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스포일러 있습니다.




시드는 유명인사들의 바이러스를 열혈팬들에게 판매하는 클리닉에서 근무하고 있다. 남들 몰래 자신도 유명인들의 바이러스를 주입하면서 심지어 불법 유통까지 시키던 시드는, 자신이 주입했던 하나 가이스트라는 여배우의 바이러스로 인해 서서히 죽어 가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제 17회 부산국제영화제)


보통 예술에 있어서, 예술가의 가족 사이에서 작품관은 쉽사리 공유되는 것이 아니다:물론, 예술을 쉽게 접하는 '환경' 자체가 예술과 관련해서 예민한 감수성을 기르는데 도움을 주기도 하며 예술가 '가족'을 형성하기도 한다. 바흐 일가나, 요한 스트라우스 1세와 2세, 뒤마 부자 등등 대를 이어서 예술을 하는 예술가들도 꽤 많이 찾아볼 수 있다. 문제는 미야자키 고로-하야오 사이의 부자갈등의 케이스나 아버지 뒤마의 여성편력을 보고 도덕적인 내용의 춘희를 썼던 아들 뒤마의 케이스를 고려해본다면 예술가 가족이 '공통된' 주제의식을, 특히 선대의 주제의식과 미학을 따라가는 형태를 취하는 경우는 드물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아들인 브랜든 크로넨버그의 데뷔작 안티바이럴은 대단히 기묘한 작품이다:최근의 데이빗 크로넨버그가 초창기 B급 SF 호러 영화를 만들었던 시절의 주제의식에서 표현양식을 제외하고는 드라마와 다양한 장르의 형태로 옮겨갔다면, 아들 브랜든 크로넨버그의 안티바이럴은 아버지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초창기 B급 SF호러 영화에 근접한 주제의식과 미학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물론, 아들 크로넨버그와 아버지 크로넨버그 사이에 '분명한' 차이점이 존재하긴 하며, 이는 밑에서 자세하게 다루고자 한다.


안티바이럴이 집중하고 있는 소재는 '질병'이다. 주인공인 시드는 특별한 클리닉에서 '질병'을 판다. 하지만 이 질병은 '특별'한데, 유명인이 겪었던 질병이며 팬덤은 이 질병에 감염됨으로서 유명인과 '유대감'을 느낀다. 그리고 시드 역시 자신의 소비자들과 유사한 기묘한 유대감에 중독되어있으며, 한나 가이스트(재밌게도 '가이스트'라는 단어는 독어로 '정신'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와 유대감을 느끼고자 그녀의 질병을 자신의 몸에 주입하다 결국 크나큰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기본적으로 영화는 이러한 '뒤틀려있는' 대중의 유명인을 향한 관심사를 풍자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는 듯 하다:유명인의 세포로 만든 배양육으로 음식을 만들어 먹는 등의 엽기적인 유명인 파생상품이 넘쳐나며, TV에서는 과격할정도로 선정적인 가십성 뉴스들을 방송한다. 단순하게 본다면, 안티바이럴의 영화 미학은 전적으로 과격한 세태에 대한 풍자를 그로테스크한 형태, '자본주의의 병자'(실제적인 의미에서)라는 악의가득한 이미지로 풀어낸 것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를 좀더 파고들어간다면 아들 크로넨버그가 안티바이럴을 통해서 달성하고 한 미학이 아버지 크로넨버그가 초기에 성취하였던 육체와 이물질의 결합과 그 과정과 유사하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시작하기에 앞서서, 우리는 먼저 이러한 질문을 던져보아야한다:과연 '질병'이란 무엇인가? 가라타니 고진은 일본근대문학의 기원의 질병에 대한 챕터를 할애하고 문학에 드러난 질병의 이미지를 분석한 적이 있다. 특히 결핵의 경우, 고진은 결핵이 근대문학에 있어서 가장 많이 쓰이는 메타포의 하나로서 결핵이 갖는 문학적인 이미지의 독특함이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고진은 결핵과 그 결핵의 메타포가 갖는 특징에 주목하였다:결핵은 근대의 병원체의 발견(비록 처음 발견했을 때 코흐가 잘못 발견한 것이긴 하지만)에 의해서 주목받기 시작한 질병 중 하나이다. 또한 전근대의 전염병의 파멸적인 속성과는 다르며(전근대의 전염병은 하수 시스템의 정비로 소멸되었다), 결핵이 갖는 특수한 이미지들, 즉 '야만적인 건강함'과는 다른 '창백하며 우울한 내면으로 파고들어 타인의 접근을 거부하는 듯한' 결핵환자들의 이미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결핵이라는 질병이 병원균이라는 특수한 원인에 의해서 발병된다는 속성이 발견됨으로 인해 결핵은 근대문학에 있어서 하나의 메타포로 각광받게 되었다.


하지만 결핵의 문학에서 다루는 감상주의적인 속성과 다르게, 현실의 결핵은 그저 하나의 고통스러운 질병에 불과하다. 또한, 결핵은 단순하게 결핵 병원균에 의해서 발병되는 질병이 아니다:우리는 매일 여타 다른 균들과 함께 결핵균에 노출된다. 하지만 우리가 결핵에 쉽게 걸리지 않는 것은 결핵이란 질병원에 노출되는 것 이외에도 우리의 건강상태, 질병원에 대한 노출도, 그리고 여태까지 유전을 통해서 이어받은 결핵에 대한 내성(아프리카에 사는 사람들이 말라리아에 높은 내성을 갖는 특성인 변형된 적혈구를 그 특성이 없는 사람이 말라리아에 걸려 죽음으로서, 배제-선택에 의한 유전으로 내성을 이어받았듯이) 등등의 다양한 요인들이 개입하여 생겨난 결과물이 바로 질병이란 현상이다. 즉, 우리의 믿음과 다르게, 질병은 질병원 자체의 절대적 원인(물론 질병원이 있어야 질병은 생긴다. 그것은 주의해야 한다)에서 비롯되지 않는다:고진은 이러한 병원체-병원의 관계에 대한 믿음을 신학적인 믿음에 불과하다고 지적한다. 그렇기에 근대문학에 있어서 질병에 대한 메타포, 그리고 그 병원체에 대한 신화는 원래 있던 것을 발견 한 것이 아닌 결핵이라는 것을 '재발견 및 재정의'한 하나의 이미지라 볼 수 있다.(흥미로운 것은 시드의 창백한 병자적 이미지와 한나 가이스트의 가련한 폐병 환자적인 이미지가 전술한 창백한 병자, 결핵환자의 이미지와 유사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가족끼리 전염되는 감기처럼, 같은 공간에 있어도, 심지어 같은 병원균에 노출되더라도 감기라는 질병이 발병되는지 혹은 어떤식으로 발병되는지 어떤 증상이 특징적으로 드러나는지 여부가 다 달라진다면(물론 유념해야하는 것은 그것이 완벽하게 예측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하지만 동일한 현상이 반복되는 것 역시 아니다. 과학적인 측면에서는 그것은 여전히 허용 범위 내에 들어있는 것이지만, 이 영화 내에서 팬들이 소비하는 이미지는 그런 '허용범위'의 문제가 아닌 완벽하게 '동일한' 무언가에 가깝다) 과연 영화내에서 보여주는 '동일한 질병을 공유한다'라는 행위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또한 엔지니어링되어 소비자에게 주입되면 곧바로 발화되는 형태의 질병이 어떻게 원본의 질병, 다양한 원인이 겹쳐져서 만들어지는 유명인들의 질병과 '동일시' 될 수 있단 말인가? 위에서도 지적하였듯이 질병이란 하나의 이미지이다. 하지만 영화에서 질병 클리닉은 질병이 병원체와 함께 다양한 변인의 복합적인 결합 현상임에도 불구하고(유명인이 걸린 질병이란 질병원에 다양한 원인이 결합한 복합적 결정체라면), 그것을 바이러스라는 형태로 물화시켜 복제하고 100% 똑같은 결과를 얻어낼 수 있게 엔지니어링 하며, 심지어는 기존의 질병이 갖고 있는 전염 가능성을 삭제하고 '복제방지'를 걸어놓는 형태로 대량생산한다.


이런 점에서 봤을 때, 안티바이럴이 질병에 대해서 취하는 태도는 시뮬라시옹적이다:시드와 클리닉이 파는 유명인의 질병이란 상품은 실제 유명인들이 겪는 질병과는 다른 질병이란 '이미지'에서 파생된 파생 이미지이다. 그리고 유명인의 질병을 공유한다는 것은 유명인과의 관계맺음에 대한 믿음이자 환상이다. 이 환상을 실현하기 위한 주술행위로서 생명공학이 들어온다:이들이 만든 질병은 대량생산이 가능하며 100% 기능하는(분명, 그것이 100%기능한다는 이야기는 영화 내에사 공공연하게 드러나진 않는다:하지만, 상품이 100% 기능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상품으로서의 가치가 있을까?) 상품이며 이미지이다. 하지만, 이 만들어진 질병은 유명인이 경험하는 질병과 동일한 질병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위에서도 언급한 내용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그들은 이 질병을 공유하고 소비하는가?


영화 내에 드러나는 다른 장치를 통해서 보면 이는 좀더 명확하게 드러난다:열성적인 팬들은 유명인의 유전자를 이용해서 만든 배양육을 먹어치운다. 하지만 이 뭉글뭉글하고 기분 나쁜 근세포 덩어리가 어떻게 '유명인'과 접점이 생길 수 있는가? 유명인의 유전자로 만들었기에 유명인과의 접점이 생긴다는 것이다:즉, 유명인의 본질은 유명인이라는 인간 그 자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닌 '유전자'라는 물질로 해체되고 쪼개질 수 있는 '무언가'라는 믿음이 이러한 역겨운 행위를 가능케하는 것이다. 유명인의 존재와 그에 빠지는 팬덤에 대해 발터 벤야민이 실존하지 않는 '아우라'를 숭배하는 행위라 비판했었던 것이 이제는 보들리야르 식으로 존재하지 않는 유명인의 본질-아우라를 보이지 않는 단위의 유전자나 또는 병원체로 신비화시키고 그것이 본질이라고 믿는 것으로 악화된다. 그리고 팬이 유명인의 질병을 공유하는 행위조차 마찬가지이다:유명인이 경험하는 질병과 고통이 그것을 상품으로 소비하는 경험과 등치될 수 없음에도 그것이 연결되었다는 믿음 자체가, 질병이라는 이미지를 소비하는 기반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질병에 의해서 변화하는 신체와 고통은(포진 바이러스가 입가에 난 팬처럼) 이러한 믿음의 '증거'이다.


그리고 여기서 아들 크로넨버그와 아버지 크로넨버그의 접점이 생긴다:일찍이 보들리야르가 시뮬라시옹에서 한 챕터를 할애하면서 JG 발라드의 크래쉬를 분석하며 '시뮬라시옹 시대의 걸작'이라 찬미하였으며, 아버지 크로넨버그는 발라드리안이자 발라드 특유의 '이질적인 두 존재의 상호침투'(열기와 인간의 결합, 역진화-물에 잠긴 세계, 차와 인간의 섹스-크래쉬 등등)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특히 아버지 크로넨버그가 크래쉬를 통해서 집대성한 섹스의 이미지는, '하고 있지만 전적으로 행해지지 않는 섹스' 그 자체이며, 그런 점에서 시뮬라시옹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안티바이럴에서 다시 반복되는데, 시드가 볼&태서의 특별 제조된 바이러스에 감염된 한나 가이스트의 피로 인해 한나와 함께 천천히 죽어갈 때, 서로 '죽음'을 앞두고 있다는 점에서 감정적인 유대가 맺어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사이에서는 어떠한 '드라마'가 발생하지 않는다. 극중 시드와 한나 사이에는 같은 공간을 점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거리가 존재하며, 죽어가는 창백한 한나를 앞에 두고 시드가 취하는 그로테스크한 태도(마치 목을 조르려는듯이 손을 뻗는 장면과 그 행위의 멈춤 또는 좌절)는 이 둘의 관계가 단순하게 유명인을 사랑하는 팬과 유명인 사이의 관계가 아님을 알 수 있게 된다. 또한 그는 현실의 한나보다는 꿈속의 한나 가이스트에 더 친밀한 유대감을 느끼는 것처럼 보인다(반복되는 꿈의 이미지와 피를 뽑는 행위를 꿈속에서 하는 것 등):유대감에 대한 강력한 '증거'를 몸에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증거'에 집착할 뿐 실제의 원본을 보면 차게 식어버리는 이 기묘한 '팬심'이야말로 영화의 주제의식을 꿰뚫는다.


아들 크로넨버그가 안티바이럴에서 질병과 유명인을 소비하는 그로테스크한 방법론은 아버지 크로넨버그의 초기작들과 유사하며 그 '증거'를 몸에 드러내는데 집중한다:브루드에서 정신병이 육체의 일부로서 발화되는 모습이나, 스캐너스에서 스케너의 정신이 육체와 기계에 융합하며, 데드 링어에서는 쌍둥이가 완벽한 타자인 서로를 완벽하게 싱크로나이즈 하려는 시도를 하는 등등은 안티바이럴의 표현방법, 유명인의 DNA로 만들어진 유사 육체를 먹는다던가 유명인의 질병이 그로테스크하게 온몸을 지배하는 모습(특히 시드의 경우, 너무 많은 유명인의 질병을 몸에 보유함으로 인해 완전히 망가져버렸다는 인상마저 준다)과 맥이 닿아있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아버지 크로넨버그와 달리 아들 크로넨버그의 안티바이럴은 사진을 전공한 이력의 특수성이 그의 영화를 지배한다:마치 세계는 진공포장된 것처럼 병적일 정도로 정돈되어 있으며 미장센도 편집증에 걸린 것처럼 보일 정도로 대칭되어 있다. 혹자의 표현을 따르자면, '카메라로 배운 세계'가 영화 내에 그려진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안티바이럴의 영상은 인공성에 초점이 맞춰져있다. 그리고 그러한 인공적인 영상미에 대한 집착이(물론 주제의식에 의해서 의도되었기는 하겠지만), 아들 크로넨버그와 아버지 크로넨버그를 구분하는 주요한 기준으로 보여진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본다면, 아들 크로넨버그의 안티바이럴은 아버지 크로넨버그의 초기작의 훌륭한 재림이라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유념해야하는 점은 아버지 크로넨버그는 이미 자신의 초기작을 넘어서 어디론가 향해서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육체 또는 정신과 이물질의 결합, 폭력과 섹스는 여전히 아버지 크로넨버그의 주제의식이지만, 그것은 그로테스크한 육체의 변화를 뛰어넘어 사람을 뒤흔드는 '드라마'의 형태로 이행하였다. 스파이더의 거미와 오이디푸스 컴플랙스의 이미지, 폭력의 역사의 일반적인 중산층 가정 이면에 숨겨진 폭력의 내력, 이스턴 프라미스의 동구와 서구의 만남 등등을 통해 드러나는 아버지 크로넨버그의 미학은, 마치 데인저러스 메소드에서 '나는 그 이상을 보고 싶다.'라고 이야기하는 신경쇠약에 걸린 융의 이미지에 맞닿아있는 듯 하다:아버지 크로넨버그는 '융합' 이후에 어떻게 될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살 것인지를 보고 싶어한다. 그리고 지금 현재까지 걸어온 길로 보자면 아버지 크로넨버그는 꾸준하고 성실하게 걸어온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아들 크로넨버그는 어떨까? 안티바이럴은, 아버지의 영향을 강력하게 부정함(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아버지 영화의 이미지를 분명하게 자기 영화에 삽입한다:음부가 기형인 배우에 대한 이야기는 데드링어에 대한 분명한 오마주이다)에도 불구하고 분명하게도 성공적인 첫걸음이라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물론 호불호가 갈리는 평이 많지만, 어찌되었든 본인은 성공적이라 보고 싶다) 그렇다면 아들 크로넨버그는 어디로 갈 것인가? 단순하게 아버지의 전철을 밟을 것인가, 아니면 자신만의 길을 걸어갈 것인가?


여기서 아들 크로넨버그의 행보를 논하는 것은 무리가 있어 보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안티바이럴이 스플라이스와 같이 고전적인 B급 SF 호러를 원하는 사람들의 목마름을 충족시키는 작품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결말에서 드러내는 '악의'는 영화를 잊을 수 없는 무언가로 만드는데 성공한다. 기회가 된다면 꼭 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