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및 책 이야기





공리주의utilitarianism은 현대철학 사조에 있어서 중요한 흐름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기본적으로 공리주의는 인간 행위의 윤리적 기초를 개인의 이익과 쾌락의 추구에 두고, 무엇이 이익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개인의 행복이라고 하며, '도덕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목적으로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최대행복의 원리Greatest Happiness Principle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러한 최대행복의 원리에 근거한 공리주의는 본질적으로 산업사회와 자본주의의 발달, 그리고 민주주의의 도래라는 사회적 배경을 전제하고 있다:실제로도 공리주의의 등장에는 자본론이라는 자본주의 시스템을 설명하는 기저가 등장하면서 드러나기도 했지만, 위에서 언급한 도덕의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말에는 역사에 있어서 유의미한 귀족, 왕족에 의한 사회가 아닌 최대다수라는 '대중'이라는 균질화된 집단이 유의미하게 등장한 부분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리주의 이론들의 많은 부분은 실제로 근대 민주주의 정부를 구성하고, 정책을 정하는데 있어서 주요한 기준으로 쓰이기도 했다.


하지만, 공리주의는 동시에 현대철학 사조에 잇어서 뜨거운 감자이기도 하다:과연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야말로 도덕 그 자체인가? 라는 전제에 대한 의문에서부터 현실에 적용하기에 모호한 부분들(밑에서 다루겠지만) 등등으로 인해서 많은 철학자들은 공리주의에 대해서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기도 한다. 하지만, 산업화와 자본주의, 그리고 대중이라는 거대한 집단을 다루는데 있어서 최초로 등장한 '공리주의'라는 도구의 유용성 때문에, 반대하는 철학자들의 숫자만큼의 철학자들이 공리주의를 옹호하기도 한다. 


재밌는 점은 JS 밀이라는 이 철학자는 위에서 언급하는 공리주의의 대표적인 철학자로 인지되기는 하지만, 정작 밀의 자유론은 벤담식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공리주의 자체에 대해서 제동을 거는 쪽에 가깝다는 것(다수는 소수에게 침묵하라 억압할 수 없다)이다. 10대 부터 경제학자인 아버지와 스승인 벤담으로부터 엘리트 교육을 받은 밀은 20대가 되기전에 이미 벤담과 공리주의이론에 통달하였으나, 20대 이후 스승과 노선을 달리하면서 전통적인 '공리주의자'의 길을 벗어나게 되었다. 그후 그는 오랜 저술활동과 말년의 의원활동을 통해서, 여성의 참정권과 노동자의 참정권을 주장하기도 했다. 19세기 중반 당시에는 획기적인 발상이었던 밀의 주장은, 훗날 노동당의 계보를 잇는 페이비언 사회주의의 형태로 계승되었다.


밀의 대표저작으로 분류되는 자유론은 그 내용 자체는 의외로 '평범'하다:자유론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표현과 사상의 자유를 인정해야하며, 사회(혹은 행위자 이외의 사회 구성원)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 선 하에서는 개인의 자유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지금으로써는 대단히 '평이한' 의견이라 볼 수 있으나, 이게 150년전의 과거의 이야기라는 것을 가정하고 볼 때에는 대단히 급진적인 의견개진이라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150년 전의 의견이 지금에 와서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점은, 이 글이 근현대 민주주의 사회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가에 대한 방증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관련된 요약은 자유론 요약 노트(https://medium.com/p/26a9cd442a40)를 참조하시길 바라며, 이 글에서는 자유론에 대한 몇몇 반박의견들과 그에 대한 생각들, 그리고 공리주의 전반에 대한 개인적인 몇몇 의문을 표현하는 형태로 진행될 것이다.


몇몇 사소한 문제들(오리엔탈리즘 및 자유를 제한하는 케이스의 왜곡사용:일제의 경우) 자유론이 가장 크게 공격받는 지점은 '과연 사회에 영향을 주는지 안주는지는 어떻게 판단을 할 것인가?'의 문제일 것이다. 특히 개인의 행동이 엄청나게 다른 사람에게도 쉽게 영향을 미치는 현대 사회의 경우에는 그러한 뚜렷한 구분을 하기 쉽지않다는 문제가 있다. 하지만 이러한 지적은 밀의 이론에 대한 '피상적'인 공격에 불과하다:밀의 선언하는 '사회의 영향을 끼치는 개인의 행위'란 시간과 공간적인 상황에 따라 유동적으로 해석될 수 있으며, 그것은 어떤 고정된 원칙으로서 기능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예를 들어, 민법의 가장 기본 원칙이라 할 수 있는 민법 신의성실의 원칙의 경우, 모든 민법의 조항들이 그 신의칙이라는 원칙에 근거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신의칙이 민법의 구체적인 조항을 '정지'시킬 수 있는 예외적 상황을 만들어내는 강력한 권한이기는 하나, 동시에 그것이 모든 상황에서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무언가라고 주장하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오히려 구체적인 사항에 맞춰서 만들어진 법에 대해서, 신의칙은 그것에 근거를 마련하지만 모든 판단을 그것에 의거해서 하는 등 자신은 뒤로 사라진다:즉 신의칙은 가장 강력하며 모든 민법의 근원이며 전제이나, 구체적인 사항에 대해서는 그 구체적인 상황에 대한 논의에 입각한 법에게 모든 것을 양보하는 최고이며 동시에 (적용에 있어서)최종적인 법조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밀의 선언 역시도 그와 비슷하게 볼 수 있다:밀은 자신의 이론에 입각해서 거대한 기반이자 대전제(사회의 영향을 끼치는 개인의 행위)를 정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어떤 것인지는, 시대와 상황, 공간별로 각기 다른 이해를 상정하고, 그 이해를 바탕으로 밀의 선언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토론을 해야할 것이다. 밀의 선언은 오히려, 절대적인 진리의 선언이 아닌 '진리'(사실 진리의 불가변성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을 생각해볼때, 진리라는 단어는 어울리지 않으나 여기서는, 그리고 후술할 문제에 의해 어쩔 수 없기에 진리라는 단어를 선택한다)를 향한 일종의 안내이자 지침으로서의 기능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오히려, 밀의 자유론이 갖는 문제들은 자유론이라는 저서의 주장이 아닌, 그 저변에 깔려 있는 근대적 한계성과 그가 기초하고 있는 '언어적/인식적인' 문제 때문에 생겨난다. 예문을 들어보겠다.



"적어도 인류가 '여전히 불완전한 상태'에 있는 동안에는 여러가지 상이한 의견이 존재하여야 하고, 마찬가지로 여러가지 상이한 생활의 실험이 있는 것이 '유익'하다. 또한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다양한' 성격에 자유로운 영역이 부여되어야 한다. 그리고 누군가가 생활의 다양한 양식의 가치를 시도해보는 것이 그들에게 적합하다면, 그가 그것을 시도하도록 하여 실제로 증명할수 있도록 해야 한다. 요컨데 근본적으로 타인과 관련되지 않는 사항에 대해 개성이 스스로를 주장한다는 것은 바람직한 것이다. 그 개인 자신의 성격이 아니라, 타인의 전통이나 관습이 행동의 규범으로 되어 있는 곳에서는, 인간 행복의 중요한 요소의 하나이자 '개인적/사회적 진보'의 주된 요소를 이루는 것이 결여되게 된다." 


-3장, 복지의 요소인 개성 중에서



'여전히 불완전한 상태', '유익', 성격의 '다양함', '개인적/사회적 진보' 등등 밀의 언어 사용은 지금 관점에서 보면 살짝 기묘하다고 볼 수 있다:밀의 이론은, 전적으로 근대적인 인식의 한계에 기반하고 있다. 이는 사회는 어떠한 방향성을 띄고 운동하며, 그러한 '시대정신'에 의해서 인류는 완벽으로 향하는 중이라는 믿음이자, 사회에 대한 '순수 논리적인' 접근이라 볼 수 있다:이는 헤겔은 예술에 있어서 '예술은 인간의 불완전한 지성이 세계를 인지하는 방법이며, 동시에 이성이 완벽에 도달하게 되면 예술은 그 역할을 상길하게 될 것이다'라고 선언하였던 것과 유사하다. 도대체 완벽한 이성의 상태는 어디이며, 그리고 그것은 어디로 가는가? 이러한 이론들은 전적으로, 어떤 실증적인(실제로 보여지는 현상) 것이 아닌, 사변적이고 관념적인 논리 실험이자 가정에 불과하다. 그것은 정상 상황의 경우에 한해서 헤겔은 완벽한 철학자라는 한병철의 평가와도 같이(권력이란 무엇인가) 완벽한 정상상황의 경우를 상정하면 그리 이해할 수 있을 것이나, '지금이 비상상황이 아니다:역사는 언제나 비상 상황이었다' 라는 벤야민의 지적을 생각해보면 이는 꿈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헤겔 이후의 철학의 흐름이 유물론(포이어바흐-마르크스), 언어라는 도구에 대한 고찰(비트겐슈타인), 실존의 문제(하이데거와 그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 니체 등등의 길을 걸었다는 것은 그런 철학의 '한계'를 분명하게 드러내는 지점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다시 자유론으로 돌아와보자:밀이 자유론에서 주장하는 바는, 인간 개성의 존재가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며, 유능하며 건강한 사회는 개성이 발현된 사회(밀에 따르면 중국과는 정반대로!)라는 것이다. 1차적으로 '개인의 개성은 사회의 건강성을 위해서 존재되어야 하는 어떤 전제적인 존재인가?'라는 지점은 재껴두도록 하자. 밀이 이러한 개인의 개성을 강조하는 것은, 거대한 대중이라는 절대 다수가 개개인의 개성을 말살하는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함으로도 볼 수 있다(심지어 그는 3장 소단원 중에서 '집단속에 매몰된 개인'이라는 챕터를 쓰기까지 하였다) 재밌는 점은, 대략 100년 뒤의 한나 아렌트 역시 활동적인 삶Vita Activa라는 저서를 통해서 인간의 개개인의 삶이 거대한 흐름에 매몰될것이라고 보고, 거기서 벗어나기 위한 자기 자신의 삶을 살아야 하는 활동적인 삶에 대한 주장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한병철의 피로사회는 이를 정면으로 비판한다:현대에 있어서 개성은, 대중이라는 익명성에 매몰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대중은 '과잉 개성'에 의해서 고통 받는다. 대중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이 되라는 이야기에 시달리는데, 그것은 자기계발 교육에서부터 성형, 다이어트의 문제 등등으로 우리에게 있어 구체적이고 세밀한 지점으로 드러나게 된다:강신주가 노숙자를 '인간으로서의 긍지를 버린' 존재라고 역설한 것처럼, 개인의 스스로의 개성을 포기하면, 그는 '인간'이 아니게 된다. 하지만 동시에 그러한 무한한 자기계발은 인간을 우울증이라는 영혼의 소진상태로 밀어넣는다:인간은 '그 자신'이 되지 못한다. 결국 그 자신과의 셰도우복싱에서 밀려서 인간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개인의 개성을 위해서 사회가 장려해야 한다는 밀은 이러한 문제를 보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무한한 자기계발에 근거한 영혼의 소진. 그것이 한병철 식의 영원히 쳇바퀴를 돌리는 햄스터든, 아니면 보들리야르 식의 시스템을 숨기기 위한 외부의 끝없는 주입이든 말이다.


또한 자유론과 별개로 공리주의의 문제는 현대사회의 가장 중대한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자유론은 아슬아슬하게나마 여기서 비켜서있다:최대다수라는 대중의 존재와 별개로(물론 이것도 문제삼으라면 문제 삼을 수 있겠지만) 과연 '최대행복'이라는 지점은 어떻게 인지할 것이냐 라는 문제인 것이다. 밀이 중요하게 근거하고 기반하고 있는 토크빌의 경우는 민주적인 사회들은 사회적 불운의 해소와 모든 인간운명의 평등화로서 보다 많은 복리를 항상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한 것에 대하여, 보들리야르는 '(이 경우에 있어서)행복은 사물과 기호로 측정될 수 있는 복리, 물질적 안락이어야 한다'라고 지적(소비의 사회)하였다:균질화된 행복, 부의 추구. 그것은 공리주의가 기본적으로 그러한 부가 가시적인 형태(숫자나 화폐 등)로 드러나는 '자본주의적인' 인식에 근거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지점이다. 행복은 '측정될 수 있다':공리주의의 등장이 자본주의 발달과정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는 지점이 여기서 뚜렷하게 드러난다고도 볼 수 있으며, 밀 역시도 리카르도의 차익지대론에서 큰 영향을 받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러한 공리주의의 믿음과 별개로 개개인의 각기 다른 행복의 지표는 돈이라는 사용가치 하에서 재구성되고 균질화되며 고유의 가치를 잃어간다(보들리야르는 이를 가리켜 '모든 것은 균질하게 소화된 똥이 된다'라는 극언을 하기도 했다) 


모든 행복은 지표화되서 인지될 수 있는가? 그것이 균질화 계량화 되어서 똑같이 인지할 수 있는가? 우리는이에 대해서 쉽게 부정하지만, 동시에 그에 대한 대안은 쉽게 제시하지 못한다. 이는 대단히 어려운 문제다:허나 분명한 점은, 그러한 계량화와 균질화가 '편리한 도구'라는 점과 계량화와 균질화를 통해서 현대 자본주의-민주주의 사회가 성립되었다는 것이다. 보들리야르가 간과하고 있는 점은, 물질문명의 혜택이 단순하게 인간을 타락시켰다는 것이 아닌, 긍정적/부정적인 의미로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지점이다. 보들리야르는 '세탁기는 그 사용 가치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위세와 행복이라는 이미지의 소비로써도 기능한다'라고 선언하였다:보들리야르의 위대성은 세탁기가 단순한 도구 이상의 이미지의 소비라는 지점도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한데 있지만, 동시에 그는 세탁기가 도구로서 여성들을 하루에 절반 이상의 시간을 소모하는 '빨래'(빨랫감을 들고 우물이나 개울까지 가서, 빨래를 하고 다시 그걸 들고 집으로 들어오는)로부터 해방시켰다는 지점에서 눈돌려버리면서 길을 잃고 해매게 된다. 자본주의 사회와 산업화된 시스템과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공리주의적 가치관이 그 자체의 문제가 심각한 것은 사실이지만, 동시에 그것으로 인해서 인간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부여했다는 점을 쉬이 간과한다:냉장고를 부엌에서 내쫒아 자본주의에 저항하고 '인간적'인 것을 다시 불러일으켜야 한다는 강신주의 발언은 냉장고라는 음식 보존의 도구적 속성을 무시한 단순한 러다이트적인 발언에 불과하다. 냉장고나 세탁기는 단순한 행복이라는 이미지의 소비의 지표가 아닌, 기능으로서도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찬성/반대 한쪽을 주장하기에는, 공리주의 혹은 '균질한 행복'이라는 지점은 상당히 복잡한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는 극론을 제기하기 보다는, 전체를 보고 숙고하는 사고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겠다.


밀의 자유론은 한계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가장 기본적인 원칙으로서, 우리가 사유할 수 있는 가장 근저에 깔린 사상의 다양성 존중의 문제를 기본적으로 다루고 있는 저서이기에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논리적으로만 치열하기에 읽는 재미는 덜한 책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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