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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스포트라이트에 가려진 슈퍼히어로의 진짜 모습! 그 동안 당신이 궁금해했던 할리우드와 브로드웨이 무대 이면이 낱낱이 공개된다! 슈퍼히어로 '버드맨'으로 할리우드 톱 스타에 올랐지만 지금은 잊혀진 배우 리건 톰슨(마이클 키튼). 그는 꿈과 명성을 되찾기 위해, 브로드웨이 무대에 도전한다. 대중과 멀어지고, 작품으로 인정받은 적 없는 배우에게 현실은 그의 이상과 거리가 멀다…재기에 대한 강박과 심각한 자금 압박 속에, 평단이 사랑하는 주연배우(에드워드 노튼)의 통제불가 행동들, 무명배우의 불안감(나오미 왓츠), SNS 계정하나 없는 아빠의 도전에 냉소적인 매니저 딸(엠마 스톤), 연극계를 좌지우지 하는 평론가의 악평 예고까지.. 과연 ‘버드맨’ 리건은 다시 날아오를 수 있을 것인가…(네이버 영화 시놉시스)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의 영화 버드맨은 한 퇴물 배우가 자기 중심을 되찾아가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연극에 도전하는 퇴물 배우와 이를 차가운 눈초리로 바라보는 대중과 평단, 그리고 동료 배우들, 그리고 한때 잘나갔던 자신의 분신 버드맨이 위압적이고도 달콤하게 속삭이며 연극을 포기하게 하고자 유혹하는 등 주인공인 리건 톰슨을 둘러싸고 있는 상황은 녹록치 않다. 이러한 쉽지 않은 상황을 극복해나가는 과정을 약 두시간에 걸쳐서 풀어나가는 버드맨의 이야기는 어떻게 본다면 그저그런 감동 스토리 영화에 머물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버드맨이 보여주는 영상과 이야기는 마치 꿈틀거리는 것 같이 생동감 있으며 매력적이며 독특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버드맨의 이야기의 특징을 다루기 위해서는 먼저 '어째서 리건 톰슨은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기 위해서 브로드웨이 무대에 도전하는가?'라는 지점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연극배우가 영화 배우로, 영화배우가 연극배우로 넘어오는 것은 일상다반사 까지는 아니더라도 희귀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이것이 리건 톰슨처럼 퇴물 배우가 어째서 '연극'이라는 장르에 집착하는가를 설명해주진 못한다. 그 자신이 레이먼드 카버에게서 호평을 들은 것을 연기 인생의 출발점으로 삼았다고는 하지만(물론 마이크의 지적처럼 그것은 술김에 쓰여진 촌평이긴 하다), 단지 그것만으로는 영화 전반에서 드러나는 그의 연극에 대한 광기어린 헌신을 모두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 리건 톰슨이 연극에 집착하는가를 설명하기 위해서 주목해야 하는 점은 연극이라는 매체의 특징이다. 독일의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이렇게 말한적이 있다.




"교회에 가거나 법정에 가거나 혹은 학교에 가는 식으로 극장에 간다면 그건 틀렸다. 우리는 스포츠 경기장에 가듯 극장에 가야한다. 여기서는 이두박근을 이용해서 하는 싸움이 아니라 좀더 섬세한 싸움이 일어난다. 그 싸움의 무기는 언어이다. 무대에는 항상 최소한 두명 이상의 사람이 있고, 또 대부분은 갈등을 겪는다. 우리는 누가 이기는지 분명히 지켜봐야 한다.


...(중략)...격투기에서 처럼 사람들 속을 꿰뚫어 봐야하고 예리하게 주시해야 한다. 무대에서는 사소한 기술이 가장 흥미롭다. 영화는 이런것을 갖고 있지 못하다. 영화는 내면적인 것과 미묘함을 이해하지 못하는 둔한 사람들의 몫이다. 그래서 좀 더 영리하고 섬세한 사람들은 연극을 보러 가야한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이 그들은 연극을 스포츠를 보듯 관람해야 한다."


-베르톨트 브레히트,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이렇게 말했다 P143






브레히트의 영화 매체 비평은 차치하더라도, 이 브레히트의 발언에는 중요한 의미가 숨어있다:연극이란 영화와 다르게 완벽한 재현이 불가능한 매체며 그렇기에 연극은 스포츠와 비슷한 극적 긴장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벤야민은 영화라는 매체를 여러번의 촬영을 통해 선별된 결과물을 바탕으로 편집되는 매체라는 것을 지적한 적이 있다. 그렇기에 영화는 컷으로 시공간이 분절되어 있으며, 각각의 컷은 가장 뛰어난 연기의 결과물로 구성이 된다. 하지만 그렇기에 영화에는 어떤 독특한 긴장(혹은 아우라)을 담아낼 수 없다:벤야민의 예시처럼, 총격전이 일어나고 창문을 깨고 도망치는 씬에서 창문을 깨고 도망치는 씬을 찍은 뒤에 총격전 씬을 찍어 영화의 시간대와는 전혀 다른 역순의 구성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서 연극은 그 연기는 오로지 그 순간에만 존재한다:연기자들의 몸상태, 관객의 분위기 등등 각각의 연극들은 고유한 특징들과 환경, 제약을 갖고 있으며 그로 인해서 그때에만 존재하는 생동감과 긴장감, 아우라를 갖게 된다.


왜 리건 톰슨은 연극이라는 수단을 자신 삶의 돌파구로 지목한 것일까? 관객들은 영화 내내 드러나는 그의 과거 삶들의 편린들을 통해 이를 알 수 있다. 리건은 끊임없이 사랑을 받기를 원하며 이를 갈구하지만 아내와 이혼하고 마약 중독 재활원에서 막 나온 딸과의 관계는 소원한 등 인간관계에서 전적으로 실패를 경험한다. 또한 그의 커리어는 버드맨이라는 히어로 무비로 흥행적 측면에서 성공했지만, 역으로 이는 그의 커리어를 얽메어버린다. 사람들이 기억하는 것은 코스튬을 입고 연기하는 배우 리건 톰슨이 아니라 버드맨일 뿐이다:그렇기에 케릭터로써 버드맨은 리건 톰슨이 아니다. 버드맨의 인격이 리건과 별개로 분열되고 서로가 서로를 부정하고 조롱하는 것은 전적으로 리건에게 있어 케릭터 버드맨은 그의 능력과는 전혀 무관한 타자적인 존재라는 것을 입증하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재밌는 부분은 리건이 홀로 있을 때 그가 '초능력'을 쓰는 것처럼 묘사되는 부분이다. 홀로 있을 때 리건은 물건에 직접 손을 대지 않고 물건을 집어던지거나 조작한다. 물론, 그가 진짜로 초능력을 가진 것은 아니며 그것은 전적으로 그의 환상에 불과하다:영화의 클라이맥스 직전에 택시비도 안 내고 택시를 타는 그의 모습에서도 드러나듯이 실제로는 매우 우스꽝스러운 일들이 리건이 초능력을 쓰는 장면 기저에 깔려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그가 왜 초능력을 쓰는 환상을 경험하는가 이다. 물론, 그가 어느정도 광기에 물들어 있다는 것으로 이를 설명할 수도 있다:하지만 본질적으로는 타인이 없을 때 그는 그의 세계의 중심이자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하기에 주변에 그런 전지전능함을 내비치는 환상을 본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비록 퇴물 배우임에도 그는 그 자신이 코스튬이나 부, 명성이 아닌 자신만의 힘으로 무엇을 이루어낼 수 있다고 믿기에 그런 환상을 경험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무엇보다도 리건은 스스로가 특별한 존재라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그리고 그것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어떤 한치의 거짓도, 덮여씌워질 이미지도 없는 공간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연극은 그러한 점에서 아우라와 생명감 약동하는 힘의 공간이며, 동시에 그의 연기의 근원(레이먼드 카버의 촌평)으로 돌아가는 작업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영화는 이를 매우 호흡이 긴 롱테이크의 형태로 풀어낸다:컷이 분절되지 않는 롱테이크의 특징 덕분에 영화는 끊기지 않는 흐름과 몰입감을 관객에게 선사한다. 그리고 여기에 드럼의 강렬한 박자와 함께, 리건의 광기, 마이크의 기벽, 연극판의 희로애락들이 더해지면서 버드맨은 다른 영화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생명력을 갖게 된다.


재밌는 점은 초중반에 중요한 위치를 점했던 연극배우 마이크(에드워드 노튼)가 중후반으로 갈수록 그 비중이 줄어든다는 것이다. 불륜을 들키는 장면에서 연인인 여배우와 실제로 하자고 덮치거나 술을 마시는 장면에서 직접 술을 마시는 마이크의 기벽은 연극이 갖는 에너지와 생명력, 그리고 광기를 드러내는 부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연극 무대라는 공간에서만 가능한 긴장감과 생명력이 마이크라는 인물을 움직이는 광기이자 동인이며, 이런 점에서 초중반의 리건은 마이크에게 밀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중후반부로 갈수록 리건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은 그를 광기로 몰아가며 그 역시도 마이크를 능가하는 광기를 갖게된다. 그리고 그 광기가 마지막 클라이맥스의 리건이 펼치는 혼신의 연기로 승화되게 된다.


클라이맥스 직전에 리건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은 전적으로 적대적이라 할 수 있다:타비사로 대변되는 평론가들은 필사적인 리건을 일탈하는 헐리웃 대배우로 규정하고 맹목적으로 적대한다. 대중들은 버드맨인 리건 톰슨을 기억할 뿐이며, 그를 신기한 동물 보듯이 보고 조롱하거나 관심을 보이고, 뛰어난 연극배우인 마이크 마저도 리건을 기회삼고 리건의 등을 처먹는 기인으로 묘사한다. 심지어 한술 더떠서 그의 내면 자아인 버드맨조차 헐리웃으로 돌아가 부와 명예를 얻자고 리건에게 속삭인다. 전적으로 자신을 연극에 투신함으로서 자신의 존재가치, 자신이 특별하다는 것을 입증하려는 리건의 노력을 이해하는 사람은 없다. 영화가 이렇게 리건을 둘러싸고 환경을 다루는 방식은 적대적이라 할 수 있다. 영화는 뭐든지 딱지를 붙이는 평론가에게 '도대체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비평가가 되는거야?'라고 조소하고, 연극판은 기벽이 판을 치며, 버드맨으로 대변되는 헐리웃의 히어로 영화를 멍청한 대중들에게 편승하는 상업물로 치부해버린다. 


하지만 오해해서는 안되는 점은 버드맨이 '예술가의 예술 인정 투쟁 vs 멍청한 대중 및 평론가, 세상'의 구도를 세워놓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리건은 스스로 자신이 될 수 있었는가?'라는 자아찾기의 문제로 접근한다는 것이다. 그가 원하는 것은 그의 연기에 대한 인정과 그 자신에 대한 사랑이었으며, 이를 위해서 자기 자신이라는 중심을 되찾을 필요가 있었다. 그것은 외부적인 압박(어떤 연극이 나오더라도 사상 최악의 악평을 주겠다는 타비사)와 내부적인 갈등(다시 헐리웃으로 돌아가 히어로 영화를 만들자는 버드맨) 사이에서 팽팽한 긴장을 경험한다. 그리고 그가 내린 결정은 그 팽팽한 긴장관계 속에서 자신을 내던지는 것, 관객과 세상을 향해 온몸을 부딪히는 행위(혼신의 열연을 펼친 뒤, 머리에 공포탄이 장전된 권총을 쏘는 것)로 귀결된다.


그러한 도박은 결국 성공을 거두게 된다. 리건은 비평가들과 대중들로부터 절대적인 찬사를 받게 되며, 그는 버드맨이라는 히어로 영화를 떠나 자신만의 독자적인 지위를 세상에 인정받게 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 자신이 더이상 버드맨이라는 존재에 속박되는 것이 아니라, 이를 뛰어넘었다는 점이다. 공포탄이 남긴 화약의 흔적은 그의 눈가에 버드맨과 같은 화장을 남겼으며, 그의 얼굴을 감싼 붕대는 영락없는 새 부리 같은 모습이다:더이상 리건은 우스꽝스러운 코스튬에 속박되어 있는 버드맨이 아니라 오롯이 자기 자신이자 버드맨의 힘을 가진 새로운 존재가 된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버드맨에게 작별을 고하고 그의 환상속에서 그랬던 것처럼 창문을 열고 세상을 향해 도약을 한다.


도약 이후 병실에 들어온 딸 샘이 아버지를 찾는 모습은 이 영화를 함축하는 백미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샘은 아버지가 침대에 누워있지 않음을 보고, 화장실을 본 뒤에 열려있는 창문을 보게 된다. 불안한 마음에 창문 바깥으로 몸을 내밀고 주변을 둘러보던 샘의 시선은 아래에서 위로 이동하게 된다. 그리고 그녀가 무언가를 보고 웃음을 터뜨리는 장면을 끝으로 영화는 막이 내린다. 이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리건의 하늘을 나는 환상은 전적으로 그의 환상, 그의 세계에서만 존재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샘의 시선이 아래를 거쳐 위로 향하는 것, 그리고 투신자살한 아버지가 아닌 하늘을 날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는 것처럼 묘사하는 점에서 영화는 리건이 특별한 존재라는 것이 리건의 환상만이 아닌 타인도 이를 인지할 수 있음을, 그리고 리건이 버드맨이 아니라 그 스스로 존재할 수 있음을 암시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버드맨은 광기어리고 생동감 넘치며 동시에 아름다운 작품이라 할 수 있으며, 기회가 있으면 꼭 보기를 추천하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