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이야기



보드게임과 컴퓨터의 결합은 사실 놀라운 것은 아니다:생각외로 많은 보드게임들이 테블릿으로 이식되었으며, PC에서 보드게임을 하는 테이블탑 시뮬레이터 같은 게임들이 은근한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은 이 둘의 결합에 대해서 의외의 수요가 있음을 증명하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컴퓨터 게임과 보드 게임이 결합하는 경우는 찾기 힘들었다:컴퓨터는 보드게임에 있어서 주사위, 카드 등의 컴포넌트를 대체하는 편리성을 보장하는 역할을 맡지만, 본격적으로 '컴퓨터 없이는 게임 플레이가 불가능한' 보드게임은 역설적으로 구곳울 보드게임이라 부르기 힘들다는 장르적 모순에 봉착하기 때문이다. 컴퓨터가 보드게임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면 과연 컴퓨터와 보드게임 사이의 차이는 무엇이고, 무엇이 컴퓨터 게임이 된단 말인가? 혹시 이것이 보드게임의 종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닐까? 


광기의 저택 2판은 그러한 경계를 적극적으로 허문 게임이라 할 수 있다. 광기의 저택 1판은 FFG에서 만든 아캄호러 프랜차이즈의 작품이자 비대칭형 대전 게임으로, 게이머 한명이 신화적 존재를 플레이하면서 조사자 플레이어들의 조사를 방해해야 한다. 조사자들은 서로 협력해나가면서 퍼즐을 풀고 괴물들과 싸워야 하는데, 이미 비슷한 컨셉의 비대칭 협동 게임인 이볼브를 통해서 증명되었듯이 신화적 존재를 플레이하는 플레이어가 얼마나 숙력되었고 게임의 완급을 조절하는가에 달려 있다 할 수 있으며, 흥미로운 게임 진행에도 불구하고 광기의 저택 1판이 다소나마 하드코어한 게임으로 자리매김한 큰 이유라 할 수 있다. 하지만 2판에서는 신화적 존재의 역할을 전적으로 컴퓨터가 맡도록 게임을 재구성하였다. 그렇기에 전반적으로 광기의 저택 2판의 룰은 간소화되었다:게이머가 신경써야 하는 것은 케릭터이 갖고 있는 전투나 퍼즐 풀기 등의 게임에 있어 가장 재밌는 부분들 뿐이며, 게임을 굴러가게 만드는 자잘한 룰들이나 규칙들의 진행을 컴퓨터가 도맡아 하기에 게이머들은 룰에 신경쓰기보단 적극적으로 의견을 교환하며 협동 게임을 즐길 수 있다.


이러한 게임의 구성은 '아캄 호러'라는 판타지 플라이트 게임의 프랜차이즈의 정체성을 궤뚫는 구성이라 할 수 있다. 아캄 호러라는 게임의 핵심은 '데미지 컨트롤'이라 할 수 있다. 아캄 호러 프랜차이즈에서 조사자들은 툭하면 미치고, 툭하면 데미지를 받아 뻗어버리고, 잘못 굴러간 주사위나 잘못 뽑은 카드 하나에 게임이 완벽하게 박살나는 일이 부지기수다. 그렇기에 때로는 헛웃음이 나오는 '우주적인 부조리'(그렇다, 아캄 호러 프랜차이즈의 핵심은 공포가 아니라 부조리 그 자체다)에 맞서 싸워나가는 것, 어떻게든 가진 수를 쥐어짜나가며 싸우는 것이 아캄 호러 시리즈의 정체성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아캄 호러는 단순하게 부조리함만을 강조하지 않는다. 게이머에게 게임이 클리어 불가능하게 느껴지는 순간에서 게임의 매력은 반토막 난다. 하지만 아캄호러는 조사자들을 매우 유능하게 설정해두고, 어떤 한 분야에 있어서는 범우주적 부조리에 당당히 맞서싸울 수 있도록 게임을 구성한다. 하지만 혼자는 이 거대한 부조리에 맞서싸울 수 없다. 그렇기에 아캄 호러는 서로의 단점을 보완하고 시너지를 낼 수 있는 협동의 양식을 갖추었을 때, 가장 재밌는 보드게임 프랜차이즈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광기의 저택 2판은 아캄 호러에 있어서 가장 '인스턴스한 재미'를 가져다주는 게임이라 할 수 있다. 게임은 컴퓨터/스마트 기기를 이용해 시나리오를 선택하고, 컴퓨터가 게임 마스터 역할을 수행하되 게이머들은 조사자를 움직여 시나리오에 따라 정해져있는 목표를 완수해야 한다. 시나리오를 선택하여 게임을 진행할수록 게이머에게 무작위적으로 불리한 일들이 일어나면서 정신적 육체적 데미지가 누적되기에 게이머들은 처음 플레이할 때는 게임을 클리어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여러번 플레이 하다보면 게이머들은 광기의 저택 2판에는 게임 내에 설정되어 있는 타임라인에 따른 이벤트와 아이템, 적들이 등장하는 일련의 규칙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게이머가 시나리오를 꿰고 있다면 광기의 저택은 클리어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다. 문제는 컴퓨터가 만들어낸 랜덤으로 발생하는 이벤트들과 스폰되는 적들, 무작위로 생성되는 보드맵(맵은 몇몇 정해져있는 맵 구성에서 로테이션 된다)은 플레이어가 계획했던대로 일이 풀려나가게 만들지 않는다. 그렇기에 게이머들은 게임 시나리오 외적으로 그때 그때 임기응변과 협동을 통해서 게임을 풀어나가야만 한다.


게임을 클리어하기 위한 큰 계획을 세우고 컴퓨터가 만들어내는 변칙적인 고비를 임기응변으로 풀어나간다는 발상 자체는 광기의 저택 2판 자체를 매우 흥미로운 게임으로 만든다. 보드게임에 스토리가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스토리를 알고 있는 것이 게임의 재미를 줄이는 것이 아닌 게임 클리어에 있어서 중요한 전략이자 단서가 된다는 점은 게임의 리플레이성을 높이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컴퓨터가 게임 마스터 역할을 하기 때문에, 게이머들이 오로지 협동의 경험에만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는 점도 눈여겨 볼 부분이다:수많은 게임들이 컴퓨터의 도움없이 스스로 움직이는 '게임 논리'(AI 보다는 원시적이지만 분명히 게이머가 필요없는 자율적인 규칙)를 만들고 완벽한 협동 게임을 만들고자 노력한 점을 생각해보면, 광기의 저택 2판은 역으로 '컴퓨터가 아예 게임 마스터이자 무작위로 게임 논리를 생성해내는 역을 맡는다면?'이라는 발상을 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컴퓨터가 게임 마스터 역할을 함으로써 기존의 보드게임에서는 보일 수 없었던 독특한 시도와 게이머와 컴포넌트 사이의 새로운 형태의 상호작용을 꾀하였다는 부분도 눈여겨 볼만하다. 특히 NPC 토큰의 존재와 NPC와의 대화, 나래이션, 효과음 등의 존재는 기존의 협동 보드게임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요소다. 그렇기에 게임은, 흥미롭게도 작은 TRPG처럼 느껴지기도 한다:게임은 게이머에게 여유를 제공함으로써 시나리오에 집중하고, 자신의 케릭터와 다른 게이머 사이의 상호작용에 집중할 수 있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광기의 저택 2판은 이렇게 보면 매우 매력적인 게임이긴 하지만, 보드게이머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 단점도 치명적인 게임이라 할 수 있다. 우선, 게임에서 발생하는 대부분의 무작위 이벤트의 해결은 주사위 굴림에 기반하고 있다. 그렇기에 광기의 저택 2판의 이벤트들은 다소간 기계적이고도 질리는 부분이 많다고 할 수 있다. 맛깔나는 플레이버 텍스트를 보여주긴 하지만, 본질적으로 핵심은 '주사위 몇개를 굴려라'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보드게이머 입장에서는 이 게임이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게임이라기 보다는 주사위를 굴리는 게임처럼 느껴질 소지가 다분히 있다. 게임의 리플레이 가치 대부분이 무작위로 생성되는 난관을 게이머가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쥐어짜내는 부분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고려해본다면, 여타 플레이어 말이나 적들 말, 토큰 같은 여타 다양한 컴포넌트와 상호작용하는 보드게임 특유의 강점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는 것으로도 보인다.


이는 광기의 저택 2판이 컴퓨터가 게임 마스터의 역할을 주재하되, 현실의 게임 컴포넌트들과 유리되어 움직이고 있다는 문제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컴퓨터는 어디에 게이머가 있는지 모른다. 게이머가 어떤 아이템을 갖고 있는지, 자신이 배치한 적이 어딨는지 등을 전혀 모르기에, 게임 마스터 역할을 하는 컴퓨터는 자신의 명령을 추상적으로 표현할 수 밖에 없다:가령 컴퓨터가 몬스터 1은 가장 가까이 있는/가장 지능이 높은 게이머를 골라 공격하라와 같은 추상적인 명령을 내리면, 게이머는 대신 그 몬스터 1을 옮기고 게임 마스터인 컴퓨터에게 그 결과를 입력한다(몬스터 1이 게이머에게 접근했다/게이머에게 접근하지 못했다) 마치 장님이 코끼리를 더듬듯이 추상적인 명령을 던지고 수행하고 주사위를 굴려서 성공/실패 여부를 판정하기 때문에, 게임은 세심하게 움직인다기 보다는 우격다짐으로 돌아가는 듯한 인상을 자주 준다. 물론 그 우격다짐으로 돌아가기에 게이머들은 게임을 쉽게 배우고 즐길 수 있지만, 점점 플레이 수준이 높아질 수록 게임에서 발견되는 아쉬움들은 눈감아주기 힘든 부분들이 있다. 엄밀하게 본다면, 광기의 저택 2판의 컴퓨터 게임 마스터는 이미 보드게임에서 자주보아왔던 자율적인 논리 규칙들을 컴퓨터가 수행하는 수준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광기의 저택 2판은 기존의 보드게임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게이머와 컴포넌트 사이의 새로운 형태의 상호작용을 컴퓨터를 이용해 보여주는 동시에, 초보적인 게임 마스터 컴퓨터의 한계에 게임을 가두어버리고 만다.


결론적으로 광기의 저택 2판은 보드게임의 경계를 조금 더 넓힌 과도기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게임은 분명 재밌고, 오랫동안 다른 게이머들과 함께 즐기면서 플레이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게임 마스터 역할을 맡는 컴퓨터가 게임 컴포넌트들을 좀더 세밀하게 통제하고 지시하여 게임의 변수를 만들어내거나, 주사위 굴림 외의 다른 변수를 규칙으로 도입하였다면 게임은 지금보다 더 흥미롭고 재밌는 게임이 되었으리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