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리뷰




가정적이고 친절한 남자 ‘톰’(비고 모텐슨)은 어느 날 자신의 가게에 들이닥친 강도를 죽이고 사람을 구한 일로 마을의 영웅이 되어 매스컴에 대서특필된다. 그러나 며칠 후, 거대 갱단의 두목 포가티(에드 해리스)가 찾아와 그가 ‘톰’이 아닌 자신의 적 ‘킬러 조이’라며 가족을 위협한다. 아내 ‘에디’(마리아 벨로)와 아이들 역시 ‘톰’에게서 문득문득 보이는 ‘조이’의 모습에 두려움을 느끼며 점점 그를 멀리하고 마침내 ‘포가티’는 ‘톰’의 집에 총을 들고 들이 닥치는데…(네이버 영화 시놉시스)


폭력의 역사는 테이크 쉘터(리뷰는 여기로)의 정반대이다. 외부의 위협으로 피하고 숨기 위한 방공호, 그리고 외부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한 총, 이 두가지의 독특한(동시에 미국적인) 문화는 위협에 대처하는 미국인 특유의 사고방식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중산층의 본질적인 위협과 그에 대한 공황, 그리고 가족이 그 공황을 공유하게 되는 파멸적인 이야기를 다룬 테이크 쉘터와는 달리, 폭력의 역사는 평화로운 중산층 가정을 침범하는 폭력적인 위협에 폭력적으로 대처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비디오드롬, 데드 링어 등등의 B급 호러와 폭력의 대가인 데이빗 크로넨버그는 이번 영화 폭력의 역사를 통해서 그의 전공인 SF와 공포 장르를 뛰어넘었으며, 동시에 자신의 장기(섹스와 폭력)를 SF나 호러가 아닌 다른 분야에서도 훌륭하게 구현할 수 있음을 증명하였다.(물론 중간에 스파이더나 크레쉬 같은 물건도 있었지만)


폭력의 역사는 중산층 내부에 숨겨져 있는 '폭력성'에 주목한다. 평범하고 행복한 것처럼 보이는 가족들도 외부의 폭력적인 '위협'이 도래하자 그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는 모습을 보여준다. 특이한 점은 영화는 이러한 중산층 가족의 폭력성이 폭력적 상황을 통해서 '발현'되는 것이 아니라 가장인 톰이라는 인물의 내력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조이'라는 존재는 톰이 숨기고 싶은 그의 폭력적인 부분이다. 하지만 역설적인 것은, 극은 톰에게 조이가 될 것을 강요하는 상황을 지속적으로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처음 2인조 무장강도가 톰의 식당에 들어왔을때부터, 마지막 자신의 형이자 모든 일의 원흉과 마주하는 장면까지 영화는 톰이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머리통을 박살내야 하는 극단적인 선택을 할 것을 강요하고, 톰은 그럴때마다 주저없이 조이로 돌아간다.


영화는 '톰'이라는 완벽한 중산층 가정의 가장 속에 숨어있는 '조이'라는 냉혹한 괴물을 독특하게 표현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명감독이나 창작자들이 행복한 중산층 가정이라는 관념을 미국식 바퀴벌레와 동치시키거나 그보다 더 싫어해서 끊임없이 괴롭혔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크로넨버그가 '폭력의 역사'를 통해서 보여주는 가족과 그 속에 숨겨진 폭력성은 본질적인 부분에서 차별된다. 이는 비고 모텐슨의 놀라운 연기력 덕분인데, 그는 톰과 조이를 오가면서 마치 파충류 같은 '번뜩임'만으로 두 케릭터가 동시에 존재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것은 감정의 폭발, 대사, 그것을 드러내는 몸짓 등의 구체적이고 명확한 표현방법이 아닌 비고 모텐슨이 순간순간 보여주는 눈빛의 변화에서 드러난다. 방금전까지 톰처럼 보였던 인간이 순간의 눈빛의 번뜩임만으로 다른 사람처럼 보이는(혹자는 조이를 암시하는 톰의 눈빛보다, 마치 멀쩡한 가장인 척하는 톰의 연기가 더 소름끼치다는 평가를 하기도 하였다) 연기를 한 비고 모텐슨과 크로넨버그의 연출력은 소름끼칠정도다.


가족들은 처음에는 '조이'의 존재를 부정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아버지이자, 남편인 이 남자가 과연 내가 알던 그 사람(톰)인가에 대해서 의심을 갖게 된다. 이러한 의심과 두려움은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하더니, 포가티 일당을 죽이고 난뒤에는 확고한 진실이 되며, 가족들은 톰을 두려워하기 시작한다. 결국 조이라는 존재, 그리고 자신의 과거를 인정하는 톰에게 역함을 느끼고 구토하는 에디나 조직폭력배였다는 사실을 알게된 아들이 아버지이게 반발하는 장면 등등은 이러한 폭력의 내력이 가족에게 옮아가서 가족의 관계를 변질시키고 박살내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하지만, 톰(또는 조이)을 이중인격자라고 이야기하는 아내의 비난은 전혀 타당하지 않는데, 왜냐면 적어도 조이가 실재로 존재하는 것처럼 톰 역시도 실재하기 때문이다. 가족을 사랑하고 헌신하는 이 중산층 가장의 실존함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들은 역설적이게도 조이로 어쩔 수 없이 화하고 난 뒤의 톰의 모습에서 드러난다. 거칠고 잔혹한 폭력이 휩쓸고 지나간 뒤, 이 난장판을 돌아보면서 회의감과 떨림을 보여주는 눈빛 등등에서 영화는 그가 선한 가장의 탈을 뒤집어쓴 괴물이 아닌 복잡다단한 인물임을 암시한다.


영화는 이렇게 폭력이라는 존재가 어떤식으로 가정을 '화학적'으로 변화시키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이 과정은 크로넨버그 특유의 '섹스에 대한 미학'이 녹아들었다고 할 수 있다. 누군가는 크로넨버그를 가리켜서 '뭘 찍어도 내게 있어서 크로넨버그는 섹스의 대가'이라는 칭찬을 하였으며, 초기작들에서도 신체에 이물질을 삽입하고 그 이물질이 인간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비디오드롬-미디어, 스캐너스-정신, 크레쉬-자동차 충돌 성애, 데드 링어-쌍둥이 등등...)에 초점을 맞추었고, 폭력의 역사도 이러한 연장선상에 있다. 또한, 영화 내의 폭력묘사들은 폭력이 일어나기 전의 긴장감(전희)-폭력의 발생(삽입)-폭력 상황이 끝나고 난 뒤의 허탈함과 그 난장판을 돌아봄(현자 타임) 이라는 지극히 '섹스'스러움에 기초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영화에 있어서 섹스 그 자체도 중요한 '화두'이기도 하다. 영화 초반 시퀸스 중에 에디와 톰이 아이들을 보내놓고 섹스를 하는 장면은 같이 청춘을 보내지 못했던 부부가 추억을 만들려는 귀여운 시도이며, 애무에서부터 자연스럽게 호흡을 맞추는 모습을 통해 그들의 부부 관계가 서로에 대한 공감에 기초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하지만, 톰이 조이라는 과거를 숨기고 있다가 이것이 가족에게 발각되고 난 뒤, 에디와 톰이 계단참에서 벌이는 섹스씬은 이전의 섹스씬과는 다르다.(강간 씬이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영상의 박력은 둘째치더라도 각본가는 강간은 아니라고 부정한다) 그것은 기묘한 긴장관계에 기초하고 있으며, 섹스가 끝난 뒤의 에디와 톰이 서로 교환하는 눈빛, 그리고 에디가 톰을 뺨을 어루만지는 부분은 과연 내가 사랑했던 남자가 그 안에 있는지를 확인하는, 몸으로 벌이는 '대화'인 것이다.(어떤분 께서는 에디가 주도하는 정사 라고는 하지만, 본인으로서는 좀 긴가민가하다...하여간) 하지만 필사적인 대화에도 불구하고, 에디가 톰에게서 발견한 것은 알 수 없음이며, 에디가 톰을 밀쳐냄으로서  이들의 관계는 공감이 아닌 알수없는 관계로 변화했음을 드러낸다.


이렇게 변해버린 가족을 위해서 톰이 할 수 있는 것은 모든 것의 원인(자신의 형)을 근절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끝난 뒤에 그가 저녁식사를 하는 가족에게 돌아왔을 때, 영화가 보여주는 광경은 화목한 해피엔딩이 아니다. 영화의 마지막 시퀸스에서 보여주는 가족은 폭력과 진실으로 인해 영원히 과거의 행복한 가족으로 돌아갈 수 없는 변해버리고 무너지기 직전이다. 이 마지막 시퀸스야말로 영화의 모든 것을 압축한 장면이라 할 수 있는데, 가족이 느끼는 그 무거움과 더이상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에 느끼는 피로감과 괴물이 숨어있는 가장에 대한 공포감 등등이 한데 뒤섞인 이 장면은 영화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처연하다. 하지만 막내딸이 아버지를 위해서 그릇을 내주고 가장은 다시 식탁에 합류한다. 각본가는 이 마지막 장면에 이런 메모를 남겼다고 전해진다.


There is hope.

희망은 있다.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 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감상]퍼시픽 림  (0) 2013.07.15
[감상]원더풀 데이즈(2003)  (2) 2013.07.11
[감상]장기수 브론슨의 고백  (1) 2013.07.03
[감상]에센셜 킬링  (0) 2013.06.25
[감상]킬러 조  (0) 2013.05.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