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및 책 이야기








우리가 일반적으로 갖는 근현대의 시간에 대한 문제인식이란, 시간의 '가속화'이다:기술 문명의 발달을 바탕에 두고 있는 대중의 등장은 시간을 측정할 수 있으며 통일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물건으로 만들었으며, 그리고 이를 더욱 빠르게 가속함으로서 더 빨리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주었다. 기차를 예로 들어보자. 목표를 향해서 일사분란하게 진행되는 기차는 기차가 도착하는 지점마다 기차역을 설치하고 정확한 '시간'을 알려주는 지표로서 기능했었다. 제각기 다르게 흘러갔던 시간이, 기차와 기차역을 통해서 하나의 통일된 시간축을 갖게되었다는 분석은 이미 익히 알려진 사실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렇게 통일된 시간,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은 인간에게 기계의 시간에 맞춰서 더 빠르게 움직일 것을 강요하고, 그 결과 이러한 시간의 흐름에 맞출 수 없는 사람들은 뒤떨어짐으로서 지친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병철이 '시간의 향기'를 통해서 주장하는 바는 다르다:문제가 되는 것은 시간이 가속화되는 것이 아니다. 현대인들이 시간에 대해서 느끼는 감각은 단순하게 시간이 빠르게 흘러가기에 생기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아도르노의 다음 구절을 인용한다.



"불면의 밤:그것을 표현하는 하나의 공식이 있다. 새벽이 찾아와 끝날 가망도 없이 공허한 지속을 잊으려는 허망한 노력 속에서 늘어지는 고통스러운 시간들, 하지만 경악을 일으키는 것은 시간이 수축되어 아무런 결실도 없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그런 불면의 밤이다...그런데 그런 시간의 수축 속에서 드러나는 것은 충만한 시간의 반대상이다. 충만한 시간 속에서 경험의 힘이 공허한 지속의 저주를 깨뜨리고 지나간 것과 미래의 것을 현재로 끌어모은다면, 조급한 불면의 밤 속에서 지속은 참을 수 없이 끔찍한 전율을 불러일으킨다." 

-테오도르 아도르노, 미니마 모랄리아.



한병철에 따르면 이렇다:시간이 빨라진다는 것은, 더 빠르게 목표에 도착한다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시간을 2배로 더 빠르게 돌린다면 더 빠르게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것이고, 그리고 이를 통해서 압축적이기는 하나 우리의 삶은 이전이나 이후나 큰 변화 없는 만족을 누리게 될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가 겪고 있는 시간에 대한 의식, 특히 불안이란 아도르노가 저술한 것, '불면의 밤'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무엇에도 도달할 수 없기에 느끼는 불안감, 24시간 깨어서 24시간 움직이지 못하기에 느끼는 절망감(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기계가 아니기에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지한다;그럼에도 인간은 이에 대해서 절망을 느낀다), 그리고 '시간이 손가락 사이로 세어나가는 것처럼 느껴지는' 감각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인지하는 시간에 대한 문제의식이다. 하지만, 이러한 시간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감각들은 일사분란하게 목표로 나가는 시간, 가속된 시간과는 어딘가 다르다고 볼 수 있다:왜냐하면, 가속된 시간에는 '목표'를 향해서 나아가는 분명한 방향성과 운동성이 존재하지만, 우리가 일반적으로 느끼는 이 '막연한 불안감'이란 목표로 나아가는 '움직임'은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뒤떨어짐'과도 거리가 멀다고 볼 수 있다:인간이 아무리 기계를 빠르게 돌려서 목표를 향해서 움직이려 해도, 결국 기계는 기계를 움직이는 주체인 인간에게 예속되어있을 수 밖에 없다. 그렇기에, 단순히 기계가 빨라졌기에 인간이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은 틀린 명제라 볼 수 있다:기계가 여전히 인간에게 매여있다면, 기계가 가속할 수 있는 시간은 여전히 인간의 영향력과 한계에 얽메여있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기계가 인간에게 얽메여있듯이, 기계는 역으로 인간을 옭아매기도 한다:유사 이래, 인간은 가장 싸면서 가장 복잡한 '기계' 또는 '기계 부품'으로서 작동하였다. 한때는 그것은 노예제였으며, 장원의 농노였고, 혹은 산업혁명기의 여성 노동자와 아동 노동자 였었다. 인간에게 기계의 삶을 요구하는 것, 인간에게 모든것을 박탈하고 착취하여 극한의 기계의 효율을 이끌어내는 것은 이미 역사적으로도 증명된 사실이기도 하다. 하지만 한병철이 제기하고자 하는 문제는, 우리 사회 일반이라는, 즉 근현대사회-모더니티라는 '정상 사회'라는 지점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이런 사회에서는 단순하게 인간이 가장 싸면서 복잡하고 정밀하게 작동하는 기계의 부품으로서 착취의 대상이 된다고는 말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유념해야하는 점은 세계뿐만 아니라 실제 우리 사회에 있어서도, 우리가 바라보지 못하는 이면에 이렇게 착취당하는 기계로서의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다만 여기서는 그 문제를 중점적으로 다루지는 않도록 하겠다)


한병철은 현대 시간 인식에 대한 문제를 과거로부터 지금까지의 시간에 대한 관념이 어떻게 바뀌어왔는가에 초점을 맞춰서 이야기를 전개한다. 고대의 시간은 신화적인 시간으로서, 신의 이야기들, 그리고 끝이 존재하는 시간으로 존재하였다:여기서 인간은 신이 만들어낸 시공간의 풍경에 불과하였다. 하지만, 신의 죽음과 함께 근대의 시간관념이 도래하면서 이야기는 바뀌게 된다:한때, 풍경에 불과했던 인간은 이성이라는 도구를 통해 시간의 중심축으로 거듭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절대이성이라는 이상적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서(헤겔이 미학에 있어서 절대 이성의 순간에 도달하면, 이라는 전제를 깔은 지점이나, 마르크스가 한때나마 역사발전에 있어서 단계를 설정하며, 밀의 자신의 자유론 저서에서 하나의 궁극적 목표를 간간히 드러내는 지점 등등) 인간은 '시간'을 가속해야할 의무를 지게 된다. 이런 지점에서, 시간은 하나의 '이야기'가 된다. 이 이야기에는 인간이라는 주역이 있으며, 이야기의 끝을 향해서 인간은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의무가 있다. 중요한 점은, 근대의 시간에서 신이 죽음으로서 시간은 인간에게 귀속되었으며, 동시에 '목표'를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즉, 신화의 시간에서 근대의 계몽의 시간으로 바뀌면서, 스스로 미래를 향해 몸을 던지는 인간들이 등장하며 시간을 조작한다는 개념이 생겨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답을 향한 조급성이 인간과 시간 사이의 내적부조화를 불러일으키기 시작한 것을 한병철은 현대의 시간 문제의 단초로 본다.


하지만, 20세기의 일련의 역사적 사건들을 거치면서(2차세계대전 전후를 위시한 다양한 사건들), 인간에게 도달해야하는 '절대적 이상'은 사라지게 되었다(혹은 그것이 갖는 폭력성과 위험성을 파악하게 되었다) 그 결과, 시간은 자신을 구성할 수 있는 중심축, 중력을 잃게 된다. 한병철이 주장하는 현대 시간 문제의 근원은 바로 이 지점이다:현대의 시간에는 '중력'이 없다. 시간에 중력이 없기 때문에, 시간은 부유하며 무의미하게 소모되는 것 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시간의 가속화란, 어찌보면 시간 문제에 있어서 하나의 '편린'에 불과하다. 부유하는 시간속에서 시간은 가속하기도 하며 감속하기도 한다. 문제는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이 어떤 규칙성을 갖고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제멋대로 무의미하게 흩날린다는 점에서 현대인들은 시간에 대해서 무기력한 감각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한병철이 주요하게 문제를 제기하는 시공간은 바로 '인터넷'이라는 시공간이다. 재핑Zapping이라는 방식으로 움직이는 이 시공간은 수용자에게 오로지 '자극'을 주느냐 안주느냐의 여부에 따라서 머무름이 결정되는 세계이다. 만약 그 페이지가 재밌으면, 사람은 그 페이지를 보며 그 페이지에 머무른다. 하지만 그 페이지가 재미가 없으면, 수용자는 자연스럽게 그 페이지에서 이탈에서 다른 재밌는 페이지를 향해서 나아갈 뿐이다. '재미'라는 자극만 남아있는 이 공간에서, 인터넷 상의 시공간은 경쟁자들에 비해서 더욱 더 큰 자극을 줘서 사람을 머무르게 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그렇기에 인터넷 미디어는 점점 더 선정적인 방향으로 발달할 수 밖에 없다. 이처럼, 시공간에 '머무를 수 있는' 중력이 부재하다는 것은 인간이 시간을 무기력하게 또는 자극적인 방향으로만 소비하게 만드는 주요한 문제라는 것이 한병철의 견해다.


한병철이 제시하는 문제의 해결방법은, 시간에 머무를 수 있는 중력을 재발견하는 것이다:시간의 향기라는 개념은 바로 이 지점에서 등장한다. 금방 사라지는 시각과 청각적인 자극이 아닌, 장소와 밀접한 관련을 맺으며 뇌에 깊숙한 여운을 남기는 향기, 즉 '후각'의 개념은 하나의 시공간에 머무르고 거기서 머무름으로서 느낄 수 있는 안정감을 선사한다는 것이다. 시간과 향수, 추억에 대해서 수많은 유럽 철학자들이 인용하는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보자(이 역시 한병철도 인용한 부분이다.)



"(마들렌의 향과 맛에 대해서)그 무엇에도 의존하지 않는 완전히 독자적인 전대미문의 행복감, 그 근거가 무엇인지 나 자신도 알 수 없는 그런 행복감이 내 온몸에 흘러 퍼졌다. 단번에 나는 삶의 굴곡에 무관심해졌고, 삶의 재앙도 그저 대수롭지 않은 불운이었으며, 삶의 짧음도 단순히 우리 감각의 기반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리하여 내 안에서 무언가가, 보통은 사랑만이 이룰 수 있는 무언가가 일어났고, 이와 동시에 나는 어떤 진미의 물질로 채워진 듯이 느꼈다. 아니, 이 물질이 내 속에 있다기보다는 내 자신이 그 물질이었다. 나는 더이상 내가 평범하다거나, 공연한 존재라거나, 죽어 없어질 몸이라고 느끼지 않게 되었다."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시간에 머무른다는 것은, 시간에 있어서 서사를 다시 되찾자는 의견은 아니다:한병철은 장 프랑수와 료타르의 순간에 대한 미학, 수평적인 시간의 흐름에 따른 미학이 아닌 그 순간에만 느낄 수 있는 존재의 수직적 미학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평가한 지점에서(물론 그것이 시간의 부유함을 막을 수 있다고 보지는 않지만), 그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다시 근대의 목표가 있는 시간축의 설정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한병철의 주장은 '사색적 삶'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것이다:머무르는 시간이란, 단지 목표를 향해서 나아가든, 아니면 목표없이 불안에 떨며 방황하는 시간이 아닌, 그 순간에 지나치며 느끼는 정념의 문제라 할 수 있다. 하이데거가 후기 저서에서 '들길이라는 시공간에서 느끼는 감정'에 집중한 것을 한병철은 중요한 지점으로 파악한다(여담이지만 한병철은 독일 철학, 특히 하이데거의 철학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시각과 청각과 다르게 향기가 뇌의 감각기관으로 들어와서(냄새는 후각 수용기로 빨려들어온다), 거기에 강렬한 자극을 주며 머무르는 것처럼, 현대인들도 시간이라는 그 순간에 머무르는 미학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한병철은 이 지점에서 니체를 인용하는데, "우리 문명은 평온의 결핍으로 인해 새로운 야만 상태로 치닫고 있다. 활동하는 자, 그러니까 부산한 자가 이렇게 높이 평가받은 시대는 일찍이 없었다. 따라서 관조적인 면을 대대적으로 강화하는 것은 시급히 이루어져야 할 인간 교정 작업 중 하나이다")


한병철의 현대의 시간에 대한 분석은 날카로우며, 핵심을 찌르고 있다. 물론 이 지점에 있어서 본인의 독서력이 얕은 관계로, 한병철이 갖고 있는 한계와 모순점을 발견해내지 못한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본인이 한병철을 높게 평가하고, 독서토론에 있어서도 평가가 좋은 지점은, 근래의 소위 '철학자'라 불리는 자들의 말장난에 비견하면 한병철의 저서들은 '논리적인' 구조에서 크게 벗어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의 문제의식은 과거 본인이 리뷰했었던 멋진 신세계에서 드러나는 죽음의 문제와 맞닿아있다:인간이 시간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면, 그의 삶은 '불현듯' 끝장나게 된다. 한병철이 인용하는 니체의 최후의 인간과 불시Un-zeit(독일어로, 부정과 시간의 결합어다) 개념은 멋진 신세계에서 드러나는 신세계인들이 죽음을 맞이하는 방식인데, 죽음이라는 존재를 전혀 모르는 상태로 그들은 문자의미 그대로 불현듯 '끝장'나버린다. 죽음을 받아들인다는 것, 그것을 준비하고 현재의 삶의 일부로 받아들인다는 개념 자체가 부재한다는 것은 멋진 신세계의 문제뿐만 아니라, 현대의 우리 역시 경험하는 문제이며 '적절히 머무르다, 적절하게 떠난다'는 적절함의 개념의 부재한다는 지점으로도 볼 수 있다.


하지만 그의 날카로움과 별개로, 본인이 그의 저서에 대해서 느끼는 찝찝함이란 그가 분석하고 있는 사회현상의 '한정됨'이라는 지점일 것이다:물론 그는 이미 충분히 복잡한 현대사회의 문제들을 철학적/미학적인 지점에서 고찰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며, 동시에 그에 대한 추상적이지만 큰틀에 있어서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본인이 지적하고 싶은 점은, '세계'와 '역사'와도 같은 어떤 구체적이고도 분명한 문제들에 대한 통찰이다. 우리는 선인들의 경험과 인터넷을 통해서 다양한 세계와 역사의 문제를 마주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분명하게도, 우리가 마주하지 않고 눈돌림으로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고 볼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에 대처하여야 하는가?


물론, 이는 비겁한 '반칙'이다:하나의 포커스로부터 시작된 이야기를 시야를 넓혀서 다양한 포커스를 다루지 않았다는 점을 공격하는 점은 논쟁이나 반박을 하는데 있어서 비겁한 형식의 이야기 확장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한병철이 다루고 있는 '일반 정상 사회'라는 개념은 어찌보면 먼 거리에서 흝어보는 대단히 추상적인 이야기들이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마주할 수 있고, 실제로도 마주치고 있는 문제에 들어오면 한병철의 담론 이외에도 수많은 다양하며 구체적인 담론들이 얽이고 섥였다는 사실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그가 '머무름'에 대해서 이야기한 지점에 대해서 주목하고 싶어진다:그는 사람은 현재에 머무르고 그것을 즐길 수 있는 미학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의 시공간에 머무를 수 있는 것에는 다양한 것들이 개입한다. 수많은 역사적/사회적인 얽이고 섥힘의 관계, 나무에 메달린 보트를 보며 '이것이 어떻게 여기에 도달하였을까?'라는 신비함, 그리고 이 시공간에 함께함이라는 지점이 우리에게 시간의 향기를 느끼게 하는 지점이라 볼 수 있다. 그렇기에, 이 모든 시공간의 엮임, 과거와 미래가 교차하는 이 현재라는 지점에 있어서 모두가 함께함이라는 것이, 어찌보면 시간의 향기의 미학에 가장 중요한 지점이 아닐까? 그렇다면, 단순하게 그 장소에 머무를 줄 아는 것 뿐만이 아니라, 이 시간의 엮임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하는 윤리와 도덕에 대한 문제의식도 필요한 것이 아닐까? 이러한 순간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면, 같은 시공간에 있음에 대한 소명의식도 필요한 것이 아닐까? 아직까지는 본인으로서도 정리가 안된 혼란스러운 지점이지만, 분명한 점은 그런 머무름과 함께있음의 어떤 맥이 닿아있음을 본인은 책을 읽으면서 느꼈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한병철의 시간의 향기는 현대의 시간 문제에 대한 날카로운 시각을 갖고 있는 저서이며, 현대인들이 느끼는 시간 감각의 문제를 근원에서부터 파고 들어가는 문제라고 볼 수 있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몇몇 의문점에 대한 대답과 함께 더 큰 의문점을 갖게된 책이기도 하지만, 이런 지점에 대해서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읽어야하는 책이라고 추천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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