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스포일러 있습니다.




랜스(제임스 스튜어트 분)는 자신의 오래전 친구 톰(존 웨인 분)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텍사스의 신본이라는 작은 마을로 향하면서 회상에 잠긴다. 과거의 산본은 리버티 벨런스(리 마빈 분)라는 무법자 때문에 공포 분위기가 하루도 가실날이 없었다. 이 곳에 도착한 젊은 변호사 랜스는 법의 울타리 안에서 무법자를 옭아매려 하지만 여의치 않는데, 이때 신본 마을에서 유일하게 리버티와 맞설 수 있는 톰은 오직 총만이 해결책임을 강조한다. 그들은 서로 의견차이를 보이며 티격태격하는데, 그 이면에는 할리라는 마을 처녀에 대한 질투심이 깔려있다. 점점 더 리버티의 만행은 심해지고 최후의 대결시간은 다가온다.


페드로 코스타는 존 포드에 대해서 이런 평가를 한적이 있었다:"어떻게 존 포드를 좋아하지 않을 수가 있나?  광활한 대지, 웅장한 산맥의 풍경처럼 누구나 좋아할 법한 것들이 거기에 있다. 단순하고 전통적인 방식의 삶이 주는 아름다움. 반동적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존 포드의 영화에는 그런 단순한 것들의 가치가 담겨 있다. 몬테이로의 말을 빌리자면 '중요한 것은 어떻게 단순해질 것인가'다." 이 단순의 미학, 단순함의 찬미야말로 리버티 벨런스를 쏜 사나이를 설명하는 키워드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리버티 벨런스를 쏜 사나이는 이러한 단순의 미학을 통해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었던 상식적인 서부극를 뒤집는다. 영화는 어둠에 사로잡힌 서부시대를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법과 질서에 대한 갈구를 보여주지만, 모든 것이 끝난 이후에 늙어버린 사람들은 사라져버린 서부 개척시대의 미덕과 영웅 반추하며 그에 대한 아련함을 경험한다. 이러한 단순하지만 분명하게 대치되는 양가적인 감정을 영화는 능숙하게 다루어내며, 흑백영화만이 재현할 수 있는 깊은 '어둠'을 이용하여 컬러영화들은 쉽게 재현할 수 없는 미학을 구축한다.


리버티 벨런스를 쏜 사나이가 보여주는 서부의 세계는 일반적인 서부극과는 벗어나있다:서부극에서 서부라는 공간은 모든 것이 허용되어있는 자유로운 세계, 방아쇠를 당기고 결정하는 자가 법이며, 무법인 지대인 동시에 미국의 찬란했던 개척정신이 극에 달한 시대다. 하지만, 리버티 벨런스를 쏜 사나이에서 서부는 그와 정반대의 세계로, 무법의 암흑과 어둠의 지배하는 세계이며,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선량한 시민들이 괴롭힘을 당하는 공간이다. 그리고 이러한 세계는 기존의 서부극에서 서부를 드러내는 방식인 '광활한 자연의 풍광'과 대치되는 방식으로 구현된다:늙은 랜스가 호레이쇼 그릴리의 명언(서부로 가라, 젊은이들이여. 가서 명성과 부와 모험을 찾으라)을 인용하면서 회상을 하는 순간, 그는 야만적으로 총을 쏘며 마차를 가로막는 리버티 벨런스와 만난다. 그리고 랜스가 리버티와 첫만남을 갖는 시간은 '밤'이다. 이처럼, 영화는 기회의 땅 서부를 찾아 떠나라는 전통적인 격언을 박살내면서 강도와 부당한 폭력이 일어나는 공간으로서 서부를 재현하고, 그것을 칠흑같은 암흑으로 표현한다:영화는 러닝타임 내내 흑백영화만이 가능한 깊이를 알 수 없는 암흑의 묘사를 통해 광활한 자연을 대체하고 서부의 본질처럼 묘사하였던 다른 서부극과는 차별되는 지점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영화 속의 사건들은 모두 밤에 일어나지 않는다:밤이라는 시공간의 대척점에 언제나 '낮'이 존재한다. 그리고 영화는 근면한 삶을 살며 정직하게 생계를 꾸려나가는 일반인들과 그들의 삶을 낮에 배치함으로서, 무법과 폭력에 대비되는 질서와 균형의 세계를 만들어낸다. 마을을 꾸리고 가혹한 서부의 자연과 인디언이라는 외부에 맞서 싸우면서 자신의 삶을 지켜내는 이 근면한 사람들은 투표와 자신들을 대변해줄 대표자를 선출함으로서 무법천지인 서부라는 공간에 질서를 부여하려 한다. 이러한 낮이라는 시공간은 어둠을 대변하는 리버티 벨런스조차도 힘을 쓰지 못하게 만들며(네놈들 모두 밤에 보자), 심지어 리버티와 그 졸개들이 희화화 시키는(투표장에서 후보를 선출하는 과정) 유쾌한 힘을 가진 공간이다:단순하고 착한 사람들의 저력. 하지만 밤이 되면, 이들은 개척 공동체를 위협하는 진정한 공포로 화하게 된다.


신본을 둘러싼 무법자-개척민들의 갈등에 끼어드는 랜스라는 인물은 이 공동체에 '법과 질서'를 가져다주는 대변자인 동시에 법과 질서의 화신 그 자체이다:뻔한 설정이긴 하지만 그는 변호사이기에 법을 잘 알며, 무능한 보안관이 리버티를 두려워해서 리버티 검거를 관할권을 핑계로 거부하려하자, 그는 법전 속에서 관할권에 대한 법조문을 찾아내면서까지 리버티의 징벌을 요구한다. 이와같이 무법이 판을 치는 서부시대에 고리타분할 정도로 질서와 법을 추구하는 인물이 바로 랜스라는 인물이다. 하지만, 랜스를 단순하게 법과 질서를 서부에 가져오는 인물로는 한정지을 수 없을 것이다. 영화 내에서 그는 학교를 연다:그리고 이 학교에서 전통적인 WASP 주민들 뿐만 아니라 히스페닉과 심지어 흑인 하인까지 같이 랜스의 가르침을 받는다. 랜스가 헌법에 의해서 모두가 평등하며 모두에게 주권이 있고 그러한 권리에 의해 투표할 수 있다라는 것을 가르치는 것은 '미국적인 공동체'(백인 뿐만 아니라 이주민들까지 포함을 한)이 무엇인지, 그리고 더 나아가서 헌법으로 표현되는 미국적 가치를 실현하고자 하는 역할을 맡고 있기 때문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랜스의 목표는 단순한 교육을 통한 계몽보다 더 나아간다. 그는 개척민들을 대표하고, 그들을 위한 '주'를 만들고자 한다. 하지만 왜 주인가? 왜 법인가? 주라는 경계가 생겨나기 전의 신본이라는 공간은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닌' 공간이다. 따라서, 그 어떤 법도 적용받지 못하며 또한 법에 의해서 보호받지 못한다. 그것은 리버티에게 폭력으로 고통받았던 랜스가 내놓은 신본의 주민들을 위한 해결책이다:헌법에 명시되었듯이 법에 의해서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면, 그 법이 이 땅에 강림하도록 하여라. 재밌는 점은 법의 보호를 갈구하는 자들이 존재하는 동시에, 그러한 '법의 없음'을 이용하는 대목장주의 존재(화면에 직접적으로 드러나지는 않는다)가 신본의 주민들과 대립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리버티 벨런스를 고용하고는 그들의 이익을 위해서 신본과 그 일대를 '법이 없는 공간'으로 남겨두려 한다. 이들은 단순하며 착한 사람들이란 신본의 주민들과 대척되는 집단이다:영화의 마지막, 주를 대표하는 사람을 선출하기 위해 웅변을 준비하는 웅변가를 보자. 그는 자신이 연설을 준비하였지만, 그것이 이번에는 필요없다고 외치면서 자신의 연설문을 구겨버린다. 하지만, 마을 주민들이 펼쳐본 구겨진 연설문에는 아무것도 쓰여있지 않다. 이러한 가식과 허영이야말로, 근면하고 성실하며 착한 신본의 주민들과 대척되는 지점이자 미국적 가치와는 동떨어진 존재들로 볼 수 있다. 즉, 서부시대의 무법지대라는 장소와 시공간을 둘러싸고, 두개의 서로 다른 존재들이 대립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무법이라는 테마를 두고, 영화는 무법자와 무법지대라는 시공간이 밤과 리버티 벨런스처럼 사악하고 폭력으로 가득차있다고 강변하지 않는다. 존 웨인이 연기한 톰 도니펀이라는 능글능글한 마초는, 우리가 익히 아는 거칠고 강인한 서부의 영웅 케릭터의 전형이다. 하지만, 랜스와 톰의 관계는 그렇게 순탄치만은 않다. 먼저, 랜스는 톰이 정신이 나갔다고 생각하며, 폭력이나 사용하는 야만인이라 생각한다:스테이크를 두고 리버티와 톰이 서로를 총으로 쏴서 죽일뻔한 상황을 보고 랜스가 화를 내는 것은 남자의 자존심 같은 것을 세우기 위해서 서로를 향해 총을 뽑는 무법자들의 어처구니 없음 때문이었다. 동시에 톰은 랜스를 '순례자'라 부르며, 그를 비웃는다:톰은 서부에는 서부만의 룰이 있으며, 그것은 얼마나 총을 빠르게 뽑는가라는 문제로 귀결된다고 믿는다. 그렇기에 톰은 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는 랜스를 맨몸으로 무모한 도전을 감행하는 순례자라고 비웃는다. 하지만, 랜스에게 있어서 폭력으로는 그 어떠한 문제도 해결할 수 없다. 그가 만들려는 세계는 총을 먼저 뽑는 폭력이 법인 세계가 아닌, 헌법이라는 조문에 적혀있는 미국인의 이상이자 가치관이 실현된 공동체 그 자체이며, 그것은 폭력으로는 만들어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톰은 랜스와 대립하지 않는다:오히려, 그는 랜스를 향한 비웃음 뒤에서 랜스를 조력하는 조력자다. 랜스를 구해준 것도 톰이고, 주를 대표하는 후보를 뽑을 때도 랜스의 추천을 사양하며 랜스를 주대표 후보로 추천한 것도 톰이었다. 하지만, 랜스와 정반대의 인물이(능글맞은 서부의 마초 vs 동부에서 온 법과 질서의 순례자) 왜 랜스를 도와주는 것일까? 톰은 그러한 '세련된' 행위들이(법과 질서, 누군가를 대표한다는 것)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잘 안다. 그렇기에 그는 랜스(법과 질서)에게 자신의 자리를 양보한다. 톰은 능글맞은 서부의 사나이이긴 하지만, 본질적으로 선한 사람이며(영화는 선인장 꽃 등의 장치들을 이용해서 그의 상냥함을 강조한다) 이런 배려를 통해서 자신의 시대(무법시대인 서부시대)를 마무리짓기 위해서 랜스와의 '세대교체'를 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밤을 지배하는 리버티 벨런스의 폭력은 랜스의 분노를 불러일으킨다. 아무도 그를 가로막지 못한다는 분노로 랜스는 리버티 벨런스를 쏴서 죽여버린다. 이로써, 질서와 규칙에 피가 묻는다. 주의회 대표를 결정하는 자리에서 대지주를 대변하는 상대편이 랜스를 어떻게 비난했던가? 그들은 랜스를 선량한 시민을 쏴서 죽인 살인마로 매도한다. 하지만, 우리는 리버티 벨런스가 선량한 시민이 아님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랜스가 무거운 마음을 감추고 회장을 빠져나올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결과적으로 그 역시 폭력을 통해서 질서를 가져왔었고 자신이 만들고자 했던 공동체에 크나큰 원죄를 지웠기 때문이었다(이것이 너무 거창하다고 생각한다면, 그의 도덕적 신념과 자기완결성에 흠집이 났다고도 할 수 있겠다) 과연 피로 세워진 질서와 법이 정당화될 수 있는가?


여기서 리버티 벨런스를 쐈다는 행위 자체는 상당히 의미심장하다:리버티 벨런스Liberty Valance라는 이름은, 자유의 균형Liberty Balance라는 단어와 발음이 비슷하며 한글자 차이이다. 물론, 리버티라는 케릭터 자체는 무법자의 흉포함을 드러내는 존재이며, '자유의 균형추'로서 작용한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법과 질서를 대변하는 랜스가 자유라는 이름을 가진 악역을 쏴죽인 것은 의미심장한 행위이다. 법은 자유로운 무법자를 쏴죽이면서 질서를 불러일으켰다. 이는 질서가 갖는 원죄일까? 칼 슈미트가 주권자가 결정을 통해 정상-비정상을 구분하고 비정상을 배제하여 정상을 도출한다고 주권권력과 법의 개념을 설명하였듯이, 랜스라는 법의 대변자 역시 리버티라는 무법자를 죽임으로서 법을 도출해낸것에 불과한게 아닐까? 그리고, '폭력'의 행사자라는 측면에서 법과 무법자는 모두 동일한 존재가 아닐까? 그렇기에 리버티 벨런스를 쏜다는 행위 자체는, 단순하게 악역을 제거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무법의 시대를 끝내고, 법의 시대를 불러일으키는 것, 하지만 그것이 랜스가 꿈꾸었듯이 평화로운 방식이 아닌 폭력을 통해서 이루어졌다는 것은 그가 추구하고 지켜왔던 모든 것을 송두리째 위협한다. 주변인들은 정의가 실현된 것에 환호하지만, 랜스가 느끼는 껄끄러움과 문제의식은 단순하게 양심의 문제를 넘어서게 되며 영화는 리버티와의 대치보다 더욱 심각한 문제상황으로 빠져든다.


결국, 랜스는 떠나려 하지만, 떠나려는 그의 앞을 톰이 가로막는다. 그리고 그가 이야기한다:자네는 너무 많이 생각해, 그리고 너무 많이 말해. 게다가 자넨 리버티 벨런스를 쏘지 않았어. 그리고 영화는 리버티 벨런스의 살해장면을 재구성한다. 리버티와 대치하는 랜스를 길건너의 어둠속에서 톰과 그의 조수가 바라본다. 그리고 검은 어둠 속에서 랜스가 총을 쏘려는 순간에 맞춰서, 톰이 리버티를 쏴서 죽인다. 결국 리버티는 톰이 쏴서 죽인 것이며, 랜스는 '아무도' 쏴서 죽이지 못한 것이었다. 


이 사건의 재구성 장면이야말로, 영화 최고의 명장면이다:어둠은 단순학 폭력이 지배하는 세계를 드러내는 것을 넘어서, '기록될 수 없는 역사의 진실'이 된다. 처음 리버티 벨런스와 랜스의 대결 장면에서 관객은 정당한 대결로 랜스가 리버티를 쏴죽이고, 서부극의 전통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처럼 느끼게 된다.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 불빛 아래서 이루어진 랜스와 리버티의 대결을 바라보고 개입한 제 3자의 존재(톰)가 리버티를 쏴죽임으로서, 서부극의 정당한 결투라는 이미지를 부숴버린다. 왜 톰은 이런 비겁한 행위를 했는가? 톰은 이야기한다:냉혈 살인자라, 난 그렇게 하고 살 수 있어...할리는 자네 여자야. 자네가 읽고 쓰는 법을 가르쳤으니, 이젠 읽고 쓸 거리를 주게. 이는 무법자가 법과 질서를 향해서 주는 최후의 배려이다:무법자는 스스로 무법의 시대를 끝내고 비겁하고 냉혹한 살인자가 됨으로서, 그가 사랑했던 모든 것들, 한 때 그의 여자였던 랜스의 연인, 공동체를 지켜낼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리버티 벨런스를 쏜 진짜 영웅은 퇴장한다. 하지만 그것은 같은 존 포드 감독의 수색자나, 여타 다른 서부극과는 다른 방식이다. 보통의 서부극에서 영웅은 자연속으로 사라진다.(흔히들 이야기하는 석양을 향해 달리는 엔딩) 이는 폭력으로 문제를 해결한 영웅은 문제가 사라지고 법과 질서가 다시 자리잡은 일상의 세계에 있을 곳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서부의 영웅들은 일상을 뒤로하고 자신들이 속했었던 풍경 속으로 사라져간다. 하지만, 톰은 그렇지 않는다:주지사 투표가 열리는 시간적 배경, 랜스가 리버티와 대치했던 한밤중, 그리고 그날밤을 회상하며 랜스에게 이야기하는 톰의 고백 등은 모두 밤이라는 시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누군가 이야기하였듯이 '역사는 밤에 쓰여지는 것'이라는 명제처럼, 영화는 후반부에 폭력과 어둠이 지배하는 밤의 이미지 위에 역사가 이루어지는 시공간과 역사가 기록되지 않은 어둠이란 이미지를 덧칠한다. 그리고, 진정한 영웅은 진실을 가르쳐주고서는 자신이 받아야하는 찬사(물론 대중은 리버티 벨런스를 쏜 사나이, 랜스를 향해 환호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리버티 벨런스를 '진짜로 쏜' 사나이 톰을 향한 것이기도 하다)를 뒤로 한체, 회장을 퇴장한다. 그가 향하는 곳은 자신이 속해있었던 광활한 자연이 아닌 더이상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역사로 기록되지 않은 심연 속이다.


그리고 랜스의 회상은 끝이 난다:그는 영웅을 기억한다. 마지막 무법자, 그리고 마땅히 존경받아야 했던 자가 맞이한 쓸쓸한 최후에 대해서. 랜스는 영웅이 존경받았으면 하고, 자신의 이야기의 모든 것을 털어놓는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는 신문에 실리지 않는다. 그것은, '전설'은 '사실'이 될 수 없는 현실의 문제다. 하지만, 역사의 어둠속에 묻혀버린 진실을 랜스와 할리는 기억하며, 그리고 그러한 시대의 아름다움을 애잔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렇기에 랜스가 다시 신본으로 돌아와서 변호사를 개업할까 라고 할리와 이야기하는 것은 자신의 기원(미국)이 서부에 있음을, 그리고 그것에 향수를 느끼기에 다시 돌아가고 싶어함을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결국은 끝나버렸고 다시는 돌아올 수 없지만, 서부시대라는 무법의 시대에 대해서 느끼는 양가적인 감정이 영화의 마지막에 공존한다.


리버티 벨런스를 쏜 사나이는 아름답고 위대한 작품이다. 지금에서 본다면, 이 단순함의 아름다움은 정치적 보수성과 보수의 가치를 그대로 내새우고 있는 지점이며, 존 포드가 미국의 탄생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서부시대를 통해서 재구성한 부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정치적 보수성이 껄끄럽게 다가오는 것이 아닌 단순하지만 아름다우며 동시에 공감할 수 있게 다가온다는 점에서 영화가 갖는 힘은 무시할 수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서부극의 문법을 비틀어서, 서부극을 넘어서며 서부시대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는 영화의 이야기는 아름답다. 리버티 벨런스를 쏜 사나이는 그런 점에서 명작의 반열에 든 작품이라 편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