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및 책 이야기




*네타가 있습니다.


9.11 테러 이후 격화일로를 치달은 '테러와의 전쟁'은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가 개인이 만든 핵폭탄 때문에 소멸된 이후 새로운 전환점을 맞았다. 선진국들은 개인정보인증을 이용, 엄격한 관리체제를 구축하여 사회에서 테러를 모조리 쓸어버리지만, 후진국에서는 내전이나 인종청소가 무서운 속도로 증가하고 있었다. 그러한 일련의 사건 배후에 항상 언급되는 미국인 존 폴. 미 정보군 특수검색군 i분견대의 클라비스 셰퍼드 대위는 체코, 인도, 아프리카의 땅에서 그 그림자를 쫓지만…


학살기관이라는 소설에 있어 소설의 전반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바로 '통제와 관리'이다. 특수부대의 나노머신에서부터 테러를 막기 위한 개인정보인증 제도들까지, 학살기관의 세계는 언뜻 보면 과거 디스토피아 소설들에 대한 연장선상이라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1984의 정치적 억압자이자 통제자인 빅 브라더나, 인간성을 거세하는 멋진 신세계와 다르게 학살기관의 세계는 다르다. 학살기관이 도달하는 디스토피아는, 정치적인 억압이나 이상향을 가장한 인간성의 말살이 아닌 '합리성이라는 필연적인 운명에 의해 도달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토 케이카쿠는, 냉전 이후의 세계를 영원히 멸망하는 세계로 표현하고 싶었다 라고 했었다. 9.11 테러에 이후, 국가안보는 전세계의 중요한 화두로 떠올랐지만 정작 국가와 군대가 싸워야 할 적은 안개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보이지 않는 위협에 대한 공포는 위협에 대한 관리 차원에서 사회에 자유를 억압하는 기제를 마련하고, 일반 대중에게 이를 적용한다. 하지만,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이 과정이 철저하게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관리'라는 결론으로 귀결된다는 것이며, 대중들은 이에 저항하지 않는다, 아니 위협에 대한 관리를 받아들이고 여기에 적응하며 이를 긍정한다. 학살기관에서 보여주는 디스토피아는 바로 합리적 이성에 의해 결론 내려진, 합리적이고 비인간적인 이성에 의한 관리와 그에 순응하는 인간들의 영원히 망할 수 밖에 없는 이야기인 것이다.


여기에 이토 케이카쿠의 학살기관은 상당히 도발적인 전제를 추가한다. 인간의 언어, 사회, 문화 등등은 사실상 인간의 유전자의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졌으며, 개인의 양심이나 영혼, 종교에 대한 믿음 역시 그 연장선상이라고 주장하는 학살기관의 전제는 그 위에 인간의 생존과 필요에 의해 '인간에게 학살을 하게끔 명령하는 언어구조'이라는 도발적인 발상을 세워올린다. 노엄 촘스키의 보편적 언어학이자 기저문법에 대한 형식주의적 언어학(언어에는 보편적인 기저 문법이 있다)의 영향에서 영감을 받은 '학살의 언령'은 연역적이고 합리적인 세계관이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발칙한 상상력 중 하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학살기관의 세계는 모든 것이 합리적으로 통제당한다. 개인정보에서부터 셰퍼드의 작전, 그의 육체, 그의 정신, 심지어는 20세기 한때 인류 멸망의 수단이라고 여겨졌던 핵전쟁에서 합리적이라고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학살(존 폴의 학살극은 결국 미국을 지키기 위한 합리적 판단의 결과물이었다는 걸 상기하면...)까지, 모든 것이 합리적 통제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이 영원히 망하는 비인간적인 순환고리 내에서, 이토 케이카쿠는 죄의식과 윤리를 핵심 키워드로 제시한다. 셰퍼드의 어머니를 안락사 시킨 죄책감, 그리고 수많은 사람을 암살한 자신을 벌해주기 원하는 벌에 대한 갈구는 모든 것이 통제당하고 관리당하는 세계에서 그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그의 것이기 때문이다. 기존의 소설들이 사회적인 연대나 사회적인 책임감에 대한 이야기를 결론이자 해결책으로 제시하였다면, 학살기관은 그와 반대로 철저하게 결론을 개인적인 형태로 만들어낸다. 


그렇기에 결말은 살짝 아쉽다. 스스로 '우리는 충분히 윤리적이지 못하다'라고 끝없이 자아비판을 하는 셰퍼드가 결국은 학살의 왕 존 폴의 유지를 이어받아 전세계를 희생해서 평화를 유지하는 미국을 학살의 구렁텅이로 빠뜨린다는 결론은, 뜬금없음을 떠나서 너무 극단적이지 않나 라는 의문점이 든다. 물론, 개인의 윤리가 거대한 집단 합리성을 극복하는 과정이란 그 누구도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싸움이기는 하지만, 이토 케이카쿠 스스로가 마지막에 좀 안일한(?) 결론을 내린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소설의 문체는, 긍정적/부정적 의미에서 오시이 마모루의 소설이나 코지마 히데오(이토 케이카쿠 스스로도 코지마 히데오의 광팬이라고 밝혔다)의 사변적 연출의 업그레이드/완성형이라고 할 수 있다. 다양한 서브컬처와 학문의 인용, 그리고 사변적인 이야기의 연속은 자칫 잘못하면 드라마의 부재로 이어질 수 있었지만, 이토 케이카쿠는 셰퍼드의 어머니 안락사라는 서브 플룻을 통해서 자칫 생기를 잃을 뻔한 소설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물론 쏟아지는 정보량과 대사량들 그리고 사고에 알러지가 일어날 수도 있지만, 이를 극복하면 충분히 재밌는 소설인 것은 확실하다. 


이 소설에 있어 참으로 아쉬운 점은, 이토 케이카쿠가 2009년 폐암으로 별세했다는 것이다. 학살기관으로 작가 데뷔를 한 때는 2007년. 앞으로 더 좋은 소설을 쓸 수 있는 작가였을지도 몰랐는데, 매우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