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주인공 일행의 찬란한 고등학교 시절의 마지막 날이이었고 또 별똥별이 떨어진 날이었던 1990년 6월 22일. 멋쟁이 게리 킹은 각양각색의 친구들 네명을 데리고 동네에 있는 열두개의 술집을 하룻밤안에 모두 순례하는 계획을 세운다. 게리와 친구들은 "골든 마일" 을 따라가지만 단 세개의 술집을 남겨둔채 모두들 약을 빨고 술에 취해서 나가 떨어지고 만다. 게리는 그 날이 인생 최고의 날이라고 기억하게 된다. 


세월이 지나 현재 게리는 지금 생활에 넌더리가 나서 그 옛날 미처 다 하지 못한 술집 순례를 하자며 친구들을 다시 불러오기 시작한다. 티격태격하면서 술집에 가기 시작한 친구들과 게리는 마을사람들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것을 발견한다. 1990년 마을에 있었던 사람들은 모조리 아직도 마을에 남아있었고 이상하게 하나도 안 늙은 술집주인들은 주인공들을 전혀 못 알아본다. 주인공들은 곧 마을 사람들이 파란 잉크로 찬 로봇들로 교체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위험에 처하지만 게리는 술집 순례를 계속해야된다고 우기는데...(엔하위키 시놉시스)


월즈 엔드는 에드가 라이트가 감독하고 사이먼 페그, 닉 프로스트 두 배우가 고정적으로 출연하는 피와 아이스크림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이다. 일찍이 에드가 라이트 감독은 뜨거운 녀석들을 통해서 과거 액션 영화에 대한 애정어린 시선과 훌륭한 재구성을, 션 오브 더 데드(국내판 새벽의 황당한 저주)를 통해서는 좀비 영화와 코미디를 능숙하게 합쳤던 경험이 있다. 하지만, 이전의 두 작품이 과거 영화들을 향한 오마주라는 측면에서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면, 월즈 엔드의 테마는 어떤 영화들의 오마주도 아니고 드라마에서도 묘하게 앞선 작품들과는 빗나가 있는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밑에서 언급하겠지만, 이 묘하게 엇나가 있는 포지션을 차지하고 있는 월즈 엔드는 이 3부작들 중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상당히 인상깊고 뜻깊다. 물론 엔딩의 과격함과 아쉬움이 약간 남아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월즈 엔드는 3부작의 마무리로써는 훌륭한 작품이라 생각한다.


월즈 엔드가 피와 아이스크림 3부작 내에서 갖는 독특한 위치를 다루기 위해서는 먼저 션 오브 더 데드의 어떤 장면으로 돌아가야 한다:술집 윈체스터로 도망친 션은 자신의 어머니가 좀비에게 물려서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본다. 그리고 좀비에게 물린 그녀가 결국은 '좀비'로 변할 것이기에 머리를 으깨서 죽이자는 친구한테, 션은 제발 그런 이름(=좀비)으로 부르지말라고 항변한다. 흥미로운 점은 션이 영화가 시작할 때부터 끝날 때까지 좀비를 '좀비'라고 부르지 않는다는 점이다:적당한 이름이 없으니 그것the Thing이라 부르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션 스스로가 좀비를 좀비라 칭하는 장면은 등장하지 않는다. 어째서 션은 좀비를 좀비라 부르지 않는 것일까?


본인은 일전에 이런 글을 쓴적이 있다(http://leviathan.tistory.com/1819) 내용은 다음과 같다:션 오브 더 데드에서 션은 좀비가 일전에는 우리가 알고 있었던 친구, 가족, 직장 동료 같은 구체적인 '개개인'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다. 그렇기에 그런 그들에게 좀비라는 이름을 주는 행위 자체가 좀비이기 때문에 머리를 짓이겨서 죽여야 한다는 당위성을 손쉽게 부여하는 과정이라는 것을 영화는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션 오브 더 데드는 똑똑한 영화이다:좀비라는 이름을 주는 행위가 갖는 행위의 위험성을 간파하고 이를 거부하며 마지막에는 '좀비가 된 친구와 함께 살기를' 선택하는 것이다.


하지만 월즈 엔드에서는 아주 정확하게 정 반대의 장면이 등장한다:게리와 그 친구들은 파란 잉크가 가득한 대체된 사람들을 '로봇'이라 칭한다. 그러자 로봇인 그들이 반박한다:로봇은 체코어의 '노예'라는 단어에서 등장한 단어인데, 우리를 보라. 우리가 어딜봐서 로봇, 즉 노예란 말인가? 이러한 그들의 반박에도 불구하고 게리와 그 친구들은 그들을 '로봇'이라 칭하길 포기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분명 첫번째 작품에서는 무언가에 이름을 붙이는 것에 극도로 꺼려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면서, 왜 여기서는 아주 쉽게 무언가를 '노예'라고 칭해버리는 것일까? 여기에는 분명하게 어떤 의도가 존재한다.


하지만 유념해야하는 것은 영화가 이 대체된 인간들을 일방적인 증오의 대상으로 규정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나름 충격적인 종말 이후, 이 대체된 인간들은 다시 사람들 사이로 돌아간다. 심지어 게리는 새로운 친구들과 함께 모험을 떠나는데, 이 새로운 친구들 모두가 '대체된 인간'이다. 영화는 대체된 인간 자체에 대해서 영화는 어떠한 편견이나 감정을 가지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조롱 가득한 '로봇'과 종말 이후의 대체된 인간들에는 어떠한 차이가 존재하는가? 가장 중요하며 유일한 차이는 바로 '네트워크'의 유무이다:네트워크는 인류를 계몽하여 은하계 사회의 일원에 걸맞는 존재로 탈바꿈 시키기 위해서 우주에서 온 외계인들이다. 그리고 이들은 사람들에게 다양한 최첨단 기술을 전파하고, 긍정적인 캐치프래이즈와 더욱 완벽하고 훌륭한 인간을 만들어내고자 노력을 한다. 


네트워크라는 빌런의 존재는 기존의 외계인 빌런들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그들은 인류를 침략하거나 그들 중의 일부로 개종하러 온 것이 아니다. 경쟁이 아닌 유대감의 문제라고 주장하는 그들은 인류를 더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린다는 숭고한 사명의식을 갖고 이 땅에 강림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네트워크가 추구하는 긍정성을 거부하고 심지어는 마지막엔 기술문명을 붕괴시키는 사태를 초래한 게리 일행이 도덕적으로 '더 나쁜' 집단이라 일컬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네트워크가 만들어내는 세계는 그야말로 악의가 없는 순수하게 선한 세계이다. 하지만 역으로 그러한 악의없는 순수한 선이 더 끔찍한 결과를 불러일으킨다:도덕적으로 완벽하기에 반박이 불가능하며, '더 좋은 세계'를 원하기에 반대세력을 쓸어낼 수 있는 추동력을 갖는다. 네트워크가 순수한 인간 3명을 제외하고 나머지 수만명의 도시 주민들을 대체 인간으로 바꾸어 놓은 것도 과거 나치즘이 우성 아리아 인에 의한 세계를 만들기 위해서 아리아 인 이외의 인류를 향해 범한 인종청소라는 범죄의 맥락과 연결지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부정이 존재하지 않는 순수한 긍정의 세계란 지극히 파시즘적인 세계라고도 결론지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유대감'이나 '더 나은 인간' 같은 자기계발서에서 다룰 법한 가치를 기치로 내건 네트워크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대체된 인간은 '노예'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재밌는 점은 이러한 긍정의 세계에 대한 경계가 3부작 중 하나인 뜨거운 녀석들에서도 드러난다는 점이다:마을 장로들은 모여서 영국 최고의 마을 상을 받기 위해서 부랑자, 불량 청소년, 범죄자 등등을 죄다 죽이고 암매장한다. 주인공이 도대체 왜 그런짓을 하냐고 물어보자 더 좋은 선을 위해서For the greater good이라고 대답을 한다. 일견 이 황당해보이는 상황은 의미심장함을 내포하고 있다:영국 최고의 마을상이 공공선Greater good과 무슨 관련이 있단 말인가? 아니, 애시당초에 공공선이라는 것의 이름 아래서 행해지는 배제가 과연 정당화될 수 있는가? 감독은 이미 월즈 엔드 이전부터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나름대로의 고민이 있었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 비꼬기만 했었던 뜨거운 녀석들과 다르게, 월즈 엔드는 감독 스스로가 내린 결론이 포함되어 있다.


네트워크와 정반대의 입장에 서있는 게리와 그 친구들을 보자. 특히 게리의 경우에는 일반적인 관객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인물이다:우선 그는 완전히 자기 중심적이며, 유치하며, 그의 좋은 시절 추억을 위해서 모든 친구들을 위험에 빠뜨렸으며, 자기 술친구를 위해 어머니까지 팔아먹는 등 엉망진창인 인간 쓰래기라 평할 수 있다. 특히, 그는 자신의 좋은 시절 추억에 극도로 집착한다:술이 떡이 되도록 마신 뒤 느꼈던 충만감과 자신감의 순간에 집착하여, 게리는 술을 마시고 나이에 걸맞지 않는 옷을 입는다. 하지만 그런 그가 나이가 들어 도달한 곳은 친구들을 화나게 만들고 실망시키며, 동시에 그 자신도 알콜중독자일 수밖에 없는 비참한 현실이다. 그렇기에 그는 골든마일 재패에 집착한다. 그것이 그 현실로부터 도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영화는 바로 인간의 '병신성' 그 자체를 긍정하고 있다는 점이다:피터는 자신을 괴롭혔던 인간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처럼(잊을 수 없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Arcade Fire, Windowsill), 인간은 네트워크가 요구하는 것처럼 과거를 벗어나서 미래로 나아가는 완벽하게 긍정적인 인간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서로가 인간임을 증명하는 과정에서 병신짓을 하던 중에 입은 흉터를 드러내거나, 이혼한 아내의 결혼반지임에도 그것을 찾으려는 앤디의 모습, 가장 훌륭했던 자신의 인생을 되찾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외치며 친구의 만류에도 술을 계속 마시려는 게리의 모습,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점점 술에 취한 모습을 보여주는 그 친구들 등등에서 볼 수 있듯이 이들은 전적으로 과거에 매여있으며 육체적인 문제에 사로잡혀있다. 그러나, 그렇기에 그들은 무한 긍정을 주창하는 네트워크에 의해 대체된 인간들과 구분될 수 있다. 어찌보면 이렇게 병신같은 인간의 모습이야말로 인간을 근본적으로 정의내리는 '무언가'라고 영화는 보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본다면 월즈 엔드의 여정은 무한 긍정의 세계 속에서 병신같은 인류의 면모를 고찰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본질적으로 '계몽'될 수 없다는 것을 안 네트워크는 최첨단 기술들을 모두 파괴하며 지구에서 떠난다:아마도 월즈 엔드에 있어서 껄끄러운 부분이라 할 수 있을텐데, 우리는 이미 최첨단 기술 사이에 살고 있기에 그러한 기술의 절멸이 갖고 있는 의미와 무서움을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여지껏 병신같게 잘 놀다가 전 지구급으로 스케일을 키우는 엔딩에서 괴리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많았으리라 생각한다. 


본인 역시도 좀더 부드럽고 납득이 되는 과정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하지만, 여기서는 먼저 그 괴리감보다는 영화가 보여주는 '종말 이후'에 초점을 맞춰보고자 한다:네트워크가 떠난 뒤 기술 문명의 종말 이후의 모습은 우리가 생각하는 혼란과 광기와는 완전하게 다르다. 그들은 오히려 더 차분해지고(앤디), 원하는 것을 얻거나(아내와 재결합한 앤디, 스티븐은 피터의 동생과 결합한다), 혹은 종말 이전과 다름 없는 삶(대체된 피터와 올리버는 종말 이전의 생활을 하는것처럼 보인다)을 살게 된다. 네트워크는 인류에게 더 좋은 세계와 기술적 진보를 가져다 주었다: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두려워한 것만큼이나 우리의 삶의 본질을 차지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없더라도 인류는 행복하게 살수 있다고 영화는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멸망하였지만 새로운 세계에서 게리는 술도 끊고 면도도 깔끔하게 한 모습으로 새로운 친구들과 모험을 즐긴다. 게리의 모습은 어떤 의미에서 부정적이었던 과거의 자신과 일정 정도는 화해하며 자신의 삶의 균형을 유지하는 규칙(특히 술을 끊은 모습에서)을 찾아낸 것처럼 보인다. 


결론적으로 영화 월즈 엔드는 이전의 두 작품에서 이어지는 작품이다. 결말까지 이어지는 더 나은 과정이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영화가 갖는 흥미로운 지점들이 죽는 것은 아니며, 동시에 영화는 이전의 두 작품에서 보여주었던 섬세하며 통찰력이 느껴졌던 부분들은 나름대로의 논리와 결론을 갖게 되었다. 물론 이렇게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월즈 엔드는 유쾌하게 즐길 수 있는 작품이며, 이전 작품들과 같이 사람들과 술한잔 하면서 보기에는 딱 알맞은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감상]버드맨(2014)  (0) 2015.03.07
[감상]엑스 마키나  (0) 2015.02.21
[감상]지옥이 뭐가 나빠  (0) 2015.01.16
[감상]더 야드(2000)  (0) 2015.01.10
[감상]몬스터즈(2010)  (0) 2015.0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