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리뷰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솔직히 까놓고 이야기하자면, 덤불 속의 검은 고양이의 이야기 자체만 놓고 따질 때 우리나라 납량 특선 '전설의 고향'의 단편 시나리오 수준에 불과하다. 전국시대, 무사들에게 겁탈 당하고 죽은 어머니와 며느리는 귀신에게 복수를 다짐하고 요괴가 되어서 무사들을 물어 죽인다. 그리고 무사로 출세한 아들은 무사를 물어죽이는 요괴를 처치하라는 명령을 받게 되고, 요괴가 된 어머니와 아내를 만나게 되는데...영화의 감독인 신도 카네코는 이런 단순한 이야기를 아름다우면서도 기묘한 필치로 표현하여 다른 호러영화들이 쉽게 범접할 수 없는 경지를 만들어낸다.


먼저 지적해야 하는 점은 영화에는 아무도 지적하지도 않지만 영화 전반을 지배하고 있는 구조들이 존재한다. 무사와 폭력이 지배하는 시대, 주인공에게 명령을 내리는 천박한 대장 무사, 어머니와 며느리가 귀신과 맺은 계약의 구체적인 내용 등등. 영화는 아들-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를 중요시하고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정작 이들의 관계를 정립 하는 것은 바로 이 외부적인 '구조'들이다. 영화는 이 '구조'에 대한 언급과 묘사를 배제함으로서, 이들을 둘러싼 어찌할 수 없는 족쇄와도 같은 환경을 만드는데 주력한다.


충격적인 초반 시퀸스와 어머니-며느리 요괴가 무사를 물어죽여서 아들이 이들을 잡으러 오기전까지, 영화는 아주 간단명료하게 영화의 전반적인 분위기와 토대를 형성한다. 평화로운 농가에 갑자기 들이닥친 무사들, 이들의 야만적인 눈길, 그리고 이어지는 폭행과 방화, 어머니와 며느리의 시체 위에서 우는 검은 고양이. 영화는 한마디의 대사도 없이 이들이 겪은 고통을 야만적으로 드러낸다. 그리고 갑자기 씬은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나생문에서 무사를 낚아서 목을 물어죽이는 요괴가 된 어머니와 며느리를 보여준다. 처음 한명, 두명, 세명...영화는 모녀의 죽음에서 요괴가 뒨 뒤에 벌이는 살육행각까지의 이야기를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이야기 전개와 묘사로 무게 있는 전설을 깔끔하게 만들어낸다.


이후 아들은 무사가 되서 금의환향한다. 하지만, 그를 반기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남은 것은 오로지 잿더미 뿐. 그런 그에게 새롭게 주어진 임무는 바로 요괴 어머니와 아내를 사냥하는 것. 재밌는 점은 자신의 가족과 조우한 아들은 그들을 아예 알아차리지 못한다. 심지어 자기 아내하고 섹스를 하는데도 말이다! 그리고 무사는 자신의 임무와 가족 사이에서 갈등하게 된다.


영화 속 주요한 긴장은 돌아온 아들-요괴가 된 아내와 어머니 사이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재밌는 점은 죽음이 이들을 갈라놓았어도 이들은 서로에 대해서 가족으로서 애틋한 애정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을 옭아메는 것은 그들의 애증이 아닌, 그 외부의 것들이다. 아내와 어머니는 무사를 원망해서 '무언가'(재밌는 점은 영화 내에서 이것의 존재는 한번도 언급되지 않는다)와 계약을 맺어서 자신의 비밀을 말하지도 못하고, 여기서 벗어날 수 없는 상황에 처해있다. 도망가는 것은 꿈도 못꾸는 상황이고. 거기에 무사가 된 아들은 천박하고 속물적인 상급 무사의 명령에 굴복할 수 밖에 없다. 결국 이 이야기는 비극으로 끝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무사가 된 아들의 엄청난 둔감함(눈 앞에 자기 마누라와 자기 어머니를 두고도 알아보지 못하다니!)과 함께 영화는 이 비극적인 알레고리를 빛과 어둠, 그리고 안개를 이용한 독특한 표현방식과 배우들의 명연으로 완성된다. 덤불 속의 검은 고양이의 미학은 전적으로 '흑백영화가 아니면 불가능한' 미학에 기초하고 있는데, 인물들과 일부 배경을 제외하면 컷과 영상의 대부분을 컬러 영화에서는 만들어낼 수 없는 압도적이고 강렬한 칠흑같은 어둠으로 채워넣는다. 이 어둠들은 관객들에게 묘한 공포를 심어주는 동시에 마치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독특한 풍경을 만들어내는데 일조한다. 마치 극에서 가장 중요한 공간인 저택은 안개와 함꼐 시간의 흐름에서 벗어난 듯한 인상을 주기도 한다.


요괴 모자의 역을 맡은 배우들의 연기는 이에 화룡점정을 가한다. 이들의 모습은 삶의 희로애락이 거세되고 뒤틀려버린 요괴의 모습 그 자체다. 하지만, 전적으로 요괴가 갖는 그로테스크함을 강조하기 보다는 이들 모녀 요괴는 자신의 한과 감정을 폭발시키기 보다는 응축하여 함열(안으로 붕괴하여 쪼그라 들어감)하는쪽으로 가닥을 잡는다. 이들 모녀가 무사들을 유혹할 때, 살짝 짓는 섬뜩한 미소와 아내 요괴가 무사를 유혹하는 장면의 에로티시즘과 살해 장면의 사이의 기묘한 긴장, 그리고 이러한 과정이 반복될 때 뒤에서 절제된 동작의 춤을 추면서 일련의 사건이 반복됨을 암시하는 어머니 요괴의 춤 장면들은 이미지를 폭발시키지않고 응축한다. 그리고 장면 장면마다 등장하는 이들 모녀의 인간이 아닌듯한 요괴의 이미지와 거대한 구조와 그 사이에 끼인 개인들이라는 네러티브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긴장은 어찌보면 별 긴장관계가 성립하지 않는(특히 자신의 가족과 재회하는 장면이라던가) 부분에서조차 관객을 사로잡는 마력을 보여준다.


이것이 가장 두드러지는 부분이 바로 요괴가 된 부인과 무사가 된 남편이 섹스를 하는 장면인데, 이 부분에서 무사를 죽여야하는 부인의 요괴로서의 숙명과 오랜만에 만난 부인과 남편 사이의 애정이 서로 공존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장면은 죽음과 에로티시즘이 서로 공존하면서 다른 영화들은 쉽게 넘볼 수 없는 아름다우면서 소름끼치는 경지에 도달한다.


덤불 속의 검은 고양이는 아름다우면서 소름끼치는 영화다. 영화의 이야기는 비록 많은 전설이나 설화에서 볼 수 있는 구조를 차용하고 있지만, 신도 카네코는 이러한 이야기를 이용해서 극도로 절제되고 아름다우며 슬픈 공포영화를 만들어냈다.(솔직히 이 영화가 공포영화인가는 이쯤되면 좀 의문이긴 하지만...) 덤불 속의 검은 고양이는 공포영화의 팬이라면 필히 관람해야 하는 명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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