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흑백 영화는 천연색을 다룰 수 없었던 구세대의 기술적 한계로 인한 결과물이었다. 하지만 그 기술적 한계로부터 우리는 여지껏 보지못했었던 새로운 미학적 세계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천연색으로 다양한 디테일을 보여주는 세계와 달리, 흑백영화의 모노톤으로 인해 세계는 단순화된다. 마치 만화가 데포르메를 통해서 현실을 왜곡하는 것처럼, 흑백영화도 현실을 왜곡한다. 하지만 그러한 왜곡 속에서도 위대한 흑백영화들에서는 다른 대중문화에서 찾아볼 수 없는 기품을 느낄 수 있다. 이는 빛과 어둠이라는 이원화된 색을 통해 다른 매체에선 찾아볼 수 없는 단순한 아름다움을 묘사하기 떄문이다:페드로 코스타가 존 포드의 영화를 두고, 중요한 것은 어떻게 단순해질 것인가? 라고 평한 적이 있듯이, 흑백영화의 핵심은 흑백이란 이원화된 표현으로 얼마나 단순하게 세계를 묘사할까에 있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본다면 신도 카네토의 영화는 흑백영화의 정수를 정확히 꿰뚫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신도 카네토의 벌거벗은 섬은 아름다움의 백미라 일컬을 수 있는 작품이다. 영화는 단순하다:외딴 섬에 사는 일가족의 일상이 4계절을 따라서 진행된다. 어떠한 극적 사건도(물론 극의 마지막에 큰아들의 죽음이 나오기는 하지만), 대사도 영화속에선 드러나지 않는다. 불연속적인 컷들의 삽입을 통해서 영화 내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마치 단조롭게 반복되는 것처럼 묘사되며, 하나의 사이클을 이루는 것처럼 묘사한다:초반에 물을 길어서 섬으로 나르는 오프닝 시퀸스의 경우, 이를 단적으로 드러내는데, 카메라를 향해서 걸어오는 부부를 묘사하는 장면을 '겹쳐지게 배치'함으로써 시간적으로 반복되는(요즘 유튜브나 스트리밍 영상에서 발생하는 일종의 타임랙이라 봐도 무방하다) 듯한 느낌을 부여하게 만든다. 이는 영화 곳곳에서 사용되는 표현 방식인데, 이러한 표현을 통해서 영화는 생과 죽음, 사계절, 슬픔과 기쁨이 평범한 일상 속에서 반복되는 모습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반복되는 것이 아니다. 신도 카네토는 그러한 반복되는 일상의 고됨속에서도 묵묵히 버텨내는 활력을 아름답게 표현해내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땀'에 대한 묘사이다. 신도 카네토의 영화는 땀의 번들거리는 질감을 정확하게 표현할줄 아는데, 이는 흑백영화라는 매체의 특성도 크게 한몫한다고 할 수 있다. 햇볕에 반사되어 번들거리는 땀의 질감은 명암이 뚜렷한 흑백영화에 있어서 인상적인 시퀸스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영화에서 땀의 번들거리는 질감은 영화에 일종의 '긴장감'을 불어넣는다:가령 덤불속의 검은 고양이의 오프닝 시퀸스를 예로 들어보겠다. 탈주무사들이 민가에 들어가서 여인들을 강간하기 직전의 긴장을 깔아두는 이 시퀸스에서 땀은 동물적인 불쾌함과 육체적인 긴장감을 드러내는 표현 수단으로 활용된다. 영화 내내 시종일관 땀에 절은 듯한 육체를 묘사하는 오니바바에서는 전쟁으로 피폐해져버린 세상과 그 속에서 동물적인 본능만 남은체로 살아남는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묘사하는 중요한 표현수단이기도 하다.


벌거벗은 섬에서 땀은 힘든 일상과 인물 사이의 긴장감을 불어넣는 표현수단으로 활용된다. 주인공 부부는 물도 흐르지 않는 황폐한 섬에 나룻배로 물을 길어날라서 작물을 기른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영화는 단 한마디의 대사를 사용하지도 않지만, 육체노동의 고됨을 땀이라는 질감(부모세대의 표현을 빌리자면 건강한 노동을 통해 흘린 건강한 땀)과 묵묵히 일하는 주인공 부부를 통해 묘사함으로써 노동과 육체 사이의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만약 이러한 땀의 질감이 컬러 영화였다면 가능했을까? 아니다. 땀이 흐르는 육체로 위로 빛이 내리고, 빛이 부서져서 반사되어 단조로운 세계에 약간이지만 명확한 디테일을 추가하는것 만으로도 영화는 관객들에게 충분히 강한 인상을 남긴다. 컬러 영화였다면, 이 작지만 섬세한 디테일은 다른 디테일과 정보들에 압살되어 사라졌을 것이다(물론 그만큼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도 늘어나겠지만) 이런 점에서 본다면 신도 카네토는 무엇이 흑백영화의 정수인지를 정확하게 꿰뚫어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벌거벗은 섬이나 오니바바, 덤불 속의 검은 고양이를 통해서 신도 카네토가 주목하는 부분은 바로 주목받지 못하는 서민의 삶, 그중에서도 특히 여성의 삶이다. 벌거벗은 섬에서 섬에서의 삶은 단조로운 형태로 반복되지만, 그 주변을 통통배가 지나가며 물고기를 팔러 육지에 왔을 때 보여지는 화려한 도시의 문물 역시 프레임 내로 들어온다. 하지만 영화는 그러한 것들에 시선을 돌리지 아니하며, 묵묵히 단조롭고 반복적인 삶에 초점을 맞춘다. 흥미로운 점은 영화가 단순한 삶에 대한 예찬을 문명이란 삶의 양식을 깎아내림으로써 이루어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영화는 주인공 부부가 처한 현실을 관조하며, 주변에 편의에도 불구하고 힘든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조용히 지켜볼 뿐이다. 


영화에서 가장 눈여겨 봐야할 인물은 주인공 부부의 아내이다:영화는 부인의 모습을 많이 다루기도 하지만, 영화 내에서 가장 희노애락이 분명하게 들어나는 인물이 바로 아내이기 때문이다. 남편은 자기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는 묘사가 많은 반면, 부인은 자신의 감정을 대사없이 다양한 표정을 풀어낸다. 흥미로운 점은 오니바바나 덤불 속의 검은 고양이에서도 여성이 주인공으로 나온다는 점인데, 남성적인 세계(또는 부조리한 세계)에 피해자(덤불 속의 검은 고양이) 또는 주변인(오니바바)으로 등장하여서 가부장적인 세계나 시선이 갖지 못하는 인물(여성)들의 삶의 편린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문명과 문명 너머의 대비(벌거벗은 섬)와 무사와 평민의 대비(오니바바와 덤불 속의 검은 고양이), 그리고 더 나아가 여성의 삶과 남성의 삶의 대비는 신도 카네토 영화에 있어서 중요한 모티브로 보여지며 흑백영화라는 흑백의 세계에 걸맞는 세계의 접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