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921년, 뉴욕 그 곳에 사랑이 있었을까?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뉴욕 엘리스 섬에 도착한 ‘에바’. 동행한 여동생의 입국 거부로 맨하탄의 빈민가에 혼자 남겨진 그녀는 댄스홀 밴디츠 루스트 ‘브루노’의 도움으로 일자리를 얻게 된다. 하지만 이 만남은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이 되고, 삶은 겉잡을 수 없이 흘러간다. 한편, 운명처럼 마주친 ‘올란도’는 그녀에게 다시 행복해질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하는데…사랑을 가져본 적 없는 호스트, ‘브루노’, 사랑에 흔들릴 수 없는 여인, ‘에바’, 사랑도 가지고 노는 마술사, ‘올란도’. 살기 위해 사랑했던 시대에 만난 세 남녀, 새로운 인생을 꿈꿨던 그들의 운명이 엇갈린다!(네이버 영화 시놉시스)


영화 감상을 쓸 때마다 네이버 영화 시놉시스를 인용하고 있지만, 네이버 영화 시놉시스는 오로지 이야기의 반만을 다루고 있다. 이민자는 사랑에 대한 문제이긴 하지만, 동시에 전형적인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제임스 그레이의 영화 대부분은 전형성의 탈을 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다른 영화적 흐름을 보여주는 일이 많으며, 이것은 더 야즈나 투 러버스의 리뷰에서도 다루었던 부분이기는 하다. 마치 영화 노 맨즈 랜드 같은 씁쓸한 부조리극을 밝은 코미디 극처럼 포장을 했었던 마케팅과 같이, 영화를 소비하는 소비자들에게 있어서 장르적 전형성에 근거하여 영화를 홍보하고 설명하는 것은 편리한 툴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영화를 잘못 이해하게 만드는 치명적인 문제를 내포하고 있기도 하다. 그렇기에 투 러버스를 감상하는 관객들은 시놉시스를 믿으면서 동시에 믿지말아야 한다. 그래야만 이 영화가 어떤 의미와 맥락에서 다루어졌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첫 걸음을 띄게 되는 것이다.


제임스 그레이의 영화 세계는 가족이라는 기본적인 공동체로부터 시작된다:그리고 그 공동체로부터 탈출하려는 욕구와 안착하려는 욕구, 이 둘 사이에서 갈등하면서 어느쪽에도 속하지 못하는 섬세하며 오묘한 모습을 제임스 그레이는 포착한다. 이는 가족이 주는 사랑의 이중성에 대한 감독 개인의 경험에 기반하고 있으며, 사랑이라는 개념을 양가적이며 중력에 비유(끌여당겨지며, 동시에 그 끌여당겨짐에 저항하는)하는 모습은 다른 영화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다. 흥미로운 점은 제임스 그레이가 이러한 복잡 오묘한 세계를 다루는데 있어서 주로 쓰는 이야기의 구도가 '전형적인 장르 영화'의 서사라는 것이다:더 야드나 리틀 오데사는 돌아온 범죄자 탕아라는 범죄물의 구도를 다루었다. 그리고 투 러버스는 전형적인 멜로물의 이야기 서사 뼈대를 갖추고 있다. 하지만 그 내부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은 무언가 내용이 뚜렷하게 구분되는 이야기가 아닌, 선인도 악인도 없는 양가적이고도 섬세하며 축축하게 젖어 무거워진 세계이다. 


이민자도 이러한 연장선상에 있다:한 여인을 매춘부로 만드는 포주에 대한 이야기는 전적으로 선과 악이 구분되는 세계로 비춰질 수 있다. 하지만 영화 내에서 브루노가 진정으로 악한인가? 관객들은 영화 내에서 몇몇 섬세한 장면들(에바의 발에 입을 맞추는 브루노)을 통해서 그가 전형적인 악한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분명 에바에게 빠져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어째서 그는 에바를 매춘부로 착취하는 것일까? 우리는 여기서 한국영화인 나쁜 남자(김기덕 감독)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사랑하는 여자를 매춘부로 만들어 착취한다는 이야기의 구도는 이민자와 나쁜남자가 공통적으로 공유하는 부분이며, 동시에 기존의 멜로드라마 서사에 반하는 불쾌하며 미묘한 지점이다. 하지만 나쁜남자가 사랑에 대한 중산층 서사(사랑은 무엇이든 극복할 수 있다)에 거대한 빅엿을 먹여주는 흐름이었다면(이는 감독의 출신 배경 및 성향에 근거하고 있다), 이민자가 초점을 맞추고 있는 부분은 다르다. 김기덕의 나쁜남자가 중산층의 판타지를 거칠게 부수는데 초점을 맞추었다면, 이민자는 대단히 섬세하게 그것을 뒤틀며 장르로써의 멜로드라마에서의 사랑이라는 관념과 제임스 그레이 영화에서의 사랑이라는 관념을 접합시키는데 초점을 맞춘다.


그렇다면 사랑이란 무엇인가? 제임스 그레이 영화에서의 사랑은 다음과 같은 제임스 그레이의 자전적인 이야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아버지는 나에게 영화감독이 되지 말라고 하셨다. 물론 그는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 말을 했다. 하지만 그는 틀렸다. 나는 감독이 됐다. 모든 가족의 내부에는 무시무시한 감정적 지원과 감정적 파괴라는 양면이 숨어있다." 사랑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사랑하는 사람을 납작하게 붙잡는 힘을 갖기도 한다. 사랑하기 때문에 같은 바운더리 내에 묶고자 하는 것, 그것이 때로는 엄청난 폭력이 될 수도 있음을 제임스 그레이는 인지한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은 가족으로부터 상처를 받고 가족을 증오하기도 하지만(가족을 증오하는 영화는 가족을 사랑하는 영화만큼 수가 많다), 제임스 그레이가 이들보다 더 높게 부상하는 것은 가족(또는 가족과 유사한 커뮤니티)에 대해서 사랑하면서 떠나고 싶은 것이라는 양가적인 감정을 훌륭하게 잡아낸다는데 있다:투 러버스에서 어머니는 떠나는 아들을 축복하며 배웅한다, 더 야드에서 삼촌은 끝까지 자신의 사촌을 감싸안으려 한다, 리틀 오데사에서는 돌아온 탕아는 동생을 사랑한다. 제임스 그레이의 영화가 훌륭한 것은 가족이란 커뮤니티의 중력과 그에 얽메이는 감각을 다루면서도 그 속에 있는 가치가 '진정성 있게' 느껴지게 만든다는 점에 있다.


제임스 그레이의 영화들은 러시아 유대인 이민자라는 커뮤니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그리고 이는 감독 자신의 출신 배경이기도 하다):그런 점에서 본다면 영화 이민자는 제임스 그레이 버전의 대부 2편이라 할 수 있다. 모든 것은 바로 여기서 시작되었다:1차세계 대전의 전화를 피해서, 핍박받았던 구세계로부터 이민자들은 꿈을 품고 미국으로 건너온다. 하지만 그들을 맞이하는 것은 구세계와 동일한 착취와 핍박이었다. 이는 브루노와 에바로 대변되는 폴란드 계 유대인 이민자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미국이라는 커뮤니티가 어떻게 구성되었는지에 대한 우화로도 읽을 수 있다. 왜냐하면 미국이란 국가란 근본적으로 이민자들의 나라이기 때문이며, 그러한 이민자들이 믿을 수 있었던 것은 같은 정체성을 지니는 유사 가족 공동체였기 때문이다. 미국으로 이민하는 외국인들이 거치는 엘리스 섬으로부터 시작하는 영화의 시퀸스처럼, 새로운 희망에 부풀어 올랐던 에바 자매의 희망이 외부자라는 신분으로 인해 쉽게 무너지는지(아감벤이 이야기했었던 입국심사장의 난민 같은 호모 사케르적인 의미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에바를 외국인이 아닌 이민자의 유사 가족 공동체에 받아주는 브루노를 통해서 어떻게 이민자들의 커뮤니티가 자연스럽게 형성되는지를 보여준다.


하지만 브루노의 유사가족 공동체는 동시에 '착취'의 커뮤니티이기도 하다:먼저 온 이민자들은 자신의 이익을 공고하게 하기 위해서 후에 온 이민자들을 착취하거나 구시대적인 명분 아래서 공동체의 구성원을 내친다. 이는 남성(포주)과 여성(매춘부)의 관계에서도 찾아볼 수 있으며, 에바가 가문의 명예를 더럽혔다며 내치는 이모부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제임스 그레이의 영화에서 가족 내에서 여성 구성원에 대해서 갖는 어떤 공감의 정서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가부장적인 권위를 갖는 아버지 같은 존재인 에바의 이모부와 이를 중재하는 여성의 존재인 이모)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임스 그레이는 그 어느 누구의 편도 들어주지 않으며, 답을 내리지 않은채 양가적인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본다. 착취인 동시에 동등한 관계(일을 하면 급여를 받는다)의 위태로운 균형이 브루노와 그의 공동체를 지배한다.


그리고 올란도의 등장으로 이야기는 복잡하게 꼬여간다. 엘리스 섬에서 중력을 거스르는 마술을 보여주는 올란도의 모습은 현실의 중력을 거스르는 미국이라는 공간의 매력이자 이민자들의 희망을 대변한다. 하지만 올란도의 등장에 대해서 브루노가 보여주는 극단적인 히스테리의 정서는 일반적인 연적 또는 삼각관계에서 느끼는 감성이 아니다:올란도는 이민자의 공동체를 벗어난 미국이라는 희망과 환상에 매료된(그의 직업이 마술사임을 상기하자) 이전 구성원이며, 자신의 공동체의 구성원인 에바를 '미국적 가치'에 오염시킬 것 같은 탕아다. 이런 점에서 에바에 대해서 갖는 브루노의 감정은 여성에 대한 사랑인 동시에 공동체를 지배하는 가부장의 권위로도 읽힐 수 있다:즉, 브루노의 사랑은 아버지된 자의 권위로써,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려오는 수직적인 사랑이다. 그가 이끄는 이민자의 공동체는 그들만의 질서가 있고, 브루노의 질서 내에서 공동체는 가족적인 '사랑'으로 묶인다. 하지만 이 사랑은 진정하긴 하지만 족쇄인 동시에 폭력이기도 하다. 그리고 올란도가 빈 총으로 브루노를 위협할 때(어떻게 보면 미국이란 희망이 갖는 과격한 모습을 보여준다고도 볼 수 있다. 전통과 자신의 출신으로부터 완전히 떨어져 나온 자유로운 구성원에 대하여), 브루노는 우발적으로 올란도를 죽여버리게 되면서 이야기는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 


이민자가 제임스 그레이의 영화 세계에 있어서 흥미로운 점은 바로 사랑이 아닌 새로운 요소가 중요한 요소로 등장한다는 것이다:그것은 바로 '고통'이다. 에바가 러시아 성당에서 고해성사를 할 때, 브루노는 에바의 고해를 엿듣는다. 그리고 거기서 그녀가 이민선에서 강간당하고 문란한 여인으로 낙인찍혔다는 그녀의 고통을 알게 된다. 또한 에바는 브루노가 누명을 쓴 자신을 위해서 경찰에게 폭행당하고 현금을 갈취당하는 것을 엿보며 브루노의 고통을 목격한다. 에바가 이모에게 자신의 고통을 이야기하고 용서를 구하듯, 브루노와 에바는 서로의 고통에 공감하여 진정한 공동체를 이루어낸다. 흥미로운 점은 제임스 그레이가 영화 내에서 가장 중요한 시퀸스를 구축하는데 있어서 또다시 '전통'의 이미지를 차용하고 있다는 것이다:러시아 동방 정교회의 고해성사를 고통을 이해하는 모티브로 차용함으로써, 이민자의 전통에서 이민자라는 커뮤니티와 중력을 넘어설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고자 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제임스 그레이는 속삭이는 것과 훔쳐보는 것, 엿듣는 것과 같은 극히 은밀하고 섬세한 장면들을 훌륭하게 캐치해낸다. 비단 이민자 뿐만 아니라 그의 다른 영화들에서 침묵속에서 지친 사람들이 서로 기대거나 섬세한 동작들로 서로와 교류하는 장면들을 잡아낸다. 에바의 발등에 입을 맞추고 첫 손님을 받게 하는 시퀸스에서 관객들은 브루노가 에바를 사랑하고 있음을, 그리고 어쩔 수 없다는 이야기로 에바를 옭아메는 폭력을 가하고 있음을 동시에 캐치해낼 수 있다. 이런 극단적인 상황에서도 브루노의 이야기가 감언이설이 아닌 어떤 '진정성'마저 느껴지게 만드는 것은 이 상황의 복잡미묘함을 섬세하게 캐치해낸 감독의 역량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영화의 가장 중요한 장면인 고해성사를 엿듣는 장면 역시, 각자의 고통에 갇히는 것이 아닌 내밀한 고통을 듣고 그 아픔에 공감하는 가능성을 섬세하게 보여준다. 이런 식으로 영화의 곳곳에서 제임스 그레이는 한 커뮤니티의 가장 내밀한 감정의 흐름을 포착해내며, 어느 감정이나 결론에 치우치지 않는 양가적인 감정, 차오르지만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을 관객들에게 전달한다.


영화의 마지막, 에바는 동생과 함께 작은 보트를 타고 떠나고, 브루노는 그와 반대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흥미로운 점은 리틀 오데사에서 도망치듯이 프레임 바깥으로 사라지는 주인공이나, 투 러버스에서 결국 돌아올 수 밖에 없었던 주인공과 다르게 에바와 브루노는 분명하게도 서로 다른 방향성을 지니고 해어진다는 것이다. 제임스 그레이가 자신의 영화 인생의 기원(러시아 유대인 공동체이자 미국 이민자 커뮤니티)을 이민자라는 영화를 통해 구현하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결말은 대단히 의미심장하다. 이제 겨우 서로를 이해하는 진정한 공동체를 형성하였건만, 그들은 이제 서로를 등지고 떠난다. 심지어 같은 프레임 내에 있는 것도 아니다. 정확하게는 프레임 너머로 사라지는 이 둘을 관객이 중간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그것은 새로운 공동체이자 가능성의 암시다:가족이나 공동체라는 중력에 얽메이는 것이 아닌 중력을 벗어난 공동체, 그 어디에도 편재할 수 있는 공동체의 가능성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제임스 그레이의 이민자는 그의 영화의 기원이자 영화 인생이 전환점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