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미야지 마사유키라는 이름은 애니메이션 팬들에게 있어서 대단히 생소할 것이다:그는 2008년 망념의 잠드를 감독했으며, 2012년 후세-말하지 못한 내사랑을 감독하였고, 이 둘 이외에는 감독을 맡은 작품이 없다. 게다가 사실 이 두 작품은 일반적인 애니메이션 팬들에게 있어서 생소한 작품들인데, 흥행 측면에서 크게 재미를 보지 못했으며 재미 자체로만 본다면 재미있다고 이야기하기에는 조금은 무리가 있는 작품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망념의 잠드와 후세라는 두 작품 만으로도 미야지 마사유키는 다른 애니메이션 감독들과는 다른 독자적인 세계관을 구축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망념의 잠드와 후세의 서사가 갖는 특징은 피해자-가해자의 이분법적이며 대칭적인 이야기 구조를 무너뜨리는데 주력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이야기의 클라이맥스를 극단적인 대결이 아닌 중지와 화해로 마무리 지음으로서, 애니메이션은 스펙타클이나 볼거리를 주는 재미가 아닌 독특한 이야기의 중지로 귀결이 된다. 망념의 잠드에서는 아키유키와 히루켄 황제가 대결하는 장면에서 한쪽(희망)이 다른 한쪽(절망)을 쓰러뜨리는 것이 아닌, 산 자의 희망을 대표하는 아키유키가 자신의 이름을 이름없는 죽은 자들의 집합인 히루켄 황제에게 줌으로서 이름을 받지 못한 폭력의 희생자들에 대해 화해의 악수를 먼저 청한다. 후세에서는 전설적인 이야기속의 괴물과 영웅의 대결을 재현하는 시노와 쇼군의 싸움이, 어느 한쪽의 승리로 귀결되는 것이 아닌 시노가 쇼군을 마무리 짓지 않음으로써 끝난다.(네녀석 혼을 빨아먹었다간 나까지 기분이 나빠질거 같아) 이 독특한 중지의 미학은 일반적인 대중문화 서사와는 차별적이라 할 수 있다:한쪽이 다른 한쪽을 쓰러뜨리고, 그 과정을 볼거리로 구축하여 관객에게 시각적인 쾌감을 선사하는 일반적인 대중문화의 스펙타클을 거부한다. 하지만, 이 차별적인 지점이, 관객들에게 있어서는 '도대체 왜 이런 이야기를 봐야하는가?'라는 지루함과 짜증의 형태로 드러날 수 있다는 점에서, 미야지 마사유키의 세계관은 치명적인 약점을 갖고 있다.


하지만 미야지 마사유키의 세계관과 미학이 갖는 독특함이란, 제임스 그레이의 작품 세계와 많은 유사점을 가지며, 이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먼저 제임스 그레이의 작품 세계를 분석해야 할 것이다. 일찍이, 어느 평론가는 그의 작품 세계를 '축축하고 무거운 우울함'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그리고 이 우울함과 축축함은 하나의 중력을 구성하여 극중의 케릭터와 관객들을 옭아멘다. 이 중력과 축축한 우울함의 미학이란, 제임스 그레이의 개인사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제임스 그레이는 이렇게 이야기한 적이 있다:"아버지는 내게 이야기했다. 너는 부유한 가정 출신이 아니니 영화 감독은 못될 것이라고. 그것은 아버지가 나를 진정으로 사랑했기에 했었던 이야기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영화감독이 되었다. 여기에 한가지 중요한 비밀이 있다:가족에는 애정어린 지원과 무시무시한 감정의 파괴가 공존한다는 것을" 이 애정과 파괴의 상반되며 극단적인 것처럼 보이는 두 가치관이 제임스 그레이의 영화에서는 충돌하는 동시에 공존하며, 그것은 다른 영화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미학을 만들어낸다.


제임스 그레이의 투 러버스와 리틀 오데사를 예로 들어보자:이 두 영화는 아주 클리셰적인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범죄자는 불현듯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오며(리틀 오데사), 실연의 고통을 가진 남자는 두 여인과 사랑에 빠지면서 혼란을 겪게 된다.(투 러버스) 하지만, 일반 장르적 클리셰들과 이야기들과 다르게, 영화에는 무시할 수 없는 '색체'가 존재한다:이 두 영화는 디제시스 바깥에서 쓰이는 BGM들(서사와 직접적으로 연관을 맺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리고 이들 단성 성가 같은 BGM들은 어떤 의미에서 유대교의 성가를 연상케 한다.)과 어떤 이야기 내에서 '유의미한' 화소로 존재하지 않는 러시아 유대인들의 문화들이 배경으로 자리잡는다.(제임스 그레이는 러시아 유대계 가정 출신이다.) 하지만, 이러한 러시아 유대계가 갖는 문화적 특수성은 어떤 민족주의적인 이야기로 귀결되지 않는다. 폴 윌레만이 '영국 흑인 영화가 영국 흑인 민족주의적이지는 않다'라고 서술하였듯이, 이들의 배경은 '민족' 이데올로기를 구성하지 않는다. 즉, 민족이라는 배경이 서사의 주요한 동인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폴 윌레만이 주목한 것은, '다문화'라는 개념자체가 하나의 폭압적인 개념으로 작용할 수 있는 가능성이었다:우리가 다문화 가정이라는 사례를 볼 때, 다문화 가정에 속하는 사람들은 '평소에 입지 않는' 전통 복식을 입고 나와서 자신의 '문화적 정체성'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즉, 다문화라는 개념 자체가 분명하게 구획되고 구분되어지는 문화적 정체성에 기반하고 있다는 믿음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문화가 아니라 문화의 탈을 쓴 하나의 '울타리'이다:문화란 만나기 시작하는 순간 섞이고 거부하는 등의 다양한 상호작용을 갖는다. 과연 순수하게 현재의 문화로부터 구분되는 '전통문화' 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는가? 그런 점에서 제임스 그레이의 유대문화는 민족이라는 커뮤니티를 이데올로기적으로 구성하지 않지만, 그 커뮤니티가 실존한다는 점을 분명하게 다뤄내고 있다. 이에 반대되는 사례는 최초의 유성영화였던 재즈 싱어를 예로 들 수 있겠는데, 랍비였던 아버지와 흑인 분장을 하고 재즈가수 질을 했던 아들 사이의 갈등 속에서, 전통문화라는 분명하게 구획지어진 '선'과 '자리'를 주고, 결국은 아들이 아버지의 랍비직을 계승한다는 이야기로 마무리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 아버지로의 전통문화로의 회귀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재즈 싱어의 전통문화와 신세대 문화는 이데올로기 적으로 재편성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이는 후술할 랑시에르의 미학에 대한 문제의식과 맞닿아 있다)


그렇다면 왜 제임스 그레이는 이러한 유대민족의 문화를 영화에 분명한 배경으로 깔아두려 한 것일까? 이러한 유대민족의 문화를 주변에 깔아둠으로서 극 내의 케릭터가 편안함을 느끼면서 동시에 그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양가적인 감정을 느끼게 하기 위한 장치다. 이 배경은 케릭터를 젖어들게 만들며, 동시에 중력으로서 땅으로 끌어내리려 한다:왜 투 러버스의 주인공은 가족을 떠나서 비유대인인 미쉘과 도망을 치려 하는 것이며, 왜 리틀 오데사의 주인공은 편안함을 느끼는 공간인 리틀 오데사를 예전에 떠났었던 것일까? 이는 위에서 제임스 그레이의 발언을 대입해보면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중력은, 안착한 자들에게 있어서 안락함과 편안함을 주지만 동시에 더이상 날아오르지 못하게 만드는 파괴를 부여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주인공들은 이 중력에 대해서 양가적인 감정을 느낀다:그들은 그들의 커뮤니티를 사랑하지만, 동시에 그러한 중력의 무거움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어하기도 한다. 이 두 감정은 일반적인 대중문화 서사에서 드러나는 방향성과 선호가 아닌, 양가적이고 공존하며 동시에 구획되거나 구분되어질 수 없는 중요한 두 감정이기에, 케릭터들은 어찌할 수 없는 우울에 사로잡힌다. 이는 영화내에서 분명하게 깔리고 있는 유대문화라는 배경이, 그들을 유대문화의 색으로 물들이며 동시에 그들을 축축하고 무겁게 사로잡는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제임스 그레이의 작품들을 유대문화라는 독특한 문화적 배경에 근거해서만 해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하지만, 분명한 것은 제임스 그레이의 이 두 작품들은 우열이나 분명한 구획을 정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의 우울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특징들은 아주 평범한 장르영화적 클리셰를 이야기라는 측면이 아닌 분위기라는 측면에서 재구성하고, 관객을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로 몰고 들어간다. 투 러버스의 마지막 장면이 그 대표적인 예라고 볼 수 있는데, 과연 주인공은 떠나버린 연인과 함께 있는 것일까, 아니면 지금 여기있는 그의 연인과 함께 있는 것일까? 영화는 분명한 해답을 주지 않으며, 관객은 안정과 변화, 안착과 떠남, 사랑과 이별 등의 상반된 관계의 감정 사이에서 팽팽한 긴장관계를 느끼며, 보통은 구획되고 구분되어질 상반된 감정이 충만해짐을 느낀다. 


이렇게 서로 상반된 감정의 충만함, 동시에 이 두 감정과 방향성에 대해서 선호나 구획지음, 구분 등의 위치를 부여하지 않고 대등하게 다뤄낸다는 점에서 미야지 마사유키의 두 작품 역시 비슷하다 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제임스 그레이의 감수성이 좀더 미묘한 순간들과 어찌할 수 없는 우울과 중력에 젖어들어감을 다뤄내는데 초점을 맞췄다면, 미야지 마사유키의 두 작품들은 대중문화 서사의 스펙타클과 도덕적 이야기를 거부함으로서 이를 구현해낸다. 잠드의 경우에는, 서브 플롯의 마지막에서 아키유키의 아버지는 폭탄테러의 가해자와 자신이 머리에 총을 쏴서 쓰러뜨린 군소속 지휘관을 함께 간호하며 살아간다. 후세에서는 모든 일의 원흉인 쇼군의 징벌을 포기한 뒤 에필로그에서 악역인 쇼군은 극중의 강박적인 모습을 벗어던지고 편안한 모습으로 재등장하며, 동시에 도덕적인 징벌을 요구하는 서브플롯을 은연중에 관객에게 제시할 뿐 그것을 분명하게 제시하지 않음(이테츠루의 아들이 목잘려서 저잣거리에 난 것은 관객들이 손쉽게 분석해낼 수 있는 정보이나, 그것은 구체적인 이야기의 화소로서 드러나지는 않는다)으로서 묘한 이야기를 구축한다. 즉, 미야지 마사유키는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의 단죄와 징벌을 거부하며, 그보다 좀더 거시적인 측면에서 문제를 접근하고자 한다:폭력의 중지와 증오의 연쇄를 끊어내는 것, 그리고 더 나아가서 함께 살아가는 삶에 대해서 말이다. 


그렇기에, 미야지 마사유키의 거시적이며 분명한 목표에 의해서 서사는 재배치된다:극에서 적을 향한 폭력과 징벌을 위한 스펙타클 그리고 도덕적인 카타르시스는 배제되고, 피해자-가해자가 뒤섞이며 전투와 클라이맥스 장면들은 비극적인 순간들을 반복하는 시지푸스의 영웅들의 격돌이 되어버린다. 이러한 과정에서 관객들은 알 수 없는 독특한 감정에 사로잡히는데, 그것은 카타르시스가 아닌 비극에 사로잡혀서 폭력을 반복하는 케릭터들의 우울이 밖으로 스며나오는 일종의 디아스포라이다. 동시에 제임스 그레이의 케릭터들이 떠남과 안착함 사이에서 어찌할 수 없는 우울에 사로잡혀있었듯이, 미야지 마사유키의 작품들 역시 그러한 우울에 사로잡힌다:징벌도, 속죄도, 단죄도, 그 어느 것도 아닌, 명확하게 피해자와 가해자가 구별되지 않는 폭력의 순환 과 그로인한 우울 속에서 인물들은 빠져나가고자 하는 것, 그것이 바로 미야지 마사유키 작품의 미학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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