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및 책 이야기




철학은 세계를 보는 관점을 규정하는 학문이다. 고대에서부터 근대, 그리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철학자들이 세계를 어떤식으로 인식할 것인지, 그리고 그 인식에서 어떻게 세계를 바꿀 것인지에 대해서 다루었다. 특히 근대-모더니즘의 사회의 문제들, 2차세계대전의 상흔이나 인간 소외의 문제 등등을 철학자들은 다양한 문제의식과 분석으로 접근했으며 각기 다른 결론과 대안을 제시하였다. 하지만 한병철의 피로사회는 짧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논의들을 정면으로 공격하며, 자신만의 독자적인 문제의식과 해결방법을 구축한다.


한병철은 사회문제는 이제 기존의 '면역학적인 문제'가 아닌 '신경증의 문제'로 넘어갔다고 해석한다. 면역학적인 문제의식은 '타자'의 존재를 상정하고, 그리고 그 외부의 타자와 내부인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 초점을 맞추었다. 예를 들어서, 레비나스의 시간과 타자의 경우, 하이데거의 언어이론을 근거로 하여서 '존재'란 '타자'를 흡수하여 파괴한다고 지적했다. 레비나스는 여기서부터 독특한 윤리의식을 만들어내는데, 윤리와 도덕이 현존재가 타자의 현존재에 복속되어 봉사하는 기존의 윤리 개념과는 다른 독특한 무언가를 제시한 것이었다. 하지만, 위에서 보았듯이, 레비나스의 문제의식은 철저하게 '내부와 외부'라는 이분법적인 개념에 기초하고 있으며, 다른 근대 철학자들 역시 이분법적인 개념에 근거하여서 사회 문제를 접근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병철의 생각은 다르다. 그는 근대/노동사회와 후기 근대(맥락에서 본다면 포스트 모던이라 할 수 있는)/성과사회를 서로 구분하며, 근대철학자들의 이분법적인 세계관/인식론을 비판한다. 가령, 한나 아렌트는 '활동적인 삶'(Vita Activa)에서 인간의 삶이 거대한 익명성의 담론 속에 묻혀서 사라질 것을 경고하고, '행동하는 삶'을 강조한다. 하지만 한병철은 한나 아렌트의 지적과 다르게, 인간의 삶은 익명성의 흐름에 묻히지 않았다고 본다. 아니, 오히려 후기 근대는 '자아의 실현'이나 '인간의 발현'가 가장 중요한 가치로 떠올랐다는 것이다. 한병철은 한나 아렌트의 지적과 반대로, 오히려 후기 근대는 '행동'이 넘쳐나기에 문제가 생긴다고 지적한다. 


근대는 종교, 신과 피안에 대한 믿음, 그리고 세계에 대한 믿음이 사라진다. 그리고 세계는 시작도 끝도 없는 탈서사화의 과정을 거친다. 니체가 '신이 죽으면 그 자리에는 건강의 여신이 들어설 것이다'라고 이야기했듯이, 절대적인 구분의 기준이자 질서의 붕괴하면 거기에는 한계없는 '긍정'이 가득차게 된다. 한병철은 이를 성과사회라 부른다. 과거의 규율사회에서처럼, 개개인은 통제와 규율의 대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성과사회에서 개인은 자신의 육체를 운영하여 성과를 내는 '작은 기업'이다. 그리고 개개인은 성과사회의 규율을 자신의 육체에 내재화한다. 현재 불고 있는 자기계발의 광풍이나 다이어트 등에 대한 현대인들의 접근, 그리고 그것들이 엄청난 속도로 체계화되고 산업화 되는 모습들에서 한병철의 분석은 예리한 통찰력을 보인다.


그렇기에 세계는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가'라는 규율이 아닌,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긍정'의 사회로 재구축된다. 하지만 한병철은 니체를 또다시 인용한다:인류에게서 관조가 사라진다면, 인류의 모든 행위들은 과잉행동으로 치달을 것이다. 세계가 긍정의 메카니즘에 의해서 운용되기 시작하면서, 더이상의 '되돌아봄'의 개념은 사라지게 된다. 인간들은 이제 성과를 내기 위해서 세계의 규율을 내재화하고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앞으로 밀어내기 시작한다. 이러한 긍정의 메카니즘의 극치에 있는 것이 바로 컴퓨터다. 컴퓨터는 긍정기계이다. 컴퓨터가 계산을 빠르게 할 수 있다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부정의 메카니즘(돌아봄, 관조)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은 기계가 아니다. 그렇기에 무한한 긍정에 의해서, 인간의 정신과 영혼은 소모될 수 밖에 없다. 이 긍정의 과잉, 자아의 팽창 상태에 의해서 생겨나는 피로와 우울은 기존의 철학에서 제기하는 문제들과 다른 양상이다. 기존의 철학이 제기하는 문제들이 인간 외부의 존재하는 '문제'들, 또는 인간 내부의 존재하는 어떤 '요소'들에 의해서 야기되는 것이었다면(면역학적인 접근), 성과사회의 인간 영혼의 소진은 신경적이며 정신적인 문제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한병철은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으로서 페터 한트케의 '치유하는 피로'를 제시한다. 모든 공동체와 언어를 파괴하는 분열적인 피로(성과사회에서의 피로)와는 다른 '치유하는 피로'란, “접근을 허락하고 만져지고 또 스스로 만질 수 있는 상태를 실현하는 피로”이다. 한트케는 “피로는 나의 친구였다. 나는 돌아와 있다. 이 세상에”라고 선언하는데, 이는 한병철이 피로사회 전역에서 인용하는 니체의 관조, 벤야민의 심심함, 그리고 참선과 무위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것은 바로 계속 자가 재생산을 하는 긍정을 '멈추고' 다시 돌아보는 것이다. 한병철은 이 멈추는 힘을 의식적인 멈춤, 조건이나 수동적인 멈춤이 아닌 부정할 수 있는 힘이라 정의한다. 현제 상황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인 '짜증'이 아닌 상황 전체에 대한 숙고와 관조에 기초하고 있는 분노처럼 말이다. 


이러한 대안적 '피로'를 대중문화 내에 적용하여 본다면, 끝없이 카타르시스와 대속을 통해 화해를 강요하는 대중문화의 서사흐름에 대한 공격이다. 보들리야르가 '대중문화에서 학살을 다룸을 통해서 대중은 학살의 경험과 화해하고 그를 극복한다. 이로 인해서 학살은 망각된다'라는 문제의식처럼, 끝없이 앞으로 나아갈 것을 요구하며 화해하고 또한 잊혀질 것을 강요하는 대중문화의 서사는 한병철이 저서에서 지적한 것처럼 상황의 '끝없는 긍정'을 통해서 거기서 벗어날 수 있다는 환상에 사로잡힌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밑에서 예시로 다룰 리틀 오데사와 악마의 등뼈에서는 이러한 환상 자체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엿볼 수 있으며, 한병철이 대안으로 제시한 '치유하는 피로'에 대한 이미지의 단초이자 영감을 받을 수 있으리라 본다.


제임스 그래이의 영화 리틀 오데사는 전적으로 축축한 슬픔과 우울로 가득찬 세계다. 폭력은 세계를 지배한다. 하지만 동시에 폭력에 대한 우울과 피로는 등장인물 사이에 만연하다. 바람을 피는 아버지, 살인자 형, 그리고 무고한 동생, 불치병에 걸린 어머니까지, 이들 모두 각기 다른 삶을 살고 있으며 케릭터들은 서로 상처주고 갈등한다. 하지만 이들은 그 축축한 우울함과 처지는 피로 안에서 ‘평등하다.’ 오히려 영화는 갈등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닌, 그런 우울함과 피로를 통해서 관객들에게 이들이 하나의 커뮤니티임을 역설한다. 그리고 그러한 인물군상들이 도달하는 비극적 결말(형의 연인은 총을 맞아 죽고, 그 현장에서 총을 들고 있던 동생은 오해를 받아 총격을 받아 죽는다.)에 대해서 어떠한 카타르시스를 던져주지 않는다. 화해하지 않음, 비극적인 결말을 통해서 관객들은 일종의 숙연함에 사로잡힌다. 그것은 카타르시스가 던져주는 대속이 아니다. 모두가 하나의 슬픔에 사로잡혀서 침잠하는 것, 폭력의 중지를 역설하는 그런 독특한 우울함에 사로잡힌다.


스페인 내전의 상처를 다루고 있는 악마의 등뼈는 엔딩이 상당히 인상깊다. 카사레스의 유령이 상처입은 아이들이 고아원을 떠나는 것을 지켜보는, 모든 것을 묵묵하게 관조하는 듯이 바라보는 엔딩에는 어떠한 화해도, 카타르시스도 존재하지 않는다.(유령이란 무엇일까? 영원히 저주받은 존재? 어쩌면 순간의 고통...죽은 것도 어떤건 산 것처럼 보인다. 조만간 감정이 정지된다. 빛바랜 사진처럼. 호박 안의 벌레처럼. 유령, 그게 바로 나다.) 상처입은 사람들은 떠나고, 죽은 자들은 유령이 되어 남아 뒤에 남는다. 하지만 극이 만들어내는 지점은 독특하다. 극히 인간적인 인간들이 스페인 내전이라는 전쟁을 배경으로, 잊혀질 수 밖에 없는 작은 사건들이 전쟁에 의해서 어떻게 파괴되고 상흔이 남는지(전쟁이 직접적 모티브는 아니지만, 고아원의 불발탄과도 같은 상징으로서 남아있다)를 보여준다. 그 누구도 절대적인 적이 아니며(하킨토가 완벽한 악이라고 규정짓기에는 그의 이미지는 철저히 인간적이다), 망자에게 정당한 것을 돌려주고 남은 뒤에 상처입은 산 자들이 떠나는 것. 결코 상처는 치유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치유되지 않는 상처로 인해서 생기는 독특한 피로감, 우울, 악마의 등뼈는 그러한 것들이 극을 지배한다. 극 내에서의 정열과 사랑은 어딘가 빛바랜 사진처럼 보이며, 고아원이라는 세계역시 그러하다. 아련한 추억 속에서 느끼는 오래된 상처의 쑤심, 피로함. 악마의 등뼈가 되살리는 지점은 바로 그러한 지점들이다.


물론 피로사회가 근대 모더니즘 철학 전반에 대한 비판을 통해서, 새로운 분석과 대안을 제시하기는 하였으나 동시에 이것이 모든 사회와 문제를 분석하는 도구로서 적용하기에는 '성과 사회'에만 적용할 수 있는 다소 제한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하지만 피로사회는 후기 근대 사회에 있어서 중요한 해석 틀이자 대안의 일부를 제시하였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