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지적장애 동생 ‘닉’과 그의 형 ‘코니’. 코니는 그들에게 비참함을 안겨주는 뉴욕을 떠나 새로운 삶을 찾으려 은행 털이를 결심한다. 하지만 현금 2만 달러를 들고 도주하던 형제는 그들의 계획이 엉망이 되었음을 깨닫고, 동생은 홀로 구치소에 수감된다. 코니는 경찰의 수사망을 따돌리고 동생을 구하기 위해, 또 형제를 옥죄는 뉴욕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촌각을 다투는 사투를 벌이는데…(네이버 영화 시놉시스)


굿 타임의 오프닝 시퀸스는 굿타임이라는 영화의 모든 것을 집약한다:먼저, 영화는 뉴욕의 빌딩을 원거리에서 부감으로 찍어낸다. 천천히 빌딩으로 다가간 뒤, 갑자기 영화는 인물의 얼굴을 거대한 클로즈업으로 다뤄낸다. 여기서 동생 닉이 등장한다. 닉은 누군가에게 질문을 받지만, 거기에 제대로 답하지 못하고 여기에 코니까지 가세하면서 관객들은 이 인물이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알게 된다. 일반적인 범죄 장르영화였다면, 닉과 코니의 관계에 대한 구체적인 서사를 설정했을 것이다. 하지만 굿 타임의 시작은 당혹스럽고 어색하다. 닉의 클로즈업 된 거대한 얼굴이 보여주듯이, 거기에는 무언가 설명할 수 없는 불편함과 어색함이 스크린을 지배한다. 


굿 타임의 이야기 구조는 오딧세이의 변종이다. 신은 오딧세우스의 불경을 벌하기 위해 오딧세우스가 귀가하지 못하고 오래도록 바다를 떠돌도록 만들었다. 굿 타임에는 코니를 벌하는 신은 없지만, 한밤중의 뉴욕을 돌아다니며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오히려 문제를 더 키운다. 하지만 문제는 왜 코니는 한밤중의 뉴욕을 떠돌며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고통을 받게 되었는가 이다:그 원인에는 구치소에 끌려간 동생이 있다. 동생을 보석으로 풀어내기 위해서 코니는 브레이크 없는 질주를 한다. 이러한 단편적인 맥락을 놓고 본다면 영화는 가진 것 없는 빈곤층 형제가 서로를 세계로부터 지키는 이야기처럼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상투적인 맥락을 배제하고 끊임없이 얼굴의 클로즈업과 부감 풍경을 교차 배치함으로써 이야기를 붕뜨게 만든다.


부감 풍경과 클로즈업을 통해 굿타임이 만들어내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드라마가 아니다:코니는 닉을 아껴주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상은 정말 그러한가? 상담사와 상담하는 중에 닉을 강제로 끌고가는 코니가 그 다음 시퀸스에서 동생과 바로 하는 일은 고무 마스크를 뒤집어 쓰고 은행을 터는 일이다. 동생을 사랑한다 이야기는 하지만, 닉이 보여주는 행동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동생에게 강압하거나 허황된 이야기를 떠드는 것 뿐이다. 주목해야하는 것은 영화 내내 보여지는 닉의 독특한 태도이다. 닉은 클로즈업된 미장센 속에서 영화 속 그 누구보다도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있는것처럼 보이며, 단순히 갇혀있는 것을 넘어 무언가 '선택하지 못하는' 중간자적 위치를 점한다:코니가 닉을 칭찬하거나 무언가를 이야기할 때마다, 코니는 주위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하고 생뚱맞은 대사와 행동을 뱉어낸다. 닉은 총체적으로 그 행동의 동인이 이해불가능하고 떠도는 케릭터이며, 극의 이야기 속에서 걸리적거리는 위치에 놓여있는 케릭터다. 


그렇기에 영화에서 주목해야하는 점은 어째서 코니가 닉을 구하기 위해서 불야성의 대활극을 벌이는가이다:영화는 드라마를 쌓지도 않고, 동생과 형의 관계는 위태로워 보이며, 심지어 극 중반 이후로는 학대하는 보호자라는 클리셰(뉴스에서 코니와 닉이 가출할 때, 할머니의 팔을 부러뜨렸다고 한다)마저도 점점 무너져 가기 시작한다. 코니가 어째서 닉에 집착하는지에 대한 정당한 동인이나 동생에 대한 유대감은 없다. 하지만 코니는 필사적이다. 끊임없이 타인에게 동생과 자신의 상황을 거짓말하고, 사람을 때려눕히고, 협박하고, 얼버무리면서 동생을 구하는데 집착한다. 하지만 그에게 동생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영화는 일언반구 언급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렇게 볼 수 있다:닉은 무엇이 문제인지, 무엇을 해결해야하는지 조차 인지하지 못한다.(영화 처음 닉에게 상담사가 문제가 뭔지를 물어보는 시퀸스를 보자. 닉은 상담사에게 문제가 무엇이라는 것 자체를 이해시키지 못한다) 코니가 닉에게 집착하는 것은 그런 해결되지 않는 상태에 대한 불안이자 강박관념, 그리고 허황된 믿음(네가 있어 나는 훌륭하다)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극단적인 인물의 클로즈업, 부감 풍경, 마지막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의 행동과 맞물리면서 굿타임은 거대한 부조리극이 된다. 동생을 구하기 위해서 경찰이 경호하는 범죄자를 데려왔지만, 실제는 자기 동생이 아니었고, 자신에게 친절했던 사람에게 등처먹고, 마약을 팔겠다고 설치다가 결국은 광란의 질주 끝에 잡히게 되고 역설적이게도 동생은 코니의 구속과 함께 자유로워진다. 이 과정을 굿타임은 서로에게 이야기하지만 전혀 맥락이 서로 닿지 않는 인물들이 각자의 샷에서 과도하게 클로즈업된 얼굴을 보여주면서 그들을 그들 스스로에게 가두어버리고, 파국을 향해서 치닫는 모습을 보여준다. 더 나아가 영화는 시퀸스와 시퀸스 사이에 부감으로 도시의 풍경을 찍음으로써 이 모든 것들이 정말로 하찮은 촌극에 불과한것처럼 포장한다. 


동생을 향한 코니의 집착은 이런 의미에서 정말로 '하찮은' 것일 수 있다. 하지만 그 하찮은 것 때문에 사람들은 파국으로 치닫는다:코니의 애인은 코니를 사랑한다고 생각하면서 부모의 카드로 거액의 카드깡을 하려 하고, 중간에 만났던 소녀는 코니의 여정에 살짝 끼어들었다가 경찰서로 끌려간다. 영화는 이 하찮고 허황된 세계에 대중문화의 밈들(스프라이트나 개구리 페페, 반복되는 뉴스, 패스트 푸드 같은)을 섞어둠으로써 하찮고 반복적인 도회지의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케릭터들은 이 속에서 영원히 고통받는다. 즉, 굿 타임은 영원히 고통받는 오딧세이아 팝아트 버전인 것이다.


영화의 클라이맥스 시퀸스는 흥미롭다. 계속해서 코니의 얼굴을 클로즈업해서 동생에 대한 집착을 보여주었던 카메라는 불현듯 코니의 검거 과정을 고층 아파트에서 내려다보는 마약상의 관점에서 다뤄낸다. 마치 미국 뉴스에서 나오는 헬기로 촬영된 체포장면을 영화는 보여주고, 후에는 갑자기 코니의 관점에서 마약상이 도망가는 장면을 아래서 위를 올려다보듯이 찍어낸다. 마치 자극적인 뉴스의 한 장면처럼, 마약상은 고층 아파트에서 추락사한다. 그러고는 카메라는 경찰차 창살 뒷편에 놓여있는 코니를 클로즈업으로 점차 잡아낸다. 처음에는 창살 너머에서 잡던 카메라가 클로즈업을 하면서 창살이 희미해지고, 이내 코니의 얼굴은 창살을 넘어선다. 마치 이처럼 광포한 인생 끝에는 광포한 종말만이 남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처럼 말이다.


영화의 마지막, 코니는 풀려나고 다시 상담사의 수업에 참석하게 된다. 방을 오고가는 환자들의 모습과 거기서 갈팡질팡하는 과정을 클로즈 업에서 클로즈 아웃으로 카메라는 천천히 빠져나온다. 부감은 아니지만, 닉의 얼굴에서 벗어나는 카메라는 교실, 더 나아가서 교실 바깥으로 위치를 옮겨가면서 영화 중간 중간 보여주었던 부감풍경의 축소판을 구축한다. 스스로 무엇이 문제인지를 파악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키워드에 맞춰서 방을 오고 간다. 닉과 사람들이 왜 그런 키워드에 맞춰서 방을 가로지르는지, 코니가 왜 그렇게 되었는지, 영화 속 모든 케릭터들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모른다. 각자 가지고 있는 행동의 동인 속에서 갇혀있는채로 방과 도시를 가로지른다. 굿타임의 마지막은 그런 점에서 영화의 축소판이자, 서로 맞닿지 못하는 씁쓸한 도시문명의 축소판이다. 하찮고 무의미하며, 개인에 갇혀있지만, 그것이 주는 애잔하고 씁쓸한 반복과 종말. 그런 점에서 굿타임은 도시문명의 핵심을 짚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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