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이 감상 역시 모대학 과제 레포트로 제출된 것입니다.


사막의 라이온은 20세기 초기에 벌어졌던 이탈리아와 리비아 사이의 20년 전쟁을 다루고 있다. 이 영화는 실화이며 등장인물도 역사적 실존 인물의 실명을 그대로 활용하고 있다. 20세기 초, 당시 끊임없이 벌어졌던 강대국의 제국주의 전쟁은 아프리카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영국은 이집트를, 프랑스는 튀니지아를, 스페인은 모로코를 점령했다. 그런데 이탈리아는 1910년부터 리비아를 침공하였으나 29년까지 교착상태에 빠진다. 그러자 무솔리니는 새 지후관 그라치아니를 파견한다.


한편 그의 상관 베드윈족의 지도자 오마르 무크타르로서 전직은 교사이며 적을 물리치는 것만이 평화로 가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코란의 정신을 이어받아총을 들고 나선 탁원한 전술가이다. 이탈리아군에 의한 무자비한 양민학살이 지속되지만 무크타르는 사막전과 산악전에서 뛰어난 전술로 현대병기로 무장한 이탈리아군을 계속 패퇴시킨다. 평화라는 미명하에 작전상의 협상이 벌어지고 전쟁은 계속된다. 결국 이탈리아군은 리비아 사막 수백 마일에 4천 명의 인부를 동원해 수천 톤의 철조망 작업을 행하영 베드윈족 5천명을 강제 수용소에 수용하고 무크타르를 생포해 공개리에 교수형에 처함으로서 1931 9 16일 전쟁을 종결한다.


 사막의 라이온은 제국주의 열강 시기에 있었던 식민지 지역민들의 저항들을 다룬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사실, 20년간 리비아에서 이탈리아를 상대로 싸운 오마르 무크타르의 이야기는 어떤 의미에서 전세계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반 제국주의 비정규군, 파르티잔의 사례이자 표본으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무크타르와 그의 반제국주의 파르티잔이 이슬람이라는 종교를 중요한 구심점으로 내세운 점은 눈여겨 볼만하다. 이는 이슬람이 그들의 역사를 통해 입증된 무력과 확장에 특화되어 있는 종교이기에 무장 파르티잔들의 전술적 교리로써 기능한 것이 아니라, 기계적이고 효율적이며 제국주의적 폭력에 맞서 싸우는 평화적이고 전통적인 가치를 위한 지역민들이 내세울 수 있는 가치라는 점에서 더욱 주목할 만하다. 종교는 지역민들의 문화 공동체를 구성하는 중요한 부분이며, 이는 이슬람이라는 문화가 이러한 파르티잔의 문화를 부추기기 때문이 아니라 종교라는 구심점이 지역민들을 뭉치고 조직적으로 행동할 수 있게 만드는 기제로 작동한다:레바논 같은 이슬람-기독교 갈등 지역에서는 기독교 민병대가, 미얀마에서는 이슬람에 대항하기 위해서 불교도들이 무기를 들고 민병대를 조직한다. 이슬람이 폭력적인 종교라기 보다는 종교가 인간과 지역, 그리고 국가와 국가를 넘어서 세계에 끼치는 영향력이 사람을 조직적으로 행동하게 만든다고 보아야할 것이다.


우리는 이슬람 부흥의 역사가 정복전쟁의 역사, ‘한 손에는 칼, 다른 한 손에는 코란을이라는 화전양면 정책의 결과물로 보고, 이슬람이라는 종교를 폭력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종교라고 쉽게 판단한다. 하지만 문제는 이슬람이라는 종교가 만약 무력적이고 호전적인 확장만으로 이루어진 종교라면 수많은 사람들이 매료될 리가 없다는 점이다. 물론 이슬람이라는 종교가 발원했던 역사적인 특성상 코란과 교리에 많은 군사적이고 호전적인 부분들이 들어있을 수 밖에 없었고, 이는 당시의 맥락을 감안하여서 재해석하여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이슬람 파르티잔들에게 있어서 아주 극명한 대립을 발견할 수 있는 사례가 있다: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주도하였으며 판지시르의 사자라 불렸던 아흐마드 샤 마수드와 소련-아프간 전쟁 이후 그에 대립하였던 극단적 이슬람주의자 탈레반이다. 마수드는 아프간 전쟁 중에 이슬람 원리주의자로서 압도적인 물량과 기술력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아프간 무자헤딘들을 이끌어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진정한 이슬람 원리주의자답게 그는 저항하지 않는 자, 아이, 여자에게는 손을 대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아프간 전후 이후를 생각하며 여성의 교육과 권리에 많은 관심을 가졌고 수피즘 책을 들고다니며 읽는 등 다른 사상에 관용적인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그에 반해 같은이슬람 원리주의자 탈레반들은 익히 알려진대로 수많은 인권 탄압과 유적 파괴, 학살, 테러 등의 행위를 자행하거나 방조하였다.


어떻게 이슬람 원리주의자라는 두 집단이 서로 정반대의 길을 걸었던 것일까? 그것은 아주 세밀하지만 중요한 차이에서부터 시작된다. 이슬람은(엄밀하게 이야기해서 모든 종교가 그러하겠지만) 시대와 장소를 뛰어넘는 메시지를 갖고 있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것을 전달하는 전통과 경전은 만들어진 그 시대에 사로잡혀 있다. 그리고 전통과 경전이 만들어진 시대가 갖는 권위는 결과적으로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막는 닫혀있는 폐쇄적인 해석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문제는 종교의 본질은 장소와 시대를 뛰어넘는 보편적인 매세지 그 자체이며,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경전과 전통은 그저 눈에 보이는 무언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종교의 경전이나 그 어떤 텍스트, 이야기, 전통 등은 현재 시대의 맥락에 따라서 재해석되고 다시 이해되어야 한다. 경전에서 메시지 그 자체를 재해석해서 발굴해내지 않는 한, 경전에 적혀있는 가르침은 책 사이에 끼워져서 향기와 아름다움을 잃어버린 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재해석의 문제는 필연적으로 곡해의 가능성을 수반한다. 멀리까지 가지 않더라도 이슬람-레반트 국가, 통칭 IS가 코란의 말씀대로 어린이 십자가형, 성노예, 대량 학살 등을 자행하고 있으며 분명 코란에 조항 자체로도 어긋나는 행위도 포함되는데도 이를 행하는 것은 이러한 곡해의 문제가 갖고 있는 위험성을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어떤 균형을 이룰 수만 있다면, 오마르가 이야기했었던 것처럼 중요한 것은 균형을 맞추는 것이라 했듯이, 과거와 현재, 전통과 현실, 율법과 가르침 등의 사이에서 능동적인 균형을 맞추는 게 가능하다면 종교는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이미지와는 다른 무언가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 더 이상 사람의 삶을 구속하는 기제가 아닌 삶의 구심점이자 새로운 영감을 불어넣는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아흐마드 샤 마수드들의 말을 인용하며 끝마치고자 한다.

 

 

어떻게 아이와 여자를 죽이는 것이 지하드란 말인가?

-아흐마드 샤 마수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