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리뷰



*스포일러 주의


일정 시점 이후로 헐리웃 블록버스터에 대한 감상은 블로그에 적지 않고 있습니다(아마도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이후?) 그것은 헐리웃 블록버스터의 미학이나 스토리 등등은 이제 '개성'의 문제라기 보다는 '얼마나 기술적(각본, 특수효과, 연기 등등)으로 잘 만드느냐'의 문제로 넘어갔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게 재밌는데 왜 재밌는지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각각의 감독의 버릇이나 특성들을 큰 그림 보듯이 다루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각각의 작품을 하나의 구조물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큰 그림(감독이나 제작진들의 특성)을 맞추기 위한 하나의 퍼즐조각으로 다루어야 합니다. 물론 개별 퍼즐조각의 완성도는 다룰 수 있으나, 역시 큰 그림이 없다면 이를 이야기하기는 힘들죠. 예를 들면 맨 오브 스틸에서처럼 왜 슈퍼맨이 마지막에 그런짓을 했어야 했는가, 같은 문제는 놀란의 각본과 현재 영웅 영화가 부딪히고 있는 한계에 대해서 장황하게 떠들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다루고자 하는 퍼시픽 림은 헐리웃 블록버스터 영화치고는 상당히, 아니 대단히 '엇나간' 작품입니다. 거대 로봇 vs 거대 괴수라는 지극히 망상적인 컨셉 하에서 만들어진 퍼시픽 림은 놀란 이후로 볼거리 보다는 서사를 강화하는 쪽으로 경향이 기우는 헐리웃 영화에게 빅엿을 날립니다. 퍼시픽 림은 너무 뻔뻔한 나머지 거대 로봇과 거대 괴수가 나오는걸 빼면 나머지는 클리셰로 채워놓고는 그것이 스토리인양 꾸며놓기까지 합니다. 심지어 그 '클리셰'들도 헐리웃 영화들의 클리셰들이 아닌 B급 영화에서부터 특촬물, 일본 애니메이션 등등에서 돌고 돌아서 닳아버린, 사람들 기억저편의 클리셰들의 연속입니다. 그렇기에 퍼시픽 림을 델 토로의 '덕력'과 '망상력'이 구현된 '동인지'에 비유하는 것은 정말로 올바른 비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스나이더의 망상력에 집합체에 뭔가 거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하다가 자빠진 '동인지' 써커 펀치와 비교했을 때, 퍼시픽 림은 스스로 몸을 낮추고 클리셰 속으로 허접한 이야기를 숨김으로서 영화가 보여주는 미학에 주력합니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영화는 대단히 성공적입니다.


퍼시픽 림의 미학이란, 그것은 서사와 이야기, 또는 이미지에 기반한 것이 아닌 만인의 어린시절의 경험과 망상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거대괴수와 거대로봇의 대결이라는 이 유치한 망상은, 우리의 어린 시절 특촬물, 만화, 애니메이션 등등의 서브컬처를 보고 자란 대중들이 공유하는 '집단 무의식'이라고 표현해도 적당할 정도입니다. 하지만 그 '집단 무의식'이 갖는 잠재적인 수요에도 불구하고, 퍼시픽 림 이전에 이런 작품들이 잘 나오지 않은 것은, 우리가 롤랜드 에머리히의 '고질라' 같은 망작(?)을 떠올려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그러한 서브컬처들의 미학이란, 망상력의 발현이라는 중요한 미학과 동시에 '예산과 표현의 문제'라는 한계 역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감동했던 작품들의 미학이 특촬물, 만화, 애니메이션의 매체의 틀을 넘어서 헐리웃 대자본과 결합해서 영화화 되는 것은 마치 맞지 않는 옷을 입는 것과 같은 어색함을 유발할 수 있습니다. 


델 토로는 바로 이 '미학적' 부분의 문제를 제대로 해결했습니다. 퍼시픽 림은 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스펙타클함과 무게감에 초점을 맞춥니다. 요즘의 액션 장면들이 제이슨 본식의 화려하고 빠른 CQC를 지향하는데 비해서, 퍼시픽 림이 예거를 통해서 보여주는 미학이란 진중하고 느릿한 로봇과 괴수들의 고전적 아름다움입니다. 특촬물(일본, 미국 양측 모두를 통틀어서)의 문법을 오마주한것으로 보여지는 퍼시픽 림의 액션 장면들은 대자본과 서브컬처에 대한 사랑이 결합해서 이룩할 수 있는 놀라운 시너지입니다. 걸을 때마다 지축이 흔들리며, 괴수들과 프로레슬링 하듯이 치고받는 예거들, 그리고 전투할 때 스피커에서 공기의 진동뿐만 아니라 바람마저 느껴질 정도로(실제로 바람이 불었을지도?) 울려퍼지는 파열음과 괴수의 포효음은 우리가 극장에서 보고자 했던 거대로봇의 로망을 그대로 구현합니다. 그렇기에 퍼시픽 림의 미학이란 일종의 리비도의 실현이자 마약적 쾌락이며, 그건 우리가 여태까지 보지 못했던 숨겨진 욕망의 해방이자 그것이 일궈내는 카타르시스이자 오르가즘 그 자체입니다. 일반적인 관객들이 어떻게 볼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어렸을 적에 서브컬처를 보면서 자란 사람들에게 퍼시픽 림은 일종의 신앙간증이며 집단적 희열을 보장합니다.


하지만 스토리에 있어서 퍼시픽 림이 보여주는 부분은 상당히 미묘합니다. 퍼시픽 림의 스토리 라인은 유치하다 못해서 최악의 수준을 달립니다. 케릭터는 묘사되기도 전에 휙휙 변하며, 갈등은 무의미하게 시작되었다가 끝나는 등 일반적인 영화였다면 올해 최악의 시나리오의 굴레를 뒤집어 씌워도 할말이 없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델 토로는 그 끔찍한 스토리를 서브컬처 장르의 클리셰를 덧씌움으로서 스토리를 로봇의 액션을 위한 설명으로서 최소한의 인과관계로서 탈바꿈 시키며, 이야기 자체를 한없이 가볍고 의미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립니다. 트라우마를 가진 퇴물 주인공 파일럿과 가족을 괴수에게 잃은 히로인, 한번만 더 예거를 타면 죽는 전설적인 예거 파일럿이자 사령관, 너드 과학자들 등등 20년이라는 세월의 먼지를 뒤집어쓴 듯한 전형적인 케릭터들과 막 만난 주인공과 히로인이 궁합이 잘맞는다던가, 구식 아날로그 로봇이 최신 '디지털' 로봇이 못하는 일을 하는 등등 영화의 스토리는 새롭지 않은 수준을 넘어서 거의 네크로맨싱 수준입니다. 


하지만 이 의미없는 '스토리'로부터 수많은 사람들은 향수를 느낄 것입니다. 그것은 이제는 서브컬처에서조차도 버림받은 클리셰들의 집합체이자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요소들이 지배하는 독특한 경험입니다. 그리고 델 토로는 클리셰 사이의 인과관계에 중점을 두기 보다는 이 클리셰에서 저 클리셰로 갈아타는 매끄러움을 보여주는데, 이 덕분에 영화는 하나의 클리셰 박물관이자 관객들에게 머릿속 깊숙한 곳에서 기시감을 불러일으키는 데자뷰의 덩어리인 것입니다. 물론 영화는 그 레퍼런스에 대해서 확실한 이미지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퍼시픽 림의 드리프트 설정으로부터 에반게리온을 느꼈겠지만, 동시에 델 토로는 에반게리온을 직접 본적은 없다고 고백을 했죠. 이는 클리셰들이 서로 돌고 돌아 하나의 네트워크를 형성한 것과 유사합니다. 어떤 것이 오마주이고 레퍼런스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반복되는 클리셰 덩어리들이 영화 상에서 너무나 뻔뻔하게 재현되고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영화 전반을 지배하는 그 고전적인 서브컬처 미학의 재해석과 결부되면서 영화는 정말로 뻔뻔한(스토리 따위는 잊어버리고 이걸 보라고! 내 거대한 예거와 카이주를 보라고!) 경지에 도달합니다.


퍼시픽 림은, 헐리웃 영화라기 보다는 서브컬처 동인지를 헐리웃 영화 산업의 자금력과 시스템을 이용해서 구현한 물건입니다. 이런 작품들은 잘못했다간 곧바로 나락으로 떨어지기 쉽죠. 하지만 델 토로는 그런 어설픈 함정에 빠지지 않고도 훌륭하게 영화를 만들어냈습니다. 물론 퍼시픽 림의 스토리 완성도는 많이 떨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영화는 그런 스토리의 완성도로부터 눈돌릴 수 있는 훌륭한 속임수를 부렸고, 이런것들에 추억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 속임수에 껌뻑 속아넘어갈 수 밖에 없습니다. 과거에 로봇 영화나 괴수영화를 즐기셨다면 꼭 보시길. 후회는 하지 않으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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