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및 책 이야기


누가 그것을 믿을 것인가? 사람들 말로는 시간에 격분에

새로운 여호수아들이, 모든 시계탑 밑에서

그날을 정지시키기 위해 시계판에 총을 쏘아댔다고 한다.


-발터 벤야민,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는 발터 벤야민의 저서 중 가장 마지막이다:왜냐면 이 글을 끝으로 벤야민은 나치를 피해 도주하던 중, 프랑스 - 스페인 국경에서 월경에 실패 후 모르핀으로 자살하였기 때문이다. 엄밀하게 글이라고 부르기도 어려울 정도로 짧게 쓰여진 메모와 착상들은 후대 많은 철학자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은 저서인 동시에 그 모호성과 은유 등으로 인하여 논쟁을 불러일으킨 저서이기도 하다. 미카엘 뢰비는 이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라는 저서를 분석하면서 이러한 모호성을 철학자가 아닌 '문필가'로써의 벤야민의 특성이라고 보았다. 그의 글은 철저한 논리의 개연성이나 근거에 의해서 쓰여지지 않는다:사진에 대한 비평을 하면서 사진가의 엉망인 솜씨를 '범죄사실을 포착해내는 예리한 통찰력'으로 잡아낸다던가, 파울 클레가 히틀러를 보고 영감을 받은 천사 그림을 파시즘이라는 역사의 흐름에 저항하는 천사에 이미지에 비유하는 등 그의 저서에는 종종 오류가 발견되기도 한다. 


하지만 벤야민이 지금까지도 인용되는 것은 벤야민의 저서들이 후대의 많은 철학자와 예술가 등에게 영감을 불어넣어주기 때문이다. 그는 종종 틀리지만, 때로는 가장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이전에 누구도 보지 못했었던 것을 보았다.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을 보라. 그 누가 감히 '사진이 예술이냐고 묻기 전에, 사진으로 인해서 예술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이야기하라' 라고 선언하겠는가. 벤야민이 사랑받고 인용되는 이유는 잘 정돈된 저서를 보는 것이 아닌, 문필가가 독자를 뒤흔들고 영감을 불어넣는 강렬함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강렬함은 파시즘이 세계를 파괴하던 파국의 소용돌이 속에서 일말의 희망을 찾아내기 위해서 노력했던 벤야민의 치열한 사유와 맞물려 있다. 그렇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은 벤야민을 읽고 인용해왔다. 그 일말의 희망이 언젠가 우리 시대에 이루어질 수 있기를 바라는 간절한 기원 속에서 말이다.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를 분석하기 위해서 먼저 미카엘 뢰비는 후기 발터 벤야민의 사유가 마르크스의 정치철학과 함께 유대교 신학적인 전통이 서로 결합되었다고 본다. 상식적으로 이는 모순되었다:유물론에 근거한 마르크스와 사람의 믿음에 대해서 다루는 신학적인 측면은 물과 기름과 같이 섞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보통 후기 벤야민을 분석하는데 있어서 유대교적인 전통 관점에서 해석하는 사람과 정치철학적인 측면에서 해석하는 사람이 나뉘어졌었다. 하지만 유물론적인 해석과 신학적인 해석이 어느 한쪽만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라는 저작이 흔들리게 된다고 미카엘 뢰비는 주장한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이 모순된 것 같은 이야기는 정치철학에 핵심에 근거한 이야기라 할 수 있다. 랑시에르의 저서 무지한 스승을 예로 들어보자:여기서 랑시에르는 인간과 지성이 어떻게 모든 인간 사이에 평등하게 존재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랑시에르는 역설적이게도 근거에 기반하여 인간의 지성의 평등함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지성이 평등하다는 믿음 아래서 인간의 지성의 평등함을 증명한다. 과학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랑시에르의 증명과정은 틀렸다고 할 수 있다. 이미 믿음과 결과를 전제하여 증명을 하는 것은 결과를 편향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핵심은 바로 거기에 있다:인간의 지성이 평등하다는 명제는 과학적인 관점에서는 증명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믿음으로써, 그것을 행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았을 때, 랑시에르의 믿음은 신학적이라 할 수 있다. 즉, 정치철학의 근저에는 다소간의 '신학적'인 요소가 들어있다는 것이다:결국 마지막에 정치철학은 믿음을 수행하기 위한 수단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벤야민으로 돌아와보자:벤야민은 어째서 신학을 마르크스 정치철학과 결합시키는가? 마르크스 정치철학의 핵심은 유물론에 근거하여 자본가가 어떻게 생산수단을 독점하고 프롤레타리아의 노동력을 착취하는가와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위한 사상적 기틀을 제공하는 것이다. 벤야민이 마르크스와 사회주의에 주목하고 사상적 기반을 마련한 부분은 바로 역사의 구조를 설명하기 위한 툴을 보는 것이라 할 수 있다:역사는 자본가들에 의해서 프롤레타리아를 착취하는 것으로 구성되었으며, 이러한 프롤레타리아들은 역사에 기록되지 않았다. 즉 역사는 자본가라는 승자의 것이며, 패배자들은 역사에 자신의 이야기를 남길 수 없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마르크스주의는 역사의 진보를 믿었다:원시 공산제에서 노예제로, 노예제에서 장원과 농노, 공장과 노동자, 그리고 마지막엔 인류의 궁극적 상태인 공산주의까지 모든 역사는 일사분란하게 공산주의라는 마지막 단계를 향해 나아간다. 하지만 벤야민은 역사에 진보가 없다고 보았다. 패배자들은 언제나 모든 역사 속에서 패배하였으며, 승자는 언제나 승리하며 역사를 써내려간다. 벤야민은 이러한 역사관을 통해서, 진보에 의한 역사의 낙관이 아닌 비관론을 적극적으로 조직하라고 이야기했다:과거 역사의 비극과 프롤레타리아의 수난은 언제나 다시끔 일어날 수 있다, 아니 지금 이 순간에도 프롤레타리아는 모든 장소에서 무한히 패배하고 있다. 하지만 진보는 모든것이 진보를 통해 해결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아도르노가 역사의 변증법에서 보여주었듯이(이 역시도 벤야민의 테제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진보는 낙관론을 낳고, 진보의 낙관론은 또다시 새로운 역사의 비극을 불러온다. 비관론을 조직하라는 벤야민의 명제는 역사의 비극이 진보에 의해서 뒤로 밀려나는 것이 아닌 언제나 다시 발생할 수 있다는 의미이며, 이것과 싸우라는 명제인 것이다.


그리고 신학은 여기서 결합이 된다:역사 속에서 비극이 계속해서 반복되는 것이라면, 역사가 빠져나올 수 없이 영원히 끔찍한 순환나선을 그리는 폐곡선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역사의 비극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가? 벤야민이 유대교 신학자 숄렘과 했던 대화 중 이런 내용이 있다:천국은 멀리 있지 않다, 그저 지금 현재 있는 것의 위치들을 약간만 옮기기만 해도 가능하다. 벤야민이 주목한 것은 반복된 패배속에서 드러난 패배자들의 역사적 전통이다:해방구, 코뮌, 봉기 등등 패배자들은 승리하지 못할지언정, 역사의 순간 순간마다 여지껏 역사의 비극 나선에서 벗어날 수 있는 단초들을 제공하였다. 중요한 것은 이들을 기억하는 것이다:시간은 무정하게 흐르지만, 기억은 시간의 흐름에 저항할 수 있다. 0이 형용사나 명사가 아닌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동사'이듯이, 인간은 기억하는 행위를 통해서 이 희박한 가능성을 다시금 떠올리고 역사의 패배자들을 불러내어 흐름에 저항할 수 있다. 어떻게 본다면 바로 이 기억이야말로 저항의 가능성인 것이다. 시간과 역사의 무정한 흐름 속에서 인간이 모든 것을 정지시킬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인 것이다. 이 순간은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 하지만 그 순간의 가능성을 믿고 살아간다는 것, 무한한 패배의 흐름에 저항하는 행위 자체가 메시아적인 구원의 가능성이라 할 수 있다.


패배자들을 기억하는 것, 더 나아가서 반복되는 순환 나선을 끊는다는 벤야민의 발상은 어떻게 보면 한국인들에게 낮설지 않은 개념이다. 한국 대중문화에서 패배자에 대한 감수성은 찾기 어려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아이 캔 스피크 같이 위안부 피해자를 다루고 그 고통을 잊지 않고 살아가겠다는 다짐을 하는 영화가 극장에서 천만 관객을 돌파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우리가 벤야민이 이야기하였던 역사의 패배자를 기억하고 모든 프롤레타리아의 비극을 기억하는가? 아니다. 대한민국의 기억은 선별적이다:우리는 국가가 주도하였던 미군 기지촌 여성들의 비극을 잊었다. 우리는 대우로지스틱스가 마다가스카에서 130만 헥타르를 무상 조차하여 그때문에 시민 혁명을 일으켰던 역사를 잊었다. 우리는 배트남에서의 국군 학살을, 철거민들의 고통을, 그 모든 것들을 잊었다. 우리는 역사의 피해자인 동시에 새로운 가해자가 되었다.


한 국가, 사회, 집단, 개인이 모든 것을 기억할 수는 없다. 하지만 모든 패배자들과 피해자들의 고통을 평등하게 잊지 않으려는 노력이, 짧게나마 가능했었던 패배자들의 해방구를, 무정한 시간의 흐름을 멈출수만 있다면. 파리의 시민들이 시계를 쏴서 시간을 멈추려했듯이, 아마존 원주민들의 후예들이 브라질 발견을 기념하기 위한 시계를 화살로 쏘았듯이, 그 모든 망각의 흐름과 무정한 시간을 멈출 수 있다면 거기에 메시아적인 구원의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적어도 우리가 아니라면 언제일지 모를 우리의 후손들은 그 세상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알게 되었단다. 

비천함에 대한 증오도 

표정을 일그러 뜨린다는 것을. 

불의에 대한 분노도 

목소리를 쉬게 한다는 것을. 아 우리는 

친절한 우애를 위한 터전을 마련하고자 애썼지만 

우리 스스로 친절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너희들은, 인간이 인간을 도와주는 

그런 세상을 맞거든 

우리를 생각해 다오.

관용하는 마음으로 


-베르톨트 브레히트, 후손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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