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늘 본능에 충실한 거친 삶을 살아온 삼류 복서 알리. 그는 5살 아들의 갑작스런 등장으로 누나 집을 찾게 되고 클럽 경호원 일도 시작하게 된다. 출근 첫 날, 알리는 싸움에 휘말린 범고래 조련사 스테파니를 돕게 되고 당당하고 매력적인 그녀에게 끌려 연락처를 남긴다. 이후, 예기치 못한 사고를 당한 스테파니는 깊은 절망의 끝에서 문득 알리를 떠올리게 되는데…(네이버 영화 감상)


자크 오디아르 영화는 어떤 의미에선 추상적이라 할 수 있다:뚜렷한 주제나 드러내고자 하는 현상이나 목표는 없으며, 영화는 불현듯 끝을 맺는다. 예언자가 이슬람의 창시자 무하마드의 이야기에서 모티브를 얻어서 만들어졌다는 것과 예언자가 만들어내고자 했던 이야기가 어떤 연관관계가 있는가? 혹은 내 심장이 건너뛴 박동에서 왜 톰은 자신의 꿈을 포기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도달했는가? 사실, 앞선 두 영화는 어떤 의미에서는 문제 제기에 가까웠다고 본인은 생각한다. 물론 영화 두 편만으로 그의 영화세계 전반을 다루는 것은 가소로운 일이긴 하지만, 그 두 작품이 가져다주는 강렬하면서 비슷한 인상들은 부정하기 힘들다. 여기서 본인이 생각하는 자크 오디아르가 그려내고자 한 이야기는(혹은 프랑스 젊은이들의 현실은) 그렇게 쉽게 해결될 수 없는 문제라 할 수 있다. 뚜렷한 대안도, 해결책도 없기에 영화는 답을 내릴 수 없다. 그렇기에 러스트 앤 본은 오디아르 영화 세계에서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생각한다:러스트 앤 본은 어떤 의미에선 나름대로의 해답을 내리고자 한 작품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서로 연관관계가 없는 두 단편소설을 이어붙였다는 러스트 앤 본은 객관적으로 봤을 때는 이야기가 두 개의 갈림길로 쪼개지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다리를 잃고 재기하는 돌고래 조련사의 이야기와 떠돌이 같은 삶을 살면서 스트리트 파이트에서 자신의 존재 의의를 찾는 하류 인생의 이야기는 언뜻 보기에는 접점이 없어보인다. 하지만 주목해야 하는 점은 이야기가 두개로 갈려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두 이야기는 명백하게 맞닿아있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맞닿는 지점은 바로 알리와 스테파니의 육체이다. 이 둘이 왜 맞닿아있는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크 오디아르 영화들의 특징들을 간략하게 살펴야 할 것이다.


자크 오디아르 영화의 키워드를 뽑자면, 본인은 '소음과 분노'라고 요약하고 싶다. 대부분 이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머릿속이 핏빛 안개가 낀것처럼 뿌옇지만 분명한 탈출구나 원인, 해결책을 찾지 못할 때, 그 핏빛안개는 점점 짙어져서 소음이 되고 불안감이 되며 머릿속을 넘어서 서성임으로 나타나다가, 종국에 가서는 무지막지한 형태로 폭발하게 된다. 오디아르는 그런 불안을 육체의 형태로 구체화시키는 재능을 가진 감독이다:예언자에서 주인공이 마피아 보스에게 숟가락으로 눈가락이 파일뻔한 장면을 보자. 그 뒤에 주인공은 혼자서 고통과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서성이면서 욕지거리를 한다. 맞은 뒤의 빨갛게 부은 상처 부위가 고통과 짜증을 동반하지만 그것 자체에서 탈출할 수 없듯이, 자크 오디아르에게 있어서 육체와 폭력의 관념을 그러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육체와 폭력의 문법은 표현을 넘어서 극을 지배한다:내 심장을 건너뛴 박동을 보자. 톰이 폭력적이고 속물적인 아버지를 벗어나고자 한 피아노로부터 좌절되었을 때, 그는 비트가 강하고 시끄러운 랩음악을 다시 듣기 시작한다. 낮은 음이 베이스가 되어 세계와 단절된 막을 만들어내지만, 동시에 그 막은 내부의 불안과 분노를 가중시킨다. 아버지 세대로부터 탈출할 수 없는 자식 세대는 고독속에 갇혀서 자신의 분노와 좌절을 키워나간다. 그것이 결국은 엔딩에서 아버지를 죽인 러시아 마피아를 향한 폭력으로 드러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러스트 앤 본도 기본적으로 이러한 문법을 따르고 있다:처음 도입부에서 알리와 그 아들이 무전여행하는 장면은 어딘가 불안함을 내포하고 있다.(남은 음식을 주워먹는다던가, 히치하이킹을 한다던가) 특히 도둑질을 하는 장면에서처럼, 도둑질 직전의 불안감과 도둑질 후에 터져나오는 급박한 상황 등은 불안함과 폭발이라는 힘을 모두 갖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리고 또다른 관점에서는 알리의 경제 계층적 상황에도 빗대어 볼 수 있다:고정적인 수입은 없고, 떠돌아다녀야 하며, 기댈 곳도 없다. 그렇기에 항상 주변에는 불안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러나 알리는 '교양있는 지성을 가진 중산층'이 아니기 때문에 이 불안을 '우아하게' 풀어내지 못한다. 그렇기에 그가 이 불안을 풀어내는 방식은 그가 주로 듣는 박자가 강한 음악처럼 '분출되는 폭력과 섹스'이다.


영화 중반부터 후반까지 알리는 스테파니 이외에도 다양한 여자들과 섹스를 하거나, 불법 스트리트 파이트에 뛰어드는 모습을 보여준다. 혹자는 그가 자기 자신의 쾌락만을 쫒기 때문에 이기적이라고도 평가할 수 있겠지만(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볼 수 있는 것이, 그가 아들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과 누나와 매형과의 관계에서는 무조건적으로 이기적이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다:이것이 바로 그가 불안을 이겨내는 방식이다. 그는 생명력이 강하지만 정제되지 않고 불규칙한 리듬을 가진 자신만의 박자를 통해서 나름대로의 삶을 살아간다. 그리고 이 단순무식한 방법론은 다리를 잃은 스테파니에게 새로운 자극과 새로운 리듬을 선사하게 된다.


알리와 다르게 스테파니는 정적인 템포를 유지한다:그녀는 돌고래 조련사로써 경제적으로 안정적이며, 동시에 다리를 잃은 이후에도 경제적인 불안은 없어보인다. 알리가 자신을 둘러싼 여러 환경적 요인의 문제 때문에 불안을 느낀다면, 스테파니의 문제는 육체의 상실로 인한 침묵이다. 다리를 잃은 이후, 그녀는 삶의 원동력을 상실했다. 심지어 자살을 생각하고 메스를 숨겼다가 뺏기는 시퀸스에서조차도 그녀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상황에 폭발적으로 대처하기 보다는 조용히 눈물을 흘림으로서 자신의 상처받은 몸뚱이와 고독 속에 갇혀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재밌는 점은 그녀가 알리와 처음 만났을 때 하였던 것이 바로 클럽에서 남자를 꼬시는 일이었다는 것이다:후에 알리에게 스테파니가 고백을 하기를 남자를 성적으로 흥분시키는 것에서 자신의 힘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스테파니의 행동과 케릭터는 자칫 넘기기 쉽지만 의미심장한 구석이 있다:자신의 육체의 활력은 자신이 스스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타자가 느낌으로써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동시에 스테파니의 '자신감의 부족'이라고도 볼 수 있다:남자를 유혹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린 그녀가 자신의 외부에서 박자와 생명력을 찾아낼 수 없게 되었을 때, 그로인해 그녀는 자신을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스테파니가 알리를 통해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게 된 방식이 섹스와 수영이라는 점(덧붙이자면 음악을 들으며 춤을 추는 장면도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은 그런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왜냐면 이는 전적으로 '육체적인 활동'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알리와의 섹스는 이 영화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핵심축이라 할 수 있다. 영화 러스트 앤 본에서의 섹스는 쾌락의 문제라기 보다(물론 이를 전적으로 부정할 수 없지만) '박자를 몸에 새기는 행위'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처음 섹스를 할 때 스테파니가 알리에게 천천히라고 요구하는 장면은 침묵하던 그녀의 삶이 다른 박자를 몸에 받아들이기 거북하고 낮설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통해서 새로운 삶의 박자와 리듬을 얻고(그전까지 휠체어를 타다가 의족을 통해 스스로 걸어다니는 모습을 보라), 자신의 다리를 물어뜯은 트라우마의 원인인 범고래와도 조우할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만든다.


(영화에서 특기할만한 점은 범고래가 사고를 일으키기 전, 물 바깥의 음악소리가 물속에서 웅웅거리는 소음이 되어 불안감과 긴장감을 증폭시키고 있었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범고래 역시도 물 바깥의 사람과 똑같은 상황에 처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침묵에 사로잡혀 있다 새로운 박자를 얻은 스테파니가 범고래와 마주하는 것은 자신의 트라우마를 마주하는 것을 넘어서 범고래를 이해하는 행위로도 볼 수 있지 않을까?)


동시에 알리는 스테파니와의 관계를 통해서 '신뢰'라는 안정을 얻게 된다:불법 스트리트 파이트 매니저가 스테파니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숨었을 때, 알리는 스테파니를 전적으로 신뢰했다. 하지만 스테파니와 알리의 관계는 어떤 의미에서는 불안정하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의 관계는 전통적인 관계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특이한 케이스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알리는 스테파니에게 무례한 행위를(스테파니가 보는 앞에서 다른 여자를 꼬셔서 나가는 것) 쉽게 저지른다. 하지만 재밌는 점은 그렇게 제멋대로의 박자에 맞춰서 살던 그가 스테파니의 분노에 화내지 않고, 오히려 그녀와의 이 묘한 관계를 지속하는 쪽을 선택한다. 어찌보면 스테파니가 알리를 통해 자신의 삶의 활력을 찾았듯이, 알리는 스테파니를 통해서 신뢰와 안정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영화의 결말부에서 알리는 도망가듯이 누나 집을 나오고, 스테파니와의 연락이 끊기게 된다. 자신의 스트리트 파이트의 재능을 종합격투기에서 살리고 안정된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홀로 연습을 하던 알리는 시합을 하기 직전 아들과 만나다가 아들이 얼음물에 빠지는 사고를 겪게 된다. 자신의 주먹으로 얼음을 내려쳐서 아들을 기적적으로 구한 알리는 스테파니의 통화에서 아들을 잃을 뻔한 불안에 대해 토로한다:이는 매우 중요한 장면이다. 이전까지 자신의 불안을 토로하지 않았던 알리가 스테파니에게 자신을 떠나지 말아달라고, 그리고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것은 이들의 비정형적인 관계가 사랑의 범주에 포함되는 것을, 그리고 동시에 알리와 스테파니의 문제를 해결하는 동력이 사랑임을 드러내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러스트 앤 본에서 사랑은 미사여구나 상용구에 잡혀있지 않았으며 육체와 삶, 그리고 이것이 구체화되는 '박자'이다. 그렇기에 이 사랑은 기묘하지만 무게가 있으며, 독특하지만 이해할 수 있는 범주에 성공적으로 안착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러스트 앤 본은 이전의 영화들과는 다른 터닝 포인트라고 할 수 있다:불안은 안정을 얻게 되고, 내지른 주먹의 고통은 더이상 불안에 의해서 폭발적으로 튀어나오는 것이 아닌 신체의 일부로서 '거기 있음'을 인정받고 고요한 독백의 대상이 된다. 자크 오디아르는 이전의 영화에서 젊은 세대의 불안과 분노를 훌륭하게 그려내었다면, 그것이 어떻게 안착할 수 있는지에 대한 가능성을 러스트 앤 본을 통해 그려내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아름다우며 충분히 볼만한 가치가 있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엔딩의 독백을 인용하며 마무리짓도록 하겠다.





인간의 손에는 뼈가 27개, 그보다 더 많은 동물도 있는데 

고릴라는 엄지손가락 뼈 5개를 포함 총 32개다. 


어쨌든 손 하나에 뼈가 27개가 붙어있다니. 팔이나 다리가 부러진다면, 

몸에서 나온 칼슘으로 저절로 뼈가 붙고 

더 강해지기도 하지만 손가락이 부러지면 절대 완치될 수 없다.


주먹을 날릴 때마다 통증을 느낀다. 아무리 피하려고 해도 어느새 갑자기...

그 고통이 살아난다. 깨진 유리조각처럼...


나를 찌르고 또 찌른다.


-러스트 앤 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