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및 책 이야기




*요약과 노트는 https://medium.com/@Leviathan1104/14b0cb5c2a2f 를 참조하시길. 


앨런 소칼과 그 동료들의 저서인 지적사기는 한 논문으로부터 시작한다:앨런 소칼은 한 편의 논문인 "경계침범:양자중력의 변형해석학"이라는 논문을 소셜 텍스트 지에 게재하고, 수많은 펄학자들과 사회학자들은 그의 논문을 높게 평가하였다. 하지만, 소칼은 이 논문에 적혀있는 어떠한 내용도 자신은 이해할 수 없는 헛소리이며, 자신이 쓴 논문은 여태까지 과학을 인문학적 글쓰기에 남용하고 있었던 포스트모던 학자들을 겨냥한 도발적 텍스트라고 밝힘으로 인해서 학계와 지식인 사회는 발칵 뒤집어지게 된다. 이러한 배경을 바탕에 둔 앨런 소칼의 지적사기는 자신이 게제한 논문과도 같은 문제, 과학과 철학-사회과학 사이의 무의미하며 현학적인 결합에 대한 경고이자, 동시에 이 둘의 결합에 대한 기초적인 전제를 제시하고 있는 저서라 할 수 있다.


엘런 소칼이 지적하고 싶은 글쓰기의 흐름, 특히 포스트모던의 글쓰기 흐름이 갖고 있는 중대한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1)철학자들이 과학에 대해 정확하게 아는 것고 아닌 막연하게 아는 이론을 장황하게 늘어놓아 글에 접목시킨다. 2)그리고 그러한 인용이 왜 나왔는지에 대해서 근거를 제시하지 않는다. 심지어 원전(과학)의 인용을 넘어서는 변용이 일어난다. 3)동떨어진 맥락에서의 인용과 분야에 대한 어설픈 학식. 이를 인용한 독자에 대한 겁주기. 4)무의미한 구절과 문장을 이용한 말장난. 등등이 있다. 요는, 포스트모던의 글쓰기란 엄밀한 논증의 형태를 취하지 않으면서 자기 머릿속에서나 존재하는 지적 허세의 글쓰기라는 것이 엘런 소칼의 분석이며, 그의 다양한 분석사례들(들뢰즈, 라캉, 보들리야르 등등)에 대한 분석이 이를 뒷받침한다.


개인적으로 생각했을 때 이 책을 읽을 때 주의하여야할 점은 바로 예시가 무엇을 이야기하는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초점을 맞추고 이해하려고 애쓰는 것이다:이 책이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각각의 예문에 적혀있는 부정확한 과학의 인용을 지적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큰 그림(포스트모던 사조의 글쓰기에 대한 비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글이기에, 예시에 초점을 맞춰서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읽어내려는 것은 글의 초점을 벗어난 독해이며 특히 소칼과 그 친구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글들과 논증이 제대로 안되어있는 지점들만을 끌어모아서 예시로 들었기에 이 속에서 무언가를 끌어내기에는 힘들어 보인다. 그렇기에 구체적으로 예시들과 논증 사이의 구체적인 반박에 대해서는 여기서 논하지 않고자 한다.


물론, 소칼이 수많은 예시들을 통해서 제시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하다:포스트모던 학자들이 쓴 글들과 그 내부에 들어있는 과학적 지식에 대한 묘사가 글 내부의 논리와의 결합이 대단히 허술하며, 그렇게 전개가 이루어지는 글들이 현학적인 지식 자랑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지적사기를 높게 평가할만한 지점은, 자신들의 포스트모던을 향한 불만을 최대한으로 억누르면서 자신들이 문제를 제기하는 지점은 전적으로 '그러한 표현'에 대한 문제에만 국한시키고 있다는 점이다.(인문학-사회과학 전반을 향한 공격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 글에서 소칼이 포스트모더니즘을 향해서 제기하는 문제제기는 전적으로 '구좌파'적인 특징에 기초하고 있다. 소칼은 현실의 학문을 해결하지 못하는 학문에 대한 공격, 계몽과 더 나은 삶을 보장할 수 있는 과학과 기술에 대해서 극단적인 상대주의와 유아론에 입각하여 '과학이란 믿음에 불과하다'라는 주장을 전파하여 사람들을 미혹시키기에 포스트모더니즘의 가장 큰 문제라고 보고 있다. 그가 노엄 촘스키가 이집트 민주주의 혁명을 통해서 느꼈던 생각들을 인용하는 지점은 인상이 깊은데, '과학과 민주주의를 받아들이면서 발전한 이집트 사회가 서구발 포스트모더니즘에 의해서 현학적인 말장난에 빠져들었다'라고 탄식하는 지점은 소칼이 포스트모더니즘 사조를 바라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하지만 동시에, 포스트모던의 특징인 '지적인 우울'에 대한 단초를 여기서 발견할 수 있으며, 이에 대한 본인의 노트는 위의 링크를 참조하시면 된다)


지적사기에서 찾아볼 수 있는 의미있는 지점은 과학과 인문사회학이 만날 수 있는 일종의 경계지대에 대한 단초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지적사기는 두 문화 같이 과학-인문사회학 사이의 결합을 다루고 있는 저서가 아니며, 소칼과 그 친구들 역시 그 결합 또는 인문학에 대한 과학의 우위를 선언하는 것이 이 책의 목표가 아님을 지속적으로 다루고 있다. 하지만, 문제상황, 포스트모던이 과학을 남용하는 상황에 대해서 무엇이 남용이고 무엇이 허용되서는 안되는가에 대해서 진지하게 다루고 있다는 점, 아주 상식적이긴 하지만 '과학을 인용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이러한 단서조항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라고 이야기하는 지점에서 최소한도의 과학-인문사회학 사이의 교류 가능성과 최소조건을 제시하고 있다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소칼이 지적사기를 통해서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어떤 한쪽이 다른 한쪽보다 더 우월하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한 작업이 아니다:소칼은 분명하게도, 각각의 학문이 다루고 있는 '세계'들은 대단히 복잡한 형태이며, 그 내부의 이론들과 관점들이 각각의 세계와 연관이 되어있을 가능성, 혹은 한 학문적 세계에서 다른 학문적 세계로 전이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고는 하나(물리학-화학의 경우와 같은, 물리학의 발견이 화학의 체계에 영향을 주었던것처럼) 그것이 서로의 학문에 대한 이해에 기반하여야 하며 그것은 '대단히 어렵다'라는 것이 소칼의 입장이다. 소칼은 인문사회학-과학의 융합은 가능하다고 보는 입장이긴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이 취한 방식(인문학이 과학을 오독하여 남용하는)은 그대로는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즉, 어떤 한 학문이 다른 학문에 영향을 주고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은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왜곡을 불러일으키지 않으려면 양 학문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한다고 볼 수 있다:하지만 여기서 좀 엇나간 질문을 하자면, 그렇다면 양 문화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두 문화의 융합에 대하여, 왜 포스트모던은 과학을 그렇게 쉽게 오남용했을까?


여기서 살짝 다른 논의를 진행해보고자 한다:소칼이 지적하고 있는 문제들, 포스트모던 인문학의 과학의 오남용의 사례는 인문학이 과학을 남용한 사례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과학이 인문학을 '남용'한 케이스는 존재하지 않을까? 유명한 사례들은 많다:나치즘이 지금은 금기시되는 과학인 우생학에 기반하여 인종청소와 대량학살을 감행한 것들에 대하여, 현대의 과학은 그러한 우생학적인 믿음과 과학이 전혀 받아들여질 수 없는 '넌센스'라고 보고 있다. 하지만, 2차세계대전 이후에도 나치즘의 산물인 우생학에 근거한 불임수술의 경우, 독일의 지성들의 모임인 막스 플랑크 연구소에서조차 '과학적'이라는 판단하에 제도 자체를 옹호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러한 '과학적 판단'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정확하게 과학 역시 인문학적인 편견에 사로잡혀 있을 수 있지 않을까?(소칼 역시 그러한 지점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또다른 사례를 보자:독서토론 도중 아버지가 제시한 사례로서, 한때 경제경영에 있어서 컴퓨터를 이용한 계량경제학이 한국에 처음 소개되었을 때의 사례이다. 컴퓨터라는 개념과 컴퓨터를 이용한 경제학이라는 개념 자체가 대단히 생소한 시점에서 롯데월드 및 롯데호텔의 공사에 시험적으로 컴퓨터를 사용한 공정관리를 도입하게 된다. 여기에는 정치적인 뒷이야기들도 존재하지만, 그 내부에는 '컴퓨터라는 기계보다 인간이 더 믿을만하다'라는 어떤 믿음이 깔려있기도 하였다. 하지만, 결과는 인간의 손으로 공정관리를 했을 때보다 비용이 수배 더 들어가버리게 되었다. 물론, 요즘 컴퓨터를 이용한 공정관리는 대단히 신뢰할만하며 동시에 일반화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어째서 기계와 정밀한 이론이 투입된 이런 사례들, 우리가 과학적이라 '믿는' 이런 사례들에 있어서 전혀 과학적이지 않은 '엇나감'이 발생하는가? 이렇게도 볼 수 있다:우리가 '과학적'이라 생각하는 과학이란 실제 과학이 아닌, 우리가 과학에 대해서 갖는 '이미지'다. 실제로 코지마 히데오가 메탈기어 솔리드를 만들면서 했었던 실수, 우성-열성의 구분에 있어서 우월함과 열등함의 개념으로 받아들여서 케릭터와 이야기를 구성했던 실수를 했던것처럼(우성과 열성은 엄밀하게 이야기하자면, 같은 유전자 내에서 무엇이 먼저 발현될 것인가? 의 문제이다. 무엇이 더 우월하고 열등하고의 문제가 아니다), 과학과 인문학적인 믿음의 '혼선'이 발생하고 그것이 흔하게 일어난다는 것이다.


물론 인문학-과학에 있어서 서로에게 그나마 '쉽게' 환원 가능한 지점도 존재하며, 그것이 금융공학이나 과학적인 이해가 인문학적인 이해에 결합해서 '실제로' 움직일 수 있는 지점(혹은 실제로는 우리가 그것이 움직인다고 '믿는 것'일 뿐인가?)을 만들기도 한다:하지만 문제는 인문학적 이해-과학적 이해의 분리된 세계가 아니라, 이 둘이 섞여서 경계가 모호해지는 지점들의 문제이다. 나치즘이 보여줬던 정치적 과학(우생학, 열등 민족을 가려내는 기준으로서의 과학)-과학적 정치(우생학에 근거하여 대량학살을 불러일으키는 정치)의 양측의 경계침범을 일으켜서 끔찍한 방향으로 시너지를 일으키는 것들, 인문학적 믿음이 과학적인 사실로 포장되고 동시에 과학적인 사실이 인문학적인 믿음으로 깎여내려지는, 두 문화의 경계에서 일어나는 예외적 상황들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이런 점에서 소칼이 제시하는 '기준'은 많은 점에서 이 아슬아슬한 경계의 예외상황을 독해하는데 있어서 도움이 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성적인 기준을 제시하려는 소칼의 방법론에도 불구하고, 본인이 소칼에 대해서 느낀 아쉬움도 어느정도 존재한다. 물론 이는 그와 그의 저서에 대한 살짝 비겁한 지적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소칼은 지속적으로 자신의 저서 내에서 범죄현장의 비유를 반복해서 인용한다. 그의 비유는 이러한데, 가령 살인사건이 있다면 그 현장에는 증거가 남아있으며, 증거에 대한 과학적인 분석과 수사에 따라서 우리는 단 하나의 사실, 범인을 향해서 나아갈 수 있다. 물론, 일반적인 대부분의 상황에 있어서 소칼의 비유는 정확하게 들어맞는다. 하지만 문제는 일반적인 상황이 아닌 '예외적인 상황'이다.


본인의 희미한 기억에 남아있는 형법총론에서 가장 인상적인 판례는 다음과 같다:어떤 사람이 한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 낫과 흉기로 폭행을 했다. 하지만 피해자는 그 현장에서 죽지 않았지만, 그 폭행에 의해서 심장에 이상이 생겼으며 이후 소풍을 가서 김밥과 콜라를 먹다가 채하여서 급성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그렇다면, 이 사건의 경우에 있어서 '범인'은 누구인가? 아니, 이것은 과연 '살인사건'인가? 이런식으로 법학도들은 법에 있어서 이런식의 다양한 특이사례들을 배운다. 하지만 이러한 특이사례들이, 일반적인 '상례'이기 때문에 배우는 것이 아니다. 특이사례를 통해서 드러나는 법의 시스템과 그 적용, 그 자체를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다:예외상황을 통해서 주권자는 체제의 본질을 열렬하게 사유하게 된다는 키에르케고르의 말처럼, 법학도들이 특이한 케이스들을 붙잡고 끙끙거리는 것이야말로 이 시스템이 어떻게 움직이는지에 대한 사유가 예외상황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책임을 지우는 과정에 있어서 '과학'의 도움은 결정적이다:과학과 법의학이 아니었다면 위의 케이스에 있어서 어떻게 폭행과 심장 이상과 급성 심부전을 한꺼번에 연결지을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이러한 인과관계를 추적해서 누구에게 책임을 물을 것인지를 사유하게 하는 것도 과학적인 사유와 논리학적인 접근이 도움을 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과학적인 수사와 범인의 특정지음과 별개로, 자연현상과 인간 사회의 문제가 달라지는 아주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지점이란 그러한 현상에 대해서 의미와 해석이 부여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단 한명의 범인과 살인을 쫒아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법시스템에 대한 본질적인 측면이라고 이야기할 수 없으며, 몇백 몇천건에 한번 일어날까 말까한 사건을 통해서 얼핏 드러나는 시스템 전체의 본질,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작동한다고 판단할 건지에 대한 예외상황에 대한 사유와 문제의식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지적에서 본인은 소칼을 비판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다만, 소칼이 사회나 철학을 다루는 지점에서 상당히 '일직선'적인, 하나의 진실이라는 소실점을 향한 운동에 자신의 사유를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시선이 갖고 있는 한계가 드러난다고 생각을 하는 것이다. 물론, 소칼은 이미 자신의 저서에서 충분하게 자신의 겸손함을 드러냈으며, 하나의 계에 대한 학문들이 서로 맞닿기에는 각자가 다루고 있는 계의 복잡성이 상당하기에, 다른쪽이 다른쪽에 대해서 어떤 견해를 피력할 때는 겸손함을 취할 수 밖에 없다는 입장을 보여주었다. 또한 저자들의 공격적인 인용에도 불구하고 포스트모던 담론 자체를 싸잡아서 비판하려는 것을 최대한 자제하려는 모습을 보여주었기에, 그의 이러한 시선에 대해서 지적하는 것은 본인이 느끼기에도 '부당'하다고 느끼는 바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이 지적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소칼이 보여주는 일반상황, 그리고 과학이 일반상황을 분석하는 강점에 대해서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이며 이는 인문사회학도로서는 중요한 '한계'로도 느껴진다. 재밌는 점은, 소칼이 포퍼의 반증가능성이 갖는 한계를 이야기하면서 언급한 콰인의 경험주의 도그마의 문제이다:실험과 이론이 모순을 빚을 때마다, 과학자들은 실험과 모순된 이론을 폐기하거나 혹은 실험이 잘못되었다고 선언하지 않는다. 그들은 '예외적'인 결과를 불러일으킨 실험을 두고 그것이 이론에 적용될 수 있는것인지, 아니면 부수적인 전제가 필요하거나 이론에 수정이 필요한지, 혹은 실험에 있어서 고려되지 않은 전제가 있는 것인지 등의 다양한 사유를 한다. 이런 점에서, 과학 역시도 '예외상황에 대한 열렬한 사유' 그 자체가 인문학에 있어서 예외상횡을 다루는 방식과 유사할 수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물론 과학 자체를 학문으로서 배우지 못한 본인이 제시하는 오만한 이론일 수 있다) 이런 지점에서 본다면, 소칼이 과학의 일반상황을 이해하는 하나의 틀을 세우는 지점을 넘어서, 과학과 인문학적인 사유가 서로 맞닿을 수 있는 지점(예외상황에 대한 열렬한 사유)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라는 희망적인 생각을 가져보기도 하는 것이다.


물론, 이 책은 과학과 인문학의 접점을 다루기 위한 책은 아니며, 어느 한쪽의 우위를 이야기하기 위한 책은 더더욱 아니다:하지만 문제는, 포스트모던의 글쓰기 방식을 넘어서 우리 일상속에서 드러나고 있는 환원불가능한 것들의 환원가능함에 대한 믿음들, 과학적 사실이 믿음이 되고 정치적 믿음이 과학적 사실이 되는 혼란스러운 경계상황과 예외상황들이 점점 '상례'의 형태로 굳어져가고 있으며 동시에 재앙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 보인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소칼이 지적하고 있는 문제의식은 좀더 넓게 보자면 포스트모던의 문제를 넘어서 문제의식을 확장해서 볼 수 있는 지점을 갖고 있는것처럼 보이며, 지적사기는 포스트모던의 문제점과 함께 포스트모던 비판론을 뛰어넘어서 인문사회학 전반에 깔려있는 과학적 사유에 대한 신화를 무너뜨릴 수 있는 기반으로서 사용될 수 있다고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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