, 그 경험이 갖는 가치는 부정당할 수 없을 것이다.




게임 이야기







*https://medium.com/korean-medium-post/ff0df30103f3 의 글을 블로그에 맞게 옮긴 글입니다.


콜 오브 듀티:모던 워페어의 성공 이후로, 소위 현대적 군대를 소재와 배경으로 하는 게임들이 많이 등장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들의 등장과 함께, ‘고증의 문제’라는 사실주의적인 문제가 부각되기 시작하였다:가장 대표적인 사례로는 콜 오브 듀티 시리즈에 대한 고증 문제를 들 수 있겠는데, 이하 링크로 걸어둔 엔하위키 항목을 봐도 충분할 것이다. 엔하위키의 항목이 저만큼 자세하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 게임에 대한 관심과 지명도, 그리고 그를 둘러싼 논란이 많다는 것과 게임의 ‘리얼리즘’에 대한 관심이 많다는 것의 반증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고증’의 문제가 불거지면서, 역으로 ‘치열한 고증’을 마케팅 포인트로 제시하는 게임들도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보헤미안 인터렉티브의 ARMA 시리즈의 경우에는, 기본적으로 ‘액션’이라기 보다는 ‘시뮬레이션’에 가깝다는 평가를 들으며(기존의 밀리터리 FPS에서 무시되었던 군장의 무게나 영점 조준의 중요성 등등) 매니악한 인기를 끌었으며, 콜 오브 듀티 시리즈의 대적자이길 자처한 배틀필드 시리즈의 경우에는 대규모 전장과 엄폐물 파괴효과, 다양한 장비와 탄도학 개념까지 들고오면서 콜 오브 듀티 시리즈를 정면으로 공격하며, 그러한 ‘리얼리즘’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지점(물론 그것이 ARMA 같은 시뮬레이션적 리얼리즘은 아니지만)을 만들어내기도 하였다.


(엔하위키, 콜 오브 듀티 시리즈의 고증 오류에 대하여. http://rigvedawiki.net/r1/wiki.php/%EC%BD%9C%20%EC%98%A4%EB%B8%8C%20%EB%93%80%ED%8B%B0%20%EC%8B%9C%EB%A6%AC%EC%A6%88/%EA%B3%A0%EC%A6%9D%EC%98%A4%EB%A5%98)


하지만 유념해야 하는 것이 있다:게임에서의 리얼리즘 논쟁은 그야말로 대표적인 ‘의미없는’ 논쟁 중 하나이다. 예를 들어, 배틀필드 4의 탄도학의 경우 거리에 따른 낙차와 조준경을 이용한 조준 수정의 경우, 그것이 탄도학의 ‘이론’을 반영하고 있더라도 그것은 ‘현실’을 반영하고 있지 않다. 어째서 배틀필드 4에서는 바람(풍향, 풍속 같은)을 고려하지 않는가? 또한 군인 개개인마다 엄격하고 기계적으로 교육을 받았다 하더라도, 그 개개인마다 생길 수 밖에 없는 차이라는 것은 실재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배틀필드 시리즈나 다른 밀리터리 슈터류의 멀티플래이의 경우, 그러한 격차는 사라진다:모든 병사의 신체적인 차이는 사라지고 균질화되며, 신체가 아닌 텍스처 덩어리로 구성된 기계에 기능적인 악세사리를 달듯이 무기를, 그리고 퍼크Perk라는 능력을 통해서 자신의 기능적 분신을 꾸민다. 그리고 개개인의 부상은 각자의 고유의 고통이나 경험이 아닌 마치 기계가 스스로 치유하듯이 일정 시간동안 피해를 받지 않으면 자동적으로 회복하며, 그 피해 입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피묻은 스크린과 헉헉 거리는 효과음을 통해서 드러난다. 이런 묘사들이 소위 게임에서의 ‘리얼리즘’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들은, 살짝만 고개를 돌려서 주위를 살펴보는 것만으로 쉽게 논파될 수 있다.


이러한 묘사의 특징들은 다음과 같은 명제를 전제하고 있다:게임은 ‘현실의 재구성’이다. 게임 제작이란 촬영하고자 하는 대상을 조밀하게 흟는 다큐멘터리나 개개인이 자신의 소소한 일상을 별다른 편집없이 유튜브에 올리는 것과는 다른 문제다. 영화나 카메라에 근거하고 있는 영상매체와 다르게, 게임이 구성되기 위해서는 그 기저에서부터 처음부터 ‘만들어져야’(그래픽적인 텍스쳐뿐만이 아니라 더 깊숙한 기저의식, 기획단계 등등에서)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제작자들은 현실을 게임으로 가져오기 위해서 ‘취사선택’을 할 수 밖에 없으며 그것은 현실 그대로의 매카니즘을 들고 오는 것이 아닌 ‘게임의 매카니즘’으로 재구축된다. 무엇이 이 게임에 어울리고, 무엇은 어울리지 않을까? 그것은 제작자의 생각을 따라(혹은 그가 생각하지 못한 지점에서) 현실을 끌어들이며 동시에 현실을 거세한다. 그렇기에 게임은 현실이 될 수 없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문제를 인지하고 있을 것이며, 게임의 리얼리즘에 대한 지적에 대해서 ‘뭐 그래서?’라는 반응을 보일 것이다:그렇기에 게임에서의 리얼리즘은 이제 의미없는 논쟁이 되었다. 하지만, 여기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게임이 얼마나(혹은 본질적으로) 현실에 근접하냐? 의 문제가 아니다. 왜 게임 회사들은 지속적으로 ‘현실’의 기제들-위에서 예를 들었던 배틀필드 4의 취사선택당한 현실로서의 탄도학 같이-을 집어넣는가? 의 문제이며, 그리고 이는 결국 왜 수용자(=게이머)들은 ‘리얼리즘’에 매료되는가? 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위에서도 지적을 하였듯이, 게이머들이 ‘게임=현실’이라 받아들인다고 주장하는 것은 너무 지나친 가정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들은 그것이 현실이 아니라는 것을 인지하면서도(최소한 어렴풋하게나마) 왜 거기에 매료되는가?


이와 관련해서 참조해야하는 지점이 있다. 발터 벤야민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영화관에서 영화를 소비하는 대중의 부류를 두가지로 분류하였다. 하나는 영화를 자신의 내부로 들고와서 소비하는 집단, 또하나는 영화의 안으로 들어가서 영화의 구조를 음미하는 집단. 하지만 이러한 영화에 대한 발터 벤야민의 분석은 ‘어떤 전제’를 깔고 있다:그것은 바로 영화-‘스크린’-관객이라는 시공간적인 ‘분절’이다. 영화는, 관객에게 있어서 철저하게 ‘외부적’인 이미지로 존재한다. 그렇기에 관객은 그 이미지를 소비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내부로 끌어들이거나, 혹은 자신이 그 속으로 들어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즉, 영화는 관객과 ‘연결’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게임은 어떤가? 게임은 본질적으로 ‘행위’의 매체이며, 게이머는 그것이 ‘형식적’인 차원에서나마 게임과 연결되어 있다. 그것은 게임-컨트롤러-게이머에서 컨트롤러라는 중간 매게자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게이머는 게임이라는 문법 내에서는 게임과 ‘결합’ 되어있다. 하지만 유념해야 하는 점은 게임과 인간이 결합되어있다 하더라도, 인간이 게임을 ‘현실’로서 인식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게임은, 위에서도 언급하였듯이, 필터링되고 재구성된 현실 또는 현실에 근거하여 구축된 가상으로서 게이머에게 ‘경험’과 ‘쾌감’을 제공한다. 그렇기에 몇몇 참전 용사들이나 군인들, 게임 혐오론자들의 비난(게임은 살인자 시뮬레이터다)는 그렇기에 게임에 대한 완벽하게 엇나간 비판이다:정상적이고 일반적인 게이머라면 게임은 완벽하게 현실이 될 수 없음을 ‘인지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결합’이야말로 게임이 갖는 최대의 강점이자 매력포인트며, 동시에 최악의 문제점이자 난점이다. 이러한 행위를 통한 결합이라는 특징은 전적으로 다른 매체에서는 쉽게 발견할 수 없는 특징이기에 게임을 비평하거나 분석함에 있어서 많은 문제를 야기할 수 밖에 없다.


(게임이 문법적으로는 게이머와 결합되어있는 것은 맞으나, 위에서 지적한대로 그것이 게임-현실을 혼동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결합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주목해야하는 지점은 게임은 어느 지점에서는 ‘이미 현실인척 하길 포기한 매체’로도 볼 수 있으며 게임이 발전하면 발전할수록 현실로부터 점점 더 유리된 무언가가 될 것이라는 것이다:게임의 그래픽과 표현은 과도한 광원과 특수효과, 그리고 극단적인 형태로 재구성되고 조합된 아트 스타일로 향해가고 있다. 이는 과거, CD-ROM 게임의 출현과 함께 고용량에 바탕을 둔 FMV-Full Motion Video, 실제 영상을 촬영하여 사용한 어드벤처가 어떤 대세가 되지 못하고 사장된 것과 연관이 있는듯 하다:게임의 문법과 FMV 사이의 어떤 괴리가 있었기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닐까? 재밌는 점은 FMV와 별개로, 사람의 자연스러운 모션을 캡처해서 그 위에 ‘텍스처’를 덧씌우는 형태의 게임 개발이 어떤 자연스러운 대세를 타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게임의 문법(행위와 결합으로서 게이머와 결합된 게임)과 ‘리얼리즘’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그것은 일종의 ‘포르노적 리얼리즘’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실제의 섹스와 포르노 속의 섹스는 완벽하게 다르다. 포르노는 ‘삽입’이라는 과정의 극단적인 클로즈업과 삽입-사정까지의 무한한 연장 등등 시공간의 ‘외설적’ 확대/연장에 기초하고 있다. 하지만 대중이 ‘섹스가 아니면서 그것을 섹스인 것처럼 인지하고 포르노를 소비하는 것’은 그것이 섹스가 아님을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다:대중이 포르노를 소비하는 가장 큰 원동력은 포르노가 섹스가 아님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포르노로 유희하기 위한 ‘대전제’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포르노는 보들리야르가 이야기한 시뮬라시옹과 많은 부분 유사점을 띈다:더이상의 원본(섹스)은 사라져 버린다, 중요한 것은 이미지(포르노)의 무한한 복제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 있어서 대중은 방조와 의도적(혹은 무의식적인?) 망각을 통해 이 무한한 시뮬라시옹을 완성한다.


게임에서 리얼리즘(최소한도로 축약하자면 밀리터리 슈터 게임에서 리얼리즘)을 찾는다는 것/혹은 그걸 토대로 게임을 만든다는 것은 이러한 포르노적 리얼리즘에 기초하고 있다:그것은 실제로 그것을 재현하는데 목표를 둔게 아니라, 대중이 2차적인 이미지를 통해서 유희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것은 현실이 아니지만, ‘현실인 척’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포르노적 리얼리즘을 영상 매체의 수용과 다른 방식, 게임이라는 매체의 문법적인 결합으로서 게이머는 즐긴다:이런 지점에서 게임에서의 리얼리즘은 여타 다른 매체에서의 리얼리즘과는 다른 방식으로 게이머와 소통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게이머들이 ‘그것이 얼마나 현실에 가까운가?’를 두고 리얼리즘 논쟁을 벌이는 것은, 그것을 ‘소비하는 또하나의 방식’이라 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유념해야하는 점은 게임의 리얼리즘이라는 측면이 포르노의 리얼리즘이라는 측면과 유사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완벽하게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게임이 추구하는 리얼리즘이란 다양한 형태로, 다양한 방식으로, 그리고 다양한 함의를 내포하고 있으며 얼마든지 다양한 방식으로 변화하고 재해석될 수 있다. 하지만 포르노의 리얼리즘이란, 전적으로 ‘섹스라는 이미지의 극단적인 반복/재생산’만이 존재한다. 그렇기에 포르노는 어떤 ‘비평’자체가 대단히 힘들다:수많은 작품들이 존재하더라도 그들은 모두 본질적으로 ‘동일하기’ 때문이다.


(이 칼럼에서 유념해야 하는 점은, 이제 ‘게임의 리얼리즘 논쟁’이란 많은 부분 사그라든 논쟁이라는 것이다:게이머들이 콜옵의 고증과 리얼리즘을 두고 싸우기를 포기하고, 마치 ‘피파 처럼 매년 나오는 정형화된 스포츠 게임’의 형태로 인지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더이상 게임에서-최소한도 밀리터리 게임에서-리얼리즘을 찾는 것이 의미가 없음을 인지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이 지나간 논쟁이 내포하고 있는 기저에는 이 글에서 지적한 이야기들이 깔려 있는게 아닌가? 라고 의심해보는 작업이다.)


(릿군님 코멘트:포르노 자체에 대한 분석을 통해 게임과 비교하기 보다는 포르노와 게임의 유사성, 글에서 이미 언급한 “취사선택”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현실을 모방하는 두 가지 매체는 “어떤 기준으로 현실을 모방하는가?”하는 문제가 게임의 현실성을 이해하는 핵심이라 생각합니다. 결국 양쪽 모두 판타지를 충족시키기 위해 필요한 조건을 현실에서 빌려오는 것이니까요. 그런 쪽으로 풀어가는 편이 더 이해하기 쉽지 않나 생각합니다. 굳이 포르노와 비교하자면 현실에서 원하는 성적 이상형이, 게임으로 치면 (현실에 영향을 받은 상상속)경험의 유사성과 비슷하지 않나… 대충 그런 생각이 듭니다.)





게임 이야기





*https://medium.com/p/ab0fae5b3a1c 를 블로그에 맞게 옮긴 글입니다.


정치신학에서 슈미트는 예외를 보편자보다 상위에 놓는 키르케고르를 인용한다. 예외는 강렬한 열정으로 보편자를 사유한다. 예외는 보편자보다 훨씬 뚜렷하게 모든 것을 드러낸다. 정상상황이 아니라 예외상황이 주권자의 본성을 명백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한병철의 권력이란 무엇인가? 122쪽


칼 슈미트는 ‘정상상황이란 예외를 통해서 규정된다’라고 보았으며, 법을 구성하기 위한 ‘주권’의 힘이란, 단순하게 법이 무엇인가를 선언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닌, 더 나아가서 ‘무엇이 법 바깥에 존재하는가’를 규정하는 힘을 갖는다라고 이야기하였다. 그리고 헤겔은 이를 가리켜 왕정에 있어 주권자인 왕이 무엇이 법규범인지를 선언하는 ‘예’와 법규범을 정지시키고 예외상황을 도출하는 ‘아니요’라는 두 단어로 주권이 형식을 지닌다고 보았다. 이렇게 본다면 위에서 키르케고르가 선언하였듯이 예외상황이야말로 주권자의 본질을 드러내는 지점이라 볼 수 있는 것이다. 왜 예외는 법이라는 울타리에 포함되지 않고 그 바깥에 있으라 선언당하고 내쫒겨지는 것인가? 왜 예외는 없어짐을 당해야 하는가? 이는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에서 주장했듯이, 무엇이 예외인지를 결정하고 이것들을 제거하는 것이야말로 ‘정상을 도출해내는’ 주요한 정치적 작업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섯번째 자유 그리고 게임…’(http://leviathan.tistory.com/1824)에서 지적한 것은, 게임의 형식과 네러티브가 제공하는 쾌감은 전적으로 위에서도 인용하였듯이 법 바깥에서 힘을 행사할 수 있는 힘, 법을 멈추게 만드는 ‘주권권력적’ 이라고 분석했었다. 즉, 게임의 쾌감이란 폭력Violance를 행사하여 타인에게 피해를 입히고 쾌감을 얻는 비도덕적인 새디즘의 차원이 아닌, 법 바깥에 존재하는 폭력Gewalt(발터 벤야민적인 개념으로서)을 휘두름을 통해서 내부의 질서를 지키는 동시에 그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쾌감, 즉 주권권력적인 쾌감의 문제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빨리 달리는 사람들은 두가지 부류만 존재한다

:경찰 또는 범죄자.

-니드 포 스피드:라이벌




니드 포 스피드 라이벌 역시 이러한 주권권력적 쾌감에 기초하고 있다:그것은 어떠한 물리적 형태의 폭력이 아닌 ‘과속’의 형태로 드러난다. 하지만 이 과속은 파괴를 위한 과속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카마겟돈과 같이 인간을 짓뭉게고 피떡으로 만들기 위한 비도덕적 쾌감을 향한 과속이 아닌, 전적으로 ‘과속’을 규정하는 ‘법’ 바깥에 설 수 있음을 증명하기 위한 과속인 것이다:사회가 만든 법, 제도의 틀 바깥에 무엇이 있는가 시험을 해보기 위해서는 게임에서 레이서가 독백하듯이 ‘한계가 있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한계를 넘어서야 한다’라는 것이다. 이 레이서의 증명의 이유는 ‘(나는) 태어난대로 자유롭다. 풀려났다’라는 선언에서 드러난다:그(=인간)는 태어난대로 자유롭지만, 사회라는 틀에 갖혀서 그 자유를 구속당한다. 그가 스스로 자유로운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그 틀을 넘어서야 한다. 그것이 자유의 실현이며 동시에 법을 멈추는 주권의 선언(나는 도로교통규범을 멈추고 내 자유를 실현하겠다)인 것이다.


그리고 이 자유는 정상운행자들에 의해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만약 게임에서 이들이 없었다면, 게임은 그저 텅빈 서킷을 놓고 경찰인척 하는 게이머와 레이서인척 하는 게이머 사이에서 벌이는 단순한 역활놀이에 불과했을 것이다. 하지만, 라이벌이 단순히 역활놀이를 넘어서서 어떤 ‘긴장관계’를 만들어내는 것은 바로 미친듯이 과속하는 플레이어들과 대비되는, 평범하게 주행하는 정상운행자들 때문이다:역설적이게도, 이들이 느릿느릿하며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게임 내의 돌발상황을 만들어내어 게이머들(경찰-레이서)을 긴장으로 몰아넣는다. 하지만 동시에 법규를 벗어난 과속과 대비되는 ‘법규 내에서’ 움직이는 정상 운행자들을 설정함으로서, 역설적으로 과속이 단순한 속도의 폭주 이상을 넘어서 ‘법규의 위반’을 의미하는 지점을 도출한다. 이러한 정상운행자들은 단순히 도로주행을 위험천만하게 만드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이들이야말로 규범내에 존재하기를 바라는 ‘일상’이며, 동시에 레이서가 틀을 부수고 뛰쳐나온 현실인 것이다. 그렇기에 레이서는 그들을 향해 ‘나는 당신들이 너무 무서워서 살지 못하는 삶이다’라고 선언한다. 그들 역시 자유롭지만, 그들은 그 한계를 넘어서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




인식이란 현실이다:법과 질서란 대중이 존재한다고 믿기에 가능한 것이다.

-니드 포 스피드:라이벌




하지만 이러한 레이서의 일탈은 역으로 경찰을 불러온다.


왜 경찰은 파괴를 목적으로 하며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닌, 법 바깥에 설 수 있는 레이서를 사냥하려 드는 것일까? 재밌는 점은 레이서가 경찰의 추적을 피해서 무모한 주행을 감행하면 감행할 수록 경찰이 운운하는 ‘공공의 안전’은 점점 더 위협받게 된다. 그것은 게임 내의 연출이 아닌 게이머의 ‘플래이’를 통해서 드러나는데, 경찰을 따돌리는 과정중에서 역주행은 기본이며 표지판에 머리를 들이받거나 반대편 차로의 주행자를 들이받는 등의 일들은 다반사로 일어나며 게이머로 하여금 스트레스와 아슬아슬한 짜릿함을 동시에 만들어내는 지점이기도 하다.


공공안전을 이야기하면서 레이서를 추적하며 그들과 함께 공공안전을 신나게 파괴하는 경찰의 목적은 사실 현재의 공공안전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다:그들이 레이서를 사냥하는 가장 중요한 목적은, 그들이 ‘법 밖에 설 수 있다’라는 가능성 하나 때문이다. 발터 벤야민의 폭력 비판을 위하여에서도 언급하였듯이(다섯번째 자유와 게임…칼럼에 인용한 부분 참조), 법의 수중에 놓여있지 않은 폭력은 법 자체에 대한 위협으로 작용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만약 대중이 법 바깥에 설 수 있는 ‘자유’의 존재를 발견하고 법 바깥으로 나가기를 선언해버린다면 법은 과연 ‘의미가 있을까?’ 그렇기에 법(경찰)이 법으로 남기 위해서는 예외(레이서)를 제거해야한다. 경찰이 ‘그 어느 누구도 해치려하지 않는 자들’(레이서들)을 사냥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그들이 법밖에 서는 것만으로 법 자체를 파괴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과속은 위험하다. 그리고 그것이 공공 안전을 위협하는 것또한 어느정도는 사실이다-게임을 해본 사람은 모두 동의할 부분이라 생각된다. 하지만 그러한 공공안전과 별개로, 공공안전이 우리가 추구해야하는 공공선의 모든 것인가? 이에 반대하는 가장 극론으로서, 멋진 신세계에서 매독에 걸리고, 추하게 늙으며, 죽어갈 권리를 주창한 것을 떠올려야 한다:이러한 극론의 존재와 거부감은, 역설적으로 우리가 ‘너무나 많은 가치를’ 공공선에 투자하고 있음에 대한 반증이라고도 볼 수 있다. 여기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공공안전을 무너뜨리고 아나키즘을 선언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공공안전이라는 미명하에서 우리는 응당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자유를 억압당하는 것이 아닌가? 혹은 우리가 공공안전을 멈추고 다양한 사유를 견지하기를 포기하고 공공안전의 폭주를 방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마치 경찰의 추적과 보호Pursue & Protect라는 슬로건이 갖고 있는 묘한 위화감 같은, 그런 지점들에 대해서 말이다.)




페이트는 나를 통해 그를 규정하려 하고 있다…..그리고 나는 그를 통해서 나를 규정할 것이다.

-니드 포 스피드:라이벌



법밖에서 뛰노는 자들로서, 경찰은 레이서를 잡기 위해 무력을 행사하며, 레이서는 경찰을 떨쳐내기 위해서 무력을 행사한다. 그리고 그들 모두 법 밖에 존재하는 자들이라는 공통분모를 지닌다. 물론 그들의 행동의 방향성은 아예 다르다:하나는 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또다른 하나는 그들을 법 안으로 끌어내리기 위해서 달린다. 또한 레이서가 레이서인척 하면서 도로 위에서 레이서들을 공격하는 잠복경찰을 판단하듯이, ‘그는 우리가 아니다’라는 선언처럼 이들이 도로 위에서 과속하는 본질적인 양태 자체도 차이가 난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그들은 대등한 폭력(과속)을 행사하는 자들로서 본질적으로 대등하며 서로 교류하는 지점이 존재한다.


그 교류란 바로 서로가 서로를 규정하는 지점이다:대등한 대립자Rival으로서, 그들은 상대방을 쓰러뜨리기 위해서 ‘상대방’ 그 자체가 되기도 한다. 게임 중 ‘경찰차를 이용해서 레이서 미션을 한다던가’, ‘레이서 차를 이용해서 경찰 미션을 한다던가’ 등의 경계 무너뜨리기의 시도인 것이다. 물론 게임 내에서는 어떤 최소한의 서사를 통해서 그들이 그래야하는(서로 사이드를 바꿔야하는) 이유를 제기한다. 하지만, 레이서가 ‘나는 너의 적이 아니다. 나는 너의 대립자Rival이다. 나는 네가 더 빨리 달리게 해줄 것이다. 나는 네게 목적을 주겠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레이서의 인식은 경찰과 레이서들의 싸움이 어떤 파멸적인 반목이 아닌 ‘서로가 서로를 규정하는 무언가’의 형태로 이해한다. 그리고 서로가 서로를 규정하는 것은 법 밖에 선 ‘무법자’들이 서로를 더 잘 사냥하기 위해서 ‘기능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넘어서, 법 밖에 서는 ‘무법자’들로서 닮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마지막 레이서가 제시한 ‘모든 갈등을 끝내기 위한 대화합의 장으로서의 그랜드 투어’의 형태로 드러나면서 의미심장해진다:레이서와 경찰 모두에게 도전장을 던진 제퍼(레이서측 주인공)는 결국은 과속의 대가(죽음)를 치루고 만다. 하지만 그의 죽음으로 끝난 것처럼 보이는 레이스는, 경찰이 그의 대사를 이어받으면서(나는 너를 더 빠르게 달리게 하고, 네게 목적을 주겠다. 그리고 너를 유명하게 만들어주겠다) 모든 레이서들에게 도전장을 던지면서 게임은 끝을 맞이한다. 즉 경찰이 레이서의 탈을 썼을 때 썼던 레이서 가명 F-8(F-Eight, FATE), 즉 운명 같은 결말로서 그는 경찰을 그만두고 레이서가 된 것이다. 이는 과속이라는 법 바깥에 서는 것을 통해서, 서로는 서로를 규정하며 그 결과 그들은 서로 동일하게 변해버리고 만 것이다.




사람들은 이야기한다:과속은 네 목숨을 위협할거라고. 하지만 과속하지 않는다면, 그 삶은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니드 포 스피드:라이벌


게임 이야기




개인적으로 기대하고 있는 3월 발매작, 인퍼머스 세컨드 썬 입니다.




...글은 차곡차곡 쓰고 있습니다. 책읽을게 너무 많아서...


그외에 텀블러를 트위터 관심글 찍어놓은거랑 어떻게 연동을 해서


새롭게 글쓰는 버릇들일까 하는데 잘될지는 모르겠네요. 








게임 이야기






*https://medium.com/p/b34b2b11e2f5 를 블로그에 맞게 옮긴 글입니다.



“자넨 구세주가 아냐. 자네의 재능은… 좀 다른 영역에 있지.”

-스펙 옵스:더 라인



다섯번째 자유와 게임( http://leviathan.tistory.com/1824 )에서도 언급하였듯이, 게임이 주는 자유의 쾌락은 많은 지점에서 ‘무엇이 예외이고 법인지를 선포하는’ 주권권력과 맥이 닿아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거기서도 지적은 하였지만, 주권권력적인 게임의 자유에 있어서 ‘폭력’은 수단이지 목적은 아니며, 게이머는 그 폭력을 자유롭게 점유하고 휘두를 수 있다는 점에 매료되며, 동시에 그것이 기존의 질서를 지킨다는 점에서 심리적 방패를 얻게 된다. 하지만, 이런 주권권력적인 폭력에 의하여 게이머는 점점 자신이 휘두르는 폭력이라는 메소드 자체에 무감각해진다:하지만 그것은 사람을 절단내고 토막내는 행위에 무감각해진다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결정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것인지, 그리고 게임의 스토리가 게이머를 아늑한 결말과 안전한 이야기로 이끌어가기에 눈치채지 못했던 지점들이 분명하게 존재하며 게이머는 이에 대해서 무감각해지는 것이다.


스펙옵스:더 라인이 게이머를 끌어들이는 지점은 바로 이 지점이다:스펙옵스가 인용하고 있는 텍스트는 명백하게도 조셉 콘라드의 ‘어둠의 핵심’과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지옥의 묵시록’이다. 하지만 스펙옵스:더 라인이 스토리에 있어서 명백한 인용을 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지니고 있는 파괴력은 ‘인용’의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다.


근 10년 동안 분명한 조류로서 성장하고 있는 밀리터리 FPS에 대해서,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 모든 게임들이 ‘다섯번째 자유와 게임’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주권권력적인 자유라는 테마를 이용해서 게이머를 매혹시켰다면, 스펙옵스는 역으로 그 주권권력적 자유가 갖는 파괴적인 속성에 초점을 맞춘다:주인공은 명령을 하달하는 상급기관과 떨어져서 독자적으로 결정하고 판단하며 임무를 수행한다. 하지만, 구조 임무로 두바이에 파견되었던 그들이 게임 막바지에서는 두바이의 생존자들을 식수망을 끊어 갈증속에 죽게 만들었으며, 33연대의 미군들을 모조리 학살하는 기염을 토한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두바이에서 생존자 구출 및 수색 임무를 맡았던 그들이 왜 두바이의 학살자로 변모한 것일까? 왜 선의로 시작된 임무가 명백한 악의와 광기로 물들어서 파국적인 결말을 맞이하게 되는가?



이건 내 잘못이 아니야.

강한 자는 자신 앞의 정의를 외면하곤 하지.

-스펙 옵스:더 라인



스펙 옵스:더 라인의 스토리의 진행은 전적으로 주인공의 ‘독단’에 의해서 진행된다. 이 ‘결정’은 두바이의 모든 상황을 ‘자의적’으로 재규정한다:처음 33연대와 조우하고 그들을 쏴죽이자, 주인공은 그들을 ‘탈영병이자 임무를 저버린 자들’로 규정한다. 부하의 항변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의 ‘결정’에 의해 백린 박격포로 33연대와 민간인을 태워죽여버린 뒤, 그는 이 모든 일은 콘라드 대령에게 있다고 선언한다. 스토리에 있어 가장 중요한 지점들에서, 주인공의 결정은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끼치며 그리고 사태를 더욱 엉망으로 만들어버린다.


스펙 옵스:더 라인의 스토리는, 아도르노가 지적하였던 서구문명이 등장하는 과정으로서의 신화 ‘오딧세이’의 완벽한 역이라 할 수 있다. 오딧세우스는 집으로 돌아오는 과정에 있어서 다양한 광기와 예외상황들, 그리고 무엇보다 ‘신화들’과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영웅인 그는 그것들(신화)을 극복하고 규정하면서 새로운 ‘계몽’을 집으로 가지고 돌아온다. 하지만 아도르노가 지적한 계몽의 변증법에 따라, 계몽은 절대적인 존재로서 다시 하나의 ‘신화’가 된다. 하지만 스펙옵스는 오딧세이아의 반대다:영웅은 안락한 집(미국)을 버리고 광기와 폭력이 휘몰아치는 신화의 세계(폐허로 변한 두바이)로 들어선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 세계를 규정하고 결정하는 과정중에 광기와 폭력에 동화되어 스스로 모든 것을 파괴하는 ‘신화’가 된다.


그리고 그러한 영웅의 몰락, 안전했던 문명이 해체되어 파멸뿐인 신화가 되어가는 과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동력은 그의 ‘결정’이다. 하지만 스펙옵스가 바라보는 지점은 주인공을 넘어서, 더 깊숙한 지점인 ‘플레이어’에게로 시선을 옮겨간다:조금이라도 멈춰서서 생각해봤다면 이상했을 지점을 왜 그는 멈춰서지 않는가? 그리고 왜 게이머는 계속해서 이 끔찍한 이야기를 계속 진행하는가? 그의 주권권력적 독단 뒤에 숨어있는 가장 어두운 욕망이자 이 모든 사태의 원흉, 그것은 바로 ‘영웅이 되고 싶어하는’ 공명심이며 게임이 공격하는 지점 가장 집중적으로 파고드는 지점이기도 하다. 게임 말미에 로딩창에 게이머를 ‘직접적으로’ 공격하는 로딩 메세지들(이제 만족했냐? 이게 다 너때문이야 등등)과 마지막 콘라드의 환영이 질책하는 것처럼, 게이머는 자신의 영웅심리를 위해서 이야기에 뛰어든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이야기가 공격하는 것은 그의 영웅심리이자 홀로 폭력을 행사하는 강력한 주권행사자가 원인임을 넘어서 멈추지 않는다는 것의 파괴성이다:너는 멈출 수 있었지만 멈추지 않았다, 또는 언제나 다른 방안은 존재한다고 항명하던 주인공의 부하의 말을 듣지 않은 결과는 파국적임을 게임은 암시한다. 그것은 제한도, 책임도 없이 오로지 ‘자신에게서 시작되며 누구도 막을 수 없지만 전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멈추지 않는 주권에 대한 이야기다.


그러나 폭력은 단순한 메소드가 아니다. 이 점에서 스펙옵스는 폭력에 대해서 정확하게 고찰하고 있다:폭력은 인간을 물들이며 인간의 사고와 행동 역시 폭력에 맞게 변화한다. 그리고 주인공과 그의 부하들은 더이상 감당할 수 없는 상황 아래서 자신들을 폭력에 맡겨버린다. 게임이 진행되면 될수록, 그들의 몰골은 처참해지며 그들의 언어와 행동은 점점 과격해진다.



집? 우리는 집에 갈 수 없어. 우리 같은 사람들은 반드시 넘는 선이 하나 있거든. 만약 운이 좋다면, 임무를 다한 뒤에 죽는 것이지. 그래… 내가 원했던 것은 말일세, 대위. 평화뿐이었다네.

-스펙 옵스:더 라인



스펙옵스 더 라인이 대단한 것은 게임이 내세우는 자유의 매력을 게임이라는 시스템을 이용해서 정공법으로 공격하고 있다는 점이며, 많은 부분에서 그 공격은 성공적이다. 물론 게임의 재미가 미묘하다는 점은 상당히 미묘하지만 말이다.



게임 이야기








제 마음속의 올 상반기 기대작 중 하나인 다크 소울 2의 트레일러입니다.






...제가 블로그에 트레일러 영상을 올리는 것은 지금 현재 글을 새빠지게 치고 있으나

금방 보여드릴 수는 없다는 의미로 받아들이시면 됩니다.

요즘 워낙 바쁘게 살다보니 글 쓰는데 있어서도 계획을 세우고 치는지라...






게임 이야기/게임 리뷰




*PS4 버전 기준으로 쓰여진 리뷰입니다.


솔직하게 이야기하자면 레이싱 장르는 이제 메이저한 장르에서 벗어났다고 볼 수 있다:물론 레이싱 장르는 RTS 같은 나락으로 떨어진 장르는 아니다. 시뮬레이션 레이싱이라 불리는, 자신이 몰 수 없는 슈퍼카들을 최대한 실제에 가깝게 조작할 수 있는 컨셉의 게임들이 인기를 끌고 십만원 이상을 호가하는 레이싱 전용 컨트롤러도 같이 판매하는 등 레이싱 장르 자체가 완전히 쇠락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러한 '시뮬레이션'적인 성격이 가까워지면서 레이싱 장르는 점점 '하는 사람만 하는' 게임이 되어버리고 말았다:시뮬레이션적인 부분을 강조하면 강조할 수록, 가장 '이상적인 주행'이라는 정답이 생겨나게 되며 이것이 '가장 기계적으로, 그리고 효율적으로 수행하는 것'이 게임의 핵심 요소가 되어버리면서 초심자들이 진입하기 힘들게 되는 문제가 발생하게 되버린다.[각주:1]


하지만, 니드 포 스피드:라이벌은 그러한 지점에서 벗어나있다.[각주:2] 니드 포 스피드:라이벌이 추구하는 바는 트랙이라는 통제된 환경에서 벌이는 완벽한 주행이 아니다. 경찰과 레이서, 추격자와 추격 당하는 자의 이분법적인 세계가 도로를 지배하며, 동시에 서로가 게임 속에서 따로 노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의 게임 플래이를 규정하는 기묘한 공생/갈등 관계를 구축한다. 물론, 라이벌이 만들어내는 게임 시스템은 전적으로 니드 포 스피드 시리즈들의 전작에 많이 기초하고 있다:경찰-레이서 대립구도를 이용한 핫 퍼슛 모드[각주:3]라던가, 게임 자체가 기반하고 반 오픈월드적 세계[각주:4]라던가 등등은 이미 전통적인 니드 포 스피드 시리즈에서 구현된 것들이었다. 하지만 라이벌이 데뷔작인 고스트는 번아웃 등으로 명성을 쌓은 크라이테리온 등등의 잔뼈굵은 시리즈 전통의 제작사들의 시리즈 작품들에서부터 장점들을 가져오면서, 동시에 그것들을 단순히 수용하는 것을 넘어서 깔끔하게 다듬고 발전시키는데 주력하였으며 이는 매우 성공적이라 평할 수 있다.


레이싱 게임에 있어서, 자동차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도로'라는 공간이다:레이싱이라는 사건이 일어나는 도로라는 공간을 어떻게 그려내느냐에 따라서, 레이싱 게임이 추구하는 바는 명확하게 드러난다. 예를 들어보자:스플릿 세컨드라는 작품이 있었다.[각주:5] 이 작품은 고정되어있으며 완전한 주행을 위한 트랙이라는 공간을 비틀어서 '폭발물과 트랩으로 가득차버린 위험천만한 테마파크'로 바꿔버린다. 스턴트 쇼를 위해서 도시 하나를 통채로 사들여서 세트장을 만들었다는 설정으로부터 시작하는 스플릿 세컨드는 그 폭발물들의 트리거를 레이서들에게 맡겨버림으로서 더이상 트랙은 완전한 주행을 위한 공간이 아닌, 시시때때로 레이서들을 위협하는 위험천만한 공간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오히려, 이렇게 완벽한 주행, 얼마나 깔끔하게 주행을 할 것인가의 문제가 아닌 어느 지점에서 뒤에서 따라오는 상대방이 폭발물을 가동할 것인가, 그리고 트랙을 바꿈으로서 나 또는 상대방이 어떤 이득을 볼 것인가 라는 지극히 '심리전'적이며 '대인전'적인 문제로 회귀하게 된다. 역설적이게도, 트랙이 더이상 완벽한 주행의 '재현'을 위한 공간이 아니게 되자, 게임은 원래 맞춰졌어야 했었던 '경쟁'의 문제로 회귀하게 된다.


그렇다면 니드 포 스피드:라이벌은 어떠한가? 물론 라이벌이 보여주는 도로 공간의 개념은, 스플릿 세컨드가 보여주었던 '혁명'(트랙이 문제면 트랙을 박살내 버리자!)과는 다소 거리가 멀다. 오히려 라이벌이 만들어내는 도로는 다양한 면모를 가진 현실의 축소 모조품이다:자동차들은 평화롭게 도로를 달리며, 해변과 사막에서부터 눈내리는 설산까지 다양한 파노라마를 보여준다. 하지만, 이 평화롭고 다체로운 공간은 시속 300km 남짓으로 질주하는 레이서와 레이서를 잡겠다고 비슷한 속력으로 바짝 따라서 질주하는 경찰의 존재로 인해서 기묘한 세계로 탈바꿈하게 된다. 레이서나 경찰이나, 어느쪽이든 처음으로 경험하는 것은 바로 게임에서의 도로가 통제가 되지 않아서 대처하기 힘든 공간이라는 점이다:아마도 코너링에 익숙해지기 시작하면 가장 난감해지는 지점이 바로 앞서서 평범한 속도로 주행하거나 반대측에서 주행하는, 혹은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에서 등장하는 차량들에 부딪히는 것일 것이다. 그리고 게임에 익숙해져서 능숙하게 게임을 풀어나가게 되더라도, 이 정상주행을 하는 차량들의 존재로 인해서 게임은 여전히 어려우며 레이서의 경우에 있어서는 까닥 잘못 했다가는 힘들게 모아왔던 포인트를 한꺼번에 날려버린 계기가 되어버리기도 한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정상주행자들 덕분에, 게임은 기묘한 해방감을 플래이어들에게 제공한다:그들은 도로교통 법규를 초월한 존재들인 플래이어(경찰이든 레이서든 간에)를 부각시키기 위한 '일종의 풍경'으로 작용한다.[각주:6] 또한 라이벌에서의 도로는 정상주행자들로 인하여 완벽하게 통제된 공간이 아니게 되며, 변화무쌍하며 플래이어의 상황에 따른 능동적인 대처를 요구하는 공간으로 변모한다. 그리고 전반적으로 게임은 '아슬아슬한 감각'을 대단히 강조하는데, 기본적으로 정상주행자라는 장애물을 피하는 행위에 점수를 부여하는 인센티브를 부과하는 한편, 특히 레이서의 경우 자동차가 부서져서 은신처로 돌아갈 시에 점수가 초기화 되는 등의 크나큰 불이익이 따르기에 정상주행자를 더욱더 조심해야하고 피해야하는 긴장의 포인트로서 작용되기도 한다.[각주:7] 


이런 통제불가능한 도로의 상황으로 인해서, 게임은 더이상 '완벽한 주행'을 위한 공간이 아닌, '항시 위험과 긴장이 지배하고 있지만 동시에 자유로운 공간'으로 변화한다.[각주:8] 플레이어의 주행은 더이상 완벽한 주행을 향한 주행이 아니다. 도로를 주행/역주행하면서 맞부딪히는(정상주행자들) 위협들을 아슬아슬하게 피하며, 자신의 라이벌을 추격하거나/따돌리는 것이 주행의 목표가 된다. 그렇기에 라이벌의 주행은 전적으로 탈출과 추격, 해방과 규율이라는 서로 대비되는 카타르시스가 레이서/경찰 플래이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그리고 제작사는 이러한 라이벌의 특징들을 '반 오픈월드'라는 공간을 통해 더욱 구체화시킨다. 


라이벌의 오픈월드는 전통적인 면의 개념이 아닌 '도로'라는 선의 개념이며, 동시에 플레이어가 체험할 수 있는 이벤트들은 한정되어 있다. 그리고 플레이어가 이벤트와 이벤트 사이를 이동하면서 할 수 있는 행위는 극도로 제한되어 있다.[각주:9] 하지만 게임은 그 이동을 단순한 이동으로 만들지 않는다:라이벌의 도로는 경찰과 레이서라는 서로 대립되는 두개의 세력이 지배하는 공간이며, 레이서는 경찰로부터 도망치며 경찰은 레이서를 잡아야 한다. 하지만 이는 단순하게 이벤트-비 이벤트의 구분을 넘어서 게임 플래이 내내 적용되는 규칙이다:예를 들어, 레이서 게이머가 레이싱 이벤트를 하다가 경찰에게 걸리면 그 즉시 경찰은 게이머를 추격한다. 동시에 경찰이 이벤트 도중에 레이서와 조우하면, 역으로 경찰은 이벤트 중이라도 레이서를 잡을 수 있다. 이렇게 어떤 무엇을 하더라도, 경찰이나 레이서는 서로의 플래이에 있어서 경계를 넘어서 자연스럽게 상대방의 플래이를 침범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렇기에 게임은 이벤트-비 이벤트-이동의 구분을 넘어서 방심할 수 없는 긴장관계가 지배한다:경찰은 경고 없이 플래이어를 사냥하며, 레이서는 플레이어가 예측하지 못하는 곳에서 튀어나와서 도망친다. 


그렇기에 다소 심심한(?) 구성임에도 불구하고, 라이벌의 게임은 절대로 느긋하지 않다. 그리고 게임은 이러한 경쟁을 부추기듯이 상대방 차량과의 충돌을 넘어서, 카트류 레이싱에서 볼 수 있을 법한 다양한 가제트들을 이용해서 상대방의 진로를 방해하는 그런 치열한 경쟁이 존재한다. 하지만, 라이벌에서 긴장을 형성하는 지점은 그러한 경쟁의 지점에서 온다기 보다는 게임이 만드는 '보상 시스템'에 기초한다. 레이서는 도로에서 과격한 주행을 하거나 이벤트를 할때마다 점수를 얻는다. 점수를 얻으면 얻을 수록 수배 레벨(히트레벨)이 올라가게 되는데, 이 수배 레벨은 원래 얻는 점수를 배로 늘려준다. 하지만 동시에 점수를 얻을때마다 경찰들의 추격들이 강해지면서 플래이어가 받는 압박도 심해지게 된다. 가장 중요한 지점은, 어떤 식으로든 강제로 차고로 돌아가는 경우(채포당하거나/차가 부서지는 경우)에는 레이서가 그때까지 모아왔던 점수는 '초기화'된다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라이벌의 보상구조는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의 구조라 할 수 있다:게임을 진행하면 진행할수록, 게이머는 더 높은 점수를 쉽게 획득한다. 하지만 동시에 얻은거 보다 더 쉽게 점수를 잃어버릴 가능성도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레이서 측의 주행은 주행 자체의 짜릿함을 넘어서 높은 점수를 얻기 위해서 더더욱 무모해지며 아슬아슬한 한계까지 자신을 밀어붙인 뒤에 추격을 뿌리치고 무사히 은신처로 귀환하는 카타르시스와 보상이 대단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레이서의 경우에는 크게 번다/점수를 잃는다 라는 극단적인 형태로 게임이 구성되어 있지만, 경찰의 경우에는 차가 부서져도 점수를 잃을 일이 없기 때문에 레이서가 느끼는 심적 압박이 적다고 볼 수 있다.[각주:10] 하지만, 경찰 역시 자신의 '먹이'인 레이서를 사냥하는데 있어서의 추격의 쾌감은 레이서 만큼은 아니지만 상당하다고 할 수 있다:레이서가 자신의 점수를 지키기 위해서 전력으로 질주하기 때문에, 어설프게 따라잡아서는 레이서를 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레이서가 무모해지면 무모해질수록, 경찰도 함께 무모해진다. 그렇기에 경찰이든 레이서든 게임의 전반적인 플래이는 아슬아슬하고 무모하며, 동시에 치명적인 매력을 보여준다.


니드 포 스피드:라이벌은 멀티-싱글의 경계를 허문다:올드라이브 시스템의 기본적인 개념은 레드 데드 리뎀션과 비슷하게, 거대한 오픈월드에서 서로 만나고 부딪히며 경쟁하거나 혹은 각자 자기 할일만 하면서 놀 수 있는 시스템이다. 기본적으로 호스트가 방을 잡고, 그 속에 게이머들이 참가하는 시스템이며 이 시스템이 가장 빛을 발하는 지점은 바로 플래이어들이 경찰과 레이서로 만나서 서로 잡으려고/잡히지 않으려고 치열하게 발버둥을 치는 지점이 될 것이다. 하지만, 올드라이브 시스템 자체가 매력적이긴 하지만 치명적인 문제점을 갖고 있는데, 이는 기본적으로 도로가 넓다 보니까 서로 만날일도 적을 뿐더러 보통은 친구나 아는 사이가 아니면 서로 소통도 하지 않은체 자기 할일만 한다는 것이며 그렇기에 서로 작정하고 부딪히려고 하지 않는 한에는 부딪히는 일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다크 소울처럼 멀티-싱글의 경계를 허물어서, 상대방 세계에 침입하고 또는 내 세계에 침입한 상대방하고 경쟁하는 그런 시스템이었다면 어떤 의미에서는 게임의 컨셉을 더 잘 살리지 않았을까 라는 아쉬움이 생기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단점에도 불구하고 게임의 멀티-싱글플래이 시스템은 매력적이며, 여전히 재밌는 지점이 많다.


라이벌의 스토리는 가벼운 소재와 암시로만 제시되는 개연성의 연속이다:게임 플래이는 게임 스토리를 드러내지 않는다. 오히려 스토리는 영상으로 짤막하게 소개될 뿐이며, 케릭터나 드라마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니드 포 스피드:라이벌의 스토리는 멋드러지는 대사와 도로의 무법자-도로의 사냥꾼의 라이벌 관계에 대한 시적인 암시를 던짐으로서 상당히 매력적이고 의미심장한 지점을 만들어낸다(이는 기회가 된다면 다른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배틀필드 4에 쓰인 프로스트바이트 3 엔진은 라이벌에서도 새끈한 이미지를 자랑하며, PS4에서는 차세대 다운 아름다운 그래픽을 보여준다. 혹자는 배틀필드 4 래이싱 버전이라고도 하는데, 게임에 쓰인 엔진 자체가 동일하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기도 한다. 다만, 라이벌은 오픈월드 게임 다운 버그가 많다고 볼 수 있는데 특히 물리엔진 때문에 튕겨져 나가 이상한 곳에 낑겨서 아무것도 못하는 버그가 종종 발생하는 것을 보면 살짝 아쉬움이 든다고 하겠다.


결론적으로 니드 포 스피드:라이벌은 혁신적인 게임은 아니다:기본적으로 위에서 언급한 대다수의 것들은 기존의 니드 포 스피드 시리즈에서 등장한 개념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니드 포 스피드 라이벌은 정말로 잘 다듬어진 게임이며, 대단히 재밌는 게임이다. 니드 포 스피드:라이벌은 하이 리스크-하이 리턴의 구조로 짜여져 있는 게임의 보상 체계와, 아슬아슬하게 피하면서 계속 달리고 싶게 만드는 중독적인 게임 플래이가 매력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드 포 스피드:라이벌은 런칭작들 중에서 차세대의 성능을 십분발휘하고 있는 작품이며 차세대 콘솔인 PS4를 구매할 때 같이 사는걸 추천할 수 있을 정도로 재밌는 작품임은 확실하다.





  1. 물론 많은 레이싱 게임들은 이를 인지하고 고치려고 많은 노력을 하고 있으며, 실제로도 그러한 노력은 성과를 거두었기에 시뮬레이션 레이싱 장르가 수백만장을 팔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고 본다. [본문으로]
  2. 보통 레이싱 게임 장르를 하는 사람들이 구분하는 레이싱 장르의 구분, 시뮬레이션-아케이드-마리오 카트류에 있어서 니드 포 스피드 시리즈는 전통적으로 아케이드 레이싱의 장르에 들어가있다. [본문으로]
  3. 1998년작 니드 포 스피드:핫 퍼슛. [본문으로]
  4. 2010년작 크라이테리온이 만든 핫 퍼슛. [본문으로]
  5. http://leviathan.tistory.com/1290 [본문으로]
  6. "나는 당신들이 살기 두려워하는, 자유로운 삶이다"-레이서 측의 스토리 동영상 대사 [본문으로]
  7. 경찰 역시도 비슷한데, 이런 정상주행자들에 부딪히는게 데미지를 입혀서 그들도 폐차당해 차고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8. 하지만 이런 공간이 '일상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은 거대한 역설이다. 이는 차후에 칼럼으로 다루고자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본문으로]
  9. 헤드 투 헤드 이벤트, 또는 추격. [본문으로]
  10. 전반적으로 경찰측은 좀더 게이머가 편하게 게임을 접근할 수 있게 배려된 사이드라 볼 수 있다. [본문으로]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스포일러 있습니다.


도쿄의 고급스러운 바에서 돈을 받고 남자들을 상대하는 아키코(타카나시 린)는 그녀의 비밀스런 일상을 모른 채 그녀에게 집착하는 남자친구 노리아키(카세 료)로 인해 쫓기듯 불안한 하루하루를 보낸다. 어느 날 밤, 오랫동안 알고 지낸 히로시로부터 누군가의 집을 방문하라는 제안을 받게 되고, 아키코는 그곳에서 노교수 타카시(오쿠노 타다시)를 만난다. 오래 전부터 자신을 아는 듯 대하는 타카시와 이야기하며 편안함을 느낀 아키코는 자연스러운 대화를 이어가며 하룻밤을 보낸다. 다음 날, 아키코를 학교에 데려다 주던 길에 타카시는 우연히 노리아키를 만나게 되고, 두 사람의 관계를 의심하는 노리아키의 집요한 시선이 주변을 맴도는데…(네이버 영화 시놉시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영화 사랑에 빠진 것처럼은 기묘한 영화다. 제목인 '사랑에 빠진 것처럼' 때문에 영화 내용이 마치 누군가 사랑에 빠지고 그것이 성공/실패를 하는 과정을 보여줄 것처럼 기대되지만, 정작 영화는 24시간도 채 되지않는 짧은 시간동안의 이야기를 다루며, 러닝타임 동안 인간들 사이의 관계는 어떠한 결과에도 도달하지 못하고 오히려 파국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영화 제목인 사랑에 빠진 것처럼과 별개로, 영화는 전적으로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하지만 관객들은 이 모든 것이 파국적인 결말에 도달한 이후 나오는 엘라 피츠제럴드의 '사랑에 빠진 것처럼'을 삽입하면서 이 제목에 숨겨진 의미를 깨닫게 된다:곡의 우아함과 아름다움 뒤에 숨겨져 있는, 영화 전반에 깔린 감독의 냉소와 악의에 대해서 말이다. 


사랑에 빠진 것처럼이 보여주는 시공간은 전적으로 도시문명의 그것과 일치한다:오프닝 시퀸스에서 시작되는 도회적이고 깔끔한 바의 이미지와 그 후에 이어지는 노교수의 집으로 가는 길까지. 하지만, 영화는 도시문명의 파노라마를 보여주는데 초점을 맞추지 않고, 오히려 가장 내밀한 형태의 공간-자동차나 집이나 방 같은-에 초점을 맞춘다. 특히 아키코가 자동차에 앉아 피곤한 몸을 기대고 바깥의 화려한 네온사인을 바라보는 장면들이나 자동차를 타고 움직이는 지점에서 드러나듯이, 영화는 자동차라는 공간 내부에서 자동차 바깥을 바라보거나 혹은 자동차 바깥에서 오로지 자동차 내부만을 보여주는 식의 영상 연출을 보여줌으로써 이 작품에서 거대한 도시문명은 사라지고 내밀한 개인의 이야기만 남게 된다. 또한 타카시가 '전화'라는 수단으로만 바깥 세계와 소통하는 지점도 그런 분절적이며 내밀한 시공간을 드러내는 지점이라 볼 수 있다.


영화는 이 개인들의 내밀한 공간으로 시선을 돌림으로서, 이들의 관계에 초점을 맞춘다:하지만,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인물들이 만나서 화학적으로 변화하는 것이 아닌, 동어반복적인 언어의 사용을 통해서 자신만을 드러내는 것 뿐이다. 처음 타카시와 만난 아키코가 그와 벌이는 대화의 형식에 주목해보자. 타카시는 끝없이 거실이라는 공간에서 서서 저녁을 먹자고 주장하며, 아키코는 침실로 들어가서 졸리니 자자는 이야기를 반복한다. 하지만, 그것은 소통이 되지 않아서 생기는 갈등으로 이어지지 않으며, 어디까지나 동어반복적인 이야기들이 계속해서 반복되다가 결국 소통에 대한 포기(타카시가 저녁을 포기하는 걸로)로 이어지게 된다. 이 장면에 있어서 '타카시의 집'이라는 공간을 공유하는 아키코-타카시마저도, 거실과 침실이라는 공간에 따로 존재할 뿐이며, 심지어 같은 침실에 있을 때조차 타카시는 의자에, 그리고 아키코는 침대에(또한 그녀는 TV에 비쳐진 이미지로만 존재할 뿐이다) 있을 뿐이다. 


그리고, 아키코의 남친인 노리아키가 타카시와 처음 만나는 장면을 보자:여기서도 노리아키와 타카시는 타카시의 차라는 공간을 같이 점유하면서도 조수석과 운전석이라는 별개의 공간에 머무른다. 그리고 영화는 지속적으로 이들을 다룰때 '분절적인' 컷으로 각자의 이야기에 침잠하게 만든다. 이 장면에서 노리아키는 거의 정신병적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여자친구인 아키코에 대한 집착과 망상(결혼 하면 거짓말을 할 수 없게 된다 라는)에 사로잡혀 있는데, 노리아키-타카시의 대화에 있어서 서로가 만나거나 합의할 수 없는 평행선을 끊임없이 그릴뿐이다. 심지어 타카시와 노리아키가 타고 있는 승용차에 아키코까지 가세하는 장면에서, 각자 운전석-조수석-뒷좌석이라는 각자의 공간에 존재하면서 서로 맞닿지 않는 인간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런 식의 도시문명에서의 내밀한 공간과 그 속에서조차 소통이 되지 않은체 분절적으로 존재하는 인간들을 다루면서 영화는 도시문명의 소통되지 않음을 다루고 있다. 하지만 멜빌 식의 자신의 의지에 의한 실존주의적인 고독, 혹은 앞서 다루었던 문라이팅의 중간자적 고독과는 다르게 사랑에 빠진 것처럼의 고독은 전적으로 '다른 의미'에서 자신의 내부로 파고든다. 아키코가 자신의 친구가 해준 농담을 듣고는 그게 왜 재밌는지 이해를 하지 못하지만, 동시에 타카시의 집에가서 그 농담을 재밌다는 듯이 들려주는 아키코의 모습에서 드러난다:그것은 일종의 '동어반복'인데, 그 언어가 갖고 있는 함의를 이해하지 못하면서 그것이 마치 '자신의 언어인양' 떠드는 것이다. 그렇기에 인간들은 극 내에서 자기 이야기만을 반복한다:하지만 그들은 전적으로 언어로 소통하지 않는다. 마치 후반부에 노리아키에게 맞은 아키코를 보면서 그로테스크한 친절함을 보여주는 옆집 아줌마처럼 말이다:집에서 나오지 않는 그녀가 작은 창문에 머리만 내밀고 타인의 불행에 아랑곳 없이 혼자 떠들고 혼자 미소짓는 이 감당하기 힘든 미친 광경이야말로 극을 지배하는 정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동어반복적이며 무의미한 소통은 노리아키가 아키코를 향해서 보여주는 광적인 집착이나 타카시가 생판 남인 아키코에게 부모 같은 친절함을 보여주는 지점에서 기묘한 모습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아키코라는 타인을 향한 강렬한 감정이지만(동시에 성적이지 않다. 영화는 성적인 이야기를 거세하기 위해서 엄청난 노력을 기한다고 볼 수 있는데, 타카시 집에서 하룻밤을 자고 가는 지점이 섹스에 대한 암시를 드러낼 수도 있지만, 그런 지점을 없애고 그 자리에 소통의 부재만을 남겨놓는다) 그것은 전적으로 타인'에 대한' 감정이 아닌 '자기 자신에 의거한' 감정이라 볼 수 있다. 이는 완전한 파국에 도달한 엔딩에서 나오는 엘라 피츠제럴드의 '사랑에 빠진 것처럼'이 흘러나오면서 분명해진다.



Lately, I find myself gazing at stars

hearing guitars like someone in love

Sometimes the things I do astound me,

mostly whenever you're around me.


최근에 나는 별들을 바라보는 자신을 발견하곤 하죠

누군가 사랑에 빠진 것을 연주하는 기타 연주를 들으면서요.

때때로 주변의 사건들이 날 놀라게 만들어요.

대부분은 당신이 근처에 있을 때구요.



Lately I seem to walk as though I had wings,

bump into things like someone in love.

Each time I look at you,I'm limp as a glove,

and feeling like someone in love.


나는 날개가 있지만 최근에는 걸어다니는 것 같아요,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여기저기 부딪히죠.

매번 그때마다 전 당신을 바라보고, 마치 졸도할 것만 같아요,

마치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요.


-엘라 피츠제럴드, Like someone in Love



이 노래의 가사에서, 모든 것은 '나'에 맞춰져 있다:나는 당신을 보고 사랑에 빠진 것과도 같은 기분을 느낀다. 여기서 '타인'은 사랑의 유의미한 형태소가 아니다. '타인'은 단순하게 대상으로서, 일종의 자극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기에 내가 사랑에 빠진 것은 타인에 대한 갈구가 아니라, 엄밀하게 이야기하자면 자기 자신으로 파고드는 일종의 '나르시즘'인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그들은 타인을 향해서 소통하는 것이 아니라 소통을 빙자한 자위를 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감독이 제시하는 것은, 이들의 기묘한 하루를 보여줌으로서, 현대 도시 문명에 대한 가장 악의적인 조소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영화 사랑에 빠진 것처럼은,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갈등에도 도달하지 못하는 동어반복적인 언어를 통해서 최악의 조소를 문명을 향해 보내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제목에서부터 사기를 치고 있는 이 영화는, 역설적으로 마지막 삽입곡을 통해서 자신의 악의와 조소를 완성시킨다:그것은 소통조차 안되는 현대 도시문명에 대한 숨겨진, 하지만 강렬한 악의인 것이다.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스포일러 있습니다.


1981월 11월, 폴란드 전기기사인 노박은 3명의 인부 볼스키, 바나샥, 쿠데이를 이끌고 런던에 밀입국한다. 폴란드인 사장의 런던 아파트를 수리하기 위해서다. 사장은 그들이 런던에서 한달간 일하는 대가로 바르샤바에서의 일년치 급여에 해당하는 보수를 주기로 한다. 그래도 사장은 값싼 폴란드 임금 덕분에 엄청나게 싼 경비에 목적을 달성하게 되는 것이다. 사장은 노박에게만 이 사실을 알려준다. 매일 중노동을 하는 그들의 유일한 낙은 매주 토요일 바르샤바로부터 걸려오는 전화다. 그러나 전화통화에서 노박은 아내 안나와 사장의 관계를 의심하게 된다. 그러던 중 폴란드에서는 자유노조연합을 진압하는 군사혁명이 일어나서 전화도 항공편도 다 끊겨버리고 만다. 노박은 이 사실을 세 남자에게 숨기고, 묵묵히 작업을 진행시킨다.(네이버 영화 시놉시스)


예르지 스콜라모프스키의 문라이팅은 기묘한 영화다:이 영화는 감성적인 멜로드라마라고 이야기하기에는 너무나 메말라있으며, 부조리한 블랙 코미디 영화라고 이야기하기에는 너무나 씁쓸하다. 오히려 에센셜 킬링처럼, 감독 본인은 이 영화에 대해서 어떠한 정치적 함의나 의도를 넣으려 하지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정치적인 목소리를 극도로 거세하고 실존적인 이야기를 다룸으로서 정치적인 문제를 깊숙하게 파고들었던 에센셜 킬링처럼, 문라이팅 역시 전혀 정치적이지도 사회적이지도 않은 인간의 실존적 문제를 다루면서 역설적으로 자신이 의도한 것 이상의 이야기를 영화속에서 만들어내는데 성공한다. 누군가는 이 영화에서 공산주의-자본주의의 만남을 볼수도 있고, 혹은 자본가-중간계급-노동자의 관계를, 또는 단순하게 거짓말으로 인해서 사람과의 관계를 파탄내고 자신마저 망가지는 소시민의 이야기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문라이팅의 강점은, 이러한 이야기를 하나의 틀에 정형화시키지 않고 컨텍스트에 따라서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는 것이다:마치 헤오도토스가 포로가 된 파라오의 이야기를 남김으로서 후대에게 해석의 여지가 있는, 뼈대만 남은 이야기를 남긴것처럼 말이다.


문라이팅은 1인극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그것은 한명만 나오고, 한명만 연기를 하는 1인극의 개념이라기 보다는, 극에 있어서 '유의미한 존재'가 한명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1인극이다. 이를 가장 심화시키는 것은 주인공 노박의 '나레이션'이다. 영화는 노박의 관점에서, 노박의 생각을 차분한 나레이션으로 끊임없이 드러낸다. 그리고 그의 미묘한 감정과 생각의 변화를 잡아냄으로서 그는 극의 중심이자 핵심으로 자리매김한다. 하지만, 그의 입장에서 서술되는 나레이션 뿐만 아니라, 영화는 노박에게 기묘한 위치를 제공함으로서 그를 부각한다. 노박은 극중 유일하게 영어를 할 수 있는 폴란드 인부(또한 그는 동료들과 어울리지도 못한다)이며, 그는 유일하게 보스와 통화를 하고 지시를 받는 인물이고, 동시에 예산을 관리하고 배분하며 일을 처리하는 '중간자'이다. 동시에 그러한 지점들 때문에 노박은 '그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인물이다.


그렇기에 노박은 고독하다:하지만 유념해야하는 점은 노박이 느끼는 고독은 멜빌식의 '안으로 침잠하는' 고독이 아니다. 오히려, 노박이 느끼는 고독은 현실적 압박속에서 '소외'당하기에 느끼는 고독에 가깝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극외부에서 얼굴도 목소리도 없는 존재인 '보스'로부터 명령을 받는다. 이 존재조차 불확실하지만 가장 강력한 권력자인 보스로부터 노박은 명령을 받지만, 동시에 그는 보스가 자신의 처인 안나를 유혹하려는게 아닌가라고 의심을 한다. 그렇기에 보스뿐만 아니라 자신의 사랑하는 처인 안나조차도 노박은 외부적 압박으로서만 존재할 뿐이다. 동시에 인부들과 노박이 같은 커뮤니티를 형성하지 못하는 것은, 보스와 비밀을 공유하는 노박의 위치(사실 폴란드인 임금이 싸기에 싸게 부려먹는 것이라는)와 작업을 강제하기 위해서 노박이 끊임없이 외부사정에 대해 거짓말 하는 것이 강력하게 작용한다. 또한 공산주의 국가에서온 노박은 자본주의 세계에서는 철저한 이방인이다. 하지만 마치 테마파크에 놀러온것처럼 유쾌하게 자기들끼리 지내는 인부들과 다르게, 노박은 자본주의 세계의 인간들이 공산주의 세계에 대해서 갖는 편견과 그들의 언어를 인지한다. 그렇기에 노박은 이 세계에서 철저하게 소외당한다. 끊임없이 외부에서 소외당해 내부로 밀려나는 노박의 이런 케릭터성은, 소시민적이며 동시에 도시문명속에서 사는 일반적인 인간을 상정한다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폴란드에 군사쿠데타가 일어나서 모든 연락과 교통이 두절되자 노박이 거짓말로 인부를 통제해서 자신의 세계를 유지하려 한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다 볼 수 있다. 그에게는 외부에 기댈 수 있는 존재란 존재하지 않으며, 소시민적인 그는 자신보다 낮은 사람들(동료 인부들)과 연대할 수 있는 용기조차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그는 진실(고국에 쿠데타가 일어났다는 것)을 숨기고 그것이 드러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면서 자신의 작은 세계(보스의 집을 개축하는 것)를 지키려 한다. 그리고 그러면 그럴수록 그는 더 비참해진다. 낯선 타국에서 사기에 도둑질을 하며, 인부들의 임금으로 공사를 강행하는 등등의 과정을 거치면서, 그는 더할나위 없이 비참해지며, 동시에 '뻔뻔'해진다:영화의 클라이막스에서 베테랑 사환을 능숙하게 속여넘기는 그의 뻔뻔함은 더이상 인부들을 먹여살리기 위해 슈퍼마켓에서 영수증으로 사기를 치면서 걸릴까 전전긍긍하는 소시민의 모습을 벗어던진 무언가이다. 


이런 소시민의 실존적 고독과 붕괴를 영화는 '소리'라는 독특한 기제를 이용해서 풀어낸다. 예르지 스콜라모프스키는 소리에 대해서 독특한 감각으로 접근하는 감독이다. 그가 감독한 현대의 노이즈들과 파괴적이며 주술적인 원시 소리의 대비를 그려낸 외침이라던가, 소통의 부재를 굉음 섞인 노이즈의 형태로 풀어낸 에센셜 킬링 등등에서 '소리'는 영화를 구성하는 중요한 기제로 작용하였다. 문라이팅 역시 마찬가지이다:인물의 내밀한 심리를 풀어내는 기제로 나레이션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효과음이나 BGM이 아닌 '일상의 노이즈'들이 주인공의 심리상태를 묘사한다. 가령, 사환에게 호감을 갖고 자전거를 타고가는 장면에서는 노박이 단조롭고 거칠지만 업템포로 짧게 부는 휘파람 소리(정확하게 휘파람소리인지는 모르곘지만 하여간 그 비슷한)를 낸다던가, 사포기를 돌리면서 나는 굉음과 함께 영어를 못알아듣는 인부들을 향해 불만을 표시하는 옆집 주인의 고함을 통해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음을 보여준다던가(이는 극 내에서 지속적으로, 그리고 반복적으로 꾸준하게 보여지는 지점이다), 혹은 크리스마스날 흥청망청 술을 마시며 노래를 부르는 인부들과 대조적으로 브라운관이 고장난 TV앞에서 TV방송을 라디오 방송마냥 소리만 들으면서 브라운관 앞에서 잠을 청하는 노박의 모습 등등에서 소리는 중요한 이미지로 등장한다.


이러한 소리의 이미지는, 시각적으로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거기 항상 존재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각적 이미지와 다른 독특한 감각을 전달한다. 극 내부에서 존재하지 않는 안나와 보스처럼, 소리는 어디에 존재하지만 구체적인 출처를 파악할 수 없다. 그렇기에 소리는, 극을 포위하는 동시에 자신을 드러내지 않음으로서 기묘한 위치를 선점하게 된다:소리는 시시각각 노박을 압박하고 포위하지만, 동시에 그는 그것을 향해 맞받아치거나 저항할 수 없다. 오히려 저항이 불가능해짐으로서 그의 소외를 심화시키는 기제로 작용되게 된다.


영화의 마지막, 그들은 꿈을 갖고 영국에 와서 집에 도착한 모습과 대비되게 한밤중에 카트를 끌고 폴란드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6시간에 걸쳐 히드로 공항까지 걸어간다:카트의 덜덜거리는 굉음소리와 함께, 노박과 인부들의 관계가 거의 파탄났음을 암시한다. 하지만, 폴란드에 돌아가기 앞서 노박은 자신의 거짓말을 밝혀야 한다. 그리고 그의 고백과 함께, 형식만 남은체 너덜너덜해진 커뮤니티는 완전한 파국을 맞이하게 된다. 그리고 이 파국은 제멋대로 굴러가는 카트의 굉음과 함께 끝을 맺는다.


문라이팅은 예르지 스콜라모프스키라는 감독이 그린 독특한 드라마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아오야마 신지가 이야기한 문자의미 그대로의 '삶의 노이즈가 낀' 세계를 보여주는 영화라고 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있는지 조차 몰라서 안타까운 감독이라 할 수 있는데(에센셜 킬링의 경우 국내 정식 수입조차 되지 않았다...), 그의 영화들은 여러 지점에서 생각할 것이 많다고 본인은 생각해본다.






게임 이야기




*https://medium.com/p/db95961675b3 글을 블로그에 맞게 편집한 글입니다.


첫 번째, 발언과 표현의 자유(The Freedom of Speech and Expression)

두 번째, 신앙의 자유(The Freedom of Worship)

세 번째, 궁핍으로부터의 자유(The Freedom from Want)

네 번째, 공포로부터의 자유(The Freedom from Fear)

그리고 다섯 번째, 위의 네 자유를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자유.

-스플린터 셀:블랙리스트



톰 클랜시의 스플린터 셀:블랙리스트(2013)는 잠입액션 게임인 스플린터 셀 시리즈의 최신작이다. 기존의 시리즈와 실험작이었던 컨빅션을 배합하여 만들어낸 블랙리스트는 기존의 성우였던 마이클 아이언사이드가 새로운 성우로 교채되기도 하며 제작진들이 샘 피셔의 케릭터성을 재해석하는 등 많은 변화를 겪은 작품이기도 하다. 그리고 스토리에 있어서 블랙리스트는 기본적인 ‘미국을 위협하는 테러리스트로부터 미국을 지킨다’라는 다소 진부한 모티브에 기반하고 있지만, 제작진들은 그러한 시나리오를 능숙한 완급으로 표현하는데 성공하며 대적자와 주인공이 서로 엎치락뒤치락하는 것을 스릴있게 표현하는데 성공한다. 또한 위에서 언급하고 있는 ‘다섯번째 자유’는 그러한 클리셰스러운 이야기에 기반을 다지는 초석같은 기제로 작용한다:샘 피셔가 하는 모든 작전들, 행위들, 심지어는 대통령마저도 무시하는 그의 ‘월권’행위까지. 샘 피셔가 하는 행위는 전적으로 다른 밀리터리 슈터류와 비슷하다:하지만 다섯번째 자유를 통해서 그의 행위는 근거를 얻고 뭔가 멋진 행위로 거듭나게 된다. 그런 지점에서 다섯번째 자유란 기존의 밀리터리 슈터류들이 전제에 깔고 있는 전제를 형식화하여 주인공을 빛내주는 지점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블랙리스트의 최대의 문제점은 게임 플래이나 미션의 구성 및 게임 내용에서 오는 것이 아닌, 스토리를 마무리 짓는 지점에서 생긴다:마지막 악역 사디크의 고문에 못견딘 국방장관이 미국의 모든 정보를 사디크에게 넘겨주려 하자, 샘의 부관인 브릭스는 ‘다섯번째 자유의 이름으로’ 국방장관의 목을 꺾어서 죽여버린다. 그리고 사디크를 붙잡은 샘 피셔는 그를 살리지도, 죽이지도 않은채 ‘다섯번째 자유를 행사하여’ 관타나모 수용소로 보내버 린다. 재밌는 점은 이 모든 것을 플래이어가 마치 ‘다섯번째 자유를 행사하는 것처럼’(정작 플래이어가 할 수 있는 것은 버튼을 누르는 것 뿐이지만) 꾸며놓았다는 것이다.


물론 많은 플래이어들은 이 장면에 대해서 큰 거부감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새롭게 디자인된 샘 피셔의 케릭터가 전작들에 비교해서 지나치게 미션 중심적인 기계적 인간이 되버린것에 불만을 가질진 모르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게임은 지극히 미국 패권주의를 정당화하는 디자인들(이란 쿠츠포스의 비밀 훈련장-아무리 봐도 백악관과 미국을 의식하고 있는 등등)을 은연중에 삽입하고 있었으며, 문제는 이 QTE로 인해서 이런 디자인들은 더이상 은연중에 깔려 있는 것이 아닌 명백한 것이 되버리게 된다(미국을 지키기 위해서 우리는 그 어떤 원칙도 무시할것이며, 어떤 희생도 감내할 것이다) 그렇기에 게임은 카타르시스를 제공하기 보다는 미국 패권주의를 정당화하는 찝찝함을 플래이어에게 제공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앞서 이야기했듯이, 클리셰스러운 스토리를 정당화시키기 위한 다섯번째 자유라는 기제와 마지막 QTE의 관계는 찝찝함과 별개로 의미심장하다고 볼 수 있다:어째서 플래이어는 다섯번째 자유를 행사하는 QTE를 거쳐서 엔딩을 보게 되는가? 그리고 만약 다섯번째 자유라는 기제가 기존의 클리셰스러운 스토리를 뒷받침하는 근거를 ‘자명하게’ 드러낸 것이라면, 스플린터 셀:블랙리스트의 스토리는 상당히 의미심장한 지점이 있는게 아닐까?



이 연구 과정에서 다음 3가지 테제가 잠정적인 결론으로 도출되었다.

1.근원적인 정치적 관계는 추방령(외부와 내부, 배제와 포함 사이의 비식별역으로서의 예외상태)이다.

2.주권권력의 근본적인 행위는 벌거벗은 생명을 근원적인 정치적 요소이자 자연과 문화, 조에와 비오스 사이의 결합의 비식별역으로 산출하는 것이다.

3.오늘날 서양의 생명정치적 패러다임은 국가 공동체가 아니라 수용소이다.

-호모 사케르, 조르조 아감벤



여기서 샘 피셔의 행위를 분석하기 위해서 들고오는 기제는 조르조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이다. 아감벤은 호모 사케르(죽일 수는 있지만, 희생 제물은 될 수 없는)를 법의 문법으로 보았다:그리고 이러한 기저에는 그리스 폴리스의 삶의 양식 조에(단순하게 살아있음)와 비오스(의미있는 삶)의 분리가 깔려있다고 아감벤은 자신의 저서 호모 사케르를 통해서 주장한다. 조에란 자연에서 단순히 태어나고 죽고 하는 것은 어떠한 가치 판단의 기준도 아닌, 단순하게 거기 있다 사라지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의미있는 삶, 비오스란, 그것의 태어남과 삶에 의미가 존재하고 동시에 중요하게 여겨진다. 아감벤은 폴리스에 있어서 시민과 함께 조에, 의미없는 삶들이 함께 살았음에 주목하였다. 아감벤은 즉, 비오스란 조에라는 ‘예외상황’을 통해서 규정된다고 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예외상황을 통한 자신의 규정’은 호모 사케르-맘대로 죽일 수 있지만, 희생물로 바쳐질 수 없는-의 법의 문법을 통해 실현된다:예를 들어보자. 사형의 경우, 사형수는 국가에 의해서 죽음을 선언받은 자들이다. 이들은 국가의 처분에 따라서 마음대로 죽임당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어떠한 숭고한 가치를 위한’희생물’은 될 수 없다. 그들은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는 헌법과 가치질서의 예외에 속하면서도, 동시에 그러한 예외를 통해서 역설적으로 헌법적 가치질서이자 주권권력의 결정을 ‘재확립하는’ 존재들인 것이다. 이러한 생명을 통해서 정치를 하는 것, 인간의 생명을 통해서 무엇이 예외상황임을 선언하는가를 ‘결정’하는 것이 주권권력이자, 동시에 아감벤의 문제의식인 ‘생명정치’인 것이다.


아감벤이 주목하는 지점은, 이런 호모 사케르의 문법이 ‘수용소’라는 공간을 통해 드러난다고 본다:수용소는 모든 법이 ‘멈추는 시공간’이다. 아감벤은 주권권력이 수용소라는 공간을 만들어냄으로서, 무엇이 국민이고 비국민인지를 구별하는 생명-죽음 정치의 장을 연다고 보았다:나치 독일이 유대인 수용소를 통해서 유대인을 학살한 것은, 유대인이라는 ‘비국민’을 만들어내어 무엇이 ‘국민’인지를 구별하고자 한 것이다. 이보다 좀더 독특하며 명확한 지점은, 나치 독일이 ‘장애인’을 소개하려고 한 행위들을 통해서 뚜렷하게 드러난다:왜 전쟁에서 패망하는 순간에 있어서도 나치독일은 장애인을 제거하는 작업에 많은 자원과 관심을 쏟은 것일까? 그것은 그 행위를 통해서 ‘무엇이 국민인가’라는 테제를 실현하기 위한, 주권권력의 생명정치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There’s a man going around taking names

And he decides who to free and who to blame

Everybody won’t be treated all the same


한 남자가 이름을 모으고 있다네, 그는 누가 풀려날지, 

그리고 누가 비난받을지를 정한다네. 

모든 이들은 똑같이 대우받지 못할거야.

-자니 케쉬, When The Man comes around


그리고 샘 피셔로 돌아와보자:그는 법이 멈추는 지점에서 임무를 수행한다. 그리고 그 지점이란, 비단 관타나모 같은 ‘수용소’라는 특수한 시공간만 지적하는 것이 아니다:테러가 임박한 상황에서, 다섯번째 자유라는 미명하에 모든 법과 절차는 테러를 막기 위해서 멈춰진다. 그리고 미국이라는 특수성이 더해지면서 샘 피셔에게 있어서 주권권력을 행사하기 위한 시공간은 ‘전세계’로 화하게 된다. 그는 중동과 적국(이란), 관타나모 수용소, 미국 내와 다른 이국적인 공간을 누비며 ‘누가 죽을지, 누가 살 것인지’를 결정한다(별 영향이 없는 심문 QTE에서 드러나듯이)


그렇기에 샘 피셔의 대모험(?)은 어떤 의미에서 서부극의 현대적 변용이다:황폐화된 사막은 이제 법이 멈춘 전세계이며, 동시에 그 법을 집행하는 것은 멍청한 연방정부(=미국)가 아닌 일선에서 뛰는 외로운 보안관이자 집행자인 샘 피셔인 것이다. 그리고 샘 피셔는 법이 멈추는 곳에서, 총을 뽑아 ‘무엇이 정의(또는 법)인지’를 결정한다.


그렇기에 그는 결정하는 권력이다:그리고 그에게 권위를 주는 다섯번째 자유란, 아감벤이 호모 사케르를 통해서 강조하였으며, 아감벤이 주된 모티브를 얻은 칼 슈미트적으로 ‘주권권력’ 그 자체이다.


(어떠한 형태로든 법의 효력을 정지시킬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 사람이 결국 주권자라면 실제로 그는)일반적으로 타당한 법질서 외부에 있으며, 그럼에도 그러한 질서에 속해 있다. 왜냐하면 헌정을 ‘전면’ 중단시켜야 할 것인지 결정할 권한은 그에게 있기 때문이다.

-칼 슈미트, 정치 신학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 저술에 큰 영향을 끼쳤던 2차세계대전 때의 법학자 칼 슈미트는 법 바깥에서 법을 결정하는 권력, 주권권력이 무엇인지를 중요하다고 보았다. 이는 뒤에서도 다루겠지만, 발터 벤야민이 폭력비판을 위하여를 통해서 ‘법은 예외를 통해서 규정된다’라고 선언하는 지점과 맥이 닿아있다. 무엇이 예외인지를 결정하는 주권 권력을 통해서, ‘예외를 통한 테두리 짓기-규정’이 일어나게 된다:그리고 샘 피셔가 행사하는 다섯번째 자유는 주권 권력과 아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그는 다섯번째 자유를 통해서 모든 절차와 법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하지만 동시에 예외상황에 기반한 자유를 통해서, 그는 역으로 평화(의 탈을 쓴 팍스 아메리카나, 미국 패권주의적 질서)를 확립한다:예외를 통해서 질서를 확립한다, 그렇기에 다섯번째 자유는 주권권력에 대한 은유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유념해야하는 것은 칼 슈미트가 나치즘에 대한 적극적인 옹호자였으며, 그의 ‘결정권력’에 대한 이론은 독일 게르만 민족의 유일무이한 총통 히틀러가 법과 민주주의를 무시하고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기반을 제공했다는 것이다. 뒤집어서 이야기하자면, 자유민주주의를 수호려고 다섯번째 자유를 휘두르는 샘 피셔 역시 그런 지점에서 아주 역설적이게도 ‘나치즘’적이며 ‘파시즘’적이고 동시에 서양인들이 금기시하는 ‘민족 유일의 구원자 총통 히틀러’적이라는 외설적인 논지까지 전개가 가능하다:그는 모든 민주적 절차와 법들을 무시하며, 심지어 그러한 자유를 부여받은 상급기관인 ‘대통령’마저도 무시한다. 그렇다면 그를 막을 수 있는 존재는 있는것일까? 샘 피셔가 정당화되는 유일한 근거는 ‘그가 결국은 평화(=팍스 아메리카나)를 수호했다’뿐이다. 그러나 만약 그가 조금이라도 실패했으면 어떘을까? 그의 결단 때문에 무고한 피해가 났었더라면? 게임이 펼치고 있는 이야기는 너무나 아슬아슬하다:샘 피셔는 타국의 주권을 침해하는 것은 당연할 뿐만 아니라 자국 내에 영향을 끼치고 있으며 심지어는 미국 국방장관을 ‘자의적 결단 아래’ 죽이기까지 한다. 그가 영웅이 아니라 범인 또는 악인이었다면, 그리고 그에게 수많은 행운들(그의 직감에 따른 독단이 올바른 선택이었다고 밝혀지는 지점들)이 따르지 않았다면, 블랙리스트의 이야기는 순식간에 끔찍한 재앙이 됬을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논지를 확대해보자:만약, 다섯번째 자유가 주권권력적이라고 보고, 다섯번째 자유가 처음 지적하였듯이 밀리터리 슈터물, 더 나아가서 게임 전반을 지배하는 기제라면, 게이머는 왜 위험천만한 생명-죽음정치의 근원인 ‘주권권력’ 권력에 끌리는가?


(법의 수중에 놓여있지 않은 폭력이 법에 위협으로 작용하는 것은 폭력이 법 외부에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추측)이와 똑같은 추측은 대범죄자의 형상 자체가 그의 목적이 제아무리 극악무도하다 할지라도 얼마나 자주 민중에게서 은밀한 경탄을 불러일으켰는지 생각해보면 더 분명하게 납득할 수 있다. 그러한 현상은 그 범죄자가 저지른 행위 때문이 아니라 그 행위가 증명하는 폭력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러니까 이 경우 오늘날 법이 모든 행동영역에서 개인에게서 빼앗으려고 하는 폭력이 실제로 위협적인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으며, 그 범죄자가 제압되는 가운데서도 법에 반감을 갖는 대중들의 공감을 자극한다.

-발터 벤야민, 폭력비판을 위하여.


칼 슈미트의 법철학으로부터 영향을 받고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 저서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친 발터 벤야민의 폭력비판을 위하여는, 폭력(Gewalt,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폭력Violance의 개념과는 다른 개념으로, 어떤 강제력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편하다;독어로서 폭력Gewalt는 상당히 폭넓은, 몽둥이라는 의미도 내포하는 단어이다)의 국가 독점과 그 독점이 ‘예외를 통해서 규정된 법’ 개념을 다루는 에세이이다. 재밌는 점은, 위에서도 언급하였듯이 발터 벤야민은 대중이 무법자에 끌리는 것은 그 극악무도한 비도덕행위에 있는 것이 아닌 ‘그 외부에 (국가가 독점하는)폭력이 존재할 수 있다는 점’에 매료되었다고 분석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게임에 적용시켜보면 상당히 기묘한 지점이 발생하게 된다. 보통 게임에 있어서 게이머가 비도덕한 행위들(살인이라던가) 행함으로서 그로부터 쾌락을 얻는다는 인식과 반대로, 무법자의 매력에 대한 벤야민의 분석은 이로부터 완전히 동떨어져있는 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게이머들은 게임의 ‘폭력’에 이끌리게 되는 것일까? 이것은 위에서 다룬 (게임 이야기에 숨어있는 동력의 근원으로서의, 주권권력적인)‘다섯번째 자유’와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일까?


예를 들어보자:우리가 서부시대에 매료되는 것은 그것이 단순히 총을 뽑아서 사람을 쏴죽이는 것에 열광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서부시대에 열광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그 시대가 ‘국가 시스템으로부터 자유로운’ 인간들이 시스템 바깥에서 자유를 행사하는 그 자체가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우리를 구속하는 일상의 제약들, 법, 규율, 관습, 사회 등등은 서부의 거대한 자연 속에서 사라져버린다. 그 속에서 인간은 스스로 무엇을 할 것인지 ‘결정’하고, 그리고 그것을 스스로 ‘집행’한다:이것이 바로 서부시대의 본질인 것이다.


다시 게임으로 돌아와서 적용해보자:게임이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전적으로 ‘수단’의 문제이다. 게이머가 게임의 폭력에 몰입하고 집중할 수 있는 것은 게임속의 폭력은 그것이 비도덕적이기 때문에 매력적인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규율’을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숨어있지만 ‘자유’의 형태로 구현이 된다:비상상황에서 세계를 구하기 위해 ‘자유’가 주어진다. 이 자유는 법 밖에서 뛰놀 수 있는 자유인 것이다. 총을 뽑아서 악당을 어떠한 절차도 과정도 거치지 않고 죽일 수 있는 것, 그리고 위급상황에서 고문을 해서 세계를 지킬 수 있는 정보를 빼내는 것 등등. 이 모든 것은 폭력을 독점하는(물론 그것이 옳다/그르다의 문제가 아닌 사실의 선언으로서의 폭력 독점) 사회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유’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물론 전적으로 이러한 과정에서 도덕이라는 것을 짓밟아서 얻는 비도덕적 쾌락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언젠가 이는 또 다룰수 있을것이다) 하지만, ‘비도덕적인 요인’이 게이머를 끌어당기고 게임을 하는 것이라는 논지는 전적으로 비논리적이다. 라프 코스타가 자신의 재미 이론에서 아주 극단적인 예를 들은 것을 한번 보자.


시험삼아 우물 모양의 가스실이 있는 대학살 게임을 떠올려보자. 플레이어는 무고한 희생자들을 가스실로 떨어뜨리게 되는데, 여기는 늙은 사람, 젊은 사람, 뚱뚱한 사람, 키가 큰 사람 등 크기와 모양이 다른 사람들이 있다. 우물 바닥으로 떨어진 사람들은 서로를 붙잡고 인간 피라미드를 만들어 우물의 꼭대기에 도달해야만 한다. 이들이 우물 밖으로 나가게 되면, 플래이어는 지고 게임은 끝난다. 그러나 플레이어가 이들을 빈틈없이 잘 막는다면, 맨 아래쪽에 있는 희생자들은 가스에 질식해서 죽고만다.

나는 이런 게임을 하고 싶지 않다. 아마 여러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테트리스’이다.

-라프 코스타, 재미 이론.


게임의 근육과 뼈대(게임의 구조와 재미를 만들어내는 기본 테제)를 뒤덮는 가죽만 바꾸었음에도 불구하고, 라프 코스타가 예시로 든 변형된 테트리스는 정말로 하기 역겨운 형태의 게임이 되어버렸다:앞으로 게임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며, 셀수 없이 많은 변형을 갖고 있는 테트리스가 이런 게임 이었으면 과연 이 게임은 지금의 명성을 얻을 수 있었을까? 라프 코스타가 지적하는 게임의 매력은 단순히 그 내부 시스템 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표면적인 것들도 포함을 한다. 심지어 우리는 AVGN이 리뷰하였던 아타리 포르노에서 라프 코스타가 지적하였던 역겨운 형태의 게임들, 게임의 기본 구조는 이미 입증되어 재미 자체는 분명하지만 전혀 하고 싶지 않은 게임들의 실례들을 이미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이야기들은 앞서 논의하였던 게임에서의 수단으로서의 폭력, 그리고 목적으로서의 자유는 이와 같이 연결이 된다:게임에서 서사가 게이머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를 주는 것이 핵심이지, 게이머가 타인에게 무차별적인 폭력을 휘둘러서 얻는 비도덕적인 쾌감 또는 그것을 학습하는 것은 게임이 지금 갖는 매력의 본질이 아니다.


(물론 우리가 유념해야하는 것은, 이는 또다른 문제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블랙리스트에서 무의미한 심문을 통한 죽일것인가/살릴 것인가-이 또한 주권권력적이다-의 결정은, 역으로 우리가 실제에서 그렇게 당하는 수많은 사람들에 대해서 무감각하게 만든다는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이는 게임만의 문제가 아니다. 보들리야르가 제기한 학살을 다루는 대중문화가 동시에 또다른 학살을 일으키고 있다는 비판과도 같이, 대중문화 전반은 이러한 무감각한 대중을 만들어내는데 있어서 의식/무의식적으로 첨병같은 역활을 맡고 있다)








왜 인간은 권력을 행사하려 하는가라는 물음에 철학은 어떤 대답을 줄 수 있는가. 푸코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서로의 관계에서 자유로울수록 타자의 태도를 규정하는 데서 더 큰 쾌락을 느낀다. 타자의 태도를 유도할 때 얻는 유희가 다양하고 자유로울수록 쾌락은 더 커진다. 그에 반해 이러한 유희가능성이 없는 사회에서는 권력이 가져다주는 쾌락도 줄어든다.(중략)

“권력은 악이 아니다. 권력이란 전략적 유희에 다름 아니다. 우리는 권력이 악이 아니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성적 관계나 쾌락 관계를 보라. 열려 있는 전략적 유희 속에서 타인에게 권력을 행사하는 일에 나쁜 점이란 하나도 없다. 그것은 사랑과 열정, 성적 쾌락의 일부분이다.”

-한병철, 권력이란 무엇인가?


그렇기에 다섯번째 자유는 게임의 내용을 넘어서 아주 의미심장한 명제가 된다:그것은 제도적인 권력이 아닌 법 바깥에 설 수 있는 자유이자 절대적인 권력으로서, 법/사회/도덕 등의 시스템의 바깥에서 내부를 규정할 수 있는 아주 강력한 힘이다. 그리고 텍스처 덩어리의 적이라는 ‘호모 사케르’들을 통해서 게이머는 누구를 살리고 죽일 것인지를 판단한다. 이는 위에서 푸코가 설명하였듯이, 이는 ‘쾌락적’이다. 하지만, 이는 비도덕적이지 않다:결과적으로 게임의 서사는 세계를 지키고 질서를 재수복하는 것이지, 그것을 강제로 점유하고 새디스틱한 파괴를 통한 쾌락을 불러일으키는 지점이 아니기 때문이다. 폭력이란 단순히 그런 주권권력적인 자유가 드러나는 하나의 ‘표현 형태’일 뿐이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게임은 경계상황(법과 질서가 멈출수 밖에 없는 지점들, 전시-비전시, 또는 완전한 전시, 혹은 완벽한 위험상태 등등)에서 시작된다. 거기서 게이머는 힘을 얻는다. 그것은 위에서 언급한 은유나 비유, 혹은 분석으로서의 주권권력적 자유가 아니다. 영상문화의 첨병답게, 게임은 전적으로 이 자유와 권력을 시각화해서 드러낸다:그것은 첨단 무기들과 가젯, 혹은 과학적 설명이 양념처럼 들어간 초능력이나, 과거의 미신적 신앙에 기반하고 있는 마법의 형태를 빌고 있으며, 동시에 이는 파괴적인 현상들을 통해서, 아주 강렬한 형태로 드러나게 된다.


(하지만 유념해야 하는 점이 있다. 한병철은 자신의 저서 ‘권력이란 무엇인가’에서 푸코 이론을 반박한다:권력은 쾌락을 줄 수 있으나 그것은 ‘본질’이 아니다. 권력의 본질이자 핵심은 ‘살아남는 것’, 혹은 더 나아가서 외부를 자신의 내부로 포섭하는 것이다. 좀더 도발적으로 본다면, 대중이 권력의 문법을 체화하고 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런 권력이 나오는 구조에 대해서 무의식적인 레벨에서 순응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구조의 생존을 위해서라면, 자연스럽게 그 구조의 ‘세포’인 개인을 죽이는 것이 정당한것처럼 인식하는 것처럼? 물론, ‘쾌’의 문제로만 본다면 이러한 논제가 과하게 나가는 경향이 있으나, 은연중에 이러한 문제가 깔려 있는게 아닐까…)


(그런 지점에서 스펙옵스 더 라인은 기묘한 위치에 서있는 게임이다. 부록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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