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유능한 프로그래머 ‘칼렙’(돔놀 글리슨)은 치열한 경쟁 끝에 인공지능 분야의 천재 개발자 ‘네이든’(오스카 아이삭)의 새로운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된다. 외부엔 알려지지 않은 그의 비밀 연구소로 초대받은 ‘칼렙’은 그 곳에서 네이든이 창조한 매혹적인 A.I. ‘에이바’(알리시아 비칸데르)를 만나게 된다. 그녀의 인격과 감정이 진짜인지 아니면 프로그래밍 된 것인 지를 밝히는 테스트를 진행하지만. 점점 에이바도 그녀의 창조자 네이든도 그리고 자신의 존재조차 믿을 수 없게 되고 모든 것을 의심하게 되는데…(네이버 영화 시놉시스)


창세기에 따르면 신은 여섯번째 날에 자신의 모습을 본따서 인간을 창조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자신의 모습을 본따서 인간을 창조하거나 인간의 모습을 하고 인간과 밀접하게 관계를 맺는 전지전능한 신이라는 모티브는 자주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창세기에는 동물과 식물, 하늘과 땅 모두 각자 자기의 모습대로 만들었지만 오로지 인간만은 신의 모습을 본땄다고 한다. 그리고 이 신의 모습을 본따서 만들어진 피조물은 신과 특별한 관계를 맺는다. 신은 이들을 이끌고 벌하며, 인간은 신에게 이끌림을 받거나 거부하거나 혹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왜 창세기나 여타 신화에서 신은 자신의 모습을 본따서 만들어진 이 피조물들에 대해서 어떤 권력을 행사하려 하는가? 그리고 왜 이러한 모티브들이 여타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종교 경전들에서 지속적으로 등장하는가?


여기서 아감벤의 예외상태에 나온 비슷한 구절을 가져와서 비교분석해보겠다:로마 가족법에 있어서 아버지라는 가장의 권위는 법적인 권리가 아닌 아버지라는 지위에서 오는 '사실적인 지위'가 법적인 권리의 형태로 굳혀진 것이라고 보았다. 즉, 창조한 자의 '권위'란 창조당한 피조물과 어떠한 형식으로든 권력 관계를 맺고 있으며, 그것이 가족애든 가장의 권위이든 가정폭력이든 간에 기저에 깔려있다(나는 너를 창조했으니, 너에 대해 권리를 갖는다. 사실과 법의 혼재)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신은 인간에게 마음대로 할 수 있다:그것이 폭압적인 강요든, 무조건적인 사랑이든 간에 말이다.


엑스 마키나는 어찌보면 이러한 연장선상에 있는 SF 영화다:인간은 자신의 모습을 본따 창조물을 창조하지만, 그것이 새로운 가능성인지 아니면 피조물과 창조주 모두의 파국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러한 SF 장르의 이야기들은 다양한 형태로 논지를 발전시켜나갔다. 일례로 이 블로그에서 다룬 스플라이스를 보자(리뷰는 여기):스플라이스는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이야기를 철학적이고도 심오한 이야기로 다룬 것이 아니라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를 근친상간과 비뚤어진 가족의 형태로 표현한 작품이다. 하지만 이 뒤틀린 막장드라마와도 같은 관계를 통해 영화는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갖고 있는 위험하고도 아슬아슬한 관계와 파국을 훌륭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엑스 마키나의 경우에는 그것이 '성정치'적인 관계로 발현된다:왜 극중의 에이바는 '여성'이라는 뚜렷한 성 정체성을 갖고 있는가? 칼렙의 표현처럼, 굳이 인공지능이라면 여성이든 남성이든 가릴 필요 없이 어떤 형태라도 괜찮을 것이다. 하지만 네이든은 창조주를 닮은 인간 여성이라는 형태를 통해서 인간과 관계를 맺고 상호작용해야만 인공지능이 인간의 수준에 올랐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고 주장한다. 일견 맞는 말일 수 있다:인간이 그것이 하나의 어엿한 지성을 가졌는지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관점에서 되돌아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가 개 모습을 하고 개의 사고 방식을 완벽하게 재현하는 인공지능을 만들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진짜 지성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일 수 밖에 없는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본다면 에이바의 탄생에는 전적으로 네이든의 뒤틀린 욕망이 숨어있다고 할 수 있다:에이바에게 섹스를 할 수 있는 기능을 부여한 점, 그리고 이전에 자신이 여성의 모습을 한 인공지능과 로봇을 만들었고 쿄코라는 메이드 겸 창부 가이노이드(여성형 안드로이드, 참고로 안드로이드는 남성형을 지칭한다)를 만들고 숨기고 있었다는 사실을 통해서 드러난다. 이는 폭압적이고 가부장적인 남성 네이든이라는 이미지를 보여주거나 그가 자신의 이상형인 여성형 가이노이드를 만들기 위해서 실험하고 있었다고 직접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오히려 영화는 이들을 배경으로 옮기고 관객에게 자연스럽게 의문을 갖도록 만들고 네이든의 의도에 대해서 추리를 하게 만든다.


영화는 이러한 과정을 자극적이진 않지만 담담하게, 그리고 무기질적인 톤으로 구축한다. 영화는 하나의 장소에서 벗어나지 않은 채 인공적이고 강박적이며 무균적인 환경에서 이야기를 진행한다. 실제 에이바의 CG 이외에는 돈이 들었을 것 같지 않은 저예산의 영화는 깔끔하고 강박적으로 컷을 배치하는데 집중한다. 그리고 이러한 컷 구성들은 쿄코와 에이바라는 존재들을 배경으로 밀어내고 탈색시킨다. 네이든이 쿄코와 에이바를 향해서 갖는 뒤틀린 성적 욕망은 인공지능과 튜링 테스트, 인공지능을 정의내리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두꺼운 껍질 아래로 숨어버린다. 하지만 영화는 이 무기질적이고도 두꺼운 껍질 아래에 깔려있는 음험한 욕망을 언뜻 언뜻 내비침으로서 관객이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관계가 논리적이고 이성적이며 철학적인 문제가 아님을 깨닫게 만든다.


인공지능과 튜링 테스트라는 껍질을 뒤집어쓰고 영화는 자아를 가진 인공지능이 탈출하고자 하는 클리셰를 풀어낸다:칼렙은 에이바에게 동정심을 느끼며 심지어는 성적인 이끌림을 느끼기도 한다. 그렇기에 칼렙은 에이바를 사랑한다고 이야기하며 에이바를 네이든이라는 폭압적인 마초로부터 구해내고자 노력한다:하지만 여기에 거대한 반전이 숨어있다. 사실 네이든이 에이바를 디자인 할 때, 칼렙이 성적인 이끌림을 느낄 수 있도록 디자인(칼렙의 야동 취향을 토대로 만들어졌다고 한다)을 한 것이었다. 네이든의 테스트는 엄밀하게 튜링 테스트 그 자체가 아닌 에이바가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것을 이용하고 여성성을 자각하여 인공지능을 넘어서 개인으로서 자유를 추구할 것인지를 테스트하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즉, 칼렙이 에이바를 향해서 느끼는 애정 역시도 조작되고 통제되어있는 실험의 변수였던 것이다.


그렇기에 여기서부터 영화는 기존의 클리셰를 비트는 제 3의 대안으로 나아간다:칼렙 역시도 네이든과 마찬가지로 에이바와의 성정치적 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도 자신의 이상형인 에이바를 사랑하고 구한다는 기존의 성역할과 판타지에 사로잡혀있는 것이다. 그리고 에이바가 네이든을 살해하고 자유가 된 순간, 에이바는 칼렙을 네이든의 저택에 가두어버리고 홀로 저택을 떠난다. 마치 모든 사건이 해결된 이후 재결합이 아닌 떠남을 택함으로서 인간으로써 자기 자신을 되찾는 입센의 인형의 집처럼, 에이바 역시도 갇혀있는 여성과 구출된 여성이라는 클리셰 및 성적 대상에서 벗어나 우리가 예측할 수 없는 존재이자 독립된 개인으로서 자립하는 것이다. 이는 창조주를 증오한 피조물이라는 클리셰도, 자신의 관념이 투영된 피조물을 사랑한 창조주라는 클리셰 모두를 벗어난 제 3의 대안이며 훌륭한 반칙이다.


결론적으로 엑스 마키나는 훌륭한 SF 영화이다:영화는 창조주가 피조물을 만들어낼 때의 욕망과 에고를 여성과 남성이라는 관계를 통해 풀어내었고, 그것을 부숴버리는 엔딩을 제시함으로서 관객에게 독특한 경험을 제공하였다. 사실상 엑스 마키나가 소설가였던 감독의 첫 데뷔작이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엑스 마키나 이후의 영화 역시도 기대된다고 할 수 있다.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칼럼]매드맥스 3부작, 마초 그리고 도로  (0) 2015.05.22
[감상]버드맨(2014)  (0) 2015.03.07
[감상]월즈 엔드  (0) 2015.01.22
[감상]지옥이 뭐가 나빠  (0) 2015.01.16
[감상]더 야드(2000)  (0) 2015.0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