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리뷰



*스포일러 있습니다.


기상 이변으로 모든 것이 꽁꽁 얼어붙은 지구. 살아남은 사람들을 태운 기차 한 대가 끝없이 궤도를 달리고 있다. 춥고 배고픈 사람들이 바글대는 빈민굴 같은 맨 뒤쪽의 꼬리칸, 그리고 선택된 사람들이 술과 마약까지 즐기며 호화로운 객실을 뒹굴고 있는 앞쪽칸. 열차 안의 세상은 결코 평등하지 않다. 기차가 달리기 시작한 17년 째, 꼬리칸의 젊은 지도자 커티스는 긴 세월 준비해 온 폭동을 일으킨다. 기차의 심장인 엔진을 장악, 꼬리칸을 해방시키고 마침내 기차 전체를 해방 시키기 위해 절대권력자 윌포드가 도사리고 있는 맨 앞쪽 엔진칸을 향해 질주하는 커티스와 꼬리칸 사람들. 그들 앞에 예기치 못한 상황들이 기다리고 있는데…(네이버 영화 시놉시스)


최근 김지운(라스트 스탠드)과 박찬욱(스토커)에 이어서 해외영화계로 진출(?)한 세번째 한국 감독인 봉준호는 제게 있어서는 저 앞의 두 감독들보다는 기대치가 높았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보기엔, 자신의 독특한 영화세계 내로 침잠하는 중인 박찬욱이나 김지운과 달리 봉준호의 영화 세계는 세세하게 짜여져있는 세계 내에서 독특하고도 인상적인 알레고리와 비유를 통해서 자신만의 영화를 공고하게 구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설국 열차는 상당히 기묘한 영화입니다. 봉준호가 한국에서 찍었던 괴물이나 살인의 추억과 같은 영화들은 한국 사회에서 시대와 상황이 갖는 세세한 디테일과 비유들을 살려서 관객들(적어도 한국인이라면)을 몰입하게 만드는 영화를 만들었다면, 설국열차는 그러한 봉준호 특유의 장점들을 포기한 평범한 SF 영화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설국열차의 세계관이나 설정, 스토리는 사실상 SF 장르에 있어서는 대단히 익숙한 이야기들입니다. 세상이 대충 멸망하고,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작은 사회를 꾸려나갑니다. 오로지 '생존'이라는 목표아래서 재구축된 사회는 철저한 계급 사회에 무자비한 사회로 묘사되는데, 흔히 주인공이나 하류 계층의 인물들은 이 질서를 타도하고 사람 살만한 세상을 만들기를 꿈꾸고 음모하죠. 사실, 설국열차의 기저에 깔려있는 이야기들은 평범하기 그지 없는 SF 장르의 이야기이며, 심지어 이 모든 이야기들의 반전에서 결말까지 모두 뻔합니다. 꼬리칸의 인구 조절을 하기 위해서 꼬리칸의 정신적 리더와 기차 엔진의 윌포드가 서로 공모하고 있었고, 반란에서부터 모든 행위들이 기차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통제기제였다는 것은 SF 장르에서는 클리셰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흔합니다.(심지어 단백질 블록이라고 하는 그 음식의 정체조차!)


하지만, 설국열차의 미덕은 뻔하디 뻔한 이야기들을 기존의 SF 장르가 보여주지 않은 다른 형식으로 보여준 점에 있습니다.(물론 원작이 있고, 완벽하게 새로운 이미지와 구도라고는 할 수 없지만) 설국열차의 세계는 기존의 포스트 아포칼립스물의 사회와는 다릅니다. 지구를 1년에 한번 주행하는 끝없이 달리는 열차가 인류 사회의 전체를 의미하게 된 설국열차의 세계관은, '기차'라는 이미지와 멸망 이후의 인류 세계를 독특한 이미지로 엮어냅니다. 달리는 기차라는 역동적인 세계와 별개로, 열차 안을 지배하고 있는 질서는 전적으로 '정지'되어 있으며 극도로 통제되어 있습니다. 세계를 1년에 한바퀴 도는 '정시성'과 함께, 반란을 이용해서 인구수를 조절하고, 각자의 기차칸에서 벗어나지 않는(이를 벗어난 사람들을 신기하게 쳐다보는 다른 열차칸의 승객들) 등, 설국열차의 세계는 열차의 위용과 동적인 이미지와는 다르게 각각의 폐쇄적이고 정적인 소우주들의 연속(열차칸들과 그 집합인 열차)입니다. 그리고 각각의 소우주들은 전체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각자에게 맡은 역할을 벗어나지 않을 것을 강압하죠.


봉준호 감독은 이러한 열차칸이라는 한정된 공간을 극단적으로 응축된 소우주로 표현합니다. 꼬리칸에서부터 학교, 수족관, 단백질 블록 공장, 물처리 시설, 그리고 마지막 엔진까지, 개개의 열차칸들은 전체 열차의 유지를 위해서 필요한 기능을 수행합니다. 평범한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장르물의 사회와 다르게, 설국열차의 세계는 기차라는 공간으로 한정될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자칫 세트 규모의 한계로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인류 최후의 빈민들의 반란이 아니라 선상 반란 수준으로 격하될 수 있었으나 영화는 각 칸을 세계에서 필요한 기능이자 상징으로 응축해서 표현하는데 성공합니다. 그리고 윌포드와 길리엄의 공모와 세계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반란을 조장해서 인구수를 통제해야한다는 발상, 동적으로 보이지만 정숙한 엔진칸의 이미지, 정해진 레일을 달리는 기차의 은유가 결합하여서 이 얼마 안되는 세계의 모든 것(지배자서부터 피지배자까지)이 끊임없이 변하려고 하는 인류를 정적인 질서에 우겨넣으려 시도하는 강압적인 폭력의 공간으로 변합니다.


그렇기에 커티스의 꼬리칸에서부터 엔진까지의 행진은 전세계를 돌아보는 행위라고 할 수 있는데, 윌포드의 열변처럼 말이죠:'열차가 달린 뒤로 그 누구도 열차의 끝부터 시작까지 지나쳐본적이 없다' 하지만, 엔진을 지배해서 꼬리칸을 질서라는 이름의 폭정으로부터 해방시키려는 커티스의 노력은 길리엄과 윌포드의 음모와 별개로 애시당초에 핀트가 어긋나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면 커티스의 오딧세이는 전적으로 기차칸을 따라서 엔진까지 도달하는, 일종의 질서의 재확인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커티스가 엔진칸에 도달해서 윌포드에게서 사실을 듣자 절망하는 것은, '기차'와 '엔진'이라는 세계의 질서이자 동력에 집착해서 생기는 문제이며 세계는 '지배자'가 바뀐다고 해서 바뀔 수 없다는 것을 인지하였기 때문입니다. 


재밌는 점은, 영화는 그렇기에 앞으로 나가는 것이 아닌 '옆으로 빠져나갈 것'을 대안으로 제시합니다. 남궁민수의 이야기처럼, 기차에 집착하지말고 문을 열고 나가야한다는 것이죠. 어차피 레일 위에서 달리는 열차에서 앞으로 나아가봤자 레일과 열차라는 질서에서 벗어날 수 없지만, 이 레일과 기차로부터 이탈하는 가능성을 제시하는 순간 인류는 생존과 질서에 집착해서 질서에 인간을 끼워맞추는 것이 아닌 새로운 가능성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영화는 기묘하게 이 부분에 있어서 남궁민수의 비중을 '묘하게' 쳐냅니다. 옆으로 나가는 것, 기존의 질서로부터 이탈하는 가능성을 남궁민수를 통해서 보여주었으나, 문제는 옆으로 나가고자 하는 그의 동기, 그와 딸과의 관계(어머니가 존재하지 않는데, 왜 이 이야기는 하지 않는가?-극 내에서 6인의 반란을 주도한 에스키모인 청소부가 어머니가 아닐까 라는 생각도 해보는 겁니다. 그러면 부족한 동기가 채워진다고 할 수 있을듯...) 등등에서 비중을 적게 주는 바람에 헛소리로만 끝났어야 했던 윌포드의 장황 연설이 관객들에게 진실되게 다가오는 문제가 생긴 것이죠.


영화 설국열차는 솔직하게 봉준호의 모든 역량이 다 발휘된 영화는 아닙니다. 그가 한국에서 찍었던 복잡미묘했던 이야기들, 그리고 섬세하지만서도 한국 정서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관객들에게 페이소스를 제공하는 영화들에 비하면 그의 장기들이 많이 죽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영화의 내용조차도 평이하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국열차는 독특한 알레고리와 묘사를 보여주고, 이런 점에서 매력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SF 영화를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한번 보셔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호불호가 극히 갈린다는 점은 인정을 해야하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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