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기획 기사



*소재가 안떠올라서 의자에서 빙빙 돌다가, 등 뒤에 붙은 대형 포스터를 보고 떠올렸습니다.

인류 과학 기술을 총 집대성한 대표적인 분야가 무엇일까요? 이에 대한 대답은 다양하지만, 그 중 가장 인상적인 분야는 바로 우주 항공 분야입니다. 이는 하늘과 우주가 인류에게 남은 최후의 미개척지이자 원시 인류로부터 지금까지 그 맥락을 이어온 동경의 대상이었기 때문입니다. 라이트 형제가 비행기를 발명한 이후, 최초의 위성 스푸트니크, 유인 우주선, 가가린, 라이카, 닐 암스트롱, 아폴로 계획, 무궁화호 등등 수많은 사람들이 하늘을 날겠다/우주로 나가고 싶다 라는 목표를 위해 자기 자신을 희생하고 헌신해왔습니다.

재밌는 점은 이러한 우주 항공 분야가 갖는 특수성입니다. 우주 항공학은 물리, 화학, 의학, 천문학 등 과학의 최첨단을 비행기/우주선에 집약시킨 과학 기술의 결정체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과연 제대로 작동하는가의 문제는 과학기술의 최첨단과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이런 분야에서는 특히 한순간의 실수, 고려되지 않는 변수 또는 부품상의 작은 결함이 끔직한 재앙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입니다.(사실 어떤 의미에서는 모든 과학 기술 분야에 적용되는 이야기라고 볼 수 있군요)

따라서 과학 기술의 절정체인 우주선 또는 비행기를 만드는 것과 그것을 운행한다는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사실, 자신이 한 개라도 결함이 생기면 치명적인 결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수만개의 부품 복합체와 수천톤의 폭발성 연료를 깔고 앉은 뒤에 육지에서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미지의 세계, 우주로 나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이 과정이 무사하게 끝날 것이라는 신념은 단순한 과학적 계산 또는 확신의 범주를 넘어섰죠. 그러한 의미에서 역설적이게도, 과학 기술의 최첨단인 우주 항공 분야는 인류 최고(最古)의 개념인 종교적인 믿음과 많은 부분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가이낙스의 1987년 첫 데뷔작 '왕립우주군:오네아미스의 날개'는 이러한 종교와 과학의 기묘한 만남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갑니다. 군대 내부에서도 막장 취급받는 왕립 우주군 소속인 주인공은 자신의 꿈이었던 공군에서 낙방한 뒤, 나태하게 살아갑니다. 그런 와중에 그는 거리에서 선교를 하는 소녀를 만나서 종교를 알게 되고, 무의미한 자신의 생활에 하나의 목표를 갖게 됩니다.

전반적으로 애니메이션은 방황하는 주인공이 종교를 통해서 어떻게 우주로 나가게 되는가를 담담하게 보여줍니다. 전반적인 드라마의 완성도, 작화 등의 상태는 명작의 반열에 올려놓아도 부족함이 없지만, 아무리 좋게 봐줘도 흥행은 도저히 안될 거 같다는 점은 인정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립우주군이 보여주는 리얼리즘은 지금의 애니와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재밌는 점은 작품이 우주 항공 분야가 정치적 역사적으로 갖는 특수성을 잘 짚어내고 있다는 점입니다. 역사적으로 우주 항공 과학 분야는 강대국의 정치적 선전, 즉 프로파간다의 성격이 강했습니다.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최초로 인류의 달 착륙을 성공시킨 아폴로 계획, 우주 왕복선, 유인 우주선 등등 우주 항공 분야의 대부분은 미소 양국간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대립인 냉전의 산물이었습니다. 이는 우주 항공 분야가 갖는 시각 및 인식에 대한 강렬한 충격(인간이 하늘을 넘어서 우주로 간다는 것)과 우주 항공 분야의 기술이 기본적으로 장거리 미사일 및 ICBM(Inter-Continental Balistic Missile, 대륙간 탄도 미사일) 등과 같은 군사 기술의 발달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작품에서도 이러한 특징이 잘 드러납니다. 애시당초부터 왕립우주군의 존재 의의 자체가 적성국의 관심 끌기용이었고, 우주개발 등의 인류의 이익과 같은 거창한 목표를 가진 것은 아니었으니까요. 결국 발사 직전에 발사는 취소되고, 설상가상으로 적국의 육군이 발사장소로 진입하게 됩니다. 하지만 주인공은 그런 와중에서 성공적으로 전장의 한 복판에서 로켓을 타고 우주로 나가는데 성공하고, 우주선에서 라디오를 통해서 전세계를 향해 기도를 합니다.

이 기도 장면은 작품에서 가장 인상깊은 부분입니다. 주인공의 기도와 함께 인류의 전쟁과 비극적인 순간들이 오버랩됩니다. 인간이 로켓을 타고 우주로 나갈 수 있게 된 과학 기술의 업적을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인류 역사는 단 한번도 평화로웠던 적이 없었습니다. 과학기술이 발달해서 기아, 가난, 자연재해 등을 해결할 수 있는 힘이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더욱 험악해질 뿐이었죠. 이런 상황에서 주인공이 올리는 기도는 어두운 세계에 작은 희망을 소망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최첨단의 과학 기술이 있더라도, 결과적으로 인류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여태까지 이루어지지 못했던 평화에 대한 간절한 소망과 희망, 그에 대한 종교적 신념을 말이죠.

우주선이라는 과학 기술의 산물 위에서 종교적인 기도를 올린다는 것은 어찌 보면 역설적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인류 이성의 극단인 과학 기술과 인류의 탄생과 함께 해온 종교가 맥락을 같이 한다는 것, 어찌 보면 극과 극은 서로 맞닿아 있다고 봐야겠죠.




덧. 역시 오랫만에 썼더니 마음에 안드는군요; 차츰 가다듬어야 할거 같습니다.