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및 책 이야기




유대인 '최종 해결책'의 실무 책임자였던 아돌프 아이히만은 2차세계대전 종전 직후 아르헨티나로 도피하고, 15년 간 은둔생활을 했다. 그러나 그 역시도 1960년,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에게 체포되어서 예루살렘의 법정에 끌려와 1년여의 재판을 받은뒤 1962년 5월 31일 형장의 이슬로 생을 마감하였다. 이 책,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1년에 가깝게 거친 그의 공판 과정을 저서로 기록해서 뉴욕 타임즈에 칼럼의 형식으로 기고하던 것을 책으로 정리한 물건이다. 이 책은 발매 당시부터 대단히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킨 책으로, 특히 유대인들로부터 '사실이 날조되었다'라는 극단적인 평가를 듣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런 원색적인 비난에도 불구하고 책은 끝까지 살아남아서 후대에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알리는 정치철학 저서로 자리매김하였다.


책 내용에 먼저 들어가기에 앞서서, 한나 아렌트의 정치철학을 알아두는 것이 편리하다. 기본적으로 한나 아렌트는 하이데거 철학의 변용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한나 아렌트의 입장에서는 인간은 '두 번' 태어난다:한번은 생물학적인 탄생이고, 두번째는 사회적인 탄생이다. 특히 한나 아렌트는 두번째, 인간의 실존을 증명하고 그 실존의 조건이 되는 외부 세계의 존재, 즉 인간의 복수성을 인간의 본질이라 규정하고 있는데, 인간이 타자에 대해서 '행위 가능성'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한나 아렌트의 정치철학의 본질이자 기본 모티브라 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한나 아렌트는 실존의 표지를 '죽음'이라 보았던 하이데거 보다는 하이데거 철학의 비판적인 변용인 레비나스에 가깝다고 할 수 있는데, 양존재의 대등한 관계 정립이 불가능한 점과 타존재에 매몰되어 봉사한다는 레비나스 특유의 윤리학은 타자의 존재를 중요시여기는 한나 아렌트의 정치철학 및 윤리학과 많은 접점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책의 내용은 아이히만 공판의 기록이자, 아이히만이라는 인물의 분석, 그리고 아이히만의 '특기'였던 최종적 해결책, 유대인 홀로코스트에 대한 다양한 형태의 기록이자 그 분석이며 한나 아렌트 정치철학의 '문제제기' 지점이라 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저서의 초점은 '아이히만이 어떤 인간이었나'라는데 초점을 맞추는데, 아이히만에 대한 한나 아렌트의 극단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그는 자신의 죽음에까지 말장난을 하다 죽은' 속물 중의 속물이었다는 것이다. 아이히만의 공판의 주내용은 아이히만이 얼마나 괴물이었는지에 초점이 맞춰진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이스라엘의 정치적인 노림수(유대민족에 대한 홀로코스트의 책임을 나치 책임자에게 묻는 처음이자, 어찌보면 마지막이라 할 수 있는 재판)가 다분히 섞여 있는 재판이었기 때문이다.(한나 아렌트는 이 재판은 국제사법재판소의 형태로 재판을 할 것을 주장하였으나,국제 사법재판소는 먼훗날 1992년 1월 1일, 네덜란드 헤이그에 세워지게 되었다)


그러나 아이히만을 나치즘의 괴물로 만들려는 시도에도 불구하고, 아이히만이 법정에서 보여준 인물성은 지극히 정상(심지어 정신과 의사까지 불러와서 검진했음에도 불구하고)이었다. 오히려, 그는 출세에 눈이 먼 인물이었다. 아돌프 히틀러에 대해서 '하사관에서 총통까지 올라온 8000만 독일 국민의 자랑스러운 모범'이라고 기술하거나, 자신도 '좋은' 유대인들을 알고 있었다고 이야기하는 등등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화술에는 결정적으로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이 떨어진다고 할 수 있었다' 공판장에서조차 그는 자신의 업적에 대해서 떠벌리기를 좋아했는데, 유대인 제거의 프로세스(추방->수용->학살)의 각 단계에 있어서 자신의 공적을 끝없이 이야기하고, 실행 불가능했던 계획들이 이루어지지 않은 점을 지속적으로 아쉬워하며, 유대인 말살의 과정에서 유대인의 운명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에 대한 공감은 전혀 없이 자신은 '좋은' 유대인을 알고 있다는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뱉어낸다. 심지어는 자신의 죽음의 순간에서도 자신의 죽음에 대한 미사여구를 늘어놓으면서 자신의 죽음이 갖는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까지 보였다.


또한 홀로코스트라는 유대인의 제거가 독일 사회로부터 유대인을 '타자화'라는 복잡한 과정을 통해서 진행됨을 이 저서는 보여준다. 저서 자체가 아이히만 공판에 대한 기록을 축약한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아이히만이 살아온 행적, 그리고 아이히만의 '업적'까지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유럽 사회 전반에 깔려있는 반유대주의를 나치가 적극적으로 사용한 것도 있지만, 그 반유대주의를 나치는 국가단위에서 효율적으로 처리하였기 때문에 인종 청소, 학살의 대명사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악랄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행위는 상당히 '복잡한' 과정을 거치는데 처음에는 유대인을 '추방'하다가, 그 뒤에는 그들을 한군데 '수용'한 뒤에, 악명높은 반제 회의을 통해 등장한 '최종적 해결책'인 '학살'까지 상당히 머나먼 길을 돌아서 온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들의 본질은 유대인을 독일사회로부터 분리하는 타자화의 과정이었다는 점이다.


상당히 흥미로운 지점은, 그 와중에 의외로 존재한 유대인 시오니스트들과 나치의 '협력'(추방-수용의 프로세스에서만)이다. 물론 이들의 '협력'은 나치의 유대인 타자화에 있어서 큰 조류로 부각되지는 못했지만, 이러한 '타자화'에 있어서 소수의 유대인들이 이득을 보려한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시오니스트, 아이히만의 표현을 빌리자면 유대인들이 서있을 땅을 찾아다니던 이들은 유대인들만의 국가를 만들고자 노력했고, 이를 위해서 나치와 국가설립을 위한 논의를 하기도 했다. 물론 그들은 그것이 유럽 전 사회로부터 타자화를 당하는 과정이었음을 인지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저서는 이러한 타자화에 과정에 깊이 관여하고, 이것의 정점인 학살이 일어나게된 동력이 아이히만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었음을 지적한다. 반제 회의 이전의 유대인 추방-수용의 단계에서 지속적으로 아이히만과 업적과 성과를 두고 내부 알력을 벌이는 행정 관료들과 그들 사이의 밀고 당기기, 게르만 민족과 좋은 독일을 위해서 아돌프 히틀러를 죽이고 전쟁을 지속해서 좋은 독일의 명성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들, 유대인 학살은 의사가 개입되었으니 '의학적 문제'라고 주장하는 나치와 아이히만의 변호사, 전쟁에서 패망할 때 왜 자신들은 총통의 자비로운 가스실 세례를 받지 못하냐고 따지던 독일 국민들(재밌는 점은 이와 비슷한 묘사가 게오르그의 소설 25시에도 나온다는 것이다) 등등까지, 저서가 지적하는 문제는 바로 악의 평범성, '사고의 불능성' 인 것이다. 그것은 타자가 어떠한 상황인지, 무슨 문제가 일어나는지, 사회로부터 타자화된 타자들이 어떤 일을 당하는가에 대한 이해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 생각하지 않는 상태를 지칭한다.


이 '생각없음'의 상태를 지배하는 것은, 나치즘이나 극단적인 증오와 믿음이 아닌 속물적이고 기본적인 사회에 대한 믿음의 연장선상이라고 할 수 있다. 아돌프 히틀러가 8000만 독일 국민의 자랑스러운 모범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그만큼 성공했기 때문이며, 아이히만이나 다른 나치 고위 관료들이 자신은 '좋은 유대인'들과 친구였으며 그들의 죽음을 안타깝게 생각한다고 진술하는 점, 그리고 좋은 독일과 좋은 독일 국민들에 대한 믿음, 칸트를 교양지식으로 '정확하게' 인용할 수 있는 속물적인 허세까지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즉,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은, 아주 무서운 결론에 도달한다고 할 수 있는데, 우리가 한 때 역사적인 악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는 나치즘이라는 존재 자체가, 극단적인 혐오와 증오, 그리고 타자에 대한 무자비 폭력의 이면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의 타자에 대한 몰이해에 기반한 속물적 사회관이 존재하였다는 것이다. 즉, 나치즘과 홀로코스트란 흘러간 시대의 조류가 아닌, 언제 어디서라도 증오가 가해지면 이들을 방조하는 방조적 지원자의 형태로 다시 등장할 수 있는 '인간의 어두운 본질' 쪽에 가깝다는 것이다.


물론 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 던지는 문제제기에 반론이 없는 것은 아니다. 2000년 이후로 몇몇 역사학자들은 아이히만이 자신이 잡힐 것을 미리 알았으며, 재판에 대한 철저한 대비를 하였고 재판에서 보여준 아이히만의 모습은 철저한 가면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아이히만이 자신이 재판정에서 보여주었던 속물적인 모습과 달리, 그는 열성적인 반유대주의자였으며 나치 신봉자라는 것이 이들 역사학자의 주장이다. 하지만, 이들의 주장은 두가지 부분에서 크게 문제가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첫번째는 그러한 재판의 준비과정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의 공판장에서 왜 속물적인 태도로 자신을 변론했냐라는 것이다. 그러한 속물적인 태도는 효과적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재판정의 경멸과 경악을 사는데 성공했을 뿐이다. 오히려 그의 뜬금없는 곳에서 터지는 발언들(칸트의 인용, 히틀러에 대한 발언 등등)에 비추어 볼 때, 기본적으로 아이히만이 변론의 논리로 이런저런 증거들을 준비한 것외에도 기본적으로 그의 속성이 한나 아렌트가 지적한 '괴물같은 속물이었음을 암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두번째는 이 반론을 제기한 사람들의 성향인데, 한나 아렌트의 저서를 직접적으로 비판한 David Cesarani라는 이 '유대인' '홀로코스트 역사' 전문 사학자의 반론(한나 아렌트는 법정에 4일 정도밖에 나가지 않았다 등의 한나 아렌트가 부분을 전체로 확대해석을 했다고 비판하고 있는 점. 그러나 재판은 상당히 지리멸렬한 휴정기간을 꽤 갖고 있었으며, 저서가 다루는 방대한 분량의 자료들의 인용, 그리고 다양한 사례들 역시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아이히만의 재판에서 사형까지의 과정은 실제 1년여의 기간-그중 6개월 가까이는 휴정기간이었다-을 거쳤으며 대법원 판결에 대해 아이히만 측이 총리에게 보낸 탄원서가 거부된 이후 불과 반나절만에 아이히만은 사형되었다.)과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 출판 직후에 제기되었던 엄청난 반발들은, 거의 대부분은 유대인들로부터 나왔다. 이는 이 저서가 얼마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거북한 문제였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심지어는 한나 아렌트의 이 저서를 몇몇 유대인은 '소설'로 취급하기까지 하였으며, 시오니즘에 대한 한나 아렌트의 반발(저서 내내 나치를 비판하지 않으면 예루살렘, 즉 시오니즘에 대한 상당히 강도 높은 비판을 보여주고 있다)이 이 저서를 '편향'되게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시오니즘이 이스라엘 건국 이후 어떤 행각을 벌였는가를 보면 이러한 주장은 설득력이 상당히, 아니 완벽하게 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그들의 악행은 여기에 일일이 기록할 수 없을 정도로 방대하다. 여기서 필자가 대표적으로 들 수 있는 작품과 사례는 시오니즘 '학살 방조'의 기록은 사브라 사틸라 수용소 학살 사건과 그 사건에 대한 기억을 다룬 바시르와 왈츠를이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나치즘이라는 거대한 증오를 지탱하던 중요한 매커니즘 중 하나를 밝힌 저서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나치즘은 하나의 메커니즘만으로는 설명 불가능한 복잡한 현상이기는 하나,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에 대한 지적은 지금까지도 유효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