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리뷰



*스포일러 있습니다.

*피판에서 감상한걸 토대로 쓰여진 감상입니다.


한물간 배우 로빈 라이트는 미라마운트 영화사로부터 독특한 마지막 제의를 받는다. 자신의 이미지와 연기를 영화사에게 파는 대신에 로빈 라이트 본인은 더이상 연기를 할 수 없는 전속계약을 맺는것. 로빈은 이에 대해서 불만을 가지지만 시대의 흐름은 거스를 수 없기에 영화사와 계약을 맺기로 한다. 그리고 20년 후, 로빈 라이트는 미라마운트 영화사가 주최하는 미래학 회의에 초대를 받고 참여하게 되는데...


콩그레스는 전쟁에 대한 기억과 홀로코스트에 대한 사회적/개인적 은폐를 다룬 아리 폴만 감독의 전작 '바시르와 왈츠를'와는 사뭇 다른 포지션을 취한다. 필름 위에 스케치를 덧대서 만들었다던 '바시르와 왈츠를'가 실제 위에 파편적이고 몽환적인 이미지를 덧붙여서 기억을 재구성한 뒤에 그것을 마지막에 거둬들임으로써 그 이미지의 끝에 존재하는 '진실'을 목도하게 만드는 놀라운 구조와 기법, 방법론을 보여주었다면, 콩그레스는 그와 정반대로 미래의 기술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묵시룩, 그리고 문화산업이 지향하는 끝을 가정한다. 절반은 현실, 절반은 애니메이션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아리 폴만이 바시르와 왈츠를을 만들기 전, 스타니스와프 렘의 원작 소설 미래학적 회의를 읽은 그때부터 구상된 아리 폴만의 라이프워크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이다. 하지만 솔직히 바시르와 왈츠를에 비교하기에는 콩그레스는 나른하며 드라마보다 도식적인 구조가 앞서는 부분이 적지않게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콩그레스는 매력적인 작품이며, 감독의 문제의식은 이런저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 포인트가 분명하다..


콩그레스의 모티브는 발터 벤야민이 지적한 헐리웃 스타 시스템과 거짓 아우라의 문제와 맥락이 닿아있다. 벤야민에 따르면 예술작품(혹은 배우)의 아우라(그 장소에서만 인지할 수 있는 예술작품/배우의 독특한 분위기)는 기술복제의 과정을 통해서 제거된다. 기술복제를 통해서 예술작품은 그 아우라가 보여주는 독특한 매력 때문에 숨겨져서 숭배받는 위치를 극복한다. 하지만, 벤야민은 당시 헐리웃 스타 시스템을 통해서 지적한 거짓 아우라의 문제는, '배우'라는 단순한 인간이 마치 인간을 뛰어넘은 무언가를 가진듯이 포장해서 이를 팔아먹는 문제를 지적하였다. 대중이 일개 인간에 불과한 '스타'라는 존재에 그 이상의 가치를 부여하면서 숭배하고 여기에 몰입하는 현상(동시에 이걸 시스템해서 상품화하는 거대자본까지)을 벤야민은 문화산업이 갖는 고유의 문제로 파악하였다.


콩그레스의 시작점 역시 벤야민이 대중문화에 대해서 내린 특유의 문제의식에 기초한다. 기계와 애니메이션이 배우의 역할을 대체하는 것은 단순한 인간이 기계에 의해서 대체되는 인간 패배를 표현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하지만 로빈 라이트가 마지막 계약을 두고 이런저런 단서조항들에 대해서 언급하는 장면을 보자. 변호사가 로빈 라이트로부터 추출한 이미지가 어떤 장르에는 출연해서는 안되며, 영화에 출연할 때의 나이, 즉 배우의 이미지를 흥정하듯이 정하는 장면은 이 기술의 발전이 로빈 라이트를 그대로 대체하는 것이 아닌, 로빈의 이미지만을 뽑아내서 박제한 것임을 암시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배우의 '연기 금지 조항'이다. 배우의 복제품, 즉 상품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배우 본인의 연기를 제한한다는 것, 벤야민이 기술복제가 진품의 존재 자체를 희미하게 만들어서 아우라를 제거한다고 한 주장의 정반대의 상황을 상정하고 있다:존재할 수 없는 거짓의 아우라(고정된 배우의 이미지)가 인간을 대체한다.


하지만, 기술에 대한 로빈의 부정적인 모습과 로빈의 마지막 연기 장면을 통해서 영화는 로빈 라이트라는 인간이자 배우의 삶을 긍정한다. 하이 커리어에서부터 점점 바보같은 실수를 해서 커리어를 점점 말아먹고, 종국에 가서는 씁쓸한 퇴물 배우의 인생을 보내고 있는 로빈 라이트 본인의 슬프면서 우아한 모습(아이러니 하게도 로빈 라이트는 영화속에서 관계자들이 까는만큼 커리어를 말아먹은 배우는 아니다.)과 매니저의 고백을 들으면서 생애 마지막 연기를 벌이는 로빈 라이트의 모습은 대중문화 '산업'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는 진짜 인간의 희노애락이 들어간, 인간적인 무언가를 갖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영화의 이야기는 20년 뒤 미래학 회의에 초대받은 로빈 라이트의 넘어가며 영화는 실제에서 애니메이션으로 표현방식을 바꾼다. 인간의 감각을 속이는 독특한 약물을 이용해 만들어진 애니메이션 구역은 오래된 미국 만화나 애니메이션을 화려한 색깔로 치장된 공간이며 사람의 영역이 아닌 케릭터의 영역을 구성한다. 그리고 로빈 라이트는 영화사의 놀라운 계획을 듣는다:영화는 한물 갔어요. 미래의 기술은 '느낌'을 파는 겁니다. 제가 당신을 여기 부른 이유는 당신의 느낌을 팔기 위해서 입니다. 이 기술을 통해서 사람들은 당신을 들이키게 될겁니다. 당신은 이제 '물질'이 된거라구요, 로빈 라이트!


사람들에게 거짓 아우라를 팔았던 대중문화는 이제 사람에게 '느낌'을 팔기 시작한다. 이제 대중들은 가짜 신들을 숭배하는 것이 아닌 가짜 신, 그 자체가 된다. 불의의 사고로 또다시 20년이 흘러 그 미래의 기술이 보급된 세계를 로빈 라이트는 목격한다. 호텔에서 본 애니메이션 구역은 이제 전세계로 뻗어나갔으며, 인류는 이제 자신의 육체와 모습을 탈피해서 다양한 이미지로 변신하며 개인의 느낌과 이미지는 이제 모든 대중이 다같이 공유하게 된다. 그렇기에 극중 누군가는 인류에게 더이상 컴플렉스나 열등감이 없는 유토피아의 세계에 도달했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아들을 찾기 위해 약에서 깨어난 로빈의 눈에 보인 세계, 애니메이션의 '껍질'을 벗어던진 '현실'은 초라하고 볼품없는 거지꼴을 한데다 약에 취한 대중들이 돌아다니는 완벽한 디스토피아의 세계다.(재밌는 점은 이 각성 장면의 연출이 바시르와 왈츠를 마지막 장면 연출과 비슷하다는 점이다) 가짜 신을 숭배하기 포기하고 스스로 가짜 신이 되기를 자처한 대중의 말로란 결국 가짜에 더욱 집착해서 자폐적인 존재가 되버렸다.


하지만 영화는 그러한 '거짓'과 대중문화가 만들어내는 '이미지'에도 진실이 있을 가능성을 어렴풋이나마 보여준다. 아들을 찾아 환상에서 벗어난 로빈은 자신의 아들이 자신을 기다리다가 결국은 환상의 세계로 넘어갔다는 사실을 듣고는 다시 환상의 세계로 돌아가기를 자처한다. 하지만 환상의 세계에서는 고정된 '이미지'란 존재할 수 없기에, 돌아가더라도 아들을 찾을 수 없고 설령 찾더라도 그것이 아들인지 알 수 없을거라는 경고에도 로빈은 환상의 세계로 돌아간다. 하지만 로빈은 스스로 아들이 되는 독특한 방법으로 아들을 찾아내며 자신이 현실을 떠나기전과 같은 풍경에서 연을 날리고 있는 아들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결론에서 영화는 인간이 자폐적인 세계에 몰두하고 의미없는 상념과 이미지의 폭풍이 현실을 집어삼키더라도 거기에는 서로 공유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믿음을 보여준다. 스스로 거짓 신이 되는 것이 아닌, 꿈을 공유할 수 있는 가능성과 여지를 남겨둠으로서 사람의 꿈은 존재하며 끝나지 않음을 보여준다.


콩그레스가 아름다운 영화인 것은 사실이나, 문제는 많은 부분 빈칸이 남아있는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는 전반부, 후반부 파트만 놓고 각각 다른 한편의 영화를 만들어도 될만큼 방대하고 복잡한 내용을 무리하게 한편의 영화로 압축시키려는 시도를 했으며, 몇몇 부분은 나른해지고 케릭터들은 몇몇 주요 인물들을 제외하면 의미없이 소모될 뿐이다(특히 별다른 설명이 없어서 졸지에 20년간 로빈을 기다린 변태 스토커가 되버린 애니메이터...아니 그게 더 적절한 설명일지도) 하지만 콩그레스는 그런 문제들을 어느정도 눈감아줄 수 있는 힘과 매력이 있다. 아마도 좀만 덜 욕심을 부렸다면, 바시르와 왈츠를에 비견되는 작품이 나올수 있었을텐데 라는 아쉬움도 있지만, 전반적으로 바시르와 왈츠를을 감명깊게 본 관객이라면 추천할만한 작품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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